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암(佛日庵)
寺在白雲中사재백운중 仄仄仄平仄
白雲僧不掃백운승불소 仄平平仄仄
客來門始開객래문시개 仄仄平仄平
萬壑松花老만학송화로 仄仄平平仄
<蓀谷李達>
절은 흰 구름속에 있는데
흰 구름 스님은 쓸지 않네
손님이 와야 문이 열리니
골, 골마다 날아가는 송홧가루뿐,
조선중기(朝鮮中期)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시(詩)다. 압운(押韻)은 소(掃), 노(老)다. 소(掃)는 노(老)는 상평성(上平聲) 호통(皓統) 상성(上聲) 호통(皓統) 운족(韻族)이다.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은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으로 보면 맞지않다. 이 시의 시제(詩題)는 불일암증인운석(佛日庵因雲釋)이다. 당풍시인(唐風詩人)인 이달(李達)이 근체시(近體詩) 압운운통(押韻韻統)을 측성(仄聲)으로 했고, 평측(平仄)도 맞추지 않는 것은, 의문(疑問)이다. 이 시는 명시(名詩)로 알려져 있다. 천봉만학 깊은 산중 골짝에 있는 작은 암자인데, 절이 구름 속에 있어서 찾아가 보니, 암자 마당에는 구름이 밟힌다. 그 구름을 스님은 그대로 두고, 쓸지 않는다고 했다. 겨우 객이 찾아오면 싸리문을 열어주다 보니, 골 계곡마다 송홧가루만 가득 날린다는 결구(結句)다. 암자는 암자인데 스님이 보이지 않는다. 선시(禪詩)의 아취(雅趣)가 물씬 풍긴다. 불일암(佛日庵)을 시제(詩題)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詩)도 있다. 깊은 절 꽃은 붉은 비로 내리고, 긴 대숲은 푸른 연기로 서렸는데, 흰 구름은 고개 위에서 잠을 자고, 청송의 학은 스님과 함께 졸고 있네.<深 院花紅雨 長林竹翠烟 白雲凝嶺宿 靑鶴伴僧眠> 서산대사(西山大師) 불일암(佛日庵)도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선시(禪詩)다. 압운(押韻)은 연(烟) 면(眠)이다. 압운(押韻) 이자(二字) 모두가 하평성(下平聲) 선통(先統) 운족(韻族)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은 기구(起句)=平仄平平仄 승구(承句)=平平仄仄平 전구(轉句)=仄仄平仄仄 결구(結句)=平仄仄平平. 압운(押韻)은 한 평성(平聲) 운통(韻統) 운족(韻族)을 맞추었으나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은 맞지않다. 근체시(近體詩) 한시(漢詩)는 이름이 세상밖에 난 옛 시인(詩人)들도 딱 들어맞는 시인(詩人)은 두보(杜甫)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이제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은 이쯤 해서 접어야겠다. 그동안 유명하다는 팔대 문장으르비롯해서 고승 대덕 100분의 시(詩)들을 맞추어 보았으니, 많은 공부가 되었다. 선사(禪師)들의 오도송(悟道頌)이나 열반송(涅槃頌)은 언어(言語) 밖의 소식(消息)이라 언어(言語)의 틀 속에 갇히지를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설선작시(說禪作詩)는 본무차별(本無差別)이라고 했다. 시(詩)가 선(禪)의 경지(境地)에 이르면 시선(詩禪)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원호문(元好問)은 시(詩)는 선객(禪客)에게는 비단 위의 꽃이 되고<詩爲禪客添錦花> 선(禪)은 시가(詩家)의 옥(玉) 자르는 칼이라고 했다.<禪是詩家切玉刀> 선사(禪師)는 미묘(微妙)한 깨달음의 소식을 시(詩)의 형식을 빌려서 쓰는 것이 오도송(悟道頌)이고 열반송(涅槃頌) 게송(偈頌)이다. 그래서 비단 위에 꽃을 놓은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했다. 시인(詩人)들은 선(禪)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을 배워서 자신의 시상(詩想)을 이미지로 전달한다고 해서 절옥도(切玉刀)라고 한다. 조사선(祖師禪)의 영향을 받은 당풍시(唐風詩)가 선적(禪的) 시어(詩語)가 많다. 명(明)나라 때 보하(普荷)는 이렇게 시선(詩禪)을 말했다. 선(禪)이면서 선(禪)이 없어야 시(詩)가 되고<禪而無禪便是詩> 시(詩)속에 시(詩)가 없을 때 선(禪)이 또한 엄연하다.<詩而無詩禪儼然>는 것이다. 알송, 달송한 소리다. 그래서 두보(杜甫)는 시(詩) 지을 때 용사(用事)는 선가(禪家)의 말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비유(譬喩)를 들면 물속에 소금이 녹은 것은, 그 물을 마셔봐야 짠맛을 안다고 했다. 눈으로 보아서는 그 물의 짠맛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셔봐야 아~ 짜구나! 한다는 말이다. 선사(禪師)들의 게송(偈頌)은 깨침의 노래 시(詩)다. 이렇게 체오(體悟) 체득(體得) 직관(直觀)의 소리라, 남들은 듣고도 보고도 알듯, 모를 듯, 이다. 고려 때 선승(禪僧) 경한(景閑) 선사(禪師)는 그래서 어떤 스님이 달마가 동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득한 강남땅 이 삼월을 생각하자니,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 향기 향기롭네<遙憶江南二三月 鷓鴣啼處白花香> 하였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일까? 사량계교(思量計較)로 묻고, 따지지 말라다. 자내증(自內證) 스스로 깨쳐 보란 말이다. 달마가 동쪽에서 온 뜻을 말해준다고 해도 사고(思考) 틀 속에 갇힌 말이 된다. 그래서 북송(北宋) 때 오가(吳哥)는 이런 관점에서 시선(詩禪)에 대한 학시시(學詩詩) 삼수(三首)를 남겼다. 학시(學詩)와 학선(學禪)의 원리(原理)가 같다고 했다. “시(詩) 배움은 마치 참선(參禪) 배움과 같거니, 대나무 걸상 부들자리 햇수를 따지지 않네, 스스로 온전히 깨침, 얻기 기다려서 멋대로 읆조려도 문득 우뚝하리라.<學詩渾似學參禪 竹榻蒲團不許年 直待自家都了得 等閑拈出便超然> 핵심(核心) 요점(要點)은 자증(自證), 자오(自悟) 요득(了得)이다. 깨친자는 마음 가는 대로 읊어도 여법(如法) 하다는 소리다.
두 번째는 시(詩) 배움은 마치 참선 배움과 같거니, 머리 위에 머리 얹음, 전할 것 딱히 없네! 두보(杜甫)의 굴레 밖을 뛰쳐서 나와야만 대장부 뜻과 기운이 하늘에 솟치는구나!<學詩渾似學參禪 頭上安頭不足傳 跳出少陵窠臼外 丈夫志氣本沖天> 옥상옥(屋上屋) 두상두(頭上頭)라는 말은 향상일구(向上一句)를 이른 말이다. 이 경계(境界)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경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경계라 율시(律詩) 틀에 갇힌 두보(杜甫) 꽁무니 따라가면 구만팔천리(九萬八千里)다. 격외(格外) 도리(道理)를 싸디싼 시장 어물 생선 취급 말라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화옹(和翁)의 소리다. 세 번째는 시 배움은 마치 참선 배움 같거니, 자재(自在)롭고, 원성(圓成)함은 몇 년이나 되었던고? 사령운(謝靈運)의 지당춘초(池塘春草) 한 구절 나오자, 천지(天地)가 놀라 떨며 지금껏 전한다네.<學詩渾似學參禪 自在圓成有幾年 春草池塘一句子 驚天動地至今傳>다. 도(道)의 경계(境界)는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다. 기천명중(幾千名中)에 한 개 아니면 반개(一個半個)라 했다. 요즘 가짜 도사(道士)가 많은 세상이다. 기본도 갖추지 못한 엉터리 사이비(似而非)가 판을 친다. 보는 눈이 없으니 가짜가 속여도 못 본다. 깨달음이란 대각자(大覺者)를 이른 말이다. 그래서 붓다(覺者)라 한다.
시인(詩人)도 선객(禪客)도 결론(結論)은 하나로 귀결(歸結)이다. 귀결처(歸結處)는 몰록 사물의 이치를 통찰(洞察) 깨침에 있다는 말이다. 깨치지 않는 소리는 공명(共鳴)이 없는 공허한 소리다. 공명(共鳴)은 하나의 울림이다. 송(宋)나라 공성임(龔聖任)이 화답시(和答詩)를 썼다. 시 배움은 마치 참선 배움 같거니, 말이야 안배해도 뜻은 못 전하네, 깨우치면 그 즉시 성율(聲律) 따윈 던져버려서 달군 돌로 하늘 구멍 막아서는 안 되지.<學詩渾似學參禪 語可安排意非傳 會意卽超聲律界 不須煉石補蒼天> 달궈진 작은 돌멩이 하나로 하늘을 막는다고 설치지 말라다. 선객(禪客)도 시인(詩人)도 달관(達觀) 고수(高手)가 되면 정형(定型)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각자(覺者)의 소견(所見)으로 읊은 시(詩)라야 된다는 말이다. 깨달음 없는 참선(參禪)은 몸 닦달 들볶음 자기학대다. 깨침이 없는 시(詩)는 말장난이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대오각성(大悟覺性)을 최종(最終) 목표(目標)로 삼는다. 남의 살림살이 오도송(悟道頌), 열반송(涅槃頌)을 성율(聲律) 운통(韻統) 평측(平仄)을 맞추다 보니, 날마다 왼 종일 남의 보물(寶物)만 세다 보니, 머리도 희끗, 자기에게는 반푼의 이익도(終日數他寶 自無半分錢)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내 본분사(本分事)로 돌아가자. 여여법당 화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