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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눈물을 닦아주는 평화의 어머니
10장 신(神)세계를 향한 위대한 도전
지독히 슬프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땅
“고래섬이라고 해서 고래가 많이 잡히는 섬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요.”
‘고래섬’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언뜻 고래가 잡히는 섬이 아닐까, 포경선이 많은 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올바른 이름은 ‘고레섬(Island of Gore′e)’입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한국과는 별다른 인연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옥색 바다를 가르며 여객선이 고레섬으로 향할 때 내 주위에 앉은 이국의 관광객들은 멋진 정취에 감탄을 연발하거나 사진 찍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내 가슴은 무척이나 저려 왔습니다. 고레섬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면서 또한 가장 슬픈 섬입니다.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흘린 통한의 눈물은 어쩌면 모든 바다를 다 덮고도 남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서북부에 있는 세네갈은 대서양을 향해 삐죽이 튀어나온 덕분에 북남미 대륙과 가장 가깝습니다. 또 위로 조금만 항해해 가면 유럽 땅에 닿습니다. 지금이야 그것이 여러 면에서 좋은 조건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난 500년 동안 온갖 고통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유럽에서 아프리카에 온 선교사들이 본질을 잃어버리고 자기 나라의 이익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교육도 하지 않고 하늘이 주신 천연자원을 탈취해 가기 바빴습니다. 게다가 피부색이 다르다 하여 인간 대접을 하지 않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런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했다는 사실이 참어머니의 입장에서 너무도 가슴 아팠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고레섬을 찾아가 그곳을 거쳐 간 아프리카 젊은이들의 한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500년대 무렵부터 유럽 사람들은 떼로 몰려와 아프리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노예사냥을 했습니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마구 잡아들여 고레섬에 모아 놓고 북미와 유럽으로 실어 보냈습니다
다리에 굵은 쇠사슬을 채워 옴짝달싹 못하게 한 뒤 살을 찌우려고 콩을 억지로 먹이고, 병에 걸리면 곧바로 바다에 던져 상어밥으로 만들었습니다. 평화로웠던 고레섬은 불시에 노예수용소로 돌변했고 비명과 죽음, 고통과 눈물이 넘쳐나는 지옥의 섬이 되었습니다. 노예사냥이 기승을 부렸던 300여 년 동안 고레섬을 거쳐 끌려간 아프리카인은 2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누에고치처럼 기다란 고레섬은 이제 전 세계인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 옛날의 통분과 아픔은 온데간데없고 백인이나 아프리카인 모두 유적지를 구경하는 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동쪽이나 서쪽 어디로 가도 20분이면 바다와 맞닥뜨리는 작은 섬입니다.
아담한 동네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감탄합니다.
“골목길에 초석을 깔아서 꼭 유럽의 뒷골목을 걷는 것 같아요.”
“집들도 고풍스럽고 아름답네요.”
유럽 사람들이 살던 집들은 아름답고 고풍스럽지만 그 뒤로 열 발짝만 들어가면 흑인들을 가둬 놓았던 노예수용소가 있습니다. 돌로 만든 수용소는 창도 없고 음침하고 좁고 더럽습니다. 수백 명이 그곳에 짐승처럼 묶여 있다가 낯선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바다로 향하는 돌문은, 그곳을 지나 배에 오르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었기에 ‘돌아오지 못하는 문’이라 불렸습니다.
그 문 앞에 잠깐이라도 서 있으면 아프리카인들의 비명과 통곡이 들리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수용소에 들어와 이곳저곳을 기웃거립니다. 간혹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얼굴을 심하게 찌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홍색으로 칠해진 철문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백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한 번의 기도가 아프리카인들이 수백년 동안 겪은 비참함과 울분을 모두 달래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누군가 그 비참함을 보듬고 울분을 달래 주어야 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고 자유를 빼앗는 불행한 역사를 끊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 검은 땅, 아직도 슬픔과 애잔함이 가득한 아프리카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흑진주의 눈물, 하나님의 품에 안기다
흔히들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가면 빨간색과 황토색이 더 많습니다. 땅은 빨갛게 드러나 있고,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하루 종일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모래가 쌓여서 황토색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늘 힘겹기만 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착취만 했을 뿐 아프리카에 베푼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을 ‘영혼이 없는 인간’이라 하여 노예로 끌고 가기만 했습니다, 그들을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살아가는 방편에 도움을 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구원의 말을 들려주는 사람은 더구나 없었습니다.
나는 1970년대 여름에 아프리카에 첫발을 들였을 때부터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연이어 건너가 교회를 세우는 일은 뒤로 미룬 채 작으나마 학교를 짓고 치료소를 만들고 공장을 세운 것도 삶을 더 낫게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일들은 당장의 배고픔은 면하게 해주었음에도 마음속에 있는 의문을 풀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통일교회 선교사와 목사들을 붙잡고 늘 물었습니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나요?”
“참부모님은 언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까?”
“참부모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아프리카에 대해 참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들의 간곡한 애원은 바다 건너 내 귀에도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프리카에 갔지만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너무나 많았고, 나라마다, 부족마다 처한 형편이 다 달라 한 말씀으로 들려주기도 난망했습니다. 어떤 나라는 영어를 쓰고 어떤 나라는 프랑스를 쓰고, 또 어떤 나라는 카톨릭신자가 많고 어떤 나라는 이슬람교인이 많아서, 같은 얼굴색임에도 서로 데면데면했습니다. 종족분쟁으로 십수 년간 피 흘리는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상처를 보듬고 하나의 마음으로 뭉치게 할까,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프리카의 모든 정치지도자들과 부족장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1월 18일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세네갈 다카르의 압두디우프국제센터(CICAD)에서 ‘신(神)아프리카: 공생, 공영, 공의와 보편적 가치’라는 주제로 ‘아프리카서밋 2018’을 개최했습니다. 마키 살 (Macky sall) 세네갈 대통령을 비롯해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전직 대통령과 총리, 국회의원들이 나의 초청에 응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북쪽에 있는 알제리부터 가장 남쪽에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55개 나라에서 1,2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그토록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대륙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한국은 동장군이 기승을 부려 온 나라와 사람들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아프리카는 햇살이 뜨거우면서도 종일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토록 갈망했던 참어머님이 찾아오셨다고 반기면서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연설이 끝난 후 아프리카에서 활발히 펼쳐지고 있는 새마을 운동과 세계평화고속도로, 선학평화상이 소개되었습니다. 또한 나의 후원으로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IAPP), 세계평화종교연합(IAPD), 세계평화족장연합(ICAPP)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날 저녁 한국의 자랑인 리틀엔젤스가 축하공연을 했습니다. 장구춤, 북춤, 부채춤, <시집가는 날> 공연과 <아리랑> 등 우리나라 전통춤과 노래를 선보일 때마다 청중들은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세네갈 국가에 이어 세네갈의 국민가수 이스마엘의 노래 <디비디비렉(Dibi Dibi Rek)>을 부르자 그 청아한 노랫소리에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엉엉 소리 내며 우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노래 하나로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었고, 아프리카에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안겨 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다음날 나는 고레섬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습니다. 슬픔과 비통의 땅이었던 아프리카를 해방, 해원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레섬 노예수용소는 2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2층에는 주인인 백인들이 거주했습니다. 반면 아프리카 많은 곳에서 잡혀 온 흑인 노예들은 배에 실려 나가기 전까지는 1층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은 현재 관광객을 위해 보수가 되었음에도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야 할 정도인 데다 채광이 되지 않아 마치 음습한 토굴과 같습니다.
고레섬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세계 정상이나 지도자들은 주로 2층을 관광하고 돌아가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지만 나는 1층 ‘돌아오지 못하는 문’에 손을 얹고 노예 해원을 위해 간곡한 기도를 했습니다. 당시 함께 참석했던 고레섬 시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통곡했습니다. 이미 생을 달리한 영혼을 해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심정을 위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인류 구원의 사명을 지닌 독생녀의 간구를 통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침묵에 잠긴 수용소 돌벽을 마주하고 이제껏 그 누구도 끊어 내지 못한 아프리카의 비참한 억압의 사슬을 영원히 끊어 냈습니다.
수용소 건너편의 작은 광장에는 성모마리아 동상이 있고 그 옆의 노란 벽에는 몇 개의 손바닥만 한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섬을 찾아온 세계 유명인들의 방문 명패였습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명패 옆에 내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붙였습니다. 세네갈 대통령과 국민들의 간구로 내 명패가 붙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습니다.
“슬픔의 땅 아프리카에 따뜻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500년 동안 짊어진 고통을 해원해 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작은 명패 하나로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를 위한 귀한 발걸음을 길이길이 기억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육지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며 나는 궁금증이 일어 섬 주민에게 물었습니다.
“배는 하루에 몇 번 다니나요?”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다녀요.”
“밤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요?”
“밤새 끙끙 앓다가 아침이 되어야 육지로 갑니다.”
“그러다가 화급하게 생명에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
“그렇지 않아도 그것이 큰 걱정이에요. 이곳에는 병원도 없고, 의사가 없고 ········.”
나는 병원선을 사주마고 약속했습니다. 육지로 돌아오자마자 응급용 배를 구입해서 고레섬에 기증했습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데, 단지 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또 생명을 희생당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자연은 아름답고 풍요롭지만 사람이 사는 곳은 척박합니다. 그래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착하고 온순하며 부지런합니다. 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볼 때마다 흑진주를 떠올립니다. 모나지 않고 둥글고 작은 흑진주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흑진주를 닮아 모두가 빛이 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실감하게 됩니다.
짙푸른 현해탄의 징검다리가 되어
“오느라고 고생스럽지는 않았나요?”
“고생은 하지 않았는데 ····· 비행기표를 구하는 일이 더 고생스러웠습니다.”
한국에서 행사가 열리면 일본에서 많은 식구들이 한꺼번에 옵니다. 나는 그들이 걱정되어 늘 안부를 묻습니다. 적게는 3천 명, 많게는 6천 명이 하루이틀 간격으로 믿음의 본향 땅 청평에 오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식구는 인천이나 김포의 공항으로 , 어떤 식구는 부산으로 건너와 버스를 타고 청평으로 옵니다. 일본 식구들에게는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방문해 통일교회 출발지인 부산 범냇골 성지를 비롯해 청파동 교회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성지를 순례하며 기도를 올리는 일이 평생의 영광이자 소망입니다. 수천 명의 식구들이 믿음을 안고 한국으로 오는 모습은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는 장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것은 아시아의 앞날을 바꿀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시아가 미래의 대륙으로 각광받는 이유는 통일교회의 부흥이 가장 왕성하기 때문입니다. 통일교회를 첫 번째로 받아들인 곳은 일본입니다. 1958년 7월, 최봉춘 선교사가 부산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극적인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밀항과 투옥, 입원과 탈출로 이어지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일본 땅을 개척해 1959년 10월 2일 금요일 오후 7시 15분, 네 명이 도쿄의 허름한 60여 년의 세월 동안 일본의 통일교회는 일본 전역에서 들불처럼 번져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단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 승공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일본 공산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순교자가 계속 나오는 등 아픔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문 총재에게 입국 비자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유명인사들이 점차 축복결혼에 참여하자 교세 확장에 위협을 느껴 언론을 통해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통일교회에 나가는 자녀를 감금해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통일교회는 무럭무럭 성장해 일본 사회의 큰 등불이 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일본 식구들이 세계 각지로 떠나 선교와 봉사를 통해 원리말씀을 전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1990년대 이전만 해도 민단과 조총련은 같은 한민족이면서도 사상적 배경이 달라 서로를 배척했습니다. 같은 민족이 마치 물과 기름처럼 따로따로 겉도는 것은 큰 불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승공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총련을 참을성 있게 인도했습니다. 조총련 교포들의 고국방문을 추진하자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정 어린 권유에 점차 마음을 돌이켜 고국방문단에 참가했습니다. 한 번 다녀간 많은 조총련 교포가 공산주의를 버렸습니다.
2018년 여름, 일본 도쿄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선교 60주년 기념 ‘2018 신(神)일본가정연합 희망전진 결의대회’가 열렸습니다. 나는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래를 위해 한국과 하나 되어 손잡고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이 한마음으로 한일해저터널을 연결해 전 세계를 잇는 평화고속도로를 만들 것을 다시 제창했습니다.
나는 1960년대부터 틈이 날 때마다 일본을 찾아 식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선교사들을 격려했습니다. 도쿄, 나고야, 훗카이도 등 여러 도시에서 수백 번 넘게 대회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중 나가노는 동계올림픽이 열린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이곳의 통일교회는 처음에 식구 수가 수십 명에 불과하고 교회도 작았으나 나의 격려에 힘입어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아름답고 아담하게 지어진 교회 옆에는 ‘화랑’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수련소도 있습니다. 신라시대 화랑도의 뜻을 높이 받들어 그들 스스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는 이 교회를 찾아 식구들을 격려하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결실 맺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뒤편에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몇 년 후 다시 갔을 때 사과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탐스러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사과나무처럼 일본에 뿌려진 말씀이 싹이 트고 번성해 튼실한 열매를 많이 맺고 있습니다.
나는 일본을 신(神)일본으로 축복했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일본은 사회와 문화가 근본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수만 명이 새 삶을 시작했으며, 매년 수만 수십만 명의 식구가 현해탄을 건너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찾아옵니다. 그 발걸음이 과거 한때 원수지간이었던 한국과 일본의 화합에 징검다리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일본이 천재지변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도호쿠 대지진, 구마모토 지진, 오카야마현의 수해를 비롯해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위로를 표해 왔습니다. 하늘 섭리를 놓고 참부모는 일본을 어머니의 나라로 축복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줍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밤잠을 설치듯, 일본은 전 세계를 위해 어머니의 심정으로 희생의 길을 가야 합니다. 어머니의 나라로서 세계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남미에 뿌린 사랑과 봉사의 씨앗
“서러움으로 말하자면 남미가 아프리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겁니다.”
남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하소연입니다. 하소연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원이 많은 것이 오히려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지요.”
남미는 아프리카 못지않게 슬픔과 착취의 역사를 지닌 대륙입니다. 500년 가까이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자원을 수탈당했기 때문에 넓은 영토에 비해 아직도 가난한 나라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원주민들에게는 수탈을 넘어 민족이 말살된 처참한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유럽인은 단지 다이아몬드를 얻고 식민지를 조금 넓히기 위해 전염병을 확산시켜 원주민을 멸종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립을 이뤘으나 공산세력이 드세해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데도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내전까지 벌어져 죄 없는 사람들이 숱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미 땅의 공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그들의 아픈 영혼을 달래 주는 해원기도를 올립니다.
처절한 수난을 겪었음에도 사람들은 모두 순박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땀 흘리고 있으며, 종교에 대한 순종심이 매우 높습니다. 자원이 풍부하고 날씨는 사시사철 온난해 사람이 살아가기에 적합합니다. 또 원시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천혜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남미에 발을 딛는 순간 광활한 땅과 태고의 자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깊은 호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남미에 우리 부부는 누구보다도 지극한 정성을 들였습니다. 통일교회가 남미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65년이었습니다. 이후 선교사들이 중미와 남미의 여러 곳으로 건너가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우리 식구들이 차츰 늘어났습니다. 남미 대부분의 국가는 카톨릭이 생활종교로 자리 잡고 있지만 나는 온 정성을 기울여 원리말씀을 전파해 나갔습니다.
다른 어느 대륙에서보다 더 많은 대회와 행사를 치르고 수많은 선교사와 세계 각국의 식구들이 남미로 건너가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학교도 지었습니다. 원시림을 개간해 농장을 만들어 가난한 원주민들의 살림살이를 향상시키고, 길을 뚫어 부족 간의 만남을 편리하게 해주었습니다. 병원을 지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수십 대의 앰뷸런스도 기증했습니다. 당연히 교회를 짓는 일은 항상 뒷전으로 미뤄졌음에도 우리 식구들의 끝없는 헌신에 마음을 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교회도 차츰 정착했습니다.
남미에 기울인 정성 가운데 가장 의미가 큰 일은 카우사(CAUSA), 즉 남북미통일연합이었습니다. 1980~90년대에 중남미는 사회주의가 득세해 대륙 전체가 공산화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만약 멕시코가 공산화된다면 그 한 나라로 인해 전 세계가 공산화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미국은 멕시코를 방어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 파견되어 있는 미군을 전부 자국으로 불러들일 것이고, 이는 한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와 유럽에까지 공산주의의 마수가 뻗치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문 총재와 나는 이 사태를 막아야 했습니다. 좌익정권이 들어서고 공산주의가 노골화되자 그것을 막기 위해 카우사를 만들어 지도자들과 청년들에게 통일사상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청년들이 공산주의에 물드는 것을 막아 냈습니다. 또한 파라과이, 우루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4개 나라를 경제적으로 연결시켜 남미가 한가족이 되도록 했습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17개 나라를 순회하면서 ‘참된 가정과 나’는 과연 무엇인지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8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 부부가 공산주의를 막아 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통통배 한 척이 통통통 울림소리를 내며 짙푸른 강 위를 헤치고 나아갑니다. 엔진을 달기는 했어도 배는 허름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갑자기 일어서면 잠시 기우뚱거리고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터집니다. 혹시라도 가라앉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이제 괜찮구나, 안도하는 것도 잠시, 누군가 또 급작스레 소리를 칩니다.
“아이쿠, 이게 뭐야?”
기괴한 물고기 한 마리가 물 위로 솟구쳐 갑판으로 털퍼덕, 떨어집니다. 날카로운 이빨을 수십 개나 드러낸 물고기는 따가운 햇살 아래 요동을 칩니다. 사람들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나면 원주민이 긴 막대기로 물고기를 들어 올려 다시 강물 속으로 던져 줍니다.
“무섭게 생겼네, 이름이 뭐예요?”
“도라도라는 물고기예요.”
브라질 자르딘에 있는 ‘도라도’보다 더 기괴한 물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물고기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풍성합니다. 남미는 언제나 봄여름이고, 언제나 꽃이 피고, 언제나 먹을 것이 많습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땅인 동시에 온갖 동물과 기이한 식물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렇게 푸른 땅에서 여러 동물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지상낙원입니다. 그 낙원 가운데 가장 우선으로 꼽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자르딘입니다. 원시림과 습지로 이루어진 거대한 오지에서 농사를 짓든 과수원을 운영하든, 살아가는 데 제일 이상적인 땅입니다. 새와 곤충, 물고기, 거대한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호수처럼 맑은 강이 흐르고 20개가 넘는 폭포가 있습니다. 저 유명한 이구아수폭포도 그중 하나입니다.
자르딘을 찾아간 것은 1994년 겨울이었습니다. 그때 브라질은 한여름이었는데, 가도가도 개미집만 무성한 평원이었습니다. 12월은 금어기간이었으나 우리는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강에서 낚시 수련을 했습니다. 태양이 이글거리자 경찰은 물속에 들어가 누워서 우리가 물고기 잡는 모습을 신기한 듯 지켜보았습니다.
예로부터 자르딘은 ‘주님이 오시는 곳’이라는 예언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기괴한 나무들과 넝쿨, 거대한 수목들이 뒤엉켜 납작 엎드려야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작은 철선에 의지해 새벽에 나가서 폭염과 모기떼와 싸우다가 한밤중에야 돌아오는 극난한 일과였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씻는 일이었습니다. 좁은 배 안에 대충 칸막이를 치고 뿌연 강물로 목욕을 했습니다.
나는 그런 원시의 자연이 더 반가웠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자르딘 교육본부를 짓고 새소망농장을 마련해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실천의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지도자수련회를 열었을 때 수련장은 화장실과 식당조차 없는 허름한 간이창고였습니다.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지도자들을 항상 그런 자리에 모아 놓고 산 체험의 교육을 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맑고 순수한 본연의 자연에서 낚시와 훈독을 하며 격의 없는 숨결과 체취를 함께 나누는 심정수련이었습니다.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있는 자르딘에 농장을 세운 이유는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에덴동산을 똑같이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세계인이 함께 모여 자연과 더불어 사랑을 체휼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마을을 지었습니다.
또 하나의 지상낙원인 판타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가 파라과이강을 중심으로 본연의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온 곳입니다. 물고기부터 동물과 식물이 모두 태초의 모습 그대로 있기에 에덴동산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깊은 감명을 받게 됩니다. 수루비, 파쿠, 카르핀초, 냔두, 악어, 야생멧돼지들이 제멋대로 거칠게 살아갑니다. 피라냐 물고기는 떼로 다니면서 사람도 해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습지이자 유네스코 자연유산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어 이상촌을 세우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땅입니다. 사방이 위험한 환경이지만 미래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농장과 양식장을 만들어 원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잡은 물고기들을 여분으로 만들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난한 나라에 보급하는 일도 했습니다. 목장에서는 소를 키워 160개 나라에 나눠 주어 기르게 할 계획도 세웠습니다. 또 파라과이강 근처의 빈 땅에 온갖 고생을 하면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한 곳은 차코입니다. 이곳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에 걸쳐 있는 그랜드차코의 작은 부분으로 정말 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1999년 우리 식구들에게 차코의 푸에르토 레다를 개척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레다는 차코에서도 살아가기 가장 힘든 곳이었지만, 우리 식구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땀 흘리며 일했습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인간과 자연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마을로 탈바꿈해 모든 사람이 살고 싶어하는 이상촌이 되었습니다.
나는 남미에 가서 여러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광활한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에 탄식했고, 배움을 갈망하면서도 글자를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하루하루가 버거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선교사들이 하소연할 때, 나는 그들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힘겨운 이야기를 듣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후일에 다시 찾아와 행복한 땅으로 만들겠습니다. 아버지, 잊지 마세요.”
기초적인 사회시설이 부족해 공부를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칠 학교가 필요했고 병원도 있어야 했으며, 무엇보다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계의 바탕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 식구들의 성금을 모아 차코에 쏟아부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청년들에게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심어 준 것만으로 우리 식구들은 조그만 위안을 받았습니다.
무너져 가는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서도 우리는 땀을 흘렸습니다.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아바존 밀림을 무차별 벌목하는 것은 지구 전체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마구잡이 어획, 무자비한 동물 살생은 어느 곳에서도 결코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식량 부족으로 전 세계의 8억 인구가 굶주리던 시절에 남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남미의 몇몇 나라는 쇠고기와 밀이 풍부함에도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농장을 만들어 밀을 심고 소를 키웠습니다. 더불어 자연보존을 위해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연구했습니다.
제왕나비는 날개를 펴도 8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5천 킬로미터 이상을 날아가 겨울을 지냅니다. 그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자연의 법칙입니다.
자연과 우리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배워야만 자연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창조에 얽힌 신비한 진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물을 창조했을 때 느끼셨던 한없는 기쁨과 사랑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배울 수 있는 땅이 남미입니다. 그 천혜의 땅에서 ‘하나님 아래 인류는 한 가족’이라는 가족애를 통해 우리는 본향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전 세계 국회의원들을 하나로 묶는 대장정
네팔은 바다가 없는 대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지닌 자연의 나라입니다. 수많은 등산가들과 관광객들이 찾아가지만 살아가는 형편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카트만두 공항에 내리면 대합실 바닥에 개 두어 마리가 태평스레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개를 쫓아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2차선 도로에서는 자동차들과 오토바이들이 달리다가 갑자기 한꺼번에 멈춰 섭니다. 저 앞에 소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그 소가 길을 터주어야 자동차들이 다시 달릴 수 있습니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 낀 네팔은 오랜 세월 은둔의 나라로 지낸 만큼 경제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를 만나면서부터 큰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2016년 여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해가 되었습니다. 아시아 각 나라에서 정치 · 경제 · 종교 · 교육 · 지도자 수백 명이 한꺼번에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을 창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계평화는 한두 사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범한 시민에서부터 정부의 고위 관리까지, 계층을 뛰어넘어 여러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에는 크든 작든 국회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국민들의 소중한 한 표 한 표에 의해 뽑힌 사람들로서 민의의 대변자입니다. 나는 세계 각국을 순회하면서 국회의원들이 찾아올 때마다 국가와 국민이 부여한 소중한 사명을 잊지 말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습니다. 당부에서 그치지 않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실제적인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각 나라의 민의에 의해 뽑힌 국회의원들을 한데 모아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을 만들어야 합니다. 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마음을 모으면 평화가 더 빨리, 그리고 자연스레 찾아옵니다.
그 말을 출발점으로 전 세계 국회의원들을 하나로 묶는 길고 긴 대장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국가 · 인종 · 문화를 뛰어넘어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두통거리를 풀어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나라의 국회는 여야로 나뉘어 갈등과 대립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파가 다른 의원들이 선뜻 모일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일말의 걱정도 없었습니다. 나의 말을 따르지 않을 국회의원은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은 2016년 2월 대한민국 국회에서 열린 창립식을 첫걸음으로 전 대륙을 순회하며 차례차례 대회를 열었습니다. 대회의 주제는 ‘우리 시대의 주요 도전과제 해결: 정부, 시민사회, 종교단체의 역할’로 정했습니다.
햇살 뜨거운 한여름에 네팔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드디어 아시아 · 오세아니아권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29개 나라 166명의 국회의원을 포함해 500여 명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네팔 국민은 물론 대통령이 직접 나서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처음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첫 대회부터 대성황을 이루자 모두가 나의 혜안에 탄복했습니다. 그 후의 대회는 열리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행사장이 늘 만원을 이뤘습니다.
네팔 대회에 이어 중앙아프리카 창립식은 부르키나파소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는데, 24개 나라 600여 명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가을에 영국 런던에서 열린 유럽 대회에는 40여 나라에서 3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나는 창설자로서 그들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영구적인 평화세계를 건설하려면 각국의 정치를 책임지는 지도자들이 올바른 인격을 갖추고 양심의 목소리와 도덕의 가치를 따라야 합니다. 세계 국회의원들이 하나가 되어 평화를 위해 협력한다면 세상은 바뀔 것입니다.”
중미 대회는 10월에 코스타리카에서, 남미 대회는 파라과이에서 열렸습니다. 11월 초에는 동아프리카 잠비아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다른 지역은 이미 늦가을로 접어들었으나 잠비아는 뜨거운 날들의 연속이어서 사람들은 무더위를 견뎌 내야 했습니다. 참석자들은 나의 평화사상에 공감해 아픔의 역사를 청산하고 희망의 평화시대를 만들어 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제 남은 나라는 일본과 미국이었습니다. 과연 일본의 현직 국회의원이 몇 명이나 참석할 것인지, 사람들은 조마조마해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려를 잠재우고 현직 국회의원 63명과 함께 200여 명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정치 이념과 문화의 차이를 떠나 평화세계를 만들어 가자는 뜻에 망설임 없이 모인 것입니다.
국회의원들과 주요 지도자들에게 평화를 갈망하는 나의 뜻과 그 길을 제시했고, 그들 모두 한마음으로 환영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대회는 그동안의 성과를 집약해 역사에 없던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을 탄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최종 승리대회의 장소는 미국 워싱턴DC로 결정되었습니다.
2016년 겨울,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마지막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 창설대회를 준비할 때 국회의사당 담당자들은 우리에게 유서 깊은 케네디 코커스룸에서 대회를 열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대회를 열 수 있는 룸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대회인 만큼 저희가 케네디 코커스룸을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케네디 코커스룸(Kennedy caucus room)은 케네디가 1960년에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한 곳입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그동안 미국과 세계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가 있는 대회들만 열렸습니다.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 창설대회는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중요한 대회인 만큼 의미가 있는 장소에서 열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2016년 12월 1일, 겨울비가 촉촉히 내리던 날, 56개 나라의 국회의원들과 주요 인사 50여 명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각 대륙에서 열린 행사에 이미 참석한 사람들이었기에 다시 만난 이웃 나라 사람들과 반갑게 포옹했습니다. 강대국도 그렇지만 특히 약소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적인 행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망으로 여겼습니다. 아프리카 베냉의 국회부의장 길버트 반가나가 한 말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나는 청년 시절 문선명, 한학자총재의 평화원리를 배웠습니다. 지금도 그 평화철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의 새로운 길을 찾아가게 해준 것에 대해 나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창립식에는 우리 부부와 오래 친분관계를 맺어온 오린 해치 미국 상원의장도 참석했습니다. 내 연설이 끝난 뒤 연단으로 올라와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1977년부터 현재까지 줄곧 미 상원을 지키고 있는 해치 의장은 나의 평화운동을 적극 지원해 왔습니다. 민주당 상원의원을 대표한 에드 마키 의원은 환경보존에 이바지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전하며 언제까지나 지지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워싱턴 대회를 끝으로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 창립은 길고 긴 노정을 마무리했습니다. 1년여 동안 지구를 한 바퀴 순회하면서 6개 대륙에서 열린 대회에 190개 나라의 현역 국회의원 2,500여 명과 더불어 2만여 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대회가 끝난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국토를 횡단하는 피스로드도 열려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이 행사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자전거를 타고 대륙을 종단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세계평화고속도로를 따라 전 세계를 하나의 교통망으로 연결해 세계의 분쟁과 갈등을 해소하고 인류를 한 가족으로 묶고자 하는 의미의 행사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모든 행사에는 리틀엔젤스가 한국의 전통춤과 노래를 아름답게 소개하고 개최국의 국가와 민요를 불러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역사 이래 그토록 많은 나라의 국회의원들이 모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들은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났고, 인종에 개의치 않았으며, 종교를 뛰어넘었습니다. 한때 원수와 같았던 이웃 나라 국회의원과 사나흘 동안 마주 보고 앉아 ‘이제 우리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의했습니다.
의인을 찾아서, 신세계의 희망봉에 서다
“왜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부를까요?”
나는 오래전부터 아프리카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는 억압과 분쟁, 불행의 역사가 난무하는 ‘검은 대륙’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아프리카에서 고단한 삶이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프리카 최남단에 가면 희망봉이 있습니다. 나는 세계평화고속도로의 출발지를 희망봉으로 정했습니다. 인류를 구원해야 할 평화의 어머니이자 독생녀로서 내가 아프리카에 희망을 주고 눈물을 닦아 줘야 했습니다.
2012년 문 총재가 성화했을 때 나는 “지상의 일은 그만 내려놓으시고 천상에 편히 입성하여 ‘하늘부모님’을 위로해 드리시라”고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나는 성혼하던 날 하늘 앞에 “내 당대에 뜻을 이뤄 드리겠다”고 한 약속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동안 하나님을 향한 효정의 마음으로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쉴 틈 없이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입안이 헐고 다리가 붓고 때로는 서 있을 수조차 없었지만 “기필코 내가 이루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구 곳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이상을 이뤄드리기 위해 신발 한 번 제대로 벗지 못한 채 걷고 또 걸었던 눈물겨운 노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신(神)종족, 신(神)국가, 신(神)세계 창건을 위한 노정은 결코 단순한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2020년까지 기필코 7개국을 복귀하겠다”는 결의 가운데 하늘을 향해 “나만 남았나이다” 기도를 수천 번도 넘게 했습니다.
드디어 하늘로부터 응답이 왔습니다. 2017년 7월 17일이었습니다. 세계본부 윤영호 사무총장이 문 총재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금으로 된 열쇠 세 개를 전달받았습니다. 그때 윤 사무총장은 유럽 희망전진대회를 비롯해 2018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릴 ‘중남미 월드서밋 2018’ 등 크고 작은 많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인연을 맺었던 의인 세사람을 미국 행사에 초청했습니다. 세네갈의 만수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하데베, 짐바브웨의 은당가였습니다.
2018년 1월에 나는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월드서밋 아프리카 2018’을 준비하면서 세네갈을 택한 이유는 하늘이 준비한 의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이슬람권으로 800만 혹은 1천만 이상의 신도를 거느린 종단장들이 독생녀의 현현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세네갈의 만수로 듀프는 이슬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나의 말씀에 감화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키 살 대통령이 주관하는 ‘2017년 월드서밋’을 자신이 직접 준비했습니다. 만수로는 대통령을 찾아가 종교 지도자로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참어머님을 모시지 않으면 아프리카의 역사를 맡길 곳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대통령은 국제회의장을 비롯해 서밋을 위한 최첨단 시설을 제공했습니다. 대통령이 사용하는 방탄차를 준비해 주는 등 국빈 이상으로 나를 환영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대통령 직속 경호원팀이 수호를 맡았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세네갈에 도착했을 때까지 마키 살 대통령이 서밋에 참석할지는 불확실했습니다.
나는 마키 살 대통령을 만나 40분 가까이 하늘의 섭리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이슬람국가 정상 앞에서 아담과 하와를 비롯해 축복의 중요성, 독생녀의 섭리에 이르기까지 설명을 하자 자리를 함께했던 장관들 마저 무척 놀랐습니다.
“내일 서밋에 참석하겠습니다.”
마키 살 대통령은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는 나의 인류 구원에 관한 간절함과 진솔함에 감동되었습니다. 내가 단지 명예나 권력, 그 어떤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적으로 “참어머님의 아들이 되겠습니다” 고백했습니다. 나아가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축복행사를 지원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생중계를 할 수 있도록 지시했는데, 국영방송을 통해 행사를 생중계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원고없이 신(神)아프리카 섭리와 인류 구원에 관해 설파했습니다.
“나는 참어머님과 함께 신아프리카를 건설하고 싶습니다.”
마키 살 대통령은 답사로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그 후 2019년 여름 나는 남아공을 찾았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2019 남아프리카공화국 효정패밀리 10만 축복축제(Hyojeong Family Blessing Festival in South Africa2019)’가 열렸습니다. 하늘은 이 한때를 위해서 의로운 선지자 사무엘 하데베를 예비하셨습니다. 행사에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전 현직 대통령과 총리 12명을 비록해 장관과 국회의원, 종단장과 지도자 500여 명이 참석해 아프리카 참가정운동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나는 아프리카 대륙이 10만 쌍 축복가정들로 말미암아 세계의 빛이자 등불인 신아프리카가 될 것을 축원했습니다.
사무엘 하데베는 500만 신도를 거느린 종단장으로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는 자신을 장차 오실 주님을 증거하는 선지자로 지칭하며 “평화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한학자 총재를 독생녀 참어머님으로 , 남아공과 함께 아프리카가 환영한다”고 증거했습니다. 남아공 국영방송 SABC에서 축복행사 전반에 걸쳐 생중계해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1년 전 넬슨 만델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축복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남아공에 갔을 때, 윤 총장이 하데베에게 “선지자님, 어머님이 찾고 계십니다.”라고 전달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교회 개척을 위해 모잠비크를 방문하던 중 전용기로 단숨에 축복이 진행되는 케이프타운으로 왔습니다. 나는 그에게 섭리사 전반에 걸쳐 들려주었습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 이상의 타락. 구원 그리고 독생녀 섭리의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데베 선지자는 말씀에 감동되어 나를 어머니로 받들겠다며 아들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와의 이론적 체계는 다를지라도 하늘이 예비한 독생녀 참어머니로 증거했습니다. 그에게 사무총장이 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어머님께서 내년에 10만 쌍 축복식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동안 아프리카를 찾았던 수많은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나는 오로지 아프리카를 위해 축복하러 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심정적인 고백을 함으로써 하나가 되었습니다.
2019년 6월 10만 축복식이 열리는 올란도 축복행사장의 준비 사항은 물론 내가 도착한 공항 라운지에서부터 신변 보호를 위한 경호팀 등 제반 사항을 스스로 준비했습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2019년 12월 남아공에서 20만 명 축복식을 준비했습니다.
나는 행사가 있기 전날인 6월 7일, 요하네스버그의 스웨토를 찾았습니다. 남아공은 인종차별 정책으로 말미암아 인종 간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백인들은 인구의 대다수인 흑인들의 토지를 강탈했고, 그들이 땅을 사거나 빌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신분증이 없으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으며, 백인과는 한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버스를 탈 수도 없었습니다. 흑인들만의 거주지인 빈민가 스웨토는 흑인격리 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이 발발한 지역입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거처가 있던 곳이며, 아프리카 인권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역시 노밸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Desmond Mpilo Tutu) 대주교가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1976년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발생한 ‘스웨토 항쟁’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어린 학생들의 희생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경찰의 총격으로 처음 희생된 열두 살 헥터 피터슨(Hector Peterson)이 피를 흘리고 쓰러진 것을 그의 누나 앙투아네트(Antoinette)가 부여잡고 울부짓는 장면은 남아공의 역사를 바꾸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인종차별 정책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피부색으로 차별하고 청소년의 희망의 싹을 앗아간 한의 역사를 청산하고 축복의 길을 하늘이 열어 줄 것”을 축원했습니다. 어두운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억울하게 숨진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독생녀가 해야 할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2018년 1월 세네갈 고레섬에서 흑인 노예의 영혼을 해방했던 일과 더불어 인종차별 희생자들에 관한 해원 역사는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짐바브웨에는 900만 신도를 거느린 대주교 요하네스 은당가 의인이 있습니다. 그가 있어 에머슨 음낭가과 대통령의 관심 가운데 6만 쌍이 넘는 축복행사를 성공리에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계시로 참어머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감사 드리며, 나는 기필코 참부모님의 왕국을 건설하고 싶습니다”라며 포부를 밝혔습니다.
은당가 주교는 2017년 축복식에 축사자로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축사자가 아니라 손수 축복을 받으라”는 하늘의 계시가 내렸습니다. 그는 계시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는 은당가 주교를 미국 매디슨스퀘어가든대회에 초청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껏 인류가 고대하고 찾던 참어머님입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증거했습니다. 자신을 소개할 때도 “나는 참어머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짐바브웨로 돌아가 목사와 주교들을 모아 놓고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2017년 11월 11일, 은당가 주교는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통일대회’에 참석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때 마침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입국하면 체포되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장관들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모두 체포되어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그는 ‘참어머님의 기적’이라고 고백합니다. 만일 붙잡혔으면 틀림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는 ‘참어머님께서 지켜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아프리카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자, 그는 첫 소감으로 “독생녀 참어머님을 모시는 짐바브웨가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색입니다. 피부색으로 오랫동안 핍박받던 아프리카가 이제 참부모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울했던 과거로부터 해방되고 있습니다. 참가정으로 거듭나 새 시대를 맞아 모든 인류 앞에 빛을 발하는 소망의 대륙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상투메프린시페, 국가 복귀의 첫 모델
“상투메프린시페가 어디 있는 나라예요?”
“글쎄 말이예요, 나라 이름이 아주 정감 있네요.”
상투메프린시페에서 ‘아프리카서밋 2019’와 ‘효정패밀리 축복축제’를 거행하겠다고 발표하자, 사람들은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 나라냐며 모두 궁금해했습니다. 2019년 봄에 우리 식구 한 명을 상투메프린시페로 보내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을 만나 정부와 MOU를 체결하도록 했습니다. 그때부터 ‘상투메프린시페에서 국가 복귀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투메프린시페는 서아프리카 기니만에 있는 조그만 섬나라로, 1975년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독립했습니다. 한국에서는 40시간 이상 걸리는 아주 먼 나라입니다. 나는 이번에 상투메프린시페를 하나님의 참된 나라로 축복하고 ‘신(神)상투메’로 새롭게 명명했습니다. 2019년 9월, 상투메 국회의사당에서 ‘아프리카서밋 2019’의 개회식이 열렸습니다. 오전 10시 이바리슈투 카르발류(Evaristo Carvalho) 대통령과 총리 및 국회의장을 비롯해 국회의원과 장관 전원, 종교지도자 200여 명, 해외 전현직 정상 등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특별히 상투메 국영방송으로 생중계되었으며 해외언론 역시 취재에 열을 올렸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은 ‘2018년 남아공서밋’ 이후 축복식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019년 여름에는 탄자니아에서 4만 쌍의 축복식이 자체적으로 열렸습니다. 이런 기반이 쌓여 국민의 대다수가 카톨릭 신도인 상투메프린시페에서 서밋이 개최된 것입니다.
행사 전날 상투메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귀빈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국가 각료들이 정중히 영접했습니다. 다음 날 오전 대통령궁에서 대통령과 회담한 후 함께 국군의장단 사열을 받으며 국회의사당에 도착했습니다.
세계정상연합 아프리카위원장인 나이지리아 전 대통령의 소개로 무대에 올라 특별연설을 했습니다. “신(神)상투메를 축복하고 참어머니와 하나 되어 천국의 모델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연설 도중 몇 번이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보내며 나의 제안에 동조했습니다. 카르발류 대통령은 개회식에서 “오늘은 상투메 역사상 가장 오래 기억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신상투메’로 축복해 주신 참어머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참어머님을 모실 수 있어 너무나 기쁘고 가슴이 벅찹니다. 상투메프린시페는 참어머님이 바라시는 천국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다음 날에는 역사적인 상투메프린시페 국가 주관의 ‘효정패밀리 축복축제’가 열렸습니다. 축복식은 각 지역별로 정치 · 종교 지도자와 전통 족장 등 국가의 추천에 의해 선발된 600쌍 1,200명과 예비 축복자 6천 쌍이 참석했습니다. 아침 8시부터 인파로 가득 찬 행사장은 그야말로 상투메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축제의 장이자 축복의 장이었습니다. 15명의 해외 전현직 정상이 자리했으며, 특별히 성수의식에는 정치 · 종교계를 대표하는 60쌍이 직접 성수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날 축복식은 국가에서 직접 주관한 것으로,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장관들이 모두 참여했습니다. 다른 축복식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상투메프린시페는 국가 복귀의 첫 번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투메에서 이렇게 국가 주관의 행사가 성사될 때까지 모든 가정이 수월했던 것은 아닙니다. 국민 대다수가 믿는 카톨릭교의 신부가 신앙적 차원에서 통일교회와 축복식을 비방하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과 각료들의 마음을 살펴서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모든 행사를 중단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한 신부의 신앙적인 견해 차이로 상투메가 한층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될 수 있다고 판단한 대통령과 각료들은 모든 행사가 정상대로 진행되기를 희망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출국하는 나에게 상투메프린시페의 대통령은 진심에서 우러난 뜻깊은 인사를 했습니다.
“상투메는 어머니의 집이고 어머니의 나라니 언제든 오십시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