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5 반야암 가족법회 지안큰스님 법문
지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법회가 열리고 있어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비가 오는 것이 반갑습니다.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비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오래 되었는데 오늘 비가 흡족하게 내려주었으면 싶습니다. <法性偈(법성게)>에 ‘雨寶益生滿虛空(우보익생만허공)’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法雨(법우)가 쏟아져 내리는데 그 法雨(법우)는 중생을 이롭게 합니다. 지금 내리는 비가 산천초목을 이롭게 하고 농사 짓는 사람들의 농사에도 도움이 되는 이롭게 하는 비입니다. 물론 재해가 나는 경우도 있고 해를 입는 경우도 있으나 오늘 내리는 비는 단비처럼 고마운 비입니다. 이 비를 통해 우리가 부처님의 法雨(법우)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신심을 다져보는 기회를 삼을 수도 있겠습니다.
불교에서 널리 쓰이는 말 중에 ‘家常道理(가상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일상생활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속에 도(道) 즉 진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침이 되면 식사를 하고,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출근을 하고, 오늘 일요법회를 위해부산에서, 창원에서, 또는 서울에서 반야암까지 오시고.. 이러한 일상생활 속의 생활 단면 하나하나를 家常道理(가상도리)’라고 합니다. 家常道理(가상도리)가 부처님 법입니다. 『金剛剛(금강경)』은 바로 이 家常道理(가상도리)에서 시작됩니다. 『金剛經(금강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성 안으로 托鉢(탁발)을 하시러 들어가십니다. 밥을 빌리러 들어가시어 托鉢(탁발)을 하시고 기원정사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하시고 난 뒤, 발을 씻고 자리를 깔고 앉으십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늘 하시던 생활 모습입니다. 평소에 늘 하시던 생활 모습을 보고 수보리가 감탄을 하면서 질문을 합니다. “希有世尊(희유세존)”, 즉 참으로 기특하고도 미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별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으셨음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希有世尊(희유세존)”에 이어서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어쩌면 그렇게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고 부촉하십니까”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을 설명할 때, 家常道理(가상도리)를 밝힌 내용들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나의 일상생활 속에 진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고, 나의 삶의 여러 모습 속에 의미가 그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불교는 家常道理(가상도리)를 알아서 그것을 통해 부처님 법을 알아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일을 ‘인연 따라 이루어 지는 일’이라 하지 않습니까?
인연이라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우리 주위에 나타나는 현실적인 조건도 인연에 속합니다. 이 인연이 나에게 편리하게 또는 이롭게 나타나면 좋은데 때로는 불편하기도 하고 해롭게도 나타납니다. 조건의 상태를 가지고 우리가 ‘좋다’, ‘나쁘다’라고 구별짓지만 인연은 隨順(수순)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가장 간명하게 설하는 말에 두 가지 용어가 있는데 하나는 변하는 않는다는 不變(불변)과, 변하지 않는 것이 변하지 않는 상태로만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따른다고 하여 隨緣(수연)이 또 다른 하나입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는 『節要(절요)』라는 책을 지어서 不變(불변)과 隨緣(수연)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불교 대의를 밝혀 놓았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일상생활을 영위해 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으나 불교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지금 소개하는 不變(불변)과 隨緣(수연)을 생각해야 합니다. 不變(불변) -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사람이라는 신분은 변할 수 없는 것, 이것이 不變(불변)입니다. 성장하면서 나이가 들면서 아이가 청년이 되었다가 중년에서 다시 노년이 되는 것이 隨緣(수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 두 가지 면에서 관찰하라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하루하루를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하여 말할 때 과거·현재·미래에 똑같은 나이지만 그러나 어제 한 일이 다르고, 오늘 하는 일이 다르고, 내일 하는 일이 다를 겁니다. 이 세상 모든 이치가 不變(불변)과 隨緣(수연)으로 설명됩니다. 변하지 않는 不變(불변)은 體(체)로서 本體(본체)요, 實體(실체)이고, 인연을 따른다는 隨緣(수연)은 用(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法性偈(법성게)>에도 ‘不守自性隨緣成(불수자성수연성)’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물을 예로 들면 물이라는 성질 자체는 不變(불변)이지만, 물은 액체와 고체, 그리고 기체로 隨緣(수연)하여 변하게 됩니다. 빗물 같은 것은 액체요, 얼어서 얼음이 되면 고체요, 끓여서 수증기가 되면 기체로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근본, 즉 변하지 않는 體(체)가 인연 따라(隨緣) 변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不變(불변)과 隨緣(수연)이 들어있습니다. 마음에 들어있는 것이 바깥 경계에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에 없는 것은 외부 경계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 이치를 『華嚴經(화엄경)』에는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라 하였습니다. 사람 개개인의 실체의 모습, 얼굴 등이 다 특징이 있고 사람 나름대로의 지식, 기술 등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實體(실체)에 들어가면 똑같습니다. 實體(실체), 體(체)는 똑같습니다. 用(용), 즉 隨緣(수연)하는 쪽에서 좋다느니 안좋다느니 분별을 하여 번뇌를 야기시킵니다.
寒山詩(한산시) 중에 이런 시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平生何所憂(평생하소우) 평생 무슨 걱정 그리도 많은가?
此世隨緣過(차세수연과) 한세상 인연 따라 살면 되는 거지
日月如逝川(일월여서천) 시간은 냇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고
光陰石中火(광음석중화) 세월은 돌이 부딪치는 불꽃 같은 것
任你天地移(임니천지이) 천지야 변하면 변하는 대로 맡겨 두고
我暢巖中坐(아창암중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위 속에 앉아 있다네
사는 게 별 거 아니다, 인연 따라 살면 그만이다 라는 말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것이 上首(상수 – 수가 높은 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달관하고 살라는 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의미를 달관하여 살려는 노력보다는 현실적 조건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근심과 걱정을 만들어 가며 살아갑니다. 본래 이 세상이란 조건이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구름처럼 덧없는 것이지요.
요즘도 사주를 보는 일 - 易學(역학)이라고도 하는 – 일을 하지만 옛날에 자신의 일생의 운수를 알아보기 위해 ‘觀相(관상)’을 보았습니다. 觀相(관상)은 얼굴로써 봅니다. 『백범일지』에 보면 백범 김구선생도 觀相(관상)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觀相不如手相(관상불여수상), 手相不如足相(수상불여족상) - 즉, 관상이 손금 보다 못하고, 손금 모습이 발의 모습 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足相(족상)을 잘 보지 않습니다만 인도의 바라나시에는 ‘Foot Print’라는 간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足相(족상)을 보는 곳 같았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足相不如心相(족상불여심상) - 발의 모습이 심상(마음의 모습) 보다 못하다 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손금이니 발금이니 해도 마음의 심리상태(心相)를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心相((심상)은 심리상태로 그 사람 마음에 어떤 감정, feeling이 들어있느냐는 것입니다. 觀相不如手相(관상불여수상), 手相不如足相(수상불여족상), 足相不如心相(족상불여심상) - 즉, 관상이 손금 보다 못하고, 손금 모습이 발의 모습 보다 못하고, 발의 모습이 심상(마음의 모습) 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불교 공부를 하는 경우에는 그 뒤에 말 한 구절을 더 붙여서 心相不如無心(심상불여무심)이라고 합니다. 心相(심상)은 심리상태가 나타나는 것으로 범부의 경우에는 모두 번뇌가 됩니다. 心相(심상)이 無心(무심)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순수한 마음이 無心(무심)입니다. 無心(무심)을 간혹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水面(수면)에 파도가 일어나지 않고 고요하여 거울처럼 되어있는 상태가 無心(무심)입니다. 우리 절에 와서 발원을 하거나 소원을 빌 때는 無心(무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순수해지는 것입니다. 이 순수해지는 마음 - 無心(무심)일 때 좋은 인연을 불러오는 것이고, 복을 불러오는 것이고, 공덕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無心(무심)은 자기 자신의 본래 순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어있는 마음으로 비어있는 마음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습니다. 불교 사상 중에 如來藏思想(여래장사상)이라 하여 여래가 안에 들어있다는 것인데 어머니가 처음 아기를 잉태하면 뱃속에 태아로 있듯이 중생이 누구나 여래의 태아를 자기 몸 속에 지니고 있다는 뜻이 如來藏思想(여래장사상)입니다. 如來藏(여래장)이란 모든 선근 공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복을 가지고 나오는데 망상을 많이 가지면 자기 복이 충돌하게 됩니다. 업장에 의해 공덕이 엄폐되어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복을 누릴 수 있음에도 마음, 즉 心相(심상)이 잘못되면 복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은 업장에 의해 공덕이 드러나지 못합니다. 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은 心相(심상)이 좋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 공부가 心相(심상)을 잘 관리하는 것이므로 마음 잘 쓰는 것이 최고입니다. 학문의 궁극적 목적이 진리를 위한 것인데 종교의 궁극적 목적도 진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 말이 思辨的 (사변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으나 진리를 위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 순수한 마음을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본래 순수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主客(주객)이 상대하는 경계에서 말할 때에는 마음 잘 쓰는 것이 진리입니다. 불교에서는 마음 밖에 볼 것이 없다고 하는데 마음 잘못 쓰는 것을 진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범부의 입장에서 자신의 마음을 잘 쓰기가 어렵지만 마음 잘 쓰는 것이 도이고 진리이고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것이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절실하게 느끼면 무엇인가 큰 울림이 옵니다.
지인 중 담배를 좋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 내 방에서 담배를 피우려 하기에 피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인이 몇 년 후 찾아왔는데 담배를 끊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지인이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했는데 교통사고 당한 사람의 두개골이 깨져있는데 그 속에 니코틴이 묻어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끊어졌노라고 하였습니다. 충격적인 목격이나 경험을 통해 자기 자신을 고칠 수 있습니다. ‘家常道理(가상도리)’속에서 간절하게 느끼면 자신의 의식을 변화시킵니다. 사고방식도 새롭게 고칠 수 있게 됩니다.
‘家常道理(가상도리)’속에서 간절하고 절실하게 자신의 마음 속에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공부가 진척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소견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를 통해 자신의 사고 영역을 넓히도록 해야 겠습니다.
사람은 보는 것 만큼 열려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시야를 넓혀서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가령 시각장애인은 눈이 어두워서 잘 볼 수가 없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熱河日記(열하일기)』 속에 우스운 우화 한 토막이 나옵니다. 눈이 먼 시각장애인이 지팡이 끝을 의지하여 자기 집을 나와 꽤 먼 길을 갔습니다. 눈이 멀어도 특이한 감각으로 지팡이로 더듬어 천천히 길을 가는 수가 있었습니다. 먼 곳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변이 생겨서 시각장애인의 눈이 번쩍 떠져 버린 것입니다. 이젠 정상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떠진 시각장애인이 어리둥절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팡이 끝으로 더듬어 올 때는 올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길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시각장애인 처럼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자신의 생각을 잘 먹어서 心相(심상)을 좋게 해야 합니다. 心相(심상)이 좋아지면 無心(무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꽃들은 전부 반야암에 피어있던 꽃들입니다)
첫댓글 _((()))_ _((()))_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열정적이십니다.
서울에서 내려오셔서 ... 법문까지 이렇게 글로 적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자연은 언제나 열려있지요
마음이 있는 자 마음을 내는 자는 보고 느끼고 행복을 불러오지요
꽃들도 어김없이 때가 되면 피고
수많은 다양한 꽃들이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마음을 내면 얼마든지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기쁩니다.
천국 극락과 같은 세상
감사 감사하며 살아야지요
어떻게 왔나요?
인연따라 업으로 원으로 ?
시작도 없는 시간과 무한의 공간속에서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줄은 알아야 하는데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
무심
무심으로 일하고
무심으로 살고
무심으로 오고 가야하지요
어떤 목적도 없이
어떤 이기심도 없이
어떤 원망 미련 한도 없이
어떤 인위적이지도 않게
그대로 하는 것이다.
절에 가는 것도
일상 생활도
사람 만나는 것도
어떤 일을 하는 것도
돈을 위해
더 가지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더 자기를 돋보이기 위해
더 성공하기 위해
더 권력을 가지기 위해
더 자기에게 유리하기 위해
더 ...
이런 것들은 내려놓고
어떤 티끌도 번뇌 욕심도 없이
아가 없게
진실되고 참되게
순수하게 정의롭게
올바르고 따뜻하게 오직 보리심으로 이타행을 하는
정성스러운 댓글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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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감로수를 흠뻑 맞았습니다.
늘 노고에 깊이 감사드려요.
불변과 수연의 이치,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것이 上首(상수 – 수가 높은 사람)의 삶,
인생을 달관하고 살라는 간곡한 말씀을 깊이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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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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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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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