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추수감사)
주제 : 감사
제목 :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라!
성경 : 시 103:1-14
찬송 : 589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191117 낙양교회 추수감사 주일 낮 예배
시 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시 103: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 103: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시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6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시 103:7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시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시 103: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영상 시청> 절망 속에서 감사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올해는 유난히도 많은 태풍이 지나갔고 그래서 가을에 추수할 것이 있을까 염려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추수할 것을 주시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두 친구가 사막을 여행하던 중 문제가 생겨 다투었습니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했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그만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뺨을 때린 친구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는 늪에서 빠져 나오자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이를 본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의 뺨을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 적었는데, 너를 구해 준 후에는 왜 돌에다 적었지?”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괴롭혔을 때, 그 사실을 모래에 적어야 하네,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말이지, 그러나 누군가가 좋은 일을 했을 때에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한다네. 그래야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인데,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시 103: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찬양의 서문에서 가장 중심 되는 특징을 이루는 단어는 ‘모두’(콜)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네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됩니다(1절하(다), 2절(모든), 3절상(모든), 3절하(모든).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완전성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시인이 자신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찬양하기로 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 103: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4: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시 104:35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송축하다’라는 말은 ‘바라크’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축복하다, 무릎을 꿇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는 뜻이며 권세를 가진 존귀한 사람을 모든 예의를 갖추어 인정해 주며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송축하라고 자신에게 타이릅니다. 무엇을 송축해야 합니까?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모세에게 처음으로 계시되었습니다.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이후에 시내산 금송아지 사건 후에 주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말라는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더 반포하시며 그의 이름이 뜻하는 바를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주님의 초월적인 이름인 “야웨”는 ‘언약 백성에게 인자하심을 베푼다.’는 점을 강조하며 본 시편의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내 속에 있는 것들아’라고 말함으로써 전인격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다윗이 소유한 지, 정, 의뿐만 아니라 온 육체와 영혼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은택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였으나 ‘주님의 은택’으로 넘어감으로써 주님의 이름이 바로 모든 은택의 원천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신명기적 가르침을 따라 주님의 은총을 잊지 않으려고 다짐합니다.
신 6: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신 8: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어떤 은택을 베풀어 주셨습니까?
시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 103: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시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모든 병을 고치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 젊음을 독수리처럼 새롭게 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하나씩 열거하면서 이렇게 대우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으로 나타나야 합니까? 바로 찬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기억하십니까? 그 은택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택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끔 병원에 가보면 감사할 조건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 사람이 병이 납니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못 먹으면 병이 납니다. 먹어도 잘못된 것을 먹으면 탈이 납니다. 그런데 건강한 사람은 조금 잘못된 것도 다 소화시킵니다. 그래서 괜찮습니다. 그런데 먹고 나서 배출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병이 됩니다. 몸이 붓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 먹고 화장실 잘 가는 것도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감사할 조건을 찾아보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평불만하기 일쑤입니다. 감사할 조건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조건을 찾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교만 때문입니다.
물론 육신만 건강하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건강입니다. 사죄의 은총을 받아야 파멸에서 구원받습니다. 사죄의 은총은 우리가 받아야 할 가장 큰 은총입니다. 아무리 육신이 잘된다 할지라도 죄 사함 받지 못하고 지옥 백성이 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분의 피 흘림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누구보다 죄 사함의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지은 큰 죄가 무엇입니까? 남의 아내를 빼앗은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 남편 충성스러운 부하를 최전방에 보내어 전사하게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은폐하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는 결코 숨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의 죄를 드러내십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곧 바로 회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자기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차이입니다.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서도 자기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 바로 자기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죄의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 하였습니다.
시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다윗이 이렇게 회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죄의 은총뿐만 아니라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케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만족하게 하다’는 동사는 아랍어에서 ‘좋은 영양분을 공급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영양이 부족한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겠습니까?
인자하심이 풍부하심을 잊지 말라!
다윗은 자신이 경험했던 은혜가 자기만이 아니라 백성 모두에게 주어졌다고 노래합니다.
시 103:6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공의로운 일들’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행동을 말합니다. 즉 주님은 공의를 실천하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억압당하는 모든 자들을 변호하며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많은 학대를 당하며 고통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건져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삿 5:11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모든 사람을 위한 재판장이 되어 주십니다. 다윗이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 103:7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이것은 이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밝히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밝히신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처음과 변함없이 완전한 의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시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바로 앞 절에서 모세에게 계시한 주님의 뜻은 이 절에서 시내산 언약의 핵심인 하나님의 이름 계시로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주님은 자신의 모습과 뜻을 다양하게 계시하였지만,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새롭게 계시한 사건은 시내산 계시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출애굽의 구원역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자신의 영광을 금송아지로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쓸어버리시고 모세를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중보 기도를 드렸으며, 주님께서는 언약을 회복하시고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화를 참고 사랑이 그지없는’ 자신의 모습을 선포하셨습니다.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시 103: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완성하기 위하여 변함없이 그들을 책망하지만, ‘두고두고 싸우지는 않습니다.’ ‘경책하다’(라브)라는 말은 법정적인 배경에서 사용되며, ‘논쟁하다, 싸우다, 잘못을 가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백성을 고소하며 책망하지만, 회개한 사람을 ‘두고두고 꾸짖지는 않습니다.’
사 57:16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여기에서 ‘품다’라는 동사는 화를 계속 내면서 풀지 않을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렘 3:5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분노는 세상의 부패함에 대한 정당한 반응입니다. 만약 하나님에게 분노하심이 없다면 그의 선하심도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늘 화만 내신다면 아무도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렘 3:12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모든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시며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라!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다윗은 4절에서도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대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 무엇으로 만드셨습니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우리의 뼈대와 성향은 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한갓 티끌’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먼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먼지라는 말은 ‘아파르’라고 하는데 ‘먼지, 티끌, 푸석한 흙’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먼지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먼지에 씨앗을 심으면 그것이 싹이 나고 자라날까요? 우리 인간은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욥 4: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욥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전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우리 인생은 체질적으로 연약할 뿐만 아니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시 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인은 인생의 연약함과 헛됨을 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인생은 풀처럼 쉽게 마르고 시들어가는 존재이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상태에서도 들의 꽃과 같을 뿐입니다.
욥 14: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들에 피는 꽃은 잠깐 영광스럽게 피지만, 순식간에 그 영화가 시들어 버립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화무는 십일홍”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연약한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았기에 오늘 우리가 감사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믿습니까? 오늘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여 그분의 모든 은택을 기억하고 진정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