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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11-18절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여러 번 예고한 것처럼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인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습니다. 이 날 새벽, 먼동이 터올 즈음,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을 때 몇 명의 여자들이 무덤을 찾았는데, 마가복음 16장에 의하면 죽은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요한복음은 여러 여자들 중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앞세워 그 일을 자세하기 설명하는데,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르자면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무덤으로 달려갔다가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구약의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였다고 증거 하고 있는데,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믿음의 내용으로 자리 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구약에서부터 말씀하신 것이긴 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친히 보여주시기까지 하셨는데,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까지 기록할 정도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요11:25-26).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결코 죽음이 생명을 삼키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자신이 죽음으로 더 이상 그로부터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기 때문에 그의 능력도 죽은 것처럼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장에서 제자들이 참된 믿음으로 고백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마16:16).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은 참 사람임과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지만 그 죽음은 인성에 한해서 그런 것이지, 신성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신성은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인성이 죽었다고 해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나사로를 죽은 자가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성부 하나님께서, 뿐만 아니라 성자이신 예수님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부활에 대한 믿음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나타났던 겁니다. 사흘 만에 죽은 자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임을 듣고 또 들었지만, 들은 그의 말씀이 그들 마음 가운데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부활하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만 하고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 가운데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자신을 나타내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마가복음 16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9절 이하를 읽어드리면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16:9-13)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찾은 것은 여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체를 볼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의 경우 이때 천사를 통해 부활의 소식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록이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고, 그 후에 두 사람에게도 보이셨다는 내용입니다. 이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내용인데, 분명한 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자신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11절과 12절을 보시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요한복음의 기록 순서가 약간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무덤에 가서 보니 천사가 무덤을 굴리고 난 뒤 그 위에 앉아 있었고, 천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역시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여자들이 무덤으로 갔을 때 무덤의 돌이 굴려져 있었고, 들어가 보니 찬사가 있어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으로 기록합니다.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무덤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근심할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말을 듣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이렇게 소식을 듣고서 제자들에게 알렸다는 것이 세 복음서의 동일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안식 후 첫날 일찍,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자들이 무덤으로 왔고, 거기서 예수님의 시체를 볼 수 없어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다고 기록합니다. 두 제자는 무덤으로 가서 그 사실을 확인했고, 그런 뒤에 오늘 본문에서 천사와 함께 예수님을 뵙게 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일단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매튜 풀 주석은 네 복음서 전체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천사들을 본 때는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있기 이전이었는가, 아니면 무덤에서 떠난 후였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전”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일 여자들이 처음에 무덤에 왔을 때에 천사를 본 것이었다면, 열한 제자, 또는 적어도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그 얘기를 했을 것이고, 또한 천사들이 그녀들에게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려 주었던 까닭에, 그녀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가져갔는데, 누가 어디로 가져갔는지는 알지 못하겠다는 말(2절)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복음서 기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무덤에 온 사실을 생략하고 보도하고 있지 않아서, 마치 여자들이 그들이 오기 전에 천사를 본 것 같이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막달라 마리아가 천사를 본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무덤에 다녀간 후였다. 먼저 안식 후 첫날에 일찍 여자들이 가장 먼저 주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굴려져 있고, 무덤 입구가 열려 있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라서 다시 성내로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여자들의 말을 전해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직접 무덤으로 와서, 그 말이 사실인 것을 확인하고서 돌아갔고, 막달라 마리아는 여전히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몸을 구푸려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다가, 돌 위에 앉아 있는 한 천사와 무덤 안에 있는 두 천사를 보았고, 천사는 그녀에게 주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을 알려 주었다.”
결국 요한복음은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있다면, 다른 복음서는 요한복음의 이 순서에서 일부를 생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자들이 무덤에 와서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확인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갔지만 여자들은 다시금 무덤에 와서 돌아가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는 오늘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울면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이 뉘었던 곳 머리와 발 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천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그들을 때로 사람처럼 보이게 하셔서 자신의 뜻을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특히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하늘의 영광에 대한 상징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변화산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 이런 모습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 마태복음에서는 이러한 천사에 대하여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마28:3)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형상이 번개 같다는 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닌 번개 모양을 했다기보다는 번개처럼 빛이 나는 사람의 모양으로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즉 빛이 나는 얼굴과 흰 옷을 입은 것으로 보통의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그런 모습으로 천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에서는 무덤을 지키는 군인들도 거기에 있었다고 증거 하면서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흰 천사들을 보았을 때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마28:4)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보통의 사람과는 분명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할 만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절과 5절에 의하면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라고 기록합니다. 분명 천사들이 저들 앞에 나타났을 때 두려워할 만한 모습으로, 보통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놀라는 그들에게 놀라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16장 5절과 6절입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이 내용이 지금 요한복음에서는 다름 아닌 막달라 마리아와 관련해서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요한복음으로 와서 13절을 보시면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비춰졌지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안심시키면서 왜 우는지 묻습니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가 없어진 것으로 인해 운다고 말하게 되는데, 이런 대화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난 시간 베드로와 요한과 다를 바 없이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직접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 일곱 귀신의 노예처럼 살다가 예수님에 의해 치유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죽은 나사로조차 살리시는 일에 대해서도 분명 들었을 것입니다. 그 소문이 유대 지역에 퍼졌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가 모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단지 귀신 들린 것을 쫓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조차 부활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안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친히 부활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믿음이 없는 자처럼 울고만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부활하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자처럼 울고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막달라 마리아에게 천사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말할 때 칼빈은 책망조의 말이라고 주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지만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나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은 꾸중을 받을만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평소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평안할 때는 괜찮은 믿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순간이 오면 평소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던 것이, 괜찮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것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우리 스스로가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하나님께서 친히 보존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누구도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스스로가 보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잘못이냐? 그렇게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다면 하나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보존해 주셔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당연히 믿음을 주셔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랑하기로 하신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보존하기까지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을 주시고 보존하지 않음으로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시는데,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처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스스로 설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럴 때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우리의 연약함을, 나아가 우리의 완악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존해 주시도록, 하나님 지식에 있어 더욱 자라남이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간구를 기뻐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는 천사의 질문에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했는데, 14절에 보시면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부활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정도의 부활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해 고백하는 것처럼(제32장 2항) 우리는 모든 죽은 자들이 다른 그 누구의 몸도 아닌 자기 자신의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비록 그들의 영혼과 다른 영원히 연합될 다른 질적 특성을 지닌 몸일지라도 자기 자신의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 죽기 전과는 다른 질적 특성을 지닌 몸으로 부활하셨지만, 다시 말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증거 하고 있는 대로 썩지 아니할 몸이요, 영광스러운 몸이요, 강한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는 왜 우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난 뒤 뒤로 돌아보았을 때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계셨지만 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가?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은 아닙니다. 앞에서 인용했지만 마가복음 16장 12절에서 시골로 가는 두 사람 앞에 예수님께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씀도 있지만, 여기서 다른 모양이란 다른 질적 특성을 지닌 몸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지, 죽으시기 전 예수님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알지 못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지만 그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눈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관련해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특히 누가복음 24장 15절과 16절에 보면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두 제자와 동행하시지만, 왜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는가?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단순히 보는 눈만의 문제인가? 칼빈은 마리아에게서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바가 그대로 드러나는 공통적인 실수를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마리아에게,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고안해 낸다는 것입니다. 달리 설명하자면 인간은 늘 지향성의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향성의 오류란 마치 카메라 렌즈의 줌 기능과 같습니다. 어느 한 곳에 초점을 두게 될 때 주위가 뿌옇게 됩니다. 뿌옇게 된 거기에는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흐릿하게 보이게 되는데, 이런 오류가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지만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했는가?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지만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했는가? 그들이 분명하게 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그 사실에 집중한 나머지 부활하신 것이라는 것은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그들 마음에 그런 마음이 자리 잡으니 정작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서 계시지만, 줌 기능처럼 죽음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죽음과 함께 부활하신 그 사실은 전혀 보지 못하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하면 경험한 그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옳다, 사실이다, 참이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신명기 13장 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13:1-3) 경험한 것 자체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적과 기사가 일어날 때 그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이 얼마나 분명한지 그것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내가 경험했기 때문이 그것이 진리인줄 압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성경이 보증할만한 경험을 했다 할지라도 더 확실한 예언은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변화산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의 변형되신 사건을 통해서 직접 볼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증거 하는 것을 친히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1:19) 자신이 경험한 것,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의 변형되신 사건을 보면서, 또한 하늘에서 증거 하시는 음성을 들으면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합니다. ‘더 확실한 예언’, 이것이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성경’이라고 말합니다(벧후1:20 참고). 바로 이 성경에 대하여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다고 하는 것이고,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더 확실한 예언인 성경이지, 우리의 경험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단지 경험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성경에 대해서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을 주지 않으면 우리는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늘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향성의 오류를 가지고 있고, 또한 판명성의 오류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겁니다. 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할 뿐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눈앞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눈앞에 계시 그리스도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눈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마음까지 타락했고, 그런 타락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전인이 불완전한 존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마음의 눈은 그 자체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세상과 사단의 유혹을 받기 때문에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칼빈).
이런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지만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지금 말씀하고 계신 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주여’라고 부르고 있는데, 주인과 종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호칭법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계속해서 찾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정하는 반면 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이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답게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그 눈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한 마디의 말씀으로 족합니다. 16절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다른 많은 말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능력은 지금까지 들었던 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으로 있게 하셨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제서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선생님’이라는 히브리 호칭을 부르게 됩니다.
여러분, 15절에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말씀도 16절과 동일한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음성이지만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말은 듣는 자에게 그것이 달려 있는 게 아닙니다. 잘 들어야지만 깨닫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듣지 않는데도 깨닫는 경우는 일반적으로는 없습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합니다. 들어야지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듣는다고 해서 다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깨닫느냐? 주께서 주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주께 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보는 것도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에 따르자면 말씀을 본다고 해서 다 깨닫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신학이 개혁신학이라고 할 때 개혁신학을 배우기만 하면 개혁신앙을 가지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개혁신앙을 가진 자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베자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베자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성경을 본다고 해서, 또 개혁신학을 배운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신앙을 펼쳐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바가 심겨져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또한 주의 음성을 들었지만 15절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6절에서 ‘마리아야’라고 하실 때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목자께서 자기 양을 부르시면서 자신을 알게 하실 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우리가 가지게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알아주시고, 다음으로 주님 자신을 알려주시고 알게 하신 후, 최종적으로 친근하게 우리를 초청해 주실 때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친근하게 우리를 초청해 주신다는 것은 효력 있는 부르심의 성격과 같습니다. 초청할 때 그 초청에 응답하거나 응답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응답하도록 하시는 초청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주께서 우리 마음에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눈 뜬 장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이요, 듣고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구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17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이 말씀에 근거하자면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는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붙들려고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나를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단순히 손을 대지 말라는 말씀인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8장 9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라고 되어 있고, 또 요한복음 20장 27절에서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예수님께서는 “나를 붙들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왜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시는가?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한 것과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부활하여 막달라 마리아 앞에 있지만 조만간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나를 붙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예수님은 죽었다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 이후 예수님은 승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마음에는 죽었다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런 주님과 이 땅에서 오랫동안 함께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묶어 두려는 생각일 뿐,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묶여 있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야 하고, 또한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금 오셔서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셔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면 육신적인 마음, 그런 것으로 나를 붙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어지는 내용처럼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갈 때가 다가오기 때문에 너는 내 형제들, 즉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내 형제들’로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부활하게 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맏아들이 되기도 하셨는데, 분명 본성적으로는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성자이십니다. 유일한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 가운데 일부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는 그들을 향한 목적에 대해서도 말할 때 맏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좀 더 정확하게는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 형제라고 부르시는 겁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부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같은 아들입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본래부터 아들이고, 유일하신 아들이었지만,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들로 여겨주시기까지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기에 자신을 맏아들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가 맏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제자들은 성부의 또 다른 아들로서 형제라고까지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친밀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죽음에 앞서 누구도 예외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자들로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형제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복된 내용은 무엇 때문에 가능한가?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습니다.
이런 명령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전하게 됩니다. 18절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물론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없다는 증거요, 믿음이 연약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직까지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믿음을 주시지 않는 이상 사람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시고, 주신 바를 전하라고 했을 때 그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다른 것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주를 보았다고 증거 했으며, 주께서 자기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그대로 증거 했습니다.
우리의 사명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받은 바를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받지도 않았는데 받은 것처럼 전해서는 안 됩니다. 지향성의 오류를 가지고서 전하는 것,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전하는 것은 결코 주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첫 범죄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습니까? 말씀의 가감으로부터 일어났습니다.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3:3)는 말씀의 흐림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 죄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대로입니다. 오직 성경대로이고, 전체 성경대로이며,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된 모든 것 그대로가 아니라 주의 말씀에 합당한 것 안에서만 전해야 합니다. 거기에 진리가 있고, 그 진리 안에만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진리를 동일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왜 이웃 사랑이 있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그와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바를 알라는 겁니다. 받은 바를 모르는 것처럼 하는 것, 그것이 사실은 죄입니다.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것, 진리의 말씀, 그 말씀으로 인한 은혜라면 우리 역시 진리에 합당한 주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