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종착역 에서
해가 뜨기전의 동녁의 여명은 돌아올 앞날에 희망을 준다. 황혼의 저녁 노을은 서쪽 하늘 구름속에 아름다운 수를 놓으며 하루를 접으며 사라진다. 지는 해는 내일 아침 또 다시 떠 오르지만 인생의 황혼은 오직 한번 만의 삶을 세상에 아름답게 남기고 영영 돌아 올수 없는 먼곳으로 향한다. 그곳이 어느곳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어언 내가 살아온 삶이 한 세상을 접게 되고 또 나와 남편이 부부라는 인연으로 살아 온지 60년이다.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 황혼의 삶이라고 생각해 본다. 신혼기는 즐겁고 신나는 삶이지만 가난했기에 만족지 못했고 다음은 자식들 뒷 바라지와 젊음의 삶터에서 생존 경쟁을 하며 살아가는 삶, 모든것을 마무리 하고 보니 어느듯 해는 서산에 걸려 있다. 황혼의 삶은 누구를 위한 삶도 아니고 누구를 책임져야할 삶도 아닌, 나만의 삶이다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추억으로 사는 삶이 황혼의 삶이 아닐까! 부부가 한 세상 함께 살면서 50년이 되는 해를 금혼, 60년 이면 회혼 이라고 한다. 세월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강산이 6번 바뀐 오늘, 아름다웠던 그 날을 생각 해 본다.
그날 아침은 포근 하였다. 눈이 올것 같다. 아침 일찍 미장원으로 향했다. 한번도 화장을 해 보지 않았는데 생전 처음 화장을 해 보는 날이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화장을 ‘신부화장’ 으로 했다. 거울을 보니 내가 아닌 것 같은 낯 설은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참 예뻐 보였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신부 가 자꾸 눈물을 흘리시니, 화장이 지워져요. 오늘 같은날 왜 자꾸 우세요?”
‘내가 왜 자꾸 우는지 모를것이다.’
힘들었던 세월이 가슴을 메이게 하는 눈물이었다.
‘열살때 돌아가신 아버지! 힘들었던 고학 시절! 연애시절의 갈등, 모든것이 뒤엉켜지며 마음속에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와의 만남은 대학 일학년때 모든것이 새로 시작 되는 화창한 봄날, 아주 착해 보이는 그를 성당에서 만났다. 그 사람은 늘 홀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1.4후퇴에 전쟁으로 인해 어머니와 작은 형을 적 치하에서 잃고 피난으로 남하 하여 서울에 계신 형님을 찾았다.
여동생 하나는 3일간만 남자들만 피난을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여동생은 이북에 홀로 남겨 두고 왔다고 했다. 남으로 내려와 다시 만나게 된, 단 한 분인 형님은 카톨릭 신부님 이였기에 둘은 4년여를 몰래한 사랑이었다. 처음에는 친구로 지냈고 친구는 연인이 되어 사랑하게 되었지만 마음의 갈등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아 갈수 있다는 용기와 사랑으로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을 했다.
흰 한복에 흰 고무신, 흰 안개꽃의 화환, 순백의 긴 면사포를 쓰고 성당으로 향했다.혼배 미사가 시작되고…
주례신부는 형님 신부님
미사 집전을 돕는 소년 복사는
오늘의 주인공 신부의 막내 동생
신랑은 주례 신부님의 동생 결혼 예물은 신랑은 만년필 하나, 신부는 결혼 반지로 은으로 만든 실 반지 하나 이렇게 우리는 미사 예식도 가족끼리의 집례였다.
“유베날은 신부 아나스타시아를 늙거나 병들거나 어떻한 고난이 있더라고 죽음이 갈라 놓을 때 까지 당신의 아내로 맞기를 원합니까?” “네”
“아나스타시아는 신랑 유베날을 늙거나 병들거나 어떻한 고난이 있더라도 죽음이 갈라 놓을 때 까지 당신의 남편으로 맞기를 원합니까?” “네”
“하늘에서 맺은것을 사람이 풀지 못하느니라” 혼인 서약을 마치고 혼례미사가 집전 되었다.
성당 안은 성탄 다음날이니 크리스마스 추리와 사방에서 반짝거리는 화려한 불 빛으로 새로 탄생하는 부부를 축복해 주었다. 가난한 학생 부부는 신혼 여행이란것도 가지 못하고, 시내 자그만한 호텔에서 첫날을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하얀 눈이 소복히 내려 있었다. 온세상이 은백색의 하얀 눈으로 덮혀져 깨끗한 세상이 되어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결혼하는날, 눈이 오면 행복하게 잘 산다’는 말이 생각나 희망으로 가득한 아침이었다.
젊은 신혼 부부는 짚차 추레라에 장농 하나, 화장대 하나 싣고 청파동 언덕 적산 가옥 방 한 칸을 빌려 셋방 살이 로 새로운 삶을 시작 하였다. 신혼시절 힘들때면 늘 부르던 노래가 있다.
“한송이 순정의 꽃 뉘에게 바치리까
마음의 창문을 내 앞에 열어주고
술잔을 높이 들어 인생을 노래하니
이 밤은 즐거우리 인생도 즐거우리
나의 사랑, 나의 행복
어떻한 가시밭 길에도 행복은 있으리라
나의 사랑, 나의 행복,
어떻한 가시밭 길에도 행복은 있으리라.
이 노래는 젊은 시절 늘 함께 불렀던 노래였다.
청파동에서 이렇게 시작한 신혼 생활은 4.19가 난후 신당동으로 이사를 했다.
약학대학을 졸업한 남편은 다른곳에 직장을 갖지 않고 처음 출발을 개업을 하기로 했다.자금이 문제였다. 24살의 새 색씨는 주한 미국 경제 협조처 (AID의 전신 USOM) 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퍼머도 하지 않고, 생머리 핀으로 꼽고, 생활 전선에서 검약과 절약을 해 가며, 당시에 유행 했던 “계 (契)”를 모아 자금 마련을 했다.
눈꼽만한 자금으로 시작한 약국은 약이 없어서 제일 값싼 약을 일렬 횡대로 진열을 하고 시작하였다. 비싼 약은 다 갖추지도 못하고, 이렇게 우리는 터전을 일구어 갔다. 한창 모양과 멋을 낼수 있었던 나이인데, 나에게는 그런 세월은 없었다. 약국 자본을 갚아가야 하기에 월급 조차도 내 손에는 남을수가 없었다.
그해 첫딸을 얻었다. 누구나 자기 아이는 다 예쁘겠지만, 우리에게는 참으로 예쁜 딸이었다. 딸이 태어나고 또 아들이 태어나고, 2남 2녀 4남매를 그곳에서 얻었다. 하느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 약국과 아이들은 하루 하루 커 갔다. 가장 행복한 세월이었다. 1968년 약국은 서울의 중심지 소공동 조선 호텔앞으로 이전을 했다.
약국도 번창하고 살림은 늘어갔다. 저녁이면 남편과 만나 연애시절, 신혼시절 넉넉지 못했던 즐거운 데이트도 했다. 저녁에는 둘이 친구가 되어 멋지게 한잔하고, 어깨 동무 하고 걸으며 옛날 신혼 때 부르던 “황태자의 첫사랑과” “비들기 처럼 다정한 사람들 이라면 이란 노래를 즐겨 불렀다.
어느 해 속리산에 갔었다. 산속에 해는 빨리 진다는 것을 몰랐던 우리는 캄캄한 산속을 아이들이 무서워 하는 것 잊게 하기 위해 네 아이들 손을 잡고 노래를 함께 부르며 내려 왔다. 그리고 세월은 갔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그리고 잘 자라 주어 4아이들은 모두 중학교, 고등학교 에 진학을 하게 되었을 때, 넓은 세상,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를 시키고 싶은 마음의 욕심으로 무조건 젊음만을 믿고 1978년 미국으로 이민을 택했다. 두 번 째 생의 도전이었다.
의지 할 곳 없는 넓은 땅에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이민생활의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은 내 생애의 용감한 도전 이었다. 4남매 우리 아이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힘든 이민 생활로 유학을 시킨 것 이었다. 힘든 세월 아이들이 잘 자라주는 고마운 마음은 내 생의 보람이었다. 학교를 다 마치기 까지는 12년이 걸렸다.
이민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힘든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었고 또 아이들은 자기의 의사와 상관 없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온 힘든 미국 생활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잘 적응 해 주어, 기쁨을 안겨 주었다. 내 생애에, 이민 생활 12년은 나의 삶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회 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을 해 보아도 잘 선택을 했다고 생각 한다. 여기 까지가 아이들을 위한 삶이었다. 이제는 나와 남편을 위한 삶을 살 것이다.
남편과 둘은 마음을 정하고 둘은 귀국하기로 결정을 했다.
세번째의 삶, 12년을 미국에서 살다가 역 이민을 하여 고국으로 귀향을 하였다. 남편의 사업은 번창 하였다. 다시 시작한 새 삶의 세월은 빠르게 지나갔다. 좋은 세월은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일까? 그리고 한국에서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사업 장소를 옮겨야 할 문제가 생겼다. 다시 다른 곳으로 옯겨 야 하기에는 힘든 나이가 되었다. 70이 되는 나이이니 은퇴할 나이 이다. 우리는 남은 세월은 우리 둘만을 위한 삶을 살자고 했다일을 접었다. 편안한 노후를 즐기며 살자고 약속을 했다. 은퇴 후, 아이들이 살고 있는 미국을 방문 하였다. 아이들은 모두 자리 잡고 잘 살고 있었다.
은퇴 후, 다시 들어와 본, 미국은 젊은 시절 고생하던 미국과는 달라 보인다. 모든것이 평화롭고, 공기 좋고, 처음 이민 생활을 하던 곳은 미국 동부 피트버그였다. 그곳에선 한국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모두가 백인 인 동네였다.
그런데 이곳 LA는 모두가 한국 사람이다. 그냥 고향 인 것 같았다. 더구나 이곳에서 남편의 동기 동창들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 간다는 말은 들은 친구들은 이곳에서 함께 살자고 했다. 젊어서 힘 들었지만, 은퇴 후의 삶은 정말 좋은 곳으로 생각이 되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나이 탓이었을까? 아니면 세 자녀가 이곳에 살고 있으니, 마음으로 의지가 될 것 이라고 생각해서 일까? 한번 더 살아 보자고, 다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네번째 다시 시작한 삶이 이곳이 되었다. 마음이 평화로운 이곳의 삶, 각자의 취미를 갖고 살고 있다. 어려서부터 글 쓰기를 좋아 했던 나는 남편이 없는 시간에는 틈틈이 글을 썼다. 좋아하는 글을 쓰며 산다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신문사에 보낸 원고는 오피니언 난에 실렸다. 황혼의 나이에 찾아 온 행복의 시간이다. “비가 내리던 부활절 아침” 이란 글로 칠순 나이에 2007년 중앙일보 신인 문학상 으로 수필가로 등단 했고, 엣세이집도 출판 했다. 세월은 빠르다지만 50년을 함께한 세월은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그 후, 또 세월은 흘렀다.
금혼도 지나고 이제 금년이 회혼의 해 이다. 회혼을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은총과 축복의 삶이다. 아직 까지 건강한 몸 주시고, 건강한 남편과 함께 회혼을 맞는 이 행복을 무엇으로 대신 할수 있을까! 잘 자라준 손주 들 까지 미국땅에 함께 살고 있으니, 신이 주신 특별한 보석의 선물 이다.
회혼의 해를 맞으며 둘만의 철학을 말한다. 주어진 자기의 몫을 최선을 다해 노력 한다면 어떤 역경에서도 길은 있다. 두드리면 열어지는 문은 있다. 두드리는 문은 열리게 되고 문이 열리면 그곳에 은총과 축복이 있다. 은총과 축복이 가득한 그곳을 향해 열심이 산다면 그것이 보람된 삶이 아닐까! 60년을 함께 살아온 삶, 이제 황혼의 종착역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황혼의 노을은 서산에 물 들고, 이제 함께 할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마지막 해가 떨어질때 까지 우리는 함께 이 노래를 부르리라…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동산 수풀은 우거지고 매기 머리는 백발이 다 되었네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