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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금같이 나오리라† 원문보기 글쓴이: 켈로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
[창세기 27:26~35]
26.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3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31.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32.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34.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35.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어떤 사람이 원숭이를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과연 원숭이에게도 부성과 모성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먼저 바닥에 철판을 놓고 불로 가열합니다. 그 철판 위에 어미 원숭이와 아기 원숭이를 놓았더니 어미 원숭이는 너무 뜨거워 펄쩍펄쩍 뛰면서도 아기를 안고는 놓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아빠 원숭이와 아기 원숭이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빠 원숭이는 뜨거운 바닥에 아기 원숭이를 놓고는 그 위에 편안하게 앉아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이런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극한 부성애를 가진 아빠들, 그리고 양육에 대한 관심도 엄마와 다르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만나 교회의 사명과 Action Plan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특히 가정 사역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이루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나누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 변하지 않는 가치관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가정’이고, 가정을 가장 가정답게 하는 것은 ‘성경적 원리’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가정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아주 강한 영향을 준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잭 프로스트가 쓴 [아버지 품에 안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존 트렌트와 게리 스몰리가 쓴 [축복의 언어]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먼저 좋은 아버지와 좋은 어머니가 됨에 대한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34절)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풍습에 의하면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축복을 베풀게 되어 있는데, 쌍둥이 동생인 야곱이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것이지요.
아버지의 축복을 받지 못한 에서가 부르짖고 통곡하는 장면이 바로 34절의 말씀입니다.
유대교 랍비인 예수 벤 시라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은 아들의 가정을 세워 주고 어머니의 축복은 그 가정에 좋은 것들로 채워 준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축복받지 못한 아들의 절규입니다.
아버지와 축복의 관계를 맺지 못한 아들의 아픔입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다]의 저자인 잭 프로스트는 성공한 사역자였지만,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내적인 문제로 인하여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열심히 사역하는 것이 그의 삶에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랑받지 못한 상처로 인하여 그의 가정 역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책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군인 출신이었던 아버지는 늘 자신에게 엄하게 대했고, 강제로 자신의 머리를 깎아버린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어느 날 집을 나가 마약을 파는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게로 찾아왔지만, 늘 아버지를 피해 다녔습니다. 1년의 시간 동안 적어도 400번 이상을 찾아온 아버지를 거절했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정도 받지 못했고, 떠나간 후에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아버지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는 그 상처로 인하여 나중에 목회자가 되어서도 ‘친밀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몰랐고, 열심히 사역했지만, 자신이 받은 상처와 같은 상처를 아내와 자식에게 주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그의 아픔 가운데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자신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지요. 유명한 예수님의 비유인 “탕자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prodigal son”이라고 하는데, 웹스터 사전에 보면 ‘prodigal’이라는 말인 ‘아낌없이 주거나 소비하는’이라는 뜻이랍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는 죄인의 행위에 대하여 초점을 두어 왔는데, 실제 예수님이 하시고자 했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자녀의 관계 회복에 더 초점을 두고 계셨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실패한 아들, 죄를 지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끝없이 은혜를 베풀고자 했고, 친밀한 관계를 이루고자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15장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이미 아들로 불림을 받은 우리, 그러나 그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우리에게 끝까지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바로 ‘탕자의 비유’라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구원의 메시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가 잃어버린 권세,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와의 교제와 친밀함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자기중심적이 되어 재산을 가지고 떠나갔으나, 끝까지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오늘까지 여러분의 신앙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것을 원했는지 말입니다.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지연될 때, 얼마나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교회는 축복을 받고, 병 고침을 받고,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는 장소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축복의 장소인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 그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한없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늘 아버지, 탕자와 같은 나를 받아 주신 아버지 때문에 한없는 은혜와 축복을 자녀들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축복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비결입니다.
복된 가정 만들기
첫째는, 애정 어린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27절에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을 비는 전통적인 모습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나이가 많아 죽을 때가 된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하는 모습. 아무리 아들이 장성해도 아들은 아들입니다. 아들을 가까이 불러 입 맞추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애정 어린 접촉을 통한 축복의 원리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네 살짜리 꼬마 소녀가 폭풍이 치는 어느 한 밤중에 무서움에 떨고 있었다. 뇌성과 함께 번개가 내리치는 순간, 아이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쏜살같이 달려나가 부모의 품에 안겼다.
“우리 예쁜이, 무서워하지 마라.”
아버지가 아이의 두려움을 달래려고 애를 쓰면서 말했다.
“항상 너의 곁에 계시는 예수님이 너를 보호해 주신단다.”
어린 소녀는 아버지에게 꼭 매달리며 말했다.
“아빠,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나를 안아 줄 사람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우리 신앙인들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양육해야 함을 압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우리에게 맡겨진 자녀들을 최선을 다해 양육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축복은 접촉을 통해 전달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당황스러워합니다. 대부분 어린이집은 그렇지 않은데, 몇몇 일이라는 것.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즘 미국과 독일에서는 아이들을 엄마들이 돌보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맡겨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와의 접촉입니다.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말이죠.
본문 26절에 보면 이삭이 아들에게 말을 합니다. “와서 내게 입 맞추라”
그리고 그 아들의 냄새를 맡고는 손을 얹어 축복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축복은 애정 어린 접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48장 9~10절에서 요셉이 자기 아들을 야곱에게 데리고 가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은, “입 맞추고 그들을 안고…”
애정 어린 접촉이 왜 축복이 되는지 조금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 몸에는 500만 개가 넘는 교감신경이 있습니다. 그중의 3분의 1이 우리의 손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손은 매우 민감합니다.
뉴욕 대학의 유아교육과 교수인 크리그(Krieger)박사는 안수의 효과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안수할 때, 안수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서 헤모글로빈 수치가 증가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왕성해지면 신체 조직은 더 많은 산소를 받아들입니다. 산소가 증가하면 에너지를 발생하게 되고 병이 있는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혹시 야곱이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안수할 때, “오 우리의 몸에 헤모글로빈이 증가했어!”라고 알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단지 할아버지의 애정 어린 접촉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접촉을 통해 축복이 전달되는 것이지요.
저는 안수하면서 “진액이 빠진다”는 경험을 합니다. 기도하며 손을 얹을 때, 그 간절함으로 인해 제 속에 있는 기기 빠져나갑니다. 단순한 기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애정으로 자녀를 만지고 접촉하는 것, 이것은 아주 중요한 성경적 축복의 원리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3~16절의 말씀을 보세요.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이 아이들을 안고, 만져주시며 축복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가정에 애정 어린 접촉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가정에서 이 사랑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어떤 신체적 접촉을 받았을 때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1위는, 부엌에서 일할 때 가만히 뒤에서 안아 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축복의 특권을 잘 사용하세요.
지난번에 중국에 갔는데, 백두 트레스디아스를 경험한 조선족 성도의 딸을 만났습니다. 광주 공항의 직원으로 취직해서, 제가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저를 안내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대로에서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간절히 축복을 빌면서 이런 감사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셔서, 이곳 중국 땅에서도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교회에서 만나는 어린이들의 머리를 꼭 쓰다듬고 지나가려고 노력합니다.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하지만, 손을 얹는 것이 귀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애정 어린 접촉으로 축복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
둘째, 마음속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이삭은 야곱에게 손을 얹었을 뿐 아니라 그의 입으로 축복을 표현합니다. 29절 말씀에 보니까,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어떤 축복을 구체적으로 빌어주기를 원하십니까?
“말의 권세” 다시 말하면 말로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축복의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셔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열국의 아비로 불리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시몬을 부르셔서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즉, 여러분의 자녀를 향한 표현 하나하나가 권세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있습니까?
복음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믿으십니까?
사실 가부장적인 유교 사회에서 자란 우리 아버지들은 표현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축복의 격려의 말을 잘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바로 여러분의 격려와 사랑의 표현을 들으며 자라고, 그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자녀들을 위하여 혹은 가족 간의 사랑과 축복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내일 이야기하면 되지”라는 생각입니다.
흔히 있는 일이지요. 부부가 맞벌이하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조금만 고생하고 참으면 가족들이 함께할 시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언가 이루어 놓으면, 가정이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장성한 아들이 대학가고, 군대 가고, 장가를 갈 때, 아무리 사랑을 표현하려고 해도, 축복의 말을 해 주려고 해도 늦을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결혼식 바로 전에 신부 대기실에서 딸에게 축복의 말을 전해주려고 하지만, 바쁜 신부는 어머니의 말을 들을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 내일 시간을 내야지!”라는 생각이 오늘 우리 자녀들과 가정에 축복의 말들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집을 장만하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잡으면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때는 이미 늦고 말 것입니다.
유명한 크리스천 교육가인 하워드 핸드릭스 박사는 2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면서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부부를 상담했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언제 했습니까?”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결혼식 날에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지요. 지금도 내 입으로 그 말을 취소할 때까지는 유효합니다.”
얼마나 삭막한 부부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지금 칭찬과 사랑의 말이 없어 굶주려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지금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아이들은 잘한다 잘한다 하면 더 잘하지요. 자녀들과 가정에 소망을 두고 축복을 표현하십시오.
셋째,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혹시 그런 CF를 기억하시나요?
손가락이 4개밖에 없는 딸, 희아에게 “너는 특별하다, 너는 특별하다.”라고 교육한 어머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팬이 되어 주셨습니까?
‘축복’의 핵심적인 개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것을 귀하게 여긴다.’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엎드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축복의 근원적인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상대방을 높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드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입니다.
시편 103편 1절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축복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분의 본질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축복한다는 차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녀의 본질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본질적인 가치, 아내의 본질적인 가치, 부모의 본질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7절과 28절을 보세요.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들을 가리켜서 밭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와 같다고 비유하며 칭찬합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는 말이 나옵니다. 22절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자녀를 향하여 특별한 가치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심하게 이야기하지만, 자녀들은 부모들이 하는 말을 통해 예언적인 말을 듣게 됩니다. 아니 오늘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여러분의 입술을 통하여 선포되는 말을 통해 예언적인 메시지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자녀와 가족들을 향해 말하는 미래의 언어가 얼마나 귀한지 아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문제점과 단점만을 지적해서 말한다고 합니다.
“너는 애가 왜 매일 그 모양이냐? 그래서 밥이나 먹고 살겠냐? 너 그렇게 공부하기가 싫으냐? 학교 그만두고 시집이나 가지 그러냐?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으면 집 나가서 일이나 해라!”
이 모든 말이 예언적인 말이 될 수 있음을 아십니까?
부부 싸움을 할 때, “당신하고는 못살아!”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제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병(炳) 삼(三)’ 성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석 삼자, 제가 그냥 목사가 된 것이 아니지요.
저는 수십 년 동안 식사 기도를 할 때마다 같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양식을 먹고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한번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의 말들을 생각해 보세요.
저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 가족들에 대한 구체적인 축복의 말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죄스러웠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 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가끔 돌아가실 때, 병원에서의 얼굴과 쓰러지신 이후에 운동하러 다니시던 초췌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제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정말 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분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꼭 필요한 분입니다.”라고 말하고 싶고요.
아내를 보면서, 다시 태어나도 만나서 같이 살고 싶은 사람, 당신은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딸을 바라보면서,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아팠던 아이. 그래서 부모의 속을 태운 것만큼이나 자신도 아팠을 딸을 생각하면서, 남겨진 삶이 모든 사람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딸이 되라고 말하고 싶고요.
아들을 바라보면서, 아픈 누나 때문에 늘 참고 양보하라는 말을 듣고 살았는데, 힘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꼭 쓰임 받는 아들이 되라고 축복하고 싶네요.
오늘 여러분의 입에서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 하나님 앞에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8-29절을 봅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결국, 야곱이 위대한 족장이 되지 않았습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지파를 이루게 되지 않았습니까?
야곱은 창세기 49장 8절에서 이렇게 축복합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여기 보세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현재를 보고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이 아닌 미래를 보고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장래를 축복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요즘 우리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마라톤을 통해 유명하게 된 자폐아 이야기,
장애인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진호의 이야기,
혼혈의 삶을 살았던 영웅 하인즈 워드의 이야기.
이들의 공통점은 현실에서가 아니라, 미래의 소망을 자식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다림이 축복이 됩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이요 사랑입니다.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신발을 신을 때, 늦게 신는다고 구박하거나 대신 신겨주는 것이 아니라, 신발을 신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을 때, 일으켜 세워주거나, 핀잔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걸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의 말씀 다음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헌신’이라 표현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할 바를 다 하면 그다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며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28)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우물을 팔 때마다 빼앗기고 쫓겨났지만, 그곳에서 우물을 파면 또 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짐과 풍성함을 허락해 주심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축복을 믿으며 아들을 축복합니다.
현명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축복을 베푸는 이 습관을 모델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시기를 원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을 빌 때, 모든 힘은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믿음을 가지고 축복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맡겨진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야곱의 축복>
Action Plan - 좋은 아버지와 좋은 어머니 되기
오늘의 Action Plan은 지금까지 어떤 것보다 단순합니다. 가정을 회복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만나 교회에서 가정사역을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너무나 다양한 사람, 다양한 세대를 향해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무리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도 부모들이 성경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교회가 우리의 삶에 가장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성경적 가치를 공유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좋은 아버지와 좋은 어머니 좋은 부부를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에 여러분이 참여하고, 배우고, 서로를 격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