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292) 사미니와 보부상
이공 스님이 반야심경을 읊으며 탁발한 바랑 망태를 메고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콰르르 쏟아지는 폭포 소리가 바람 소리, 새 소리, 낙엽을 밟는 소리를 모두 삼켜버렸다.
갑자기 스님이 바랑 망태를 던지고 가사 장삼을 입은 채 풍덩 폭포의 포말을 뚫고 소로 뛰어들었다.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스님이 나왔다.
소가에 여인을 뉘어놓고 스님이 올라탄 채 가슴을 짓누르다가 인공호흡을 했다.
“?, 푸르르.” 여인이 물을 토하고 큰 숨을 뱉었다.
바위 아래 조그만 암자에 등불이 켜지고 스님과 여인이 마주 앉았다.
여인은 귓불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새파란 처녀였다.
신 진사의 셋째 딸인 금파 아씨는 열일곱 나이에 우 대인의 맏아들, 득구 도령과 혼인 날짜를 받아놨었다.
인물 좋고 마음씨 고운 양반집 셋째 딸은 시집갈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가슴이 벅찼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 날 밤, 담을 넘어온 괴한이 별당에 들어가 금파 아씨를 덮쳤다.
17년 동안 고이 간직한 순결을 괴한이 빼앗아간 것이다.
이튿날,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가 계신 안방과 사랑방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산으로 올라와
폭포 옆에 신발과 버선을 벗어놓고 소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3년의 세월이 흘렀다.
9월 열엿새, 산비탈의 봉분이 야트막한 억새로 뒤덮인 무덤에 허우대가 멀쩡한 젊은이가 벌초한 후에
보따리를 풀어 제물을 펼쳐놓아 술을 따르고 절을 했다. 그러고는 머리를 땅에 박고 어깨를 들썩인 후
눈물을 닦고 퍼질러 앉아 음복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솔밭에서 스님이 나오며
“여보게, 나도 곡차 한잔 주게” 하자 깜짝 놀란 젊은이가 자세를 가다듬고 술 한잔을 따랐다.
“구천을 떠돌던 삼월이도 이제는 극락으로 갔을 게야, 나무아미타불….”
젊은이가 깜짝 놀랐다.
“스님, 사, 삼월이를 어, 어떻게 아, 아, 아십니까?” 젊은이의 목소리는 떨렸다.
“삼월이만 아는 게 아닐세. 만석이 자네 아들은 벌써 네살이 됐네.”
젊은이는 꿇어 앉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아들이라니요? 소인은 장가도 가지 않았는데….”
곡차를 한잔 마신 이공 스님이 새파란 가을 하늘에 흘러가는 한점 구름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토했다.
7년 전 만석이는 천석꾼 부자 우 대인 집안의 착실한 집사였다.
집 안팎의 일을 한치 흐트러짐 없이 곧게 처리해 우 대인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우 대인은 만석이를 불러 말했다.
“내년 봄에 삼월이와 혼례를 올리고 나면 둘이서 깨소금 쏟을 집을 내가 장만해뒀네.
아 참, 이 자리에서 아예 혼례 날짜를 정하세.”
만석이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고 큰절을 올렸다.
그러나 인품이 훌륭한 우 대인에 비해 그 아들 우득구는 개차반이었다.
우 대인과 만석이가 1박2일로 마름을 간 그날 밤,
집사 만석이와 혼례 날짜까지 받아놓은 열여덟살 침모 삼월이를 우득구가 겁탈한 것이다.
삼월이는 뒤뜰 감나무에 목을 매 숨을 끊었다.
집으로 돌아온 만석이는 싸늘하게 식은 삼월이를 안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미친 사람처럼 울고 웃던 만석이는 3일 만에 삼월이를 뒷산에 묻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들 득구를 잡으면 죽이겠다고 벼르던 아버지 우 대인은 병들어 누웠다가 이태 만에 이승을 하직했다.
제 아버지 앞에 발도 못 붙이던 득구가 집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치르고
얼마 안 있어 신 진사의 셋째 딸 금파 아씨와 혼례날을 잡았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 밤 금파 아씨를 겁탈한 괴한은 바로 우 대인댁 집사였던 만석으로
삼월이를 죽인 우득구에 대한 복수였다.
금파 아씨를 소에서 건져내 살려낸 이공 스님은 그녀를 암자에 숨겨뒀는데
서너달이 지나자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하더니 열달 만에 옥동자를 낳았다.
이공 스님은 핏덩이를 강보에 싸서 동네로 내려가 오 과부에게 맡기고
산후조리를 한 금파 아씨는 이공 스님의 주선으로 멀리 떨어진 비구니 사찰로 가 삭발을 하고 사미니가 됐다.
삼월이가 죽은 날을 알게 된 이공 스님이 그녀의 제삿날 무덤 뒤 소나무 숲에 숨었다가 만석이를 잡았던 것이다.
이공 스님이 만석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제는 삼월이를 잊게. 득구는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아편으로 폐인이 됐네.
자네가 복수심으로 겁탈한 금파 아씨는 자네 씨를 받아 출산해서 자네 아들은 남의 손에 맡겨졌고
금파 아씨는 사미니가 됐네.”
만석이는 이공 스님의 장삼 자락을 잡고 통곡을 했다.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 어느 날
이공 스님의 조그만 암자에서 조촐한 혼례식이 치러졌다.
신랑은 보부상으로 거상이 된 황만석이고 신부는 아직 머리가 자라지 않아 보자기를 덮어쓴 금파였다.
오 과부가 네살 된 아이를 안고 있었다.
첫댓글 더위를 식혀주고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많이 내린다는 예보 서로가
배려하는 즐겁고 행복한 금요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