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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뜬 하늘, 내린 하늘, 없는 하늘>의 줄거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이렇게 윤동주는 하늘의 시선 아래에 서 있는 자신을 봅니다. 그 거울 앞에 선 '떳떳한 나'를 소망합니다. 반면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다" 라는 구절을 통해 다윗은 이 땅으로 하늘이 내려오길 소망합니다. '완전한 마음의 나'는 소망 자체가 아니라 하늘 소망의 실현을 위한 준비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아예 뜬 하늘도 내린 하늘도 아닌 하늘 없는 땅의 삶을 살고들 있습니다.
뜬 하늘, 내린 하늘, 없는 하늘
(시편 101:1~8)
1.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2.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3.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4.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뜬 하늘, 내린 하늘, 없는 하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뜬 하늘, 내린 하늘, 없는 하늘’
말씀의 전체 내용을 제목에 담기 위해서 제목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고, 제목을 줄이려고 애를 쓰다 보니 낯선 단어들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뜬 하늘’이란 높이 있는 하늘을 바라볼 때의 상황입니다. ‘내린 하늘’이란 하늘이 내게로 내려온 것을 말합니다. ‘없는 하늘’이란 이 땅을 살아갈 때에 높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지도 않고 하늘이 내려오는 것을 소망하지도 않으며 하늘 없이 살아감을 말합니다.
본 시는 내린 하늘에 대한 다윗의 소망을 왕의 자리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입장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예로서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서시(序詩)를 들어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시일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아름다운 시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할아버지가 장로님이셨기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십자가”라는 제목의 시가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윤동주 시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를 살펴보는 이유는 이 시가 뜬 하늘을 바라보고 살았던 대표적인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에서 윤동주 시인의 소망이 나타납니다. 윤동주 시인은 1945년 8월의 해방을 맞이하기 얼마 전 2월에 일본의 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만으로 28살이 채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심정에서 이러한 시를 짓게 된 것일까요?
일제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무력함을 느낍니다.
윤동주 시인뿐만 아니라 민족전체의 마음이 먹구름 아래에 놓여 우울한 시대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천재 시인은 스스로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자문합니다. 그리고 질문의 답에 대한 기준을 하늘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하늘의 시선 앞에서 떳떳해지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먹구름 속에서 신음하는 민족을 위로하는 일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능력과 처지를 하늘이 알고 있습니다. 이 하늘의 시선 아래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싶다는 심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우울해하는 민족과 함께 살아가는 윤동주 시인의 마음속에 꿈이 있다면 하늘의 시선을 거울삼아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이 시를 문학적 측면이 아닌 복음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짙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백성들이 신음하던 때에 제자들에게 세상에 속하지 않은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과 대적들에 의한 박해와 탄압이 지속적으로 따르던 때에,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고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고뇌의 십자가이며 장엄한 결단을 촉구하는 십자가입니다. 성경이 말해주는 기쁨으로서의 십자가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데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본 시의 저자인 다윗은 왕의 위치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앞서 보았던 시편 95~100편은 하나의 주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있는 만백성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1편에서는 인간의 통치로 주제가 바뀝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노래하였고 오늘 본문은 인간이 다스려야 하는 상황이 있음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두 다스림의 주체가 어떤 연속성을 가지고 화합할 수 있는가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앞선 여섯 편의 시에 걸쳐서 하나님께서는 만백성과 삼라만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다스림을 행사하는 대표적 존재인 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다윗이 왕위에 오른 초기에 이 시가 지어졌다고 추측합니다. 그렇다고 볼 때에 오늘 시는 표면적으로는 앞으로의 통치 방향을 노래하는 것으로 통치자로서의 결단과 결심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포된 내용은 사뭇 다릅니다.
1절을 보면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의 핵심은 인자 즉 사랑과 자비와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주께 찬양하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은 지금 스스로 인자와 정의의 통치를 행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자와 정의라는 통치의 속성에 대해 꼬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자신은 할 수 없으니 여호와께서 하시라는 고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은 인자하심과 정의로우심이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왕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올바른 통치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완전한 길에 주목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리라’는 말이 모두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는 질문의 조건입니다.
이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향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고 오점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며 떳떳하고자 하는 것은 윤동주 시인과 같으나 그 이유가 다릅니다.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는 질문에서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왕의 자리에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에게 있어서 마음의 떳떳함은 그 자체가 이상이자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서 떳떳함은 하나의 방편이고 준비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꿈이 뜬 하늘의 시선 아래에서 떳떳하게 되는 것이었다면, 다윗의 꿈은 뜬 하늘이 자신의 삶으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왕 노릇을 하나님께 의탁하려 했던 것입니다. 관심하는 소원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소모되고 제공되고 사용됩니다.
다윗의 꿈은 이 삶이 이루어지는 현실에 하나님을 내려오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담기 위해서는 마음에 오점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주석에 의하면 앞으로의 통치방법과 기준에 대해 설명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원칙을 밝히는 등의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해석일 뿐 내포된 내용은 보다 깊습니다.
3절에서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정책이나 인사기준으로 삼기에는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5절의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라는 부분도 결코 한 국가의 정책이나 법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합당한 말이 아닙니다. 개인의 심리적인 측면에 치중된 주관적인 기준입니다.
이는 주변의 부정함으로 인해서 거룩하신 뜬 하늘이 내려오심에 거리낌이 생길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방해가 될 만한 모든 요소를 치워버리겠다는 노래입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꽉 차 있습니다. 통치자의 자리에 앉았지만 나라를 잘 다스리는 훌륭한 왕의 모습을 꿈꾸었던 것이 아닙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무력한 현실 속에서 하늘을 거울삼아 떳떳하게 살겠다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다윗이 윤동주 시인과 달랐던 것은 바람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 오히려 자신은 사라지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집안사람들일지라도 합당하지 않다면 없애버리겠다는 마음가짐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왕의 자리에 오른 다윗의 꿈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에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판단이 필요하고, 판단을 이끌어내는 결정적 요소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수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자신이 앉은 왕의 자리에 모시려고 했습니다.
오늘 시편을 편집한 편집자는 이러한 다윗의 시를 의도적으로 101편에 배치하여 95~100편까지의 내용에 이어지게 하였습니다. 95~100편까지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노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서는 백합화를 입히시며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 통치하시고 다스려나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세밀한 다스림을 행하시는 하나님과 인간은 어떠한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할까요? 이것을 다윗 왕의 예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꼭 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소원하고 계획하고 추진하는 모든 일 앞에서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우리의 일상이 다스림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내가 사장님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결정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사장님 앞에서 굽실굽실하는 것조차도 근원적으로 따지면 내가 나를 다스리는 형태가 사장님에 대한 복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를 야단치는 사장님을 용납할 수 있는 이유도 내가 나를 다스리는 방식으로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다스리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늘에만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혹은 하나님을 안 계시다고 생각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하나님을 내 삶에 내려오실 분으로서 생각하고 꿈꾸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삶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룩함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오점을 없애야 합니다. 마음에서 오점을 없애는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은 본래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에서 군자의 세 가지 낙(君子有三樂) 중에 두 번째로 등장합니다. 군자의 첫 번째 낙은 부모가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입니다. 세 번째 낙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부분이 군자의 두 번째 기쁨으로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사람을 굽어보아도 부끄럽지 않음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이 살 수 있을까요?
하늘은 고사하고 사람들 앞에서 숨기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는 떳떳한 척하며 살 수는 있겠지만 하늘의 시선 앞에서 어떻게 떳떳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윤동주 시인이 하늘의 시선 앞에서 떳떳하고자 한 것처럼 우리 마음에 오점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하늘의 시선 앞에서 떳떳하고 마음에 오점이 없다는 것은 곧 이 세상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땅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 할 때에 하늘 앞에서는 부끄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집에 아이를 남겨두고 시장에 갈 때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그 동안 공부를 하라고 일러두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에 엄마 앞에서 떳떳할 자녀는 아무도 없습니다. 컴퓨터를 했을 수도 있고 만화를 봤을 수도 있습니다. 딴 짓을 한다는 것은 곧 기쁨거리를 찾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재미거리와 만족거리를 찾으려 한 것입니다. 엄마가 정해준 공부에서는 기쁨과 만족을 찾지 못하기에 다른 것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엄마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지 못함도 이와 같습니다. 땅에서 기쁨거리와 만족거리를 찾기 때문입니다. 돈 좀 벌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쳐다보려하니 그렇게 오점이 생긴 마음에는 하나님이 내려오실 수가 없습니다. 자녀가 형통하기를 바라며 하늘을 쳐다보려하니 그 마음에는 오점과 부끄러움이 생겨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습니다.
단지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그 앞에서 떳떳하게 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내려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 오점이 없어야 합니다. 땅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 기쁨과 만족거리를 찾지 않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고백을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 삶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식민지하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평안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그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에게 보다 깊은 믿음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의 괴로움을 하늘에 대한 관계 안에서 승화시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늘이 땅에 내려오심을 노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시를 쓸 정도라면 하늘이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내려오면 식민지하의 무시무시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기쁨은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문학적 입장이 아닌 신앙적 입장에서 볼 때에는 얼마나 더 감동적이었을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일제강점기에 느낀 무거움을 여러분은 삶에서 느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늘은 뜬 하늘입니까? 없는 하늘입니까? 하늘을 입으로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가상의 날조된 하늘을 부르는 사람들조차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거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을 가지고 입으로는 하늘을 부를 때에 그 하늘은 날조된 하늘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기 그지없는 마음입니다. 하늘이 내려오실 수도 없을뿐더러 하늘을 인정하지도 않는 태도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에서 기쁨과 만족거리를 찾을 수 없다고 여겼기에, 하늘에 대해 떳떳해지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늘을 내려오게 하라고 요청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이더라도 십자가에서 이 땅에 대해서 올바르게 죽을 수만 있다면 하늘은 임하고 하늘은 열립니다. 그렇게 내려온 하늘을 타고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 시에서 왕에 등극한 다윗은 어떻게 하든지 뜬 하늘을 내려오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내려오심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결심으로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고백이 이루어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린 하늘로서 우리 마음에 오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배우자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사업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들을 홍길동이 구름을 타듯이 하늘로 떠받쳐주시며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뜬 하늘, 내린 하늘, 없는 하늘 중에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내린 하늘을 허락해주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나의 판단이 필요하고 나의 책임을 요청하는 수많은 대상들이 있습니다. 이것들 앞에서 다윗의 심정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이 땅에 내려오실 수 있기를 소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통해 이 땅에 대해 죽음으로서 주홍같이 붉은 오점으로 가득한 내 마음이 흰 눈같이 깨끗해짐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