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근현대사 속 홀로코스트(Holocaust)
2차 대전 때 1100만명, 난징에서도 대규모 학살당했죠
입력 : 2023.05.03 03:30 조선일보
근현대사 속 홀로코스트
▲ 지난달 18일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철길 위에 추모객들이 추모의 마음을 담은 쪽지를 올려놓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지난달 19일(현지 시각)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게토 봉기(유대인들이 수용소 강제 이송에 반대하며 일으킨 봉기) 80년 추모 행사'가 열렸어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가슴에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 장식을 달고 참석했어요. 그는 "독일인이 저지른 범죄에 용서를 구한다"며 과거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사죄했습니다. 사흘 뒤인 22일은 작센하우젠 수용소 해방 78주년이었어요. 작센하우젠 수용소는 독일 내 가장 큰 규모 수용소로, 일부 학자들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보다 더 잔혹했던 장소'라고 평가하기도 한답니다. 2차 세계 대전(1939~1945) 당시 독일에서 일어난 유대인 탄압을 '홀로코스트'라고 부릅니다. 홀로코스트는 어떤 현상일까요?
'유대인 탄압' 대명사 된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희생 제물을 완전히 불태운 제사'를 의미합니다. 원래는 대학살 행위를 총칭하는 단어예요. 고유명사(the Holocaust)로 쓰이면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나치 세력이 유대인을 학살한 행위를 뜻하지요.
대대적인 유대인 탄압은 1933년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시작됐어요. 1918년 독일이 1차 세계 대전(1914~1918)에서 패배한 후 우익 극단주의자들은 패배 원인을 유대인 탓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악덕 자본주의자이자 혁명으로 세계를 혼란하게 할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지요. 당시 독일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의 무능, 대공황과 함께 닥쳐온 경제적 어려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등 때문에 나치의 반유대주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어요.
나치는 '아리안(게르만)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독일 아리안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했어요. 그리고 유대인이 가장 열등하며 독일인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민족이라고 주장했어요. 나치는 반유대주의를 제도화하며 경제·정치·사회·문화 생활에서 유대인을 배제하기 시작했어요. 1933년에는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을 시작했고, 1935년에는 유대인의 공무원 임용, 유대인과 비(非)유대인의 결혼 등을 금지하는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을 제정했지요.
'수정의 밤'과 작센하우젠 수용소
1938년 나치 정권은 유대인을 대대적으로 수용소에 가두기 시작합니다. 당시 독일은 폴란드계 유대인을 강제 추방하고 있었어요. 1938년 11월 7일 프랑스에 있던 폴란드계 유대인 헤르셸 그린슈판은 자신의 부모님이 추방당했다는 편지를 읽고 분노해 파리에 체류 중이던 독일 대사관 직원을 암살했어요. 나치 간부 괴벨스는 이 사건을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분노를 부추기는 데 이용하죠. 11월 9일 밤부터 이틀 동안 나치 당원들은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해요. 이 사건을 '수정의 밤(Crystal Night)'이라고 부릅니다. 유대교 회당, 집, 상점이 파괴되면서 거리에 흩어진 유리 파편이 수정 같다고 붙여진 명칭입니다. 곧이어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나치 지도자들은 '유대인 대학살'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베를린 북쪽 오라니엔부르크 근처 작센하우젠 수용소는 1936년에 생겨 1945년까지 운영된 정치범 수용소예요. '수정의 밤' 때 유대인 수천 명이 베를린·함부르크·메클렌부르크 등지에서 끌려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어요. 유대인 외에도 소련·폴란드 등의 전쟁 포로, 반나치주의자도 수감됐어요. 3m 높이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교도관과 개들이 지키고 있어 탈옥은 불가능했어요. 약 40국에서 온 20만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수용됐어요. 이 중 약 10만명이 질병·영양실조·처형·강제노역·생체실험 등으로 목숨을 잃었죠. 1942년부터 이곳 일부 유대인 수감자들은 독일의 정보 작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 등 외국 통화를 위조하는 베른하르트 작전(Operation Bernhard)에도 동원됐답니다. 1945년 4월 소련군이 이곳을 해방하면서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비극은 막을 내립니다.
2005년 유엔총회 결의안에서는 1월 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1945년 1월 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킨 날을 기념한 거죠. 홀로코스트 희생자는 폴란드인, 소련인, 전쟁 포로 등을 포함해 약 1100만명이고 이 중 약 600만명이 유대인으로 추정돼요.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프랑스 등에도 있어요.
또 다른 홀로코스트, 난징 대학살
2차 세계 대전 직전 동아시아에서도 대학살이 벌어졌어요. 1937년 말 중국에서 일어난 '난징 대학살'입니다. 1937년 7월 일본의 선제 공격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는데요. 일본은 그해 11월 상하이를 점령하고 곧 중국 국민정부 수도 난징까지 침략합니다. 국민정부는 난징을 떠나 충칭으로 피신했으나, 군대 15만명은 끝까지 일본군에 저항하며 맞서요.
1937년 12월부터 6주 동안 일본군은 난징의 건물을 파괴하고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수십만 명을 잔인하게 학살했어요. 가족 전체가 살해당하고,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처형 대상이 됐지요. 당시 중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온 예수회 신부 로베르 자퀴노는 서방 국가 공관을 중심으로 안전 구역(Safety Zone)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이후 난징에는 일본의 꼭두각시 정부가 수립됐고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난징을 점령했습니다. 난징은 폐허가 됐고 도시를 복구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지요.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 수 없지만, 약 6주 동안 일본군에 살해된 중국인이 20만~3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 1941년 독일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 중인 유대인들의 모습. /위키피디아
▲ 지난달 18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아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묵념 중인 방문객들. /로이터 연합뉴스
▲ 중국 난징 대학살 기념관의 모습. /전기병 기자
▲ 중국 난징 대학살 기념관의 모습. /안용현 기자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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