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진도대교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다.
자전거는 해남 우수영에서 출발해서 진도대교를 넘는다. 진도는 올망졸망한 작은 산을 수없이 품고 있다. 그 산들의 능선을 자전거로 오르고 내릴 때 산하는 음악으로 변한다. 나는 아직도 그 음악을 해독하지 못한다.
진도대교 밑에서 바다는 겨울 들판을 건너가는 눈보라 소리를 낸다. 흰 갈기를 휘날리는 물살은 출정하는 군마群馬처럼 우우 함성을 지르며 명량鳴梁해협을 빠져나가 목포쪽으로 달려간다.
이 해협의 폭은 가장 좁은 거리가 293미터이고 최고 유속은 10노트이다. 여기가 한반도 전 해역에서 가장 사나운 물길이다. 이 물길은 하루에 네 번 역류한다. 해남반도에서 목포 쪽으로 달려가던 북서해류는 거꾸로 방향을 바꾸어 남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는데, 명량해협을 하루에 네 차례 이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한다. 물길이 거꾸로 돌아서는 사이마다 바다는 문득 잔물결 한 점 없이 거울처럼 고요해지고, 질풍노도를 예비하는 이 적막의 순간에 바다는 더욱 무섭다.
무인의 길
18번 지방도로는 진도대교로 명량해협을 건너간다. 이순신이 전라 우수영과 벽파진의 이 순신 전적비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18번 도로는 삼별초의 용장산성을 지나서 남도석성에 닿는다. 삼별초 대장 배중손裵仲孫은 이 남도석성에서 전사했고, 몽고대장 홍다구의 칼에 맞아 죽은 삼별초 임금 왕온王溫은 이 도로변 야산의 무연고 분묘들 틈에 묻혀 있다. 진도는 노래와 그림의 섬일 뿐 아니라 무인들의 삶과 죽음이 명멸한 섬이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된 이순신의 칼에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는구나一揮掃蕩 血染山河”라는 검명이 새겨져 있다. ‘물들일 염染’자의 공업적 이미지는 이순신의 무인다운 내면의 한 본질이라고 할 만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펜을 쥔 자들의 엄살이거나 자기 기만이기가 십상이다. 그 말은 정치적이다. 칼을 쥔 자들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문文은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으로서의 무武를 동경한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정직하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었다. 그의 칼은 다만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한 칼이었다.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 삼엄한 단순성에는 굴욕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멸적 정서가 깔려 있다. 그는 당대 현실 속에서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그가 남긴 시문 중의 한 절창은 이렇다.
가슴에 근심 가득 뒤채이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殘月照弓刀)
‘비출 조照’ 자 속에서, 달과 칼 사이에서,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하는 자의 살기는 극도로 억눌려 있다. 이 내면의 억눌림이 그의 외로운 전쟁을 버티어준 마음의 힘이었다. 이순신의 글은 영웅다운 호탕함이나 과장이 없고 무협의 장쾌함이 없다. 그는 악전고투 끝에 겨우겨우 이긴다. 그는 영웅 된 자의 억눌림의 비극을 진술할 때는 단호하게도 말을 아끼고, 온갖 정한情恨에 몸을 떠는 한 필부의 내면을 진술할 때는 말을 덜 아낀다.
한바탕의 전투를 치르고 바다에서 돌아온 날 저녁마다, 또는 전 함대를 전투 배치한 출정의 새벽마다. 몸에 병이 깊은 그는 요가 젖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 절망에 맞서는 그의 마음의 태도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고 거기에 일체의 정서를 개임시키지 않는 방식이다. 그때 그의 내면은 무섭게 억눌리고 그의 글은 칼의 삼엄함에 도달한다. 그는 많은 부하들을 베어죽였다. 부하를 죽인 날 그의 일기들은 “아무개가 거듭 군령을 어기기로 베었다. 바다는 물결이 놓았다”라는 식의 문체를 보인다.
백의종군을 시작하던 1597년 5월 16일의 일기는 “맑음, 오늘 옥문을 나왔다”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을 가두고 때리면서 사형의 빌미를 찾으려 했던 정치 권력의정당성 여부와 그 원한에 관하여 끝끝내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남해안 일대를 돌면서 망가진 배 12척을 수습해서 명량해협의 우수영에 포진했다.
명량해전을 보름 앞둔 1597년 10월 12일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은 탈영해서 도주했다. 고급 지휘관의 쩍전 탈영은 절망적인 사태였다. 이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일기는 다만 한 줄이다. “맑음, 오늘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
그의 일기에 나오는 ‘부안 사람’이라는 여자는 그의 첩이거나 애인이었던 모양이다. 이 여자는 이순신의 병영 가까운 곳에 거주했던 것 같다. 1594년 9월 15일의 일기는 “꿈에 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 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쫓아버렸다”라고 기록했다. 여자의 정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악몽인데, 꿈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가파르고 단호하다. 그는 절망을 부인하지 않고 절망을 중언부언하지도 않는다.
명량해협에서, 이순신의 싸움은 일인 대 만인의 싸움이었다. 정찰병들은 적선의 숫자를 보고하지 못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들이 명량으로 돌려온다”라는 것이 제1보였다 이 바다가 아군에게 유리하다고 적군에게 불리한 바다는 아니었다. 양쪽 지휘관 모두 이 바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왜장 마다시의 작전 목표는 교전이 아니라, 이 해협을 통과해서 서해안으로 진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함대는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에 올라타서 명량으로 들어왔다.
1597년 10월 26일 해남 앞바다는 상오 7시께 큰 사리의 만조를 이루었다. 마다시 함대는 이 만조의 앞자락을 타고 해남에서 발진했다. 마다시 함대는 오전 11시께 명량으로 진입했는데, 이때 해협은 최강 유속을 이루었다. 우수영에서 발진한 이 순신 함대 13척은 적의 진로를 정면으로 막아섰다. 이 좁은 해협에서는 피아간에 우회로가 없다. 물살은 이순신에게는 역류였고 마다시에게는 순류였다.
이순신의 적은 우선 일본 군대가 아니라 겁에 질려 도망가는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그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는 죽음의 힘으로 이 아수라를 돌파한다. 그는 죽음 앞에서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달아나는 부하들을 붙잡아놓고 그 대안 없음을 가르쳤다. 이 아수라 속에서 살길을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싸우다 죽는지 달아나다 죽든지, 군율에 죽든지 죽음의 방식만이 선택의 길이다. 명량은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사지死地이다.
해협의 물살이 바뀔 때 이순신은 공세로 전환한다. 명량 바다로 나가는 그의 마음은 칼에 시 한 줄을 새기는 그 단순성이다. 그리고 삶을 수식하지 않는 그 삼엄함이다. 대안 없는 운명 속에 대안은 있었다. 진도대교 밑에서 삶과 죽음은 대척점에서 서로 겨누며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바다는 수억 년을 이쪽저쪽으로 뒤치고 있었다.
…<하략>…
이순신의 내면은 무겁게 짓눌려 있고 삼엄하게 통제되어 있다. 그는 이 통제된 내면의 힘으로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한다. 『난중일기』와 그가 조정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들은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정치적 불운에 목숨을 저당잡힌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피난 정부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정치 상황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바다의 사실에만 입각해 있었다. 매일매일 바다 날씨의 미세한 변화를 그는 기록했다.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나는 오늘 슬펐다”라고까지만 기록하는 통제된 슬픔이었다. 그의 슬픔과 기쁨에는 수사적 장치가 없다. 이 통제된 슬픔의 힘이 “저녁 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기로 베었다.” 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이순신의 죽음이 ‘의도된 전사’였으며, ‘위장된 자살’이었다는 주장은 매우 신빙성 있는 정황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는 전후의 권력 재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다케다 신겐이 허수아비를 앞세우고 통과해나간 아수라를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으로 정리했다. 영웅이 아닌 우리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다. 역사는 모순이며 비애이다. 우리는 억눌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우리는 패션이 공격 무기가 되는 세상에서 살기 싫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힘이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카게무샤>는 슬픈 영화다.
―김훈, 『자전거여행』,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생각과 나무, 2-3~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