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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명절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를 얻은 유월절이었습니다. 독립기념일이었습니다. 그동안 유대 지역을 떠나서 전도 활동을 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찾으셨습니다. 여러 개의 출입문 가운데 성전 제사 때 사용하는 양들이 출입하는 문The Sheep Gate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양의 문은 구조상 지성소가 가까워질수록, 안으로 들어갈수록,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할수록 점점 좁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좁은 문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육적 자아가 완전히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또 양의 문은 죽음의 문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간 양은 절대로 살아나올 수 없습니다. 특히, 양의 문의 끝은 거대한 휘장으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물론 양의 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곧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니라”(히10:20)라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휘장이 되셨습니다. 찢기셨습니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를 완전히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로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구원과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많은 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양의 문으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양의 문 옆에는 베데스다라고 불리는 연못 하나가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주로 집과 성전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ב(베이트)와 사랑, 은혜, 자비, 긍휼, 인애 등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חסד(헤세드)의 합성어입니다.
“사랑의 집, 은혜의 집, 자비의 집, 긍휼의 집, 인애의 집” 등으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 주변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습니다. 이 행각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무수히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데스다 연못에는 아주 가끔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물을 휘저었습니다. 동시에 물은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는 사람 딱 한 명만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본서의 저자인 사도의 소신所信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깨달음은 더 더욱 아니었습니다.
행각에 누워있던 무수히 많은 병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지고 있었던 신념 또는 너무나도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낸 전설이었습니다. 간절히 원하게 되면 이루지게 되어 있다고 믿는 우상 숭배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제까지 병을 고침 받았다는 사람이 나타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병자들 가운데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특히, 병자들은 하나같이 마치 도道를 닦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물이 움직일 때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움직이게 되면 언제라도 가장 먼저 달려가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습니다. “먼저”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같이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간수할 수 없을 정도로 정상적이지 않고, 서로 우열을 가릴 수도 없고, 서로 비교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아니 비교한다는 사실 자체가 전혀 의미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피를 튀기는 치열한 경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눈물 나는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가젤Gazelle이 눈을 뜹니다.
본능적으로 사자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잡혀 먹히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사자 역시 매일 아침 눈을 뜹니다. 본능적으로 가젤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가젤이든, 사자든 아침에 눈을 뜨면 본능적으로 질주하게 됩니다. 그Burke Dale는 “삶을 즐기는 리더십”이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항상 바쁘게busy 일하고 있고, (대부분의 순간) 일속에 파묻혀buried 지내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동료 또는 경쟁자들보다) 뒤쳐져있다behind”는 위기감이나 조급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삶이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처럼 여유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충분히 소유했고 온갖 종류의 유흥을 즐기면서도 정작 필요한 만족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아무튼 사랑의 집, 은혜의 집, 자비의 집, 긍휼의 집, 인애의 집이라고 불렸던 베데스다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는 경쟁과 시기와 원한이 가득했습니다. 비극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삼십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다.”(요5:5)는 증거에 따르면, 행각에는 치료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자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연못물이 움직여도 스스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들어다 넣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든 병자들이 하나같이 공정하다고 인정하는 경쟁이라는 법칙이 그에게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이미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고 묻는 예수 그리스도께 “당연히 낫기를 원하지요. 그렇지만 저에게는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저 혼자 어렵게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요5:7)라는 푸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믿음을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연못에 먼저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완전히 매몰되었습니다.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숨을 푹푹 몰아쉬며 한탄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생각합니다. 자신이 불행한 이유는 자신보다 더 건강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흙 수저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천에서는 더 이상 용이 날 수 없다는 한탄과 함께 원망을 늘어놓으면서 소중한 인생을 허비합니다.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치료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병을 완벽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에 아무렇게 버려진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그에게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은혜를 값없이, 일방적으로, 넘치도록 풍성하게 쏟아부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호와를 떠나버린 당신 백성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완벽하게 고쳐주셨습니다. 고통으로부터 건져주셨습니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 속으로 몰아붙이는 허물과 죄로부터 완벽하게 건져주셨습니다. 여전히 기울어져 있는 또 개선의 여지 역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은혜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라는 고백대로, 오늘도 여전히 쉬지 않고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마침내, 창세전에 이미 작정하셨던 더할 나위 없이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창조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다 파악하고 다스리며 가지고 있는 특성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지혜로웠던 아담과 같은 모습으로 재창조해 주실 것입니다. 지극히 죄 친화적이고, 죄의 경향이 지극히 농후하며, “죄 곧 나, 나 곧 죄”에 불과한 저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의 완벽한 통치를 받을 수 있도록 재창조해 주실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서 여호와께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재창조해 주실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자아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여 더 위대한 자아를 가진 탁월한 존재로 재창조해 주실 것입니다. 마침내 “나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입니다the end of me is beginning of Jesus(Christ).”라고 고백할 수 있는, 하루하루 자신을 지워갈 수 있는, 결국 집요하게 추구하였던 자기 자신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나타낼 수 있는 수준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치밀하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 같아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현실을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위대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아무리 양 보하고 또 양보해도 도무지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만드는 탁월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특히, 여호와께서는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고 싶은 당신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도록 하십니다.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당신의 부재 곧 영적 일식日蝕”의 때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묵묵부답하시는 당신께 분노할 수밖에 없는 절대 절망의 자리로 몰아붙이기도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단 한 가지도 빠짐없이 모두 다 이유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현재 당하는 고통은 미래의 축복으로 인도하는 너무나 거룩하고 감사한 도구입니다. 사탄이 밤낮 사십일 동안이나 금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왔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b)라고 유혹했습니다. 먹을 떡이 없으니 굶으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만나를 만들 때처럼 떡을 만들어보라고 유혹했습니다. 떡을 먹고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짐승은 떡 문제만 해결되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떡 문제만 해결된다고 만족할 수 없습니다. 떡 문제를 완벽하게 다 해결해 놓은 상태에서 실컷 놀고, 실컷 자고, 여행도 실컷 하고, 하고 싶은 일도 실컷 다 하고, 갖고 싶은 것도 실컷 다 가지고, 온갖 허세도 실컷 다 부려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물론 꼭두새벽부터 늦은 한밤중까지 몸부림치면서 일하면 더 많은 떡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적인 갈증까지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갈증은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먹을 때에만 비로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 존재인 사람이 어떻게 떡만 먹고 살 수 있겠느냐고 도전하셨던 이유입니다. 시인 역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시1:1-2)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물질문명이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떡 이야기를 합니다.
학업 문제도, 직장 문제도, 집 문제도,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관심거리도 결국은 다 떡 이야기입니다. 떡 문제를 빼놓고는 대화를 이어가지 못할 정도입니다. 기, 승, 전 떡입니다. 특히, 사람들은 더 많은 떡을 가지기 위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원하는 만큼의 떡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 같아서 똑같이 일하고도, 때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일하고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떡을 받아야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극히 적은 수고를 하고도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납니다. 가만히 있어도 넘치도록 풍성한 떡이 주어집니다. 가진 떡이 셈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천문학적인 떡을 만들어냅니다. 하루가 다르게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총동원하여 발버둥 치며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거의 가질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떡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제안을 외면하기는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 하나만을 의지하여 살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사탄의 교묘한 유혹 곧 제안 앞에서 왜 그리도 무기력하게 무장해제가 되는지, 영혼까지 팔아버리는 일이 너무나도 흔하게 발생하게 되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호한 대답이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지, 온전히 순종하며 따르기가 왜 그리도 어려운 일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에서 실패한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갔습니다. 성전의 제일 높은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깊은 심연深淵 같은 낭떠러지로 몸을 날려보라고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멋들어지게 뛰어내려보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메시아를 목이 빠지도록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백성들에게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빼도 박도 못할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나 다 기다리던 메시아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며 따르고 섬기지 않겠느냐는 의미도 함께 암시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기꺼이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적인 환대를 받으면서 누구에게나 칭찬과 인정을 받는 영웅적인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보통 사람들의 허영과 야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유혹이었습니다.
사탄은 거기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91:11-12)라는 약속의 말씀까지 인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은 더욱 단호하고 분명해졌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4:7)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저와 여러분의 원함을 위해서 여호와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힘과 능력으로 다스리는 것은 이기적인 이권을 추구하는 세상 권력자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해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을 속이려고 여러 가지 기적과 이상한 일들을 할 것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내가 이렇게 미리 말해 둔다. 그러니 조심하여라.”(막13:21-23)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거짓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이미 삼십여 명이나 되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예언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4-25)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 알의 밀알처럼 기꺼이 자신을 부인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집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얼마든지 희생합니다. 헌신합니다. 병들고 타락한 자아와 세상 자랑을 추구하는 이들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깨달아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 곧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고 살아내신 거룩한 삶의 과정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소위 많이 가졌다는 자들은 이미 손에 쥔 떡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가질 수 없었던 이들은, 오히려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진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20:28)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을 따라서 살아야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아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영혼들을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대속적인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진정한 의미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유혹을 통해서도 실패한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려갔습니다. 천하만국과 영광을 펼쳐보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쾌락과 통치권의 실체를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세상 모든 영화Prosperity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여호와를 거역하는 죄악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은 교묘하게 뒤로 감췄습니다. 영광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 속으로 몰아넣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늘 영광과는 처음부터 비교조차도 될 수 없는, 굳이 하늘 영광과 비교해 본다면 누더기 정도에 불과한 세상 영광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탄은 죄를 제거하려고 하지 말라고 유혹했습니다. 세상 영광을 취하라고 유혹했습니다. 딱 한 가지, 자신 앞에 엎드려 경배하기만 하면 모두 다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빅딜Big Deal을 제안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세상에서, 평생 영광과는 거리가 먼 힘겨운 삶을 살아왔던 이들에게는 결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습니다. 한편, 사탄은 이 세상의 임금입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타락한 피조물입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해 주시는 지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권세를 실현實現할 수 있는 흑암의 세력입니다.
습관적으로 불법을 행하는 타락한 통치자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사탄이 주겠다고 약속한 선물은 여호와께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물을 간절히 사모하거나 받아 누리는 자는 사탄과 하나입니다. 공범입니다. 때가 이르면, 받아 누리던 모든 소유와 권리들은 물론 영광까지도 완벽하게 다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죄를 사주使嗾하고 여호와로부터 떠나게 만들었던 사탄과 함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야욕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랑하던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에 팔았던 유다가 마침내 자살로 삶을 끝낸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오히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붙잡으셨습니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타락한 세상에서 여호와 한 분만 경배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섬기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성도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본분이라는 사실을 삶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넘겼다.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넘겼다...힘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다 짓이겼다. 가뜩이나 기를 못 펴는 사람을 길에서 밀쳐냈다. 아비와 아들이 한 여자에게 드나들어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저당물로 잡은 겉옷을 제단들 옆에 펴놓고 그 위에 뒹굴었다. 벌금으로 받은 술을 저희의 신당에서 마셨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암2:6-8)라는 증거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을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죄 없는 무고한 사람을 잡아들였습니다. 짓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벌금을 물렸습니다.
벌금을 낼 힘이 없는 사람들은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은 신발 한 켤레 값 정도의 정말 작은 빚을 졌을 때도 용서 받지 못했습니다. 신 한 켤레 값에 팔렸습니다. 인권은 짓밟혔고 착취당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세상에서 소위 넘치도록 풍성하게 가졌다는 자들이, 온갖 정치 종교적인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자들이, 자신은 거룩하다며 시장 어귀를 거들먹거리며 걸어 다니던 자들이, 모든 호사를 빠짐없이 다 누리고 있었던 자들이 행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가난한 백성들의 머리에 있는 티끌까지 탐낼 정도로 탐욕스러웠습니다.
육두문자로만 이루어진 쌍욕을 거침없이 쏟아 부어도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기막힌 세상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당신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아니 당신이 곧 하나님 나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노에 매몰되지 않으셨습니다. 불안해하거나 절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당하는 손해는 잠깐 뿐이라는 사실을 붙잡으셨습니다. 잠깐 당하는 손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넘치도록 풍성하게 누리게 될 기업을 붙잡으셨습니다. 당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기꺼이 고난 당하셨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자의 편에 스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상황에서 어찌하여 가만히 있느냐고, 비록 성민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어떻게 더 나쁜 놈들을 통해 심판하실 수 있느냐고, 아무리 양보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벌이시느냐고 당신께 따져 묻는 선지자에게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b)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의인은 어떤 상황이 주어지게 된다 할지라도 반드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2:14)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이 임하는 날, 영원히 이어지리라고 확신했던 세상 모든 것들이 불탑니다. 지극히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너무나도 허무하게, 그야말로 완벽하게 사라집니다.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상황에서도 반드시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는 선을 이루십니다. 당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당신 한 분만으로 충만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흥을 이루어주십니다. 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여호와만 오롯이 드러나는 부흥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는”(합3:17) 상황에서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어야합니다. 없고, 없고, 없는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어야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거룩한 사명을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합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자들과 함께 하시고, 약한 자들이 수시로 느낄 수밖에 없는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공포와 두려움을 아시고, 약한 자들이 흘리는 눈물을 반드시 씻겨주실 여호와를 신뢰할 수 있어야합니다. 무엇보다 수시로 무너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멋들어지게 승리하도록 이끌어주시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이 겉으로는 지극히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불공정한 세상에서 성도가 반드시 가져야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반드시 보여 주어야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경쟁이 일상화된 타락한 세상에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의 편에 설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까지도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도구로 사용하시는 여호와 한 분만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뤄주시는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삶,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