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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산소
레23:33-34, 42,43,초막절과 우리의 중추절
이 초막절은 유월절과 오순절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온 남자들은 그 얼굴을 여호와께 보이라는 명령한 순례절기입니다, 일년 중 세 번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지키는 절기이고 그 중에 초막절은 우리의 추석과 같은 날 해가 지는 시각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초막절은 유대 종교력으로 7월 15일에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의 추석은, 음력으로 8월 15일, 대보름입니다. 그렇다면 유대력으로 7월 15일에 지켜지는 성경의 초막절이, 어떻게 음력 8월 15일에 지키고 있는 우리의 추석과 항상 같은 시기, 같은 날짜에 만나고 있는 것일까요?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음력 달력은, 시헌력(時憲曆)입니다. 그것은 청나라 초기에 독일의 제수잇 교단의 선교사이며 천문학자인 아담 샤알(Adam Schall 1591-1666)이 제정한 것인데, 그 기초가 동양의 간지력(干支曆)이라고 합니다.
간지력의 근본은 신년의 시발점을 태양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점에다 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추석과 성경의 초막절이 항상 그 날짜의 때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유대력이 시헌력보다, 한 달이 늦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달력이나 유대인의 달력 중 어느 한쪽에 윤년이 들어 있는 해에만, 한 달의 차이가 나고 있을 뿐입니다.
유월절로부터 시작해서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은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은 오늘 우리에게 지나간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과 다가올 미래을 알게 하시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무엇일까요? 애굽에 노예로부터 탈출한 것,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우리의 유월은 무엇일까요? 죄로부터 죄의 노예로부터 탈출, 구원을 받고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신 것처럼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죄악에서 건져 내시고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이 한날이지만 우리의 유월절은 각자가 다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날에 죄에서 건져내어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유월절은 분명하게 있습니까?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은 무엇입니까? 오순절은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축제입니다. 부활 승천은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를 말씀하십니다. 부활승천하신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으로 우리를 옛 율법에서 속량하시고 우리의 심비에 새 율법으로 새기시고 현재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필요한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넉넉하게 이기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렘31:34, 겔36:26-27)믿으십니까?
또한 초막절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텐트치고 방랑생활 한 것을 기억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녀다니며 장막(tent. 초막)에 거주한 것을 기념하여, 초막절이라 이름했으며(출12:37, 느8:)특히 이 초막절을 수장절이라고(출23:16), 혹은 성스러운 집회(민 29:12-40) 로 명칭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고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갔듯이 오늘 우리는 저 천성을 향하여 가는 나그네임을 일깨우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유월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면, 오순절은 성령의 강림(행2:1-4)과 교회 탄생에 연관이 되고 이 초막절은 추수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어 곡간과 불속에 들어가는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상징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령의 강림은 강조하고 지키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하다는 것이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정하고 지키든 안지키든 상관없이 우리 인간 역사에는 인생의 추수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점, 이 시대에는 또 지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초막절의 첫 번째 의미는 추수감사입니다.(레 23:39),
오늘 본문 레 23:39에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15일부터 7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라”고 추수감사의 의미가 이 초막절에 깃들여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업과 생업을 보장해 주시고, 열매 맺게 해 주심에 대한 감사이며, 우리들의 땀 흘린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보장과 결실의 기쁨을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로 화답하는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적인 추수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있을 이 땅의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셨는데. 바로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의 비유로 우리 인생의 끝날 추수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 모두가 알곡으로서 또 오른편에 양처럼 하나님의 창고에 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에 들어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도 한 해의 삶을 점검하면서 우리 인생의 결산과 이 시대의 영적인 추수를 예견해 보시고 우리의 단 한번 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의 믿음의 삶, 나그네의 삶을 보람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초막절의 의미는 우리 인생은 나그네 삶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42절, “너희는 7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이스라엘 민족은 7월15일이 되면 실제로 초막에 거하면서 텐트(tent) 생활을 통해서 옛날 조상의 광야 생활을 경험해 보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광야 40년의 나그네의 삶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사하며 그 뜻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과 교훈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나그네로 살았다면 우리도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면서 저 천국의 도성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그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 않았다면 우리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과 악성을 뽑아내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수없이 받아 누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아서 수없이 애굽을 그리워하고 불평했습니다. 그 댓가는 죽음이었습니다. 광야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인 죽음을 유월하였습니다. 홍해인 세례를 받았고(고전10:4)만나인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시원한 생수로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반대로 땅에 집착하고 살아간다면 가나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가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도성의 문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시간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을 바라보고 살기 위하여서 그렇습니다. 이 나그네 같은 모습을 포기하고 왕처럼 생각할 때 우리는 곧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깨어지는 연약한 질그릇이며 날아가기 쉬운 먼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됐다”고 할 때 교만해지기 쉽고, 타락하기 쉬운 우리 인간의 연약성을 우리는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이제 됐다”라는 결론은 우리가 해야 할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실 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것입니다.
3. 초막절의 세 번째 의미는 자유함의 책임의 의미가 있습니다.
초막절은 오순절에 받은 율법을 준행하는 의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불의와 죄악을 경고하고 바로 잡는 것이며,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의를 실천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나그네로 즉 천막에 거하면서 먹을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않도록 책임져 주셨기 때문이며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신 말씀을 순종해야할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용서하시고 죄에 세력에서 건져 주신 것은 그냥 천국으로 들어가라고만 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준행하여야 할 의무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가난하고 죄에 사로잡히고 악에 세력에 눌린 자들을 돌아보고 구원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의 것을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요6: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믿음으로 굳게 서서 악의 세력에 눌린 자들을 일으켜 자유케 해주고 악의 세력을 끊어 내어야 합니다. 주께서 땅에 계실 때 그 일을 하셨고 우리에게 또 부탁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며 수고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평화에 대한 사명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만을 위한 삶, 나만을 위한 기도, 이기주의,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기도도 해야 하지만 그러나 이웃을 위해 이웃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 다시 조상의 대한 제사로 이슈가 되어 천국가나, 못가나, 논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첫째, 둘째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뜨거운 감자인 제사, 명절때마다 제사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죽은 자에 대한 제사를 무어라 하시고 있는가?
성경의 제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시작으로해서 온통 하나님께만 드렸습니다. 제사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이 아니면 다 귀신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전10:20)
우리는 주의 상에서 떡과 잔을 마십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10:21)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10분의 한국의 개신교 목사님들이 다 조상 앞에서의 추도예배는 불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두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이 세상을 떠나면 다 하나님의 주권대로 갈 곳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유명절의 설 추석예배는 그래서 조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서 추석 명절을 감사의 예배로 드리지 않고 우리 아버지의 영혼이 어쩌고 조상님이 어쩌고, 혹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조상이 좋은데 간다든지 하늘에서 우리에게 복을 빌어 줄거라든지 이러한 마음으로 한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상 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를 나그네로 살았는데 그러나 그곳은 영원한 도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하늘의 것이라 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은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 또한 나그네로서, 발은 이 땅을 딛고 있어도 언제나 영원한 저 하늘의 도성을 사모하면서 하늘 아버지의 친백성으로의 삶을 생활해야 할 것을 예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브리서 13:14)라고 하였고, 또한 아브라함에 대해 기록하기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5,16) 라고 하였고,
베드로 사도는 "3:11....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1~13)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은 '한가위' '추석'문화가 재래 종교와 혼합되어 지니고 있는 그 죄의 부패성(성경말씀과 대립되는)은 제거하되, 전통은 수용하면서 그 내용을 기독교적인 내용으로 새롭게 채우며 그 의미와 영적 의미를 승화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으로
초막절기는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모든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과, 천년왕국의 안식 세계와 그리고 나아가 영원한 천국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생활을 예표하는 절기인 것입니다(계시록 21:1~4).
즐겁고 보람 있는 '한가위''추석' 명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퍼가실때는 흔적을..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