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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선집 제7권 1편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누가복음 15:11-32 1959년 7월 5일(日), 전 본부교회
<말 씀>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해 보려는 말씀의 제목은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입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도상(途上)에 있는 인류
지금 이 세계의 인류는 평화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유를 누리는 개인이 되어, 자유의 사회, 자유의 나라, 자유의 세계에서 살기를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평화가 없고, 내 마음에 자유가 없고서는 진정한 행복은 있을수 없습니다. 참다운 인생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다운 평화 속에서 참다운 자유를 구가하며 참다운 행복을 누리기를 바랄 것입니다.
내적으로 보나 외적으로 보나 우리 인류가 바라는 본향의 세계가 이뤄지지 않았고 인류가 그 세계에서 살지 못하고 있는 연고로, 오늘날 우리 인류는 본향을 찾아가는 길거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인류라는 것을 우리는 밝히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잘난 사람도 본향을 찾기에 허덕이고 있고 못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본향으로 가는 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성현 혹은 현철들이 나와서 인생의 갈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가라 혹은 이러한 주의에서 살라 하면서 어떤 방향성을 세워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철학이 지향하는 방향성도 있겠고, 어떤 주권자가 내세운 이념을 통한 길도 있겠고, 혹은 사회적인 윤리관을 통해서 가는 길도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외적인 세계를 끌어내어 여기에 영원한 이념을 연결시키려 하는 종교적인 방향성도 있겠습니다. 크게 보면 그러하겠고 작게는 개인을 중심하고는 이렇게 가야 되고,가정은 이렇게 가야 되고, 대인관계에서는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방향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이념이 지향하는 행복의 한때를 대비해서 움직이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한다할진대 그 모든 것은 천륜을 해명해 가지고 하늘의 뜻을 완전하게 세우는 그날에 가서는 반드시 천륜에 걸리는 입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가는 길, 윤리를 중심삼고 가는 길, 혹은 철학이 지향하는 진리의 길에서 행복의 세계를 소개할 수 있는 평화와 자유를 어떻게 찾아야 되겠는가? 사람의 심정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년 전에 가졌던 심정이나 억천만 년 후에 나타나는 심정은 같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발전이 없는 거예요.
본향을 그리워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
그런 곳이 심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 개개인이 살 수 있는 곳이요, 그러한 본향이 인류역사의 종말시대에 소개되어야 할 곳입니다. 그렇지 못할진대 오늘날 이 세계는 수습하려 해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것을 소개할 수 있는 어떤 이념이나 주의를 논리적인 견지에서 세우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본향의 세계, 본향의 땅, 본향의 형제,본향의 가족, 본향의 친척, 본향의 동산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지향하는 그 방향성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해결되게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하늘이 이런 입장에서 섭리를 해 오셨다 할진대 도리적인 면이나 진리적인 면에서만 우리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지 심정적인 면을 중심삼고 우리의 갈 방향을 가르쳐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심정적인 면에서, 실생활에서 실감할 수 있는 행복과, 생활하면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평화와자유를 가르쳐 주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것들을 아득한 소망의 한 초점으로서 바라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것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택한 선민이라고 자랑하던 유대 백성들이 4천년이란 기나긴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의 은덕을 받들어 왔으면서도 고대했던 그 메시아가 나타난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보내 놓고서야 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러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구주라고 하는데 그는 당시의 인류 앞에 어떠한 구주가 되어야 했느뇨? 너희들의 슬픔을 내가 맡아 주마. 할 수 있는, 자신 있는 구주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하고 말씀하
셨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 한마디는 인류를 위한 위대한 선각자의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세계를 맡을 수 있고, 이 민족을 맡을 수 있으며,심정문제를 맡아 가지고 그 심정의 짐을 풀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기에 예수님은 다시 온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이뇨? 인류의 모든 십자가의 짐을 도맡아 주기 위하여 오셨으나 인류의 심정적인 짐은 도맡아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전세계 인류는 심정적인 짐을 예수님 앞에 다시 맡기기 위하여 그날을 고대하면서 '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하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분
이제 우리들은 자기의 이 불쌍한 사정을 연결시켜서 세계와 통할 수 있는 불쌍한 사정을 가진 분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또 자기에게 어떤 외로움이 있다 할진대 그 외로움이 세계와 더불어 연결될 뿐만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게 갑갑하고 클클함이 내 한 마음에 사무쳐 있다면 이 고달픈 심정이 이 세계와 더불어 연결될 수 있는 때로 찾아 들어가고 있으므로, 그 모든 것을 해명해 줄 수 있는 분, 즉 나의 불행과 나의 불쌍함과 나의 고독과 나의 한스러움을 맡아 줄 수 있는 분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가 고대하는 그 이상의 세계를 소개해 줄 수 있는 분, 행복과 평화와 자유의 세계에서 영원히 느끼고 싶었던 심정을 충족시켜 줄수 있는 분, 그 심정이 영원성과 연관하여 존재세계의 어떠한 것과도 버젓이 행복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동기의 주체로서의 한 분을 만났다 할진대 그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성공자일 것입니다.
심정의 이념을 갖추고 걸어가야 고달픈 인생행로에서 서러움에 부딪쳐도 그런 심정의 세계에서 느껴진 감정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치고 때려도 더 강해지고 하늘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는 그 무엇, 심정의 인연으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 이는 지옥 밑창에 몰아넣을지라도 점령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이 기필코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방향은 그 한 곳, 본연의 동산입니다.
우주나 혹은 천주란 견지에서 보면, 이 세계가 나의 본향이 됩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범위가 크면 클수록 그 본향의 범위도 비례적으로 커간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생활 과정에서 잘 느낄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은 어떤 곳이뇨? 여러분이 어느 어느 곳이 내 고향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 곳이 아닙니다. 본향, 마음의 본향, 그곳은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내 심정의 안식처, 심정세계의 보금자리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역사가 바라고 있는 참다운 행복의 동산은 이런 곳이라고 소개할 수 있고, 참다운 평화와 참다운 자유를 소개할 수 있는 그 본향에는 누가 계실 것인고? 생각해 보세요. 그 본향에는 누가 계실 것인가? 높고 크고 존엄하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고대하던 주님이 그 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신이 그 곳에 계실 것이며 역대 섭리사에 왔다 갔던 수많은 공신들이 그 곳에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쇠하기 전에 가야 할,인생의 행로를 개척해야 할 우리입니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늠름한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심정과 마음의 중심을 가졌느냐, 이것이 오늘날 여러분 자체를 걸어 놓고 문답해야 할 중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지적하여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 고 하셨습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자가 가져야 할 태도
모든 성현들이 본향을 찾아가는 길에서 마음과 이념의 세계를 방황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세계를 찾기 위하여 먼저 인간적인 사정도 다 저버리고 인간 세상에서 정으로 인연되었던 모든 환경까지도 다 끊어 버리고 허덕였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제해 놓고라도 하늘을 대신하여 걸었던 선지 성현들, 또한 이를 수습하여 본향을 찾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세우고 해결지으러 오셨던 메시아인 예수도 이 길을 가기 위해 허덕였습니다.
반대를 받아 밀려나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반대와 핍박이 무서워서 고요한 산천을 찾아가서 기도의 시간을 가진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압정이 두려워서, 십자가의 길이 두려워서 가야 할 인생길에서 돌아서고자 했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히 가야 할 인생의 행로에서 어떠한 입장하에서도 가야 했고, 어떠한 불쌍한 처지에서도 가야겠다고 각오했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본향의 심정을 느끼고 본향의 사정을 아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본향이 환영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서의 행사를 대신해야 할 메시아였습니다.
인생길을 가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비참한 환경에서 상처를 입고 억울함을 당하고 분함을 당하는 사람,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하고 본향을 찾기 위하여 그러한 길을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그 사람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취해서 살게 되어 있는 사람의 본질
어떤 이상주의가 있다 할진대 그 주의를 통하여, 어떤 사상이 있다 할진대 그 사상을 통하여 어느 정도 취해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만들었느냐를 봐 가지고 그 주의나 사상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점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심정을 털어놓고 통곡할수 있는 감정이 우러나오는 데 있습니다. 이 감정이 역사 노정에 있어서 기독교의 형태를 변경시켜 나왔습니다. 기독교가 변혁의 단계에 들어가려면 심정을 통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그가 변치 않는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감정, 즉 기독주의가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을 해부해 보면 취해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어떤 대학자가 있다 할진대 오! 내가 이렇게 공부하여 이런 학자가 되겠다 하는 사람은 그렇게 못 됩니다. 못 돼요. 자기도 모르게 취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세계적인 대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 합니다.
취하는 감정을 통하지 않고는 오늘날 기성의 내용 이상의 어떤 법칙이나 공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라 할진대 그는 어떤 주인공이었느냐? 인간의 사정에 취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과 역사적인 심정과 시대적인 심정과 미래적인 심정에 취하여 그 하나에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에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쫓기든, 몰리든, 죽이든 아버지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이런 태연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됩다. 이런 사람은 기성관념, 혹은 그 시대의 이성적인 관념으로 바라볼 때는 미친 사람입니다, 미친 사람이에요.
인간이 찾고,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뇨? 심정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 그러한 행복, 그러한 평화, 그러한 자유를 소개해 주는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은 다 같습니다. 대통령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일개 노동자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같습니다. 오히려 말단에 있는 사람이 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하여 부족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그 자식이나 아내를 대하여 부모의 사명을 못 하니 미안하고, 남편의 사명을 못 하니 미안하다는 마음이라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사람은 내 할 것 다하고 있는데…. 합니다.
여러분은 그 인연과 더불어, 본연의 심정과 더불어 취하여서 감사합니다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옆길로 가게 될까봐 그러신 것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뜻길을 자신 있게 왕래할 수있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기도가 필요 없어요.
하늘 편에 가까운 사람
인생행로에서 자신을 갖고 취해서 간 사람은 역사가 옹호해 줍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갖고 하나님의 뜻에 취해 살다가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민족적으로도 그 민족의 운명과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자신이 그 책임을 다하기에 취해서 죽음의 길을 불사하고 넘어간 사람들을 충신이요, 열사라 하였습니다. 역사의 흐름이 이런 움직임을 통해서 흐른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천정을 찾아 나가는 노정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같은 인생행로에서 처참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불쌍한 사정을 알고,우리의 동족이 인생행로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사람은 하늘 편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형제들이 인생행로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을 볼 때에 너는 언제 올 것이냐 하며 마음 졸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심정의 지도자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그러한 지도자를, 양들은 그러한 목자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대하여 울었습니다. 나에게로 오라. 하시며 눈물지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대하여 탄식하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 13:34) 하시며 자신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인생노정의 성공자
자기가 나가는 인생행로에서 자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신과 더불어 소망의 본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에 사무쳐 달음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산아 가리어라, 바다야 가로막아라, 원수야 나타나라,내 갈 길을 누가 막겠느냐? 할 것입니다. 핍박의 바람이 불어와도 한때일것이며, 시험의 화살이 날아와도 한때일 것이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와도 한때일 것으로 알고, 그 한때를 넘기 위해 달리는 사람, 더 큰 한때를 찾기 위하여 자기의 작은 생애의 한 때를 잊고 뛰어 나갈 줄 아는 사람이라 할진대 그는 인생노정에 있어서 성공자입니다. 그럴 거 아니에요?
아까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걷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우실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 (마 7: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모든 것이 갖춰질수 있는 하늘의 섭리라면 그런 말이 쓸데없을 것 아니에요?
고달픈 인생길을 가다 보니, 자기 딴에는 목표가 바른 길인 줄 알고 걸었는데 반대의 걸음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서러움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바라는 방향은 이러한 것인데 탕자의 모습이 되어 반대 방향으로 가 가지고 유린당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자식의 모습을 보고 있는 부모가 있다 할진대 그 부모는 통곡할 것입니다.
인간을 바른 길로 돌려잡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
오늘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을 중심삼고 나아가는 방향, 인간들이 가고 있는 방향은 하늘이 지향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이러한 인간들을 돌려잡기 위해 이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민족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주도하실 수 있는 국가 형태를 갖추어 천적인 주권을 이 땅 위에 세워 드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런데 민족의 책임자로 오셨던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를 중심삼고 하나의 본연의 국가를 건설하고 사탄들을 향해 행군하는 천군이 되어야 하고, 하늘의 정병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생이별입니다. 생이별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조, 신앙의 선조들은 무엇이 잘났다고 자랑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였던 것은 선민의 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야 했던 길은 그런 길이 아닙니다. 생이별의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과 심정적인 통합을 이루었더라면
이 땅 위에는 예수의 생죽음의 한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 인간을 심정적인 이념으로 대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려던 그 본향의 나라는 어디 갔느뇨? 어디 갔어요? 그 민족이 살 수 있는 가나안 땅은 어디 갔느뇨? 그 본향은 어느 갔는고? 아브라함이 축복받고 하늘 앞에 제자 지내던 그 땅, 그성전은 어디 갔는고? 하나님이 직접 주관할 수 있었던 아담, 택하였던 노아와 방주 안에 있었던 그의 가족은 어디 갔는고? 우리들이 살 하늘의 안식처 될 수 있는 그 본향의 세계는 없습니다, 없어요. 그러기에 성경에도 고아와 같고 과부와 같은 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인생행로에 있어서 그 가는 모습이 처량할지라도 우주를 노래할 수 있는 감정이 하늘과 더불어,만물 만상과 더불어, 그 흐르는 심정이 천정과 더불어 짝할 수 있는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거지깡통을 들고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지성을 다해 그를 모셨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한때가 올 것을 자신 있게 알았기에 그럴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한때가 올 것을 자신 있게 아시기에 오늘날 이런 섭리를 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야 할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여러분은 자신 있게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자신 있습니까? 자신 있어요?
본연의 이상동산
본연의 동산은 이상동산입니다. 유무상통하는 세계였고 형제의 감정이 만우주 어느 곳에든지 통할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민족적인 감정, 혹은 국가의 어떤 주권적 차이를 가지고 논의할 수 있는 이상과 주의의 세계가 아닙니다. 민족의 차별, 혹은 국가의 주권 등 그러한 모든것을 넘어서서 논의하는 세계, 인간의 경제적인 사정이라든가 문화라든가하는 조건의 차이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을 가지고 논의하는 세계였습니다.
예수께서도 가룟 유다일당 앞에 나타나게 될 때 늠름한 모습으로 나감으로써 이 모습에 그 일당은 머리를 숙였던 것입니다. 올 테면 와라. 하는 일면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도 심정으로는 왕래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어떤 악당이 있어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막으려 하더라도 막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의식적인 영감에 의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 동적인, 자연적인 감정에서 느낄 수 있는 자리가 있다 할진대 여기에는 사탄이 아무리 침범하려 해도 침범하지 못합니다. 훼방했다가는 사탄이 큰일난다는 거예요. 사탄이 녹아난다는 거예요. 인생행로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다 하신 말씀
우리는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행로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더첨부해야 할 말씀은 '나는 사랑이요' 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은 빼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나님이여, 나는 사랑이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고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진 사람, 하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왔다 할진대 그를 두고 '야, 이 녀석아 너는 이 땅에서 하늘을 배반한 자다'. 하며 심판대에 올려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들딸들이 땅 위에 많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높이 보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있고 싶고 살고 싶고 가고 싶은 곳
여러분이 있고 싶은 곳, 살고 싶은 곳,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이 본연의 자리일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식구와 식구들은 형제입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상처를 입고 있으면 그 상처를 붙들고 울어 줄 수있는 마음이 우러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래야 됩니다. 우리 식구 중 누
가 상처를 받게 되면 가슴이 메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우리의 본향집은 어떠한 곳이뇨? 아버지께서 나를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도 같이 우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심정의 인연을 한 부분도 빼지 않고 동반자의 입장, 친구의 입장에서, 혹은 신랑의 입장에서 대해 주시려는 하늘이라는 말씀, 고맙고 황송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생행로에서 고달픈 몸으로 승리적인 하나의 내용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 역사적인 모든 성현 현철 그리고 하늘이 환희하면서 맞아줄 수 있는 한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그날을 영광스럽게 맞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날을 감사히 여기고, 그날에 자신들의 모든 허물을 잊어버릴 수 있고, 그날에 고대하던 소원을 다 이룰 수 있기를 바라고 나가야겠습니다. 그렇게 가는 사람이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임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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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러분이 있고 싶은 곳, 살고 싶은 곳,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이 본연의 자리일 것입니다.
참부모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