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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다윗 Ⅸ (삼상 23:15-28)
영적적용 : 성결
요약
십 황무지 수풀은 기도를, 요나단은 성령으로 강한 새 의지를, 다윗을 색출하는 십 사람들은 인간의 본질을 밝혀 내는 말씀과 연단의 환경을, 사력을 다해 사울을 피하는 다윗은 죄를 씻는 성화적인 회개를, 블렛셋 침공으로 사울의 추적이 그침은 육체의 가시를 통한 하나님의 안전장치를 각각 예표한다.
설명
다윗은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살아났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육적인 것을 분리 받고 신령한 성도가 될 수 있는지 발견한다.
1. 기도로서 십자가 아래 나아가라.
15절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1) 황무지 -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 특수한 환경이다.
2) 수풀 - 기도의 동산 겟세마네를 연상시킨다.
2. 성령으로 새 의지가 나타나야 한다.
16-18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1) 요나단 - 새 의지의 예표이다.
2) 힘있게 - 원문에 '하자크'로서 '손을 강하게 하다'는 뜻이요, '손'의 히브리어 '야드'는 '능력, 권세'의 뜻이다. 즉 새 의지는 성령으로 나타난다.
3. 죄악의 정체를 샅샅이 드러내 주신다.
19-23절 "때에 십 사람들이 ‥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1) 십 사람들 - 인간의 본질을 밝혀 내는 말씀(율법)과 연단의 환경이다.
2) 믿었던 자들 - 인간의 의조차 처리되어야 한다.
4. 회개하므로 죄를 씻어 처리하라.
24-26절 "사울이 산 이편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편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1) 밝혀지는 다윗 은신처와 사력을 다해 피함 - 성화적 회개의 예표이다.
2) 십의 자기 발견과 요나단의 새 의지가 이루어 낸 합작품이 성화의 원리이다.
5. 하나님의 섭리적인 안전장치가 있다.
27절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1) 블레셋의 사울나라 침공 - 육체에 고통인 사단의 사자를 가리킨다.
2) 셀라하마느곳 -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안전장치이다.
강해
오늘 본문은 다윗이 유다의 십 황무지와 마온에서 절대절명에 있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넘긴 내용입니다. 이와 같은 다윗의 온갖 고통은 먼저는 왕으로 오신 초림의 예수의 일생적 고난을 예표하고 나아가 성도들의 왕적인 신분에 맞는 삶을 위한 훈련을 상징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영성이란 무엇이며 그리고 육신과 마음의 정체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것은 이미 규명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 규명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분리에 대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분리해야 할 이유는 육신적인 죄의 요소를 제거해야 만이 영적인 삶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편리상 영육의 분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런 의미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럼 어떻게 육적인 것을 분리하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나아가야 합니다.
15절에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했습니다.
여기 황무지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은신하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곳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곳은 황무지로서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 특수한 환경이라는 점과 그 지역의 십 사람들에 의해 이미 그 은신처는 밝히 드러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장소를 낮은 저지대로 옮기지만 십 사람들의 인도를 받은 사울의 군대는 다윗을 찾아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여기 수풀은 기도의 동산 겟세마네를 연상시킵니다.
이처럼 성도가 육적인 것을 분리 받으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적인 의미의 영육분리는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미 성도는 예수와 함께 육적인 것은 죽었고 예수와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상 예수 안에서 이 영육분리의 축복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할 일만이 남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공로를 믿을 뿐 아니라 성령으로 적용받기 위하여 십자가 아래 엎드려 늘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속에 형성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 성령으로 인한 새 의지를 받아야 합니다.
16-18절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했습니다.
여기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출현은 숲 속에 숨어 있는 다윗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여기 요나단이 다윗을 위로하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새로운 위계질서를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요 요나단은 그 다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친 사울도 안다는 사실은 다윗에게 실로 고무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둘은 여호와 앞에서 서로 언약하고 다시 헤어집니다.
여기 요나단은 새 의지의 상징입니다. 이 의지는 성령으로 생겨납니다. 우리가 십자가 아래 나아가서 엎드려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성령의 감동된 새 의지를 나타내 주십니다. 이 새 의지는 하나님께 절대 순복하는 영적인 위계질서로 나타남이 그 특징입니다. 그래서 새 의지는 요나단처럼 하나님을 진실로 순복하고 사랑하며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을 굳게 결심합니다.
이 새 의지는 인격을 변화시키는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여기 "힘있게"는 원문에 '하자크'로서 '강하게 만들다, 강화시키다'는 의미로 한 목적어로 한 개인의 손이 올 때는 '손을 강하게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손'은 '능력, 권세'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의지가 나타남이 영적생활에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 엎드림은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계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다시 실족하여 넘어지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강력한 새 의지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의지는 좀 더 구체적인 삶 속에서 적용되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죄악의 정체를 샅샅이 드러내 주십니다.
19-23절에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하노라 혹이 내게 말하기를 그가 심히 공교히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 은적하였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탐지하고 실상을 내게 회보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천천인 중에서 그를 찾아내리라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했습니다.
여기 유다 지파에 속한 십 사람들이 자기 지파 출신인 다윗을 돕기는 못할 망정 나서서 다윗을 밀고하고 적극적인 색출운동에 가담함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배반한 이유는 전에 다윗을 돕던 놉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한 데 대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을 역설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들이 다윗을 색출하러 다니는 것 같으나 실재는 자신들의 정체가 폭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다윗은 자기 지파가 자기를 도울 것으로 여기고 도피생활의 상당 부분을 유다 땅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십 사람들로 인해 그렇지 않음을 확실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본 바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셔서 처리해 주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드러냄에는 약 두 가지 방법으로 진행됩니다. 그것은 말씀과 환경입니다. 특히 십 사람은 말씀 중에도 율법의 상징이 강합니다.
그런데 환경에 있어서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한 대로 이 본 바탕을 드러내시는 작업은 철저히 진행됩니다. 때로는 가족관계로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다른 인간관계로 때로는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일을 하라고 임금을 준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마치 십 사람들처럼 누가 시키지 않았고 임금조차 약속한바 없는데 이 일을 하려고 태어난 것처럼 이 과정이 속에서 진행됩니다. 그런데 여기 십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역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 은신처가 있는지 손바닥 보듯 잘 압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우리들의 정체를 벌거벗기듯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찾아내는 일은 아주 쉬웠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고향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믿고 숨었던 바로 그들이 적이었음을 알았듯이 우리들도 죄악은 물론 인간의 의도 사울과 같은 한 동류의 죄악의 속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영적이란 질적인 것이지 모양이나 분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것은 보기 좋든 나쁘든 삶 하나 하나까지 다 들추어져서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영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 사랑도 영적으로 해야 합니다. 아내 사랑도 영적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정체 즉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안다고 다 됩니까?
4. 근신하며 회개하므로 죄를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24-26절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 아라바에 있더니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사울이 산 이편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편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했습니다.
이제 다윗 색출작전은 사울의 군대와 십 사람들의 연합작전에 의해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그 결과 다윗의 은신처는 여지 없이 드러나고 사울의 군대는 포위작전으로 다윗의 군대를 압축해 들어갑니다.
마온 황무지의 아라바는 '거친 들'이라는 뜻처럼 온갖 바위로 이루어져서 험준하기 그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십 사람들의 도움으로 정체가 쉽게 드러나자 장소를 마온 황무지의 더 험란한 협곡 아래로 이동하여 숨지만 역시 그들에 의해 다윗의 군대는 밝히 노출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사울 군대를 다윗은 급히 피해 저편 산으로 이동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다해 추격하고 다윗은 잡히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도망을 칩니다. 참으로 위기 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여기 두 가지 즉 샅샅이 밝혀지는 정체성과 사력을 다해 피하려는 그 자세에 담긴 중요한 의미입니다. 이것이 성화적인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정체가 밝혀지는 대로 사력을 다해 그것을 씻어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요나단 즉 새 의지의 나타남과 십 사람 즉 자기 정체 드러남이 이루어내는 합작품입니다. 우리에게 생긴 새 의지는 나타나는 죄악의 정체를 용납하지 않고 떨어버리려는 노력을 계속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성화적인 회개라고 부릅니다.
5. 육신를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는 섭리적인 손길도 필요합니다.
27절에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습니다. 다윗의 절대 절명의 위기에 사자가 사울에게 급한 전갈을 알립니다.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갑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다윗이 벗어나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순간이었으면 다윗이 그 곳의 바위를 셀라하마느곳 즉 '경계의 절벽, 분리의 절벽'이라 칭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 경계와 분리의 절벽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의미에서 사울이나 다윗이나 모두 우리 한 인격 속에서 되어지는 일로 보면서 이 문제의 해답을 찾으십시다. 여기 해답은 블레셋이 사울을 침노함에 있습니다. 비유란 상황에 따라서 그 적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육체라면 블레셋은 사단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사단이 육체에 주는 각종 질고와 고통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속의 것들을 폭로시키는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항구적인 것으로 간구해도 떠나지 않습니다. 다만 온전히 주님을 붙들 때 잠시 약해질 뿐입니다.
이 항구적인 사단의 사자가 주는 고통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믿음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 특별은총을 간증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에게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12:7-11)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를 보호하시려는 안전장치입니다. 그래서 '셀라하마느곳' 즉 '경계의 절벽, 분리의 절벽'입니다. 아무도 이 절벽을 넘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더욱 분발하여 열심을 다 하십시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의 구원의 복음을 믿고 십자가 아래 나아가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다. 그래서 새 자아로 변화를 받아 말씀과 환경을 통해서 드러내 주시는 내 속의 악한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 버리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셀라하마느곳의 사랑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안전하다는 사실을 믿고 이제는 더욱 열심내어 육신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