彈劾(탄핵)의 歷史(역사)
二. 사료(史料)를 통해서 본 탄핵
二-1-②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탄핵제도와 사례(事例) : ‘風聞公事(풍문공사)’ 금지
어찌 기관 대 기관의 탄핵 뿐이랴! 감찰과 탄핵의 핵심기관인 사헌부에서는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인 풍문(風聞)과 사적인 감정으로 탄핵하는 이른바 ‘風聞彈劾(풍문탄핵)’ 혹은 ‘風聞推劾(풍문추핵)’ ‘風聞擧劾(풍문거핵)’ ‘風聞公事(풍문공사)’로 일컬어지는 사건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定宗 2년(1400년, 明 建文2년) 4월 1일 丙申日의 두 번째 기사 가운데 대사헌 권근(權近)이 “헌사(憲司)를 이름하여 풍헌관(風憲官)으로 함은 무릇 풍속을 바로잡는 등의 일을 다 풍문으로 탄핵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이미 풍문공사를 행하지 말라고 명했으나 풍문으로 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인심을 바르게 하겠나이까? 바라옵건대 지금부터 풍문의 일에서 그 실상을 얻는다면 다 잘 살펴서 다스릴 수 있나이다(憲司名曰風憲官, 凡正風俗等事, 皆風聞彈劾。往者, 旣命毋行風聞公事, 然不風聞則何以正人心乎? 願自今風聞之事, 如得其實, 則悉皆糾理)”고 아뢰자 임금은 “풍문공사는 태상왕이 금하신 바이니, 가볍게 고칠 수 없고, 지금 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다시 입법해야 한다(風聞公事, 太上王之所禁, 不可輕改, 今欲行之則宜更立法)”고 답했다.
그러나 입법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定宗의 답변처럼 조선 건국 첫해에 太祖의 下敎가 있었기 때문이다. 太祖 1년(1392년, 明 洪武 25년) 10월 11일 己未日은 왕의 탄신일이었다. 이날 태조는 특별사면령을 내리고, 네 가지를 일을 하교(下敎)하는데, 그중 두 번째가 ‘풍문으로 고발하는 사람은 징계한다’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1. 안으로는 도당(都堂, 최고 의정기관으로 고려의 제도를 승계. 定宗 2년에 정비)과 대성(臺省, 臺官과 諫官), 밖으로는 절제사(節制使, 侍衛軍을 지위하는 무관 벼슬)와 안렴사(按廉使, 각 道의 으뜸 벼슬)와 주(州)와 현(縣)의 관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자애로 백성을 어루만짐을 힘써야 함이 어진 정치로 나아감이라. 초창기에 법제가 아직 갖춰지지 못한 때를 당하여 어찌 가히 갑작스럽게 말단적인 업무로 능히 풍속을 바로 하겠는가? 또한 오래전부터 물든 나쁜 풍속을 스스로 새롭게 해야 하는 날들을 만나 어찌 가히 지나간 일들을 뒤쫓아가서 허물하려는가? 공자께서 “구악을 생각지 않으니 원망이 이에 적어졌다(『논어』 공야장편 제22장)” 하시고, 또, “점점 스며드는 참소와 피부에 와닿는 호소가 행해지지 못하면 가히 밝다고 이를 뿐이라(『논어』 안연편 제6장)” 하셨느니라. 이제부터 직접 출두하여(見身, 현신) 고소장을 냄에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것과 모반과 대역은 곧 마땅히 수리되겠지만, 풍문으로 피해자가 아님에도 남의 범죄를 들추어 고발함은 풍속을 무너뜨리고 교화를 어지럽히는 근원이기에 의당 수리하지 않으니, 어기는 자는 징계할지라. 안으로 종실의 자제와 밖으로 대소신료와 사서인에 이르기까지 범하는 바가 있다면 스스로가 고통스러운 징계를 부담했으니, 단연코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라(一內而都堂臺省, 外而節制按廉, 至於州縣官, 一以慈愛撫民爲務, 卽仁政也。當草創法制未備之時, 豈可遽以末務, 能正風俗哉? 又當舊染自新之日, 安可追咎旣往之事? 孔子曰不念舊惡, 怨是用希, 又曰浸潤之譖, 膚受之訴, 不行焉, 可謂明也已矣。自今見身告狀, 而有明證及謀叛大逆, 卽當受理, 風聞告訐, 乃敗俗亂化之源, 不宜受理, 違者懲戒。內而宗室子弟, 外而大小臣僚至於士庶人, 如有所犯, 自當痛懲, 斷不原宥).
議政府(의정부)는 이러한 뜻을 잘 받들었으나 司憲府(사헌부)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두 기관이 부딪히는 일도 일어났다. 太宗 4년(1404년, 明 永樂 2년) 10월 25일 癸巳日의 세 번째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의정부는 대간이 풍문으로 탄핵하는 일과 사사로움을 끼고 보복함을 금하도록 청했는데 윤허했다. 상소의 대략은 이러했다. “풍문의 일을 탄핵하여 묻지 못함은 이미 법령에 나타나 있음에도 이제 대간원 등이 ‘구습을 따라(因循, 因循姑息 : 당장은 편하기에 구습을 그대로 따름)’ 행하지 않나이다. 이제부터 풍문의 일과 사사로움을 낀 보복과 ‘불만을 품고 표현하지 않다가 암암리에 비방(腹誹心謗, 복비심방)’하는 등의 일을 일절 금지해야 하나이다. 대간원 가운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본부에서 ‘즉시 서면으로 아뢰고(申聞)’ 죄를 논하여 ‘성헌(成憲, 成文憲法)’을 길이 따라야 하나이다(○議政府請禁臺諫彈劾風聞之事及挾私報復, 允之。疏略曰風聞之事, 不得劾問, 已有著令, 今臺諫員等, 因循不行。今後風聞之事及挾私報復, 腹誹心謗等事, 一皆禁止。臺諫員如有不遵者, 本府隨卽申聞論罪, 永遵成憲)”
‘風聞公事(풍문공사)’인 ‘風聞彈劾(풍문탄핵)’은 사실을 확인하기에 앞서 소문(所聞)에 근거하여 소장(訴狀)을 만들고, 그 사람을 소환하여 심문하는 일이므로 자칫 당사자와 그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킬 개연성(蓋然性)이 크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이 있듯이 사헌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듬해인 태종 5년(1405년, 明 永樂 3년) 7월 17일 庚戌日에 사헌부는 ‘풍문추핵법(風聞推劾法)’을 올렸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사헌부가 다시 풍문이 도는 경우 탄핵을 소추하자는 법을 행하자고 청했으나 회답하지 않았다. 상소의 대략은 이러했다. “삼가 당나라의 『백관지(百官志』)를 살펴보건대, 어사대는 송사(訟事)를 받지 않고, 고소(告訴) 가운데 가히 듣고 심리(審理)할 만한 게 있으면, 그 성명을 생략한 채 풍문에 의탁하여 살펴서 다스렸나이다. 그 앞선 왕조[隋, 수]에서는 헌사가 이미 소장(疏狀)을 받아서 송사를 심리했고, 또 ‘풍문탄핵’의 제도가 있었나이다. 이로써 권문세가와 토호 세력이 법을 두려워하여 감히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나이다. 아아! 우리 왕조가 한결같이 선왕의 법을 따르는데, 본부만이 풍문의 탄핵을 없앴으니, 이는 풍기(風紀, 풍속의 紀綱)의 임무를 이지러뜨리고, 간사한 이들의 욕심을 부추기고, 간악하고 숨은 자들을 적발하여 어지러움을 미연에 제거하지 못하도록 하였나이다. 관리들이 탐욕스럽고 잔악하고, 장수들이 오만방자하고, 마을 사람들이 근심하고 원망하며, 모든 가문이 더러워지는 등의 일에 이르고 나서야 비록 밝고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혹 기세가 꺾여 꼼짝 못 하거나 돕는 이가 적게 되고, 혹 자기와 상관없다면 다만 입을 다물고 이를 갈 뿐이니, 누가 감히 고하겠나이까? 악한 짓을 하는 자가 날로 더욱 늘어나고 풍속이 날로 더욱 무너지는 까닭은 심히 자그마한 연고가 아니옵니다. 바라건대 지금부터라도 풍문의 법을 그 옛 제도로 회복하소서!(○司憲府請復行風聞推劾之法, 不報。疏略曰謹按唐百官志, 御史臺不受訟, 有訴可聽理者, 略其姓名, 托以風聞而糾理之。其在前朝, 憲司旣受狀理訟, 又有風聞彈劾之制。是以權豪畏法而不敢爲非。洪惟我朝, 一遵先王之法, 獨於本府, 除風聞之劾, 是虧風紀之任, 而縱憸邪之欲, 無以發奸摘伏而除亂於未然也。至若官吏貪殘, 將帥驕蹇, 閭里愁怨, 闔門汚穢等事, 雖有明智者, 或勢窮援寡, 或不干於己則但緘口切齒而已, 誰敢以告? 所以爲惡者日益張, 而風俗日益壞, 甚非細故。願自今風聞之法, 復其舊制)”
그러나 태종은 회답하지 않았다. 사헌부의 간절한 청에도 태종이 회답하지 않음은 앞서 살폈듯이 개국 초에 태조의 하교(下敎)가 있었고, 태종 또한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기에 뭇 소문을 진정시키면서 사회 안정화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태종 16년(1416년, 明 永樂 14년) 3월 20일 壬子日의 첫 번째 기사 가운데 그 의지를 다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육조와 대간은 다 내 말을 들어라. 내 이르건대, 풍문공사는 행함이 불가하다. 금하고 행하지 못함이 이미 태조원전에 실려있다. 만약 풍문의 일을 행하도록 허락한다면 다시 서로 적발하여 상호간에 음험하게 모함하여 해치고, 민간의 풍속과 세속의 풍습이 틀림없이 불미스러워지리니, 내 반드시 이 법을 굳게 지킬 것이라(六曹, 臺諫咸聽予言。予以謂, 風聞公事, 不可行也。禁而不行, 已載於太祖元典。若風聞之事, 許令行之, 則更相撥摘, 互相陰中, 民風俗習, 必不美也, 予必堅守此法矣).”
더욱이 왕조가 바뀐 시점에서 前 왕조의 사람들이 새 왕조의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부당한 압력과 대우를 받게 되면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태조의 풍문탄핵 금지는 새 왕조가 들어선 뒤 사회안정과 화합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었고, 태종 또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기에 무엇보다 안정과 화합이 필요했기에 風聞公事를 막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부터 풍문공사는 끊임없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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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덕분에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