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NIA”에 대해서 국어 사전은 “광기(狂氣)의 뜻으로, 어떤 한 가지 일에 열중하는 일, 또는 그러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에 깊이 빠져 버린 상태, 또는 사람이 MANIA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는 정말 여러 가지 종류의 MANIA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닥치는 대로 책을 모으는 Bibliomania, 병적인 도벽 증세를 말하는 Kleptomania, 골프라면 사족을 못쓰는 Golf mania, 비디오에 푹 빠져 사는 Video mania, 하루도 인터넷 없이는 살 수 없는 Internet mania, 심지어 일확천금을 꿈꾸는 Lotto mania까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밥 먹는 것이나 자신을 가꾸는 것보다 구두에 더 빠져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사진 찍는 것에 빠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동호회를 만들어 함께 출사를 다니기도 하고, 찍은 사진을 인터넷상에 올리기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에 빠진 MANIA입니까? “감자탕 교회 이야기”라는 책에는 “처녀 엄마 은주”라는 소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평범하게 직장에 다니던 한 자매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후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까 생각하던 자매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설에 들어가 8명의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이 자매가 봉사하는 것에 대해서 그녀의 담임목사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썼습니다.
“은주야, 너는 네 방에 있는 여덟 아이들의 엄마라고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서부터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어린 초등학생들이 은주를 엄마라고 부르는 건 그나마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지만 고등학생이 은주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건 왠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구나. 하지만 넌 벌써 네가 엄마라는 사실에 익숙해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네 딸들은 참 행복하겠구나. 너를 엄마로 맞았으니 말이다. 가끔은 네 딸들을 부여잡고 울기도 했겠지. 때론 힘에 겨워 잠시 다른 생각을 해 보기도 했겠지. 그러나 널 그곳에 보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넌 다시 맑은 눈을 깜박이며 웃고 일어났을 거야. 은주야, 난 네가 존경스럽단다. 네 또래의 다른 처녀 아이들에게 네가 하는 일을 하라고 하면 모두 기겁을 하고 달아날텐데. 넌 자원하여 그곳을 찾아갔으니 말이야. 아마 나에게 지금 네가 하는 일을 하라고 하면 나 역시 쉽게 할 수 없을 거야. 내가 너의 담임목사인 것이 자랑스럽고 기쁘구나....네가 가는 그 길이 사실은 네가 가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계신 예수가 가시는 길이란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이 자매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시설에 들어가 아이들을 돌보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쳤기 때문입니다. 곧 JESUS MANIA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미쳤다고 중상 모략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고후5:13a)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에게 미쳤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하나님께 비쳐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신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앞가슴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쳤습니다.”(I am crazy about Jesus)는 글을 붙이고 걸어갑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등에 있는 글을 보고는 이내 웃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의 등뒤에는 “그러면 당신은 무엇에 미쳐 있습니까?”(Then what are you crazy about?)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한가지에 미쳤다는 것은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쳤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전혀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가난도, 절망도, 슬픔도, 외로움도, 상실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부흥의 소망”을 가진 바울이 자신의 지나온 삶을 회상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있는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 역시 지금 자신을 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의 이단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습니다.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죽일 때에는 언제나 가 편에 투표했습니다. 회당에서는 강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저주하도록 하기 위해서 채찍질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외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까지 가게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미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가 굶주린 야수와 같은 얼굴을 하고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을 바로 그때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① 그의 삶은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상하게 하는 인생이요,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곤고한 인생이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 역시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삶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잘못된 자기 생각 때문에 스스로 가시 채를 발로 차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② 더 놀라운 것은 이제까지 자신이 그렇게 핍박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순간 그는 둔기로 맞은 듯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충성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7월 마지막 주에 “왜곡되고 변질된 증인”들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목사라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왜곡되고 변질된 증인입니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왜곡되고 변질된 증인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왜곡되고 변질된 증인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외면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왜곡되고 변질된 증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리스도인임을 잊지 않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선한 삶을 살았는데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죄 지은 것이 무엇이냐? 악한 것이 무엇이냐?”고 따질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상대적인 선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적극적인 선입니다. 당장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참 안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그 사람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에게만 투자할 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에게로 가지 못합니다. 나라와 민족, 열방 가운데 헐벗고 굶주린 영혼들에게 나가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들이야 어찌되었든 상관없이 자기 혼자 독야청청 선하고 깨끗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혼자 잘먹고 잘 삽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왜곡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이요, 하나님을 핍박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불의와 대적함으로, 상처받는 영혼들을 위로함으로,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줌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왜곡된 삶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왜 왜곡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느냐고 지적하면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왜곡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본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왜곡된 삶을 살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 돌아볼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임한 놀라운 소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③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사환과 증인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백한 대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일꾼으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친 예수 그리스도의 마니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에게 또 다른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영적인 부흥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 곧 부흥의 소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자신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이시라면, 세상 어느 누구라도 반드시 변화시키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다섯 번에 걸친 불의한 재판을 받으면서도 지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의연하고 당당하게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단의 괴수 같은 나까지도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사환과 증인 삼아주셨는데 하물며 당신들이겠습니까?”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에 미쳐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미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을 만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이후 전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9-21절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죽이고자 하였으나”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처럼, 복음을 증거 하는 것 역시 거역할 수 없는 사명이었습니다. 그가 만일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회개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랬습니다. 예수께서도 그러셨고, 초대교회의 사도들 역시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행실을 중지하고 나아가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옮겨가는 것으로 복음의 중요한 부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는 말씀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3:8)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와 구원은 그 열매로써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면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증거, 곧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를 잡아죽이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행21:27b-28절은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지금 심문 받는 자리에 서게 된 직접적인 죄목은 소위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바울은 그것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대신 자신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일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전을 더럽혔다는 추측에 의한 정죄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하나의 계기였을 뿐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배타적인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대인들은 구원의 복음은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렇게 혈안이 되어 바울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건져주셨습니다. 22-23절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 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 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그것은 또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시겠다”(행26:17)는 약속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외쳤던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핵심은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구원의 빛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성경과 전혀 위배되지 않는, 유대인들이 전혀 반대할 이유가 없는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과는 상관없이 자기 생각에 빠져 있었던 유대인들은 고난받는 종에 대해서 예언한 사53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영웅적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옛 유다 왕국의 영광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할 지상적이면서도 정치적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들은 메시아가 이방 세계를 포함한 온 인류의 빛이 되실 것이라고 예언한 사42:1-7, 49:6, 60:3 등의 말씀 역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는 오직 선민인 자신들만을 위한 메시아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복음을 전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에 미쳐 있었던 그들은 그들대로 바울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미쳐있었던 바울은 바울대로 목숨을 걸고 성경적인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위험과 죽을 고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위경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바울에게는 로마까지 가야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합니다. 미쳐야 합니다. 그렇다고 주어진 일을 게을리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밥 먹는 이유, 사랑하는 이유, 참고 견디는 이유, 가정과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명을 다하기까지 함께 하시며 지켜주실 것입니다. 위기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명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들은 베스도의 반응은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그는 바울이 미쳤다고 소리쳤습니다. 24절입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이미 살펴본 대로 베스도는 정직했습니다.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 교만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그립바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할 때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우상숭배에 관한 이야기뿐, 범죄가 성립될 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말을 통해서 그가 어떤 가치관의 소유자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바울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다투고 있는 문제는 “귀신숭배와 같은 미신 짓거리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정직한 관리였지만 교만했던 그에게 생명의 복음은 귀신 놀음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권력과 명예와는 전혀 상관없는 귀신 놀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의 핵심을 증거하고 있는 바울에게 미쳤다고 소리까지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미쳤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두 가지 형태로 쓰이고 있는데 앞의 것은 “마이노마이”(mah'eenomahee)이고, 뒤의 것은 “마니아”(manee'ah)입니다. 그리고 두 단어 모두 “마오”(mao)에서 파생된 말로 “광인처럼 미친 듯이 날뛰다, 자신을 잃어버리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MANIA”란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베스도는 한마디로 바울을 정신나간 사람 정도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도무지 가치 없는 일에 생명을 걸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학문을 도무지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그에게 있어서 바울의 행위는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소명에 대한 철저한 헌신은 바울로 하여금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10:20절은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도 생전에 미쳤다는 말을 들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소리 듣는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자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신이 나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미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을 미쳤다고 치부해버린 베스도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25절입니다.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여기서 “정신차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솝흐로쉬네”(sofrosoo'nay)는 “마음의 건전함, 제정신, 사리를 분별하는 마음”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지극히 정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으로 돌리는 베스도의 비난에 대해 바울은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진술했던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확신에 찬 말과 논리적인 변증, 신앙고백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베스도에게는 미친 짓이요,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야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간증이나 하면서 전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말처럼 온전한 정신으로 바른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스도가 더 이상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은 바울은 다시 아그립바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26-28절입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은 유대 땅의 어느 한쪽 구석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인근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4:23-25절은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역사에 밝은 아그립바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울의 간증을 통해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가 종교적인 갈등 때문이라는 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베스도가 아그립바를 위해 청문회를 연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아그립바 만큼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그립바 왕을 향해 선지자들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지자들의 말을 믿는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 또한 믿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상당히 애매한 말로 바울의 전도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학자들 가운데는 아그립바의 말이 간접적인 긍정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만일 아그립바가 긍정의 뜻을 확실히 표현했다면 바울을 미친 자로 생각한 베스도의 말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전격적으로 부정했다면 유대인들의 눈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리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아그립바 역시 정치적인 판단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말에 크게 동조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 미지근한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했습니다. 29절입니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과 행동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그립바를 위해 준비된 청문회에는 가이사랴의 거의 모든 고관대작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반면 그들 앞에 서 있는 바울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손에는 사슬까지 매여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 앞에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권세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본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노사도의 모습에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국 청문회 역시 바울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30-32절입니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 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바울에게서 사형이나 결박할 만한 일이 없다고 판단한 왕과 총독과 베니게 등,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관리들은 한결같이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더라면 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더 바울을 죽이려던 유대인들의 고소가 잘못되었음에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죄명도 없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로마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는 오늘까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당한 바울이 이후 유대인과 천부장 루시아,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 그리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 받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그 동안 유대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공회와 총독과 왕 등 세상의 권세자들 앞에서 무려 다섯 차례나 되는 공식적인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홀로 외롭게 투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도 위축되거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몸이든 쇠사슬에 매인 몸이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들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자앞에서는 낮은 자 앞에서 변함없는 자세로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부활의 증인으로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구원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주어진 사명에 충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MANIA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는 서로 다른 여러 명의 MANIA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여러 차례 살펴본 것처럼 베스도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는 MANIA였습니다. 아그립바는 로마정부에 붙어 권세를 추구하는 MANIA였습니다. 아그립바의 여동생 버니게는 권력과 정욕을 추구하는 MANIA였습니다.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고관대작들 역시 권력의 맛에 흠뻑 취한 MANIA들이었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은 형식과 의식과 자신들의 생각을 추구하는 MANIA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에 미친 MANIA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푹 빠져,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JESUS CHRIST MANIA”가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