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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24) - 2024 .06. 15(토) - 06.16(일) |
이번 24차 순례는 수원교구 남부지역이다. 해당 성지는 죽산 순교성지, 미리내 성지, 어농 성지, 단내 성가정성지, 은이 · 골배마실 성지, 요당리 성지, 남양 성모성지 정도이다. 하지만 올라 갈 때 청주 읍성 순교성지를 거쳐 가야 함으로 목표대로 이행될지는 불확실하다.
지난 23차 순례는 준비부족에다 악천후, 택시 이용으로 시간에 쫓겨 외면상으로는 많은 성지를 순례했지만 반면에 성지 내에 봐야할 많은 곳을 빠뜨린 점을 생각하고 이번에는 승용차로 가기에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순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12시에 죽산 성지에서 서울 모세 형제를 만나기로 하여 일찌감치 07시 성당 출발. 주말이지만 한산한 영천 - 상주 고속도로에 기분도 상쾌하다. 출발한지 3시간 50분 걸려 청주 서운동 성당 도착.
청주읍성 순교성지 - 죽음의 칼날 아래에서도 영원을 노래했던 그리스도의 용사들 |
청주읍성 순교성지 유래와 순교자
청주교구(충북지방)의 천주교 성지는 북으로 감곡매괴 성지, 서북쪽으로 배티 성지, 동쪽으로 연풍 성지, 그리고 남동쪽으로 멍에목 성지가 있다. 이들 성지들은 경기도와 경상도의 접경지대로 수도권에서 영남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있다.
그리고 교구의 중심 청주지역에는 병영과 진영의 관아가 있어 박해시대에 인근의 천주교도를 잡아들여 처형한 순교지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곳의 순교자 중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내방으로 오반지(바오로), 원시보(야고보), 장 토마스, 김사집(프란치스코), 배관겸(프란치스코) 5위가 복자의 반열에 올랐고, 최용운 암브로시오, 김준기 안드레아, 전 야고보 3위가 하느님의 종으로 올려졌다.
청주지역의 순교지는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4순교지 1증거터로 요약되는데 그 중심에 이 순교지를 관리하는 서운동 성당이 있다.
【청주 읍성 순교성지】
(1)서운동 예수성심 성당
(2)청주 진영 순교지
(3)남문밖 장터 순교지
(4)청주 병영 순교지
(5)북문밖 장대 순교지
(6)청주 옥 신앙 증거터
⑴서운동 예수성심 성당 (청주시 상당구 대성로 41)
서운동 성당의 이름은 서운동 예수성심 성당이다. 이번 순례 일정이 예수성심 성월인 6월이라 또한 의미가 있다. 서운동 성당은 1933년 6월, 청주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되었으며 본래의 위치는 청주시 상당구 중앙로 62-16(현 가톨릭청소년 센터)이었다. 1963년 7월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함과 동시에 성당 이름도 북문로 성당에서 예수성심성당으로 바뀌었다.
이 성당 일대는 조선시대 청주읍성 지역으로 이곳에 청주병영과 천주진영이 있어 박해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지역 교우들을 체포, 구금하고 처형한 곳이다. 따라서 서운동 성당은 오늘날의 청주지역 순교터의 대부분을 관할하는 성당임과 동시에 지역 순교사적지를 개발하고 성역화하는 책임도 있다.
09:50 성당에 도착하니 교우들은 벌써 화단 꾸미기 등 성당 미화작업에 분주하다. 성당 2층 정면에는 예수성심상이 내려다보시고 아래에 예수성심성당이라는 이름이 크게 걸렸다. 예수님상 좌우에 4개나 되는 에어컨 공기배출기가 눈에 약간 거슬린다. 그런데 높은 종탑이 건물 뒤쪽에 있는 것이 일반 성당과 다르다.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큼직한 십자고상 아래 성수대가 있다.
제대 뒤 벽면에는 맨 위에 ‘가룩하시도다’가 세 번 반복하며 아치를 이루어 성령의 비둘기를 감싸고 있고, 그 밑으로 십자고상이 청색 배경 속에 달려있어 좌우의 성요셉상과 성모상의 희색, 그리고 제단 바닥의 붉은 융단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제대 앞에는 청주지역의 순교 복자 오반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좌우의 벽면에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목각 14처가 갈라져 있다.
뒤편 벽에는 청주지역 순교복자 5명의 영정과 순교화가 걸렸다. 순교화의 내용은 다섯 복자들이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 기록에는 오반지가 순교하자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청주지역 순교복자 5명
순교자 | 순교지 | 나이 | 순교언 |
오반지(바오로) | 청주진영 | 53 | 나는 천구교인이요 만번 죽어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 |
원시보(야고보) | 청주병영 | 69 | 주님을 잘 섬기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어찌 죽음이 두렵겠소 |
장 토마스 | 청주장대 | 51 | 세간과 목숨을 버릴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
김사집(프란치스코) | 청주장터 | 제가 섬기는 하느님은 세상의 큰 임금이신데 내 어찌 그분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 |
배관겸(프란치스코) | 청주병영 | 60 | 내 팔다리가 다부러져 나가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배반할 수 없소. |
성당 출입구 벽면에는 103위 순교성인화가 걸렸고 바깥문을 나서자 역대 신부님 사진과 성체조배실이 있다.
성당 밖에는 성모동산이 있다.
이제는 순교터와 감옥터를 찾아나선다. 성지에 처음 찾아온 순례객들을 위해 안내 인쇄물이 비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자료만 가지고는 찾기 어려운 곳도 있다. 그럴 때엔 주민들에게 물어보지만 표지판 하나 뿐인 성지를 주민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성당 정문이 아니고 후문으로 가는 길이 있다. 향기 나는 골목 정원이라는 쪽문을 나선다. 일단 첫 장소인 청주진영 순교지는 제일교회라는 개신교 교회 경내에 있기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운동 성당에서 약 450m 가까운 거리에 있다.
(2)청주 진영 순교지(청주시 상당구 13번길 15)
청주진영은 조선시대 군대가 주둔하던 충청도 지역의 다섯 곳의 진영 중에 중영이 있던 장소이다. 청주진영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의 체포를 주도한 관청이며 이곳은 본래 청주 영장(營將)의 관사와 죄인들을 가두는 옥사가 있었던 장소이다.
충북 진천 지장골 출신의 복자 오반지 바오로가 1866년 3월27일 영장 집무처인 읍청당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1866년 11월 3일과 1867년에는 진천 사울(현 진천군 이월면 신계리) 출신의 하느님의 종 전 야고보, 김준기(안드레아)도 이곳에서 각각 순교하였고 보은 멍에목(현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 출신의 하느님의 종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과 여 요한과 최조이 부부도 1868년 4월 이곳에서 순교했다
제일교회는, 1892년 한국에 온 미국 북장로회 민노아 선교사가 병인박해의 순교사를 기억하기 위해 1905년 남문밖에 있던 교회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1천 5백여 평되는 넓은 대지를 확보한 교회는 1백 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 교회에서 설립한 청남학교가 개인 사저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여학교인 청신학교(淸信學校)도 설립하였다. 후에 소민병원(蘇民病院)으로 발전하는 시약소(施藥所)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당유치원과 청주 남녀 성경 학원도 이곳에서 설립되는 등 개화기 근대 문물 유입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2017년 청주교구는 제일교회의 협조를 얻어 현재의 순교 표지 시설을 건립했다.
맨 위에 오반지(바오로), 아랫줄 좌로부터 전 야고보, 이준기(안드레아), 최용운(암브로시오)이며 옆면에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스리스도를 배반할 수는 없소”라는 오반지 순교자의 말이 적혀 있다.
▲복자 오반지(바오로)
진천 반지(진천군 이월면 장수로 일대)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것도 40세가 훨씬 지난 1857∼58년 사이의 일이다. 장성할 때까지 비교적 풍요롭게 살면서도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혼인한 뒤로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버렸던 그는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고 나서 크게 변화된 면모를 보였다. 영세 이후 채 10년이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아주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해 3월 초 체포된 그는 진천 관아에 투옥됐다가 청주로 이송됐다. 병영에 압송돼 모진 형벌과 문초를 받아야 했지만, 그는 교회 일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누설하지 않았다. 관장은 어떤 형벌로도, 어떤 유혹으로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다”며 굳은 신앙을 증거한 뒤 청주성 남문 밖으로 끌려나가 목이 졸려 죽었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훗날 서 수산나의 증언을 따르면, 그가 순교한 뒤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신에서 하늘까지 닿았다”고 전한다.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몇이서 지장골로 옮겨져 인근에 안장됐다. 1016ㄴ
▲전 야고보
청주 금봉(현 충북 청원군 미원면 월룡리)에서 삼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전 야고보는 어렸을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반면에 본성이 유순하고, 언제나 부모에게 순명하였다. 야고보가 처음 천주 신앙에 대해 들은 것은 13세 때였다. 당시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보은(報恩) 멍에목(현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구병리) 회장인 매부 최용운 암브로시오이다. 이때 그는 암브로시오 회장이 입으로 말하는 교리를 듣고 입교를 결심한 뒤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외우고 있던 교리를 가족 열두 명에게 가르쳤고, 이후 온 가족이 함께 조선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867년 10월에 다시 청주 포졸들이 금봉으로 몰려와 야고보를 체포하여 청주로 압송하였다. 청주 법정에 이르렀을 때, 야고보를 본 형관은 즉시 포졸들에게 다음과 같이 분부하였다. “천주교가 무엇인지 맹인이 어찌 알겠느냐? 어서 빨리 놓아주도록 해라.” 그러자 야고보는 형관에게 다음과 같이 응대하였다.
“제가 비록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맹인이지만, 마음으로는 한결같이 천주를 받들어 공경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야고보는 태연하고 올곧은 모습으로 천주교의 주요 기도문을 큰소리로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런 다음 끝까지 신앙을 지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133위 하느님의 종에 포함되어 시복을 기다린다.
▲최용운(암브로시오)
최용운은 1836년 충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속 학문을 배우던 중 우연히 천주교 교리를 접한 후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살던 보은 멍에목 교우촌(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요한에게 교리를 배워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최용운은 입교 후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굳은 신심은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다. 그 결과 그는 1864년 멍에목 교우촌을 방문한 한 선교사로부터 그곳 회장으로 임명됐다.
최용운은 이때부터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교우촌 신자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멍에목에서 가까운 상주 장재동(현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 장자동)으로 피신해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체포된 최용운과 여요한 등은 보은 지역을 관할하던 청주 진영으로 압송됐다. 이때 최용운은 진영 옥에 갇혀 있으면서 관장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리 스승인 여요한이 신앙을 되찾아 순교에 이를 수 있도록 열심히 권면하기까지 했다.
최용운은 1868년 4월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김준기(안드레아)
자(字)가 ‘시경’이고, 관명이 ‘준기’인 김준기 안드레아는 충청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신자들이 비밀리에 교우촌을 이루고 살던 진천 새울(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신계리)로 이주해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이나 교우촌을 수소문하고 다니던 진천 포교들에 의해 새울 교우촌도 발각되어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다. 진천관아에서 여러 가지로 회유했지만 불변이었다.
그들은 결국 청주진영(현 충북 청주시 남문로 1가)으로 압송된 뒤 다시 옥에 갇혔다. 청주 영장 앞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은 진천 관아에서보다 혹독하였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또 함께 형벌을 받던 교우들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그들 모두에게 말하기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함께 순교하자.”고 하면서 힘써 권면하였다.
이후 안드레아는 끝까지 형벌을 극복하고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동료 교우들과 함께 순교했으니, 그때가 1866년 11월 23일(음력 10월 17일)이었다.
진영 순교지에서 남문밖 순교지를 가는 도중 제일교회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망선루터라는 표지석이 하나 길가에 서 있다. 옆에 조그만 안내판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망선루란 청주관아 객사 동쪽에 있던 고려시대에 목조 누각 건물인데(충북 유형문화재 110호) 1921년 일제 강점기에 무덕전 신축으로 헐리게 되자 당시 제일교회의 담임 한태영 목사와 독립지사 김태희 장로를 중심으로 보존 운동을 전개하여 1923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교육과 계몽활동 장소로 사용하다가 청주시에 기증하여 지금은 중앙공원에 이전 복원하였다. 경주의 객사 동경관처럼 문화재 보존에는 이처럼 선각자들의 기여가 크게 기여한다.
(3)남문밖 장터 순교지(청주시 상당구 성안로 59-60)
찾기가 쉽지 않은 순교터다. 청주약국 20m 앞이라고만 했을 뿐이지 순교지 표지판이 없어 육안으로는 찾기가 어려웠다. 청주약국은 다들 알고 있었다. 청주약국은 전통이 있어 안내판도 서 있다. 안내판에 의하면 청주약국은 1910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내려오는데 이곳은 청주읍성의 가장 큰 문인 청남문이 자리한 곳으로 전통시장의 원조인 저자가 열려 1980년대까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번화가였다고 한다.
지금도 장터(한마음 쇼핑상가타운 주변의 장터)여서 상가가 많은데 순교터는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다행히 알고 있는 주민 한 사람을 만났는데 친절하게도 직접 우리를 데리고 가서 가리켜 주었다. 찾기 어려운 것은 시장 바닥이라 표지판도 세울 수 없어 길바닥에 순교터임을 새겨놓았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음력 2일과 7일에 5일장이 열렸는데 1801년 12월 22일 장날 끝까지 배교를 거부한 복자 김사집(프란치스코)는 장터 사람들에게 조리돌림(회술레)을 당하고 곤장 80대를 맞고 순교한다. 이후 60년이 지난 1866년 보은 멍에목에 살고 있던 안 루카가 체포되어 청주 진영 이곳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이곳 장터로 끌려나와 조리돌림을 당하고 목 졸려 순교하였다.
▲김사집(프란치스코)
‘성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金)사집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良家)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만 노력하였으며,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다.
김 프란치스코의 타고난 슬기와 재능,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 대한 희사와 애긍은 복음 전파의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2년 동안 육식을 삼가면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 때 덕산 관아로 압송된 김 프란치스코는 관장에게 유혹과 형벌을 번갈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같은 해 10월, 김 프란치스코는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2개월 뒤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엄동설한에 해미에서 청주로 가는 3일간의 180리 길은 김 프란치스코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인종(忍從)과 마음의 평온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청주로 이송된 지 얼마 안되어 김 프란치스코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는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4)청주 병영 순교지(청주시 상당구 남사로 115 중앙공원)
지금의 청주 중앙공원의 자리는 조선시대 군대의 주둔지인 충청도 병마절도사 병영이 있던 자리이다. 충청병영(忠淸兵營)은 충청북도 청주(淸州)에 위치하였던 조선시대의 충청도 지역의 군영(軍營)이다. 청주병영(淸州兵營), 청영(淸營)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지휘관은 종2품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이다.
천주교에서의 청주 병영은 1799년 4월 17일 순교한 홍주 응정리(현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의 매우물) 출신의 복자 원시보(야고보)와 1800년 1월 7일 당진 진목(현 당진시 고대면 장항리) 출신의 복자 배관겸(프란치스코)이 장살(杖殺 매로 때려 죽임) 당한 곳이다. 원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약 50여 가족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2002년 9월에는 천주교 청주 순교자 현양비가 공원 남쪽에 세워졌다. 1799년 순교한 원시보 야고보를 비롯한 4명의 청주지역 순교자를 기리는 돌로 앞머리에는 '순교자 현양'이라 각자했다
중앙공원은 청주시의 한가운데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서 공원에는 선인들의 숨결이 서려 있다. 충청병영이 있던 이곳에는 병영을 경영키 위한 건물이 꽤 많았다. 병마절도사의 처소인 청진당(淸塵堂), 도서실격인 후당(後堂)과 반시당(反始堂), 병사의 집무소인 운주헌(運籌軒), 지휘소인 통군루(統軍樓) 등 수십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병마절도사 영문 한 채만 남아 있다.
공원 내 주요 문화재로는 충청도 병마절도사 영문(지방유형문화재 15호), 압각수(은행나무, 충북기념물 5호), 망선루(지방유형문화재 제110호), 조헌 전장기적비(지방유형문화재 136호), 청주 척화비(지방기념물 23호) 등이 있다
. 먼저 망선루다. 안내판에 의하면 망선루(望仙樓)는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몽진을 왔다가 난리가 끝나자 궁궐로 돌아갈 때 묵었던 집으로 그 기념으로 과거가 열렸는데 취경루(聚景樓)에 합격자 방을 붙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461년 세조 때 이백상이 중수하고 한명회가 망선루란 이름을 붙였다. 그후 여러 번 중수되다가 헐리게 된 것을 남문로 제일교회 뒤에 옮긴 것은 망선루 터에서 이미 말한 대로다. 기둥이 썩어 붕괴의 위험이 있는 것을 2002년 청주시에서 이곳에 이전 복원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누각식 2층 목조기와집이다. 현재 1층은 1920년대 이전 과정에서 목재 위에 시멘트 벽돌을 덧대어 다시 짓는 바람에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청주 지역에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망선루 바로 옆에 복자 원시보(야고보)와 복자 배관겸(프란치스코) 순교자 현양비가 세워져 있다. 천주교 순교자 현양비로서는 초라한 편이다.
▲원시보(야고보)
원시보 야고보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본래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하였으며 입교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온갖 덕행을 실천하였다.
1795년 무렵, 원 야고보는 주문모(周文謨,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나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즉시 첩을 내보냈다. 이로부터 2년 후 1797년 정사박해 때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갖가지 혹형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고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와 몹시 두들겨 맞았으며, 형벌로 인해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1799년 병영이 있던 청주로 이송되어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온갖 혹형을 당하고 결국 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1799년 4월 17일(음 3월 13일) 순교하였다. 청주지역의 첫 순교자였다. 당시 그의 나이 70세였다
▲배관겸(프란치스코)
충청도 당진의 진목(현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인 배관겸 프란치스코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입교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자신의 죄를 진실히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사박해 때 밀고자에 의해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었다. 관장은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갖다 바치라.”고 강요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다시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어 프란치스코는 원시보(야고보) 등 다른 교우들을 만나 고통을 함께하였다. 온몸의 살이 헤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가 되어서도 그는 영웅적인 인내로 모든 것을 참아 냈다. 그러나 형리들의 매질이 계속되면서 끝내 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0년 1월 7일(음 1799년 12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 약 60세였다.
중앙공원에는 거대한 은행나무 고목도 있어 공원의 유서를 말해준다. 고려시대 때부터 있어온 나무라고 한다. 고려 공양왕 때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이 죄도 없이 청주옥사에 갇혔는데 갑자기 대홍수가 일어나 옥사가 유실되었는데 이때 이들은 이 은행나무에 올라가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하늘의 뜻이라고 하자 조정에서도 이들을 방면했다. 양촌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압각수(鴨脚樹)란 은행잎이 오리 물갈퀴 같이 생겼다고 하여 은행나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정곡문(正鵠門)은 충청 병영의 여러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영문(營門)이다. 정곡(正鵠)이란 활을 쏠 때의 목표물 곧 과녁이다. 과녁이란 관혁(貫革)에서 온 말로 원래는 목표물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고니(鵠)를 가죽에 그려놓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밖에도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운 기허당 영규대사 기적비(紀蹟碑), 의병장 조헌 기적비, 화천당 박준무 기적비 등이 서 있다.
(5)북문밖 장대 순교지(청주시 상당구 북문로 1가 220)
이곳 장대는 청주읍성 북문 밖에 있던 군대의 지휘소가 있던 장소로 복자 장 토마스가 순교한 현장이기도하다. 그리고 1866년 12월 29일에는 진천 정삼이골과 용진골(현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에 살고 있던 손관보 베드로와 여 요셉도 이곳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장대 터는 청주시 상당 사거리 북서쪽 모퉁이에 있다. 서운동 성당 안내서에는 북문 표지석 부근 ‘시골길 식당 앞 소나무 숲’이라고 되어 있어, 북문 표지석도 찾고 시골길 식당도 찾았으나 소나무 숲의 순교지 표지판은 찾을 길이 없어 관광안내 부스의 해설사에게 물어도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소나무 몇 그루를 심어 갓길 공원을 조성한 그 입구에 순교지 표지석이 있었다.
▲장 토마스
경기도 수원 느지지(요당리)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張周基, 일명 낙소, 1803~1866, 요셉)의 재종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장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장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면서 하나 있는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안 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때에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장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로 끌고 나가 처형했다. 갔다.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2세였다. (수원교구 요당리 성지 참조)
(6)청주 옥 신앙증거터(청주시 상당구 남문동 2가 48-19)
청주 옥터는 비록 순교자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각지에서 체포되어 이곳에서 서로 권면하며 하느님만을 바라던 순교자들이 머물렀던 장소로 1799년 복자 원시보(야고보), 1800년 배관겸 프란치스코와 1866년 오반지 바오로와 김준기 안드레아와 진천 퉁점(현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 출신의 윤 바오로와 진천 지장골 출신의 이영준 아우구스티노등이 이곳 옥에 갇혀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충청도 덕산의 김사집(일명 성옥, 프란치스코), 진천의 오반지(吳盤池, 바오로)와 수원 느지지 출신의 장 토마스, 삽교 지역 최초의 순교자인 덕산현 출신의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 등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다.
이곳을 찾는 데도 곡절이 많았다. 서운동 성당 안내에는 쫄쫄호떡집 지나 철당간이 있는 곳으로 되어 있는데 주민들도 다들 모르겠다고 하고 네비게이션 작동도 원활하지 않아 난감했는데 마침 3명의 초등학생들을 만났는데 자기들이 시장 떡뽁이 집 부근에서 철당간을 보았다고 해서 그들의 안내를 받아 철당간은 찾았으나 인근 일대에 순교터 표지판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야 철당간 광장 한쪽에 순교지 표지판이 있는 것을 알았다. 지척에 두고도 10여분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이제 마지막으로 철당간 이야기로 청주성지를 끝내려 한다.
철당간의 본이름은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1호)이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찰로 추정되는 용두사에 세워진 당간(깃발 장대)인데 절은 없어지고 철제 당간과 석제 당간지주(당간을 지탱하는 두 개 기둥장치), 그리고 받침과 간대만 남았다. 원래 철제 원통 30개를 쌓아 당간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20개뿐이다.
이 당간이 국보로 가치가 있는 것은 물론 철제 당간도 드물기는 하지만 철제 당간 원통에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당간은 고려 광종 13년(962) 김희일 등 청주 호족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당간 중에서 연대가 밝혀진 유일한 것이다. 대부분의 당간지주는 사찰이 창건된 연대로 추정한다.
그리고 민간에 전래하는 바는 이곳 청주에 홍수가 자주 일어났는데 한 점술가가 청주의 지형이 떠나는 배 형태여서 돛대에 해당하는 당간을 세우면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이 철제 당간을 세우니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뜻밖에 가치 있는 대한한 유물을 보너스로 보게 되어 행운이다.
벌써 11시 50분. 신 모세와 죽산 성지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12시인데 곧장 가도 좀 늦을 것 같다.
죽산 순교성지 - 국법에도 없는 가족 동시 처형이 자행되다 |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죽림리 703-6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장암로 276-44
죽산 도호부와 천주교 박해
죽산(竹山)은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인데다가 도성의 남쪽이어서 도성 수호의 주요 전략지로 파악괴어 일찍이 현이나 군보다 상위 지방관청인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이에 죽산 도호부는 지금의 안성시 죽산면 · 일죽면 · 삼죽면과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 백암면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한 행정기관이었다. 거기다 여주에 있었던 진영(鎭營)이 죽산으로 옮겨져 죽산 도호부사(종3품)은 수어후영장(守禦後營將)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되었다. 그래서 뒷날 병인박해 당시 죽산 도호부사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천주교인들을 대거 체포할 수가 있었다.
당시 도호부 감옥터로 추정되는 현 죽산면사무소 입구에는 병인박해 때 인근 지역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이곳으로 끌려와 참담한 고문을 당한 후 현 죽산 순교성지 자리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곳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치명일기” · “병인치명사적” ·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에서 그 이름이 밝혀진 이만해도 24명에 이른다. 하지만 척화비를 세우고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사학죄인’을 색출한 뒤 무차별적으로 교우들을 끌어다가 처형하던 당시의 몸서리쳐지는 박해의 서슬을 생각해 볼 때,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셀 수조차 없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부터 이곳에 처음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밝혀진 순교자 명단 24위는 다음과 같다.
24명 중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님 내방으로 124위 복자 위에 오른 분은 박경진(프란치스코), 오 말가리다 두 분이고, 하느님의 종 133위 중에 포함되어 복자 위를 기다리는 여섯 분이 포함되어 있다.
▲죽산 순교성지 순교자 24위
이 름 | 순교일 | 나이 | 비 고 | |
1 | 최제근(안드레아) | 1868.7 | 27 | 하느님의 종 |
2 | 방 데레사 | 〃 | 25 | 최 안드레아의 처 |
3 | 여기중 | 1868 | 60 | 하느님의 종 |
4 | 여정문 | 1967 | 44 | 여기중의 자 |
5 | 여기중 처 | 〃 | ||
6 | 여정문 자 | 〃 | 15 | |
7 | 문 막달레나 | 1867 | 19 | 하느님의 종 |
8 | 박경진(프란치스코) | 1868.8.14 | 34 | 복자 |
9 | 오 말가리다 | 1868.8.13 | 복자. 박경진의 처 | |
10 | 趙치명(다데오) | 1868.7 | 30 | 하느님의 종. 김우르보시나의 남편 |
11 | 김 우르보시나 | 27 | 하느님의 종. 부부가 같은 날 순교 | |
12 | 한치수(프란치스코) | 1866 | 47 | |
13 | 유(兪) 베드로 | 1869.8 | 24 | |
14 | 이희서 | 1866.12.22 | 이진오의 장인 | |
15 | 홍천여(洪千汝) | 같은 날 순교 | ||
16 | 정덕구(야고보) | 1867 | 23 | 하느님의 종 |
17 | 최성첨 | 1868.8.13 | ||
18 | 최성첨 장남 | 〃 | ||
19 | 이진오 | 1868 | 이희서 사위 | |
20 | 김회장(도미니코) | 1869.10.7 | ||
21 | 김인원 | 〃 | 김회장과 함께 순교 | |
22 | 홍치수 | 1871 | ||
23 | 정 토마스 | 1866 | 25 | |
24 | 금 데레사 |
지명이 말해주는 순교터
순교자들이 처형된 곳은 잊은터로 불리던 곳으로, 오늘날 죽산 순교성지가 자리한 그 일대이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이진(夷陣)터’였다.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竹州山城)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그런 이름으로 불려 왔다. 그 후 오랑캐의 피로 더럽혀진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되었고, 조선 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오랑캐들이 진을 쳤던 곳이기에 죄인들의 사형터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병인박해를 겪으면서 이진터는 순교터가 되었다.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터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가족도 친지도 한 번 끌려가면 영영 볼 수 없는 곳, 순교자들의 참담한 비극이 그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죽산에는 또 두둘기라는 곳이 있다. 죽산 읍내에서 서쪽으로 15리쯤, 지금은 삼죽면 소재지로 제법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인가가 드문 곳에 작은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름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이 있다. 지형이 조금 도드라져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고, 땅이 진흙이어서 신을 땅에 두드려 패지 않으면 신발 바닥에 붙은 진흙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두둘기 마을은 병인박해 때 교우들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한 많은 땅으로 변했다. 용인 · 안성 · 원삼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포졸에게 잡혀 가는 호송 길에 이 주막은 잠시 쉬어 가는 곳이 되곤 했다. 포졸들은 신자들을 줄줄이 묶어 끌고 가다가 주막에 들러 술을 마신 뒤 툭하면 갖은 트집을 잡아 심하게 두들겨 패곤 했다. 또 뒤쫓아 온 가족들은 교우들이 무참히 맞는 것을 보고 땅을 두드리며 원통해 했기에 마을 이름이 두둘기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래저래 ‘두둘기’는 두들겨 맞는 곳으로 전해져 왔다. 천주교 박해는 이렇게 지명으로도 증거 된다.
가족을 함께 처형한 순교지
죽산 순교지의 특징은 가족이 같은 날 처형한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60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한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날 한자리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들 여정문의 입장에서는 그의 아버지와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한날,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당시 국법으로는 아무리 중죄인일지라도 부자(父子)를 한날 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또 여정문 가족뿐만 아니라 1868년의 조치경, 김 우보로시나(우르시치나) 부부와 최성첨과 그의 장남이 또한 그러한 예이다. 이로 볼 때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애절한 순교가 있다.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평온히 주님께 의존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 명이 찾아와 열일곱 살 난 그의 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에 힘이 센 김 도미니코의 둘째 아들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산으로 피하며 따라오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순교자 김 도미니코에게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서 너희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서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여러 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그들 앞에 내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다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는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아마도 하늘나라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았으리라 믿는다.
12시 30분 도착 예정이었는데, 죽산 성지에 실제 도착한 시간은 30분이 지연된 오후 1시였다. 점심시간이지만 어디 마땅한 식당도 없어 집에서 준비해간 간식으로 점심을 때우려고 일단 성지 문밖 공원 쉼터에 갔다. 자리를 펴려고 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자리를 걷고 일산 밑으로 자리를 잡아 간식을 먹고 나니 1시 40분.
안내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동선을 정한다.
예수성심상이 있는 넓은 주차장⓵에 주차를 하고 식수대⓷와 십자가 동산⑯이 있는 성지 밖 쉼터에서 간식을 먹고, 성역문⓸를 통해 성지 안으로 들어간다. 먼저 대성당⑨에 가서 참배하고 나와 넓은 잔디밭 주위의 장미꽃 묵주기도 길⑤을 돌아 중앙계단을 통해 제대⑥와 순교자 묘역⓻에 올라가 참배를 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⓼을 통해 맨 뒤편에 있는 사제관⑫, 사무실⑬을 거쳐 다시 돌아 나온다. 다음으로는 이 안내도에 잘려나간 피정기관 영성관을 보고 차를 타고 죽림 도호부 옥터순교지⑰로 가서 죽산 성지 순례를 끝낸다.
십자가 동산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시는 순간을 재현한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맹세한 제자들은 다들 떠났다. 아니 떠났다기보다는 달아났다. 오직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등 약한 여인들만이 남아 예수님의 마지막을 고통과 슬픔으로 지켜보았다. 못 박히는 고통의 신음소리도 들었다.
천국에도 서열이 있을까? 있다면 그 서열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 기준은 얼마나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사랑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킨 여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위기상황에서 교회를 지켜내고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교회에 큰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기보다는 이 연약하고 볼품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여인들의 연장선상에 바로 순교자들이 있는 것이다.
죽산에 한 옛날에 천주학 신봉자들
산산히 찢겨지고 뼈골이 부셔져도
은공의 주님사랑 세세에 전하고자
수없는 고통 속에 목숨을 사루었다.
많다던 포졸들은 이제는 간곳 없고
은총의 신도들이 성전을 이루고져
선조의 순교정신 만세에 현양코자
조용히 외람진 곳 외로이 불탔어라.
들어라 산과 들아 모두다 설워말라.
이제는 신도들이 옛일을 변호코자
피맺힌 옛 성터를 꽃으로 단장하니
로서아 찬바람은 봄빛에 물러났다.
써서도 혀로서도 형언키 어려운 삶
믿음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으니
음성을 다해서도 찬양키 부족하다
을병정 셈을 세도 무궁히 세야 하리
증거자 순교자는 천상에 오르시어
거룩한 주님 앞에 영복을 누리시니
한없는 부러움에 우리는 사로잡혀
땅 위에 무릎꿇고 간절히 비나이다. (2007년 순교자 성월에 이정운 베드로 몬시뇰님의 글 월파 강주관씀)
옮겨놓고 보니 각행의 첫 글자를 세로로 읽으니 죽산성지 찬가가 된다. - 죽산은 수많은 선조들이 피로써 믿음을 증거한 땅
성역문 안에 들어서면 위쪽으로 성지 전면이 아스라이 보이는데 좀더 가까이 가면 대형 십자가와 그 앞의 제대 그리고 계단에는 다섯 개의 검은 색 흰 색 묵주알이 있어 묵주기도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광장 둘레에는 장미꽃 속에 싸인 묵주알들이 화원을 이룬다. 화원 전체가 하나의 묵주이면서, 묵주의 기도이다.
묘역으로 오르는 계간 좌우에는 같은 형태의 피에타가 자리하고 있고 순교자 묘역은 무명순교자의 묘가 한 가운데 가장 크게 자리하고 그 좌우로 날개처럼 24명의 순교자 묘가 12명씩 나뉘어 펼쳐지고 양단에는 뾰족한 순교 현양탑이 순교자의 기개를 나타내는 듯 솟아있다.
묘역 24위마다 사각형 오석 묘비가 묘의 왼쪽에 서 있고, 군데군데 오석 묘비가 눕혀져 있는데 이것은 주로 가족관계로 그 순교 내력을 소개해 주고 있다. 이처럼 죽산성지의 순교 특징은 유독 가족이 많은데 이는 국법에도 없는 가족 동시 처형의 참혹한 모습을 보여준다.
순교자 묘역을 지키는 대형 십자가 위에는 대형십자가와 순교자묘를 감싸듯한 반원형 십자가의 길이 펼쳐진다. 대리석으로 된 석조 14처로 되어 있다. 성지가 시원스레 조망된다.
이제 대성당이다. 장엄한 순교자 묘역과 묵주기도의 길의 화려함에 비해 매우 소박하다. 입구에는 성모님이 서 계신다. 성전 앞에는 철도침목 같은 목재가 깔려 있어 성전 황토벽 같은 흙을 밟지 않고도 들어갈 수가 있다.
성전 내부는 천장만 흰색일 뿐 벽과 바닥과 장의자가 모두 주황색이다. 벽면에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고 십자가의 길 14처가 지나간다. 벽과 색상이 같아 구별이 되지 않는다.
밖에는 고해소가 있고 벽 앞에 전통 한복 차림의 성모자상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성당 바로 뒤에는 식당 등 편이시설 건물이 한 채 있다.
성당을 나와 다시 철도침목 같은 목재길을 오르면 사제관, 소성당, 사무실 영역이 나온다.
오후 2시 반경 죽산 순교성지 순례를 끝내고 죽산도호부 옥터로 향했다. 안내에 죽산 면사무소 부근이라고 했다. 나오는 길에 수원교구 영성관을 지났다. 순례자들의 영성을 높이는 피정기관이다.
면사무소에 들렀더니 공휴일이어서 직원들은 없고 당직자인 듯한 청년이 한 사람 있어 죽산 옥터순교지를 물으니 모른다고 한다. 다시 나가서 주민들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죽산 성당 사무실에 전화를 했더니 면사무소 가기 전 골목길을 한참 들어가야 있다고 했다. 각자 흩어져서 찾는 중에 신 모세 형제가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가서 보니 바로 큰길 옆 면사무소 들어가는 코너, 커다란 면사무소 안내판 옆에 있었다. 이처럼 천주교 성지는 주민들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주민들뿐만 아니라 성당 사무실에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 (1835∼1868년)
박 프란치스코는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이후 이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절골에서 약 2년 동안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쳐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그의 아내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그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후 그 동네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러나 그 비신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아내 마르가리타와 함께 죽산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들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박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4세였다.
▲복녀 오 마르가리타 ( ? ∼1868년)
오 마르가리타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훗날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이후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쳐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가장 먼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남편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가 한 비신자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들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다.
아직도 고통이 모자라 - 죽산 이진터에서 -
땅 기우는 고문도
시원한 바람일 수 있는 것입니까?
하늘은 맑고 햇살은 곱습니다.
나는 침묵 투명한 땅에서
캄캄히 나의 삶 들여다봅니다.
캄캄히 나의 죽음 들여다봅니다.
나는 아직도 고통이 모자라
피 맑지 못한 기도는
여전히 구름 뚫지 못하는데
진정 나의 사랑은 어느 높이에서
잠을 깨고 있는 것입니까?
멀리 지평선 이루는 숨결
아득히 약속 밝히는 기억
부질없이 떠돌았던 나의 젊음도
이제는 밝은 파문 일으키는
작은 죽음 하나 꿈꿀 때 되었습니다.
(김영수)
오후 3시가 다 되었다. 미리내 성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