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양군(密陽郡)의 동북쪽 변두리에 위치하며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과 경남(慶南) 울주군(蔚州郡) 등 세 고을의 도계(道界)와 군계(郡界)를 이루고 있는 산중의 별구(別區)이다.
부경(府境)의 태산(泰山)이라고 일러오는 해발 1189m의 재약산(載藥山) 줄기가 동남쪽으로 분수령을 이루어 울주군(蔚洲郡) 상북면(上北面)과 단장면(丹場面) 구천리(九川里)와 각각 경계를 지었고, 그 북쪽에 이른바 영남 알프스의 주산인 1240m의 실혜산(實惠山), 천화산(穿火山), 가지산(迦智山)이 우뚝 솟아 두 도(道)와 세 군(郡)의 경계를 이루면서 앞가슴에 백운산(白雲山)(885m)을 품고 있다. 또 정북(正北)에는 운문산(雲門山)(1188m)이 동서로 길게 뻗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운문면(雲門面)과 도계(道界)를 이루었고, 그 서쪽에 억산(億山)(944m)을 거느리고 있다. 다시 구만산(九萬山)(785m)과 용암봉(龍岩峰)(686m) 산줄기는 상동면(上東面). 산외면(山外面)과 면계(面界)를 이루었고, 남쪽에는 정각산(正覺山)(859m)을 경계로 하여 단장면(丹場面)과 대치하였다.
이와 같이 사방에 1000m를 전후하는 태산 준령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다만 서남쪽에 길게 입구가 트이어 "호리병 속의 별천지" (호리건곤(壺裏乾坤))라고 일컬었다. 또한 동북쪽 분수령인 백운산(白雲山)에서 발원한 물이 산내천(山內川)이 되어 젖줄을 이루었고, 그 하천(河川)을 중심으로 좌우의 분지에는 옹기종기 아담한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물 좋고 반석 좋고 토지가 비옥하다고 하여 "삼락(三樂)의 가경(佳境)"이라고도 했다.
산내면(山內面)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17세기 초에 면방(面坊)의 구역을 정비할 때 중동면(中東面)에 편입되었다. 당시에는 이웃한 상동면(上東面)과 하동면(下東面)의 사이에 있다고 하여 중동면(中東面)이라고 했으나, 지금의 산내(山內). 산외(山外). 단장(丹場) 등 세 면(面)을 포괄하는 매우 넓은 구역이었으며, 그 가운데 산내면(山內面)에 해당하는 방리(坊里)로는 천화리(穿火里). 벌완실혜촌(伐宛實惠村), 석동(石洞) 뿐이었다.
그 때만 해도 언양(彦陽) 고을과 경계를 이룬 천화령(穿火嶺)(석남령(石南嶺))의 아래에 취락이 몰려 있었으며, 그 뒤 새로운 방리(坊里)가 생겨 18세기 말에는 오치리(烏峙里). 소고례리(所古禮里). 가라리(加羅里). 용천리(龍泉里). 적암리(赤巖里). 원당리(院堂里). 양지리(陽地里). 음지리(陰地里). 가좌리(加佐里). 양송정리(養松亭里). 미라리(美羅里). 임고정리(林高亭里). 발례동( 發禮洞)里와 같은 여러 마을이 면내 전역에 자리잡았다.
19세기 초에는 다시 중동면(中東面)에서 단장면(丹場面)이 분할되어 떨어져 나가고, 지금의 산내(山內)와 산외(山外)를 합친 구역을 천화면(穿火面)이라 개칭했는데 이는 애초에 이 면(面)의 발상과 중심지가 천화령(穿火嶺)의 아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천화(穿火)라는 지명은 일반적으로 화산(火山) 지대의 분화구라는 뜻으로 불이 땅을 뚫고 나온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지로 이 지대는 지질학상으로도 안산암(安山岩) 계통의 화강석(花崗石)이 널리 분포되어 화산(火山) 지질임을 알 수 있고 "시례호박소" 등의 산상(山上) 소택지가 그 분화구에 해당된다고 한다.
1860년경에 군내의 면방(面坊)을 개편하면서 종래의 중동면(中東面)인 천화면(穿火面)과 단장면(丹場面)을 통털어 다시 중초동(中初同). 중이동(中二同). 중삼동(中三同) 등 세 면으로 분할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천화면(穿火面)은 중초동면(中初同面)과 중이동면(中二同面)으로 나누고 단장면(丹場面)을 중삼동면(中三同面)으로 일시 명칭을 바꾸었으며, 1880년경에는 다시 중초동면(中初同面)과 중이동면(中二同面)을 폐합하여 천화면(穿火面)으로 환원하였고, 중삼동면(中三同面)은 도로 단장면(丹場面)이 되었다. 1895년(고종(高宗) 32)에는 천화면(穿火面)을 또 분할하여 서남쪽 입구의 높은 산을 경계로 하여 그 바깥에 해당하는 중이동면(中二同面)을 천화산외면(穿火山外面)이라고 했고, 안쪽에 있었던 중초동면(中初同面)을 천화산내면(穿火山內面)이라고 했다. 이 때 본면(本面)의 취락으로는 오치(烏峙), 소고(所古), 벌완(伐宛), 노라(蘆羅), 용천(龍泉), 적암(赤巖), 원당(院堂), 양지(陽地), 음지(陰地), 가좌(加佐), 송포(松圃), 미라(美羅), 임고정(林古亭), 발례동(發禮洞) 등 14개의 방리(坊里)로서 종래의 천화리(穿火里), 실혜촌(實惠村) 등 중심 취락의 이름이 없어진 반면 방리(坊里)의 표기도 다소 변경되었다.
1914년에 전국적으로 일제히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에 종전의 자연부락을 통폐합하여 지금과 같이 용전(龍田), 임고(臨皐), 송백(松栢), 봉의(鳳儀), 원서(院西), 가인(佳仁), 삼양(三陽), 남명리(南明里) 등 8개리로서 법정리를 삼았다. 1918년에 이르러 천화산내( 穿火山內)面이 산내면(山內面)으로 개칭되었고, 1965년에 8개 법정리에 소속된 자연부락을 조정하여 23개의 행정리로 재편성하였다.
이 면(面)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비허선사(備虛禪師)가 석굴(石堀)(지금의 석골사(石骨寺))에서 수도하며 운문산(雲門山)의 보양(寶壤)과 서로 왕래했다는 사실이 실려 있고, 고려사(高麗史)에도 초적(草賊)의 괴수 효심(孝心)의 항거지로서 밀성(密城)의 저전촌(楮田村)(지금의 용전리(龍田里))이 있다 했으며,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임진왜란의 전적지로서 석동(石洞)과 대암(臺岩)이 소개되어 있다.
또 면내에는 충(忠). 효(孝). 열(烈)의 삼강(三綱)을 높이 숭상하기 위하여 세운 탁삼재(卓三齋)를 비롯한 고가(古家)의 정각(亭閣) 등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시례호박소, 얼음골, 이목굴, 함화산(含花山), 구만폭포(九萬瀑布) 등의 경승지도 있는데 특히 점필재 김선생(金先生)의 구연시(臼淵詩)와 오한 손기양(孫起陽)의 석골사시(石骨寺詩)가 유명하다.
1985년에는 고을의 숙망이던 밀양(密陽). 언양(彦陽)간의 산업관광도로가 2차선의 포장국도로서 개통되어 오지의 산간벽지였던 산내면(山內面)이 이제는 동부 경남의 교통 요지이며, 관광명소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