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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端의 追憶 #109, 동방교의 대기처 생활 모음
대기처라고 하면 말 그대로 ‘대기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세칭 동방교의 여러 은어(隱語)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지구의 종말, 곧 닥아올 불심판을 피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 빈집(원래 자기가 살던 집)을 초월(가출)해서 임시로 이 땅에서 머무는 장소라는 뜻이다. 즉, 무단가출한 동방교 신자들이 머무는 ‘집단합숙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장소는 서울에만도 여러 곳이 있었다. 수원정(용산), 수원장(명수대), 향림정(흑석동), 성무대(마포), 성수대(마포), 큰집(상도동), 기도처(후암동), 청해약국(도동), 청산루(후암동), 청해장(용강동), 주학목장(천안), 평택농장, 시흥농장, 삼청동, 용강동, 약수동, 옥수동, 성지(소사)등등... 기억나는 것만 이 정도다. 주로 알려진 곳이 이 정도이고 숨겨져 모르는 곳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뭇 요정이름 같기도 하고 무슨 누각이름 비슷한 이런 명칭들은 풍류가연 하는 노광공의 성품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빈집초월(무단가출)한 동방교의 신도들을 이런곳에 배치하여 연단선님이라고 이름 붙여진 어린 남녀 청소년들은 낮이면 밖으로 나가 껌을 팔거나 행상을 하여 이제 곧 닥아올 천년왕국에서 왕의 씨가 된다는 부푼 희망에 부풀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춥거나 덥거나 국경일이거나 공휴일이거나를 막론하고 춘하추동 하루도 쉬지않고 동방교의 할아버지(교주 노광공)에게 돈을 벌어 충성을 바치고 있었고, 일반 대기자들중에 여자들은 주로 밥하고 빨래하고, 마당이며 온 집안 구석구석에 먼지 하나 없도록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만 했다. 이것을 ‘청소청결, 정리정돈’이라 이름하여 사람을 달 달 뽁는 것이다. 남자들은 이곳 저곳에 끌려 다니면서 이고 지고 나르는 인력제공에 동원되어 무임금 막노동에 내 몰리는 것이다. 식사는 오작죽 팔작밥이다. 이것을 동방교의 ‘근검절약정신’이라 한다. 거친 노동에 팔작밥과 오작죽을 먹이는 것을 좁은길(동방교)의 ‘근검절약정신’이라고 지금도 핏대 세워 외치는 것이다. 쌀 한홉을 열작이라 말하는데 그 중의 팔작정도를 한 끼 식사량으로, 오작정도로 끓인 죽을 한 끼 음식으로 먹이는 이것은 동방교의 근검절약이 아니라 노광공의 인색(吝嗇),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무엇을 하고져 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이다.
경기도 소사의 소래라는 곳에 있던 ‘성지’라고 부르는 곳에 자기의 무덤을 제왕의 분묘같이 꾸미려고 했던가, 충청도 금산땅에 지어놓은 청남수양관에 일백수십억을 퍼부어 노광공 노영구 두 부자지간의 우상화를 위한 기념관을 짓기위한 자린고비 인색이었던가... 우주만상의 온갖 조화를 한손에 움켜잡은 창조주요 재림주의 모습으로 군림하고 싶었건만 아비는 당뇨합병증으로 요절하고 자식은 파킨슨병에 발목잡혀 낯선 이국땅에서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 그들 부자의 허망한 삶을 생각하면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인생사의 숨겨진 섭리를 보는 것 같다. 모여진 재물에 주인이 없어졌으니 서로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후대의 군상들도 가관이다. 음습한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동방교(좁은길)를 떠나자니 먹고 살 일이 막막한가, 이단사설에 사로잡혀 천지분간이 안되는 얼마 되지않는 신도들 위에 군림해 보고싶은 소집단의 영웅심리인가... 새롭게 자라난 동방교의 모태 신세대들은 상황파악이 벌써 끝나 제갈길을 찾아 떠났고 오랜 세월 연속적으로 세뇌된 얼마 안되는 잔존 신도들은 편이 갈라져 서로 원수처럼 되었고 난감한 세월만 흘러가고 있으니... 요즘은 옛날처럼 무단가출(빈집초월)하는 신도들도 거의 없고 위험스레 그것을 종용하지도 않으니‘대기자’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태생적 동방교 모태신도이거나 이단사이비인줄도 모르고 입교한 어린 청소년 신도들중에 장학사업을 미끼로 공개모집을 통하여 집단수용으로 은밀하게 교육을 시키거나 옛날의 대기자들 중에 나이들어 오갈데 없어 할 수 없이 수용하고 있는 신도이거나 과거부터 세뇌되어 어쩔 수 없는 개인적 꼴통 열혈분자들을 일컬어 ‘수도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일반 신도들과 구분하고 있다. 도대체‘수도자’라면 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수도(修道) 한다는 것일까...
과거의 대기자와 같은 부류의 신도들을 요즘은‘수도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수도(修道)의 사전적 의미는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고 수양을 쌓는 단계, 또는 어리석음을 없애고 청정한 마음을 지키며 수행 정진하는 것’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무슨 거창한 면이 있는것 같이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을것 같아 그 시절 세칭 동방교 대기처에서의 대기자(요즘 말하는 수도자)생활을 엿볼수 있는 본 카페의 여러 글들중에 몇 가지를 추려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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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처의 대기자들은 깜깜한 새벽에 각 일터로 분산 배치되어 저녁이 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본부(수원정)로 집합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식 ‘교주종교’의 사상주입 교육과 일일 성과점검, 개인 신앙평가 등 꼭 밤 12시에 예배(점호)가 시작된다. 나는 몇 년간 그 예배에서 하나님, 예수님, 성경, 찬송가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곳에서는 교주가 하나님이고, 성경은 교주어록을 보조하는 부교재에 해당하며, 찬송가는 유행가 곡조에 가사를 개작하여 부르는 것으로 상당히 염세적이다. 삼손 목사의 설교가 시작된다. 아니 이것은 ‘설교’ 라는 말은 절대로 어울리지 않으며,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군대에서 군기를 잡는 점호 시간이다. 군대에서 이유란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다. 특유의 경상도 억양의 사투리, “무씬 노무(무슨 놈의) 일을 그 따위로 하고 있어!” 두들겨 팰 태세는 항상 완료되어 있다. 조직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는 누구 한 명은 시범 케이스로 자신의 몸을 교관(간부)들의 현란한 구타 기술에 샌드백이 되어주는 수밖에 없다.
(샬롬 요엘 ‘이상한 공동체’ 중에서)
이 수원정에서는 낮, 초저녁, 심야로 구분지어 예배를 보는데, 낮과 초저녁은 일반 신도, 심야(深夜)에는 그야말로 정예(精銳) 성도들이다. 그들은 전국에서 뽑힌(빈집초월 한) 자들로서 신분상의 위상(位相)과 계급이 일반 신도와는 천지(天地) 차이가 난다.
(샬롬 요엘 ‘한국의 기독교 이단’ 중에서)
새벽 다섯시, 마지막 순번의 경비를 서고 있던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기상∼’, ‘기상∼’을 외쳐댄다. 아. . . 제일 듣기싫은 소리다. 웬수같은 소리에 떨어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눈을 비비면서 그래도 일어난다. 머무적 거리다가 정화수 기도시간에 늦으면 안된다. 정신이 희미하다는 질책을 받게되고 천당가는 것은 나중 문제고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이다. 첫 새벽부터 귀싸대기 얻어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찬물에 대충 얼굴을 문지르고 '수원정' 마루바닥 이쪽 저쪽 구석에 모두들 꿇어앉아 동서남북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두손을 모으고 정화수기도를 하고 있으면 적정한 시간에 아침예배를 시작한다는 신호가 들린다. 정화수 기도를 일찍 마친 대기자들이 제단을 향하여 앉아 있으면 그 뒤로 주섬주섬 모두 뒤따라 앉게되고 바로 아침 예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침예배는 대부분 간단하게 끝난다. 인도자가 성가 한곡을 부르면 모두 따라 부르고 성경 한구절 정도 찾아 읽고 간단한 설교를 하게 된다. 이것을 설교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잡설 수준이다. 할아버지(교주 노광공) 은혜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세칭 동방교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세뇌수준이다. 이어서 오늘의 중요한 지시사항이 각 사람에게 하달되고 주기도문으로 아침예배를 마치게 된다. 주로 양학식 베드로목사가 주관했지만 때로는 그가 부재중일때는 김태문 삼손목사, 갈렙목사등 다른 사람이 주관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각자의 일터로 '수원정'을 출발하게 되는것이다. 각자 소임이 부여된 다른 대기처로, 농장으로, 주간기독교 신문사로, 총회 사무실로 . . .
(이단의 추억 # 44, '수원정'에서의 하루(Ⅰ)-순회자의 길 중에서)
이때는 항상 배가 고팠다. 배를 채울 다른 방법도 없었다. 이때부터 자정전후에 시작되는 마지막 집합시간까지 약간의 짬이 생긴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사람, 양말이나 빨래를 하는 사람, 구석구석에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 성경책을 보는 사람, 끼리끼리 모여 오늘 일어났던 여러 잡담들을 나누는 사람등 '수원정' 내부가 다소 어수선 해진다.
밤 12시 전후가 되면 집합싸인이 떨어지게 된다. 마지막 점호가 시작되는 것이다. '수원정'으로 들어와야 할 사람이 다 들어왔는가, 없어진 사람이 없는가 이때 점검하는 것이다. 미리 머리를 조아리고 줄지어 앉아있는 갈렙목사, 김태문 삼손목사등을 위시하여 여러 대기자들 앞에서 주로 양학식 베드로목사가 성경 찬송 한 두권 올려 놓을만한 넓이의 허리높이 정도되는 조그만한 탁자앞에 서서 ‘거어룩타아 십자아성에 문이 여얼려 부우름이여’ 하는 성가 1장을 선창하면 모두 따라 부르게 되고 그 소리를 듣고 미쳐 참석하지 못한 대기자까지 모두 모이는 것이다. 어떤때는 다정다감한 양학식 베드로목사인데 어떤날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쌍소리를 내뺏으며 군기를 잡기 다반사다. 하루일과에 피곤하여 졸고 있으면 어느새 다가왔는지 뺨따귀에 불이 나기 일쑤고 성경 찬송이 날아가는 것은 신사요, 앞에 있는 탁자를 불쑥 치켜들고 공중으로 날릴 기세다. 그가 자기도취에 빠지면 시간은 밤 1시를 넘기고 2시를 넘기기도 예사다. 그야말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난리 법석이 벌어진다. 일반신도(대기자들은 그들을 평성민이라고 불렀다)들을 위한 낮시간의 집회와는 너무나도 분위기가 다른, 야밤의 대기자들 집합시간은 그야말로 칼바람부는 살벌한 동토(凍土)의 나라다. 낮시간에 잠간씩 들렀다 가는 일반신도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는 해병대식 순검의 시간이다. 평성민들에게는 웃음을 띠고 자애롭게 표정관리를 하던 그들이 이렇게 돌변하는 사태를 그 누가 알겠으며 상상이나 해 보았으리요 . . .
마지막 집합을 마쳐도 끝이 아니다. 김태문 삼손목사가 구석으로 나를 부른다. ‘엎드려 뻗쳐’를 시켜놓고 어린아이 팔뚝만한 작대기로 인정사정없이 허벅지를 10여대 후려친다. 아파 죽을 지경이다. 웬지 내가 마음에 들지않는 모양이다. 이유는 모른다, 반항하면 더 두드려 맞는다. 차라리 빨리 두드려 맞고 끝내는 편이 낫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기록해야 겠다. 이제 경비순번이 남았다. 매주 지방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순회자도 이곳에서 정신무장을 다시 하고 세칭 동방교의 각종 기관에서 일하는 대기자, 연단선님 순회자등 항상 10여명의 남자들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 경비는 이들의 몫이다. 30분 정도씩 경비순서가 칠판에 기록되는데 제일먼저 들거나 제일 마지막에 순번이 드는 경우는 운수대통한 날이다. 오늘 첫 번째로 순번이 들면 내일은 다음 순번, 이렇게 주로 순서대로 돌아가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한밤중의 중간쯤에 경비순서가 들게 되면 억장이 무너지는 날이다.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이곳 저곳으로 찾아 들어가 잠을 청하게 되는데 나는 주로 동쪽 골방하나에 들어가 부산에서부터의 친구인 D와 둘이서 잠에 골아 떨어지게 된다. 잠이 들기전 잠시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나는 주로 이노무 '수원정' 생활이 못마땅해서 늘 투덜거리는 쪽이었고 그는 항상 나를 달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같이 참아보자고. . .
(이단의 추억 # 45, '수원정'에서의 하루(Ⅱ)-전도사의 길 중에서)
밤12시 전후해서 '수원정'에 기거하는 여러종류의 대기자들이 모두 모여서 점호형식의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보통 10-20명 정도 되었다. 오늘 하루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고 반성하고 내일의 정신상태를 가다듬는 칼바람부는 일종의 점호같은 시간이다. 세칭 동방교에서의 중심거점인 이곳 '수원정'의 정신무장 상태가 무너지면 동방교 전체의 정신상태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전국 각지의 세칭 동방교에 정신무장의 강도가 파급되는 것이다. '수원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어떤 진리말씀(설교를 그렇게 불렀다)이 나왔더라는 등 순회자들을 통하여 각 지교회로 일파 만파 퍼져 나가는 것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남자들은 순번을 정하여 돌아가면서 잠을 안자고 경내를 지키는 경비를 서게 된다. 보통 30분 정도씩. 그러고도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야 되는 강행군이니 얼마나 피곤이 쌓이겠는가, 순회 나가는 길 버스안에서 골아 떨어져서 내리는 정류소를 지나치기는 다반사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였다. '수원정'의 동쪽에 있는 골방에 일부러 내 친구 D와 같이 붙어 자면서 ‘나는 (부산으로) 내려 갈란다’ 말하고 물론 그는 한사코 말렸다.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그러면 나는 좁은길(세칭 동방교를 그렇게 불렀었다)을 배반한다는 자책감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 참!’을 연발하곤 했었다.
(이단의 추억 # 49, 탈출, 그 깊은 잠 중에서)
마리아장노님이 주방 담당을 하셨는데 연세가 무척 많으셨고 아들이 모셔갈려고 해도 꿈쩍없이그 자리를 지키셨어며 굽은 허리를 하시고도 개밥까지 챙기셨던 그분도 참 궁금합니다. 당연 돌아가셨겠지만요. 이땅 좁은길 안에서는 고행을 많이 할수록 하늘나라에 재물이 쌓인다고 사상교육을 치명적으로 받았어니~ 이레할아버지 오시면 이깟 육신의 고달픔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시면서 자녀들과의 고리를 끊어셨죠 슬프게도..@@
어느날아침 장노님이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하시면서 찬장에 밥이 없어졌다고 그 많은 밥을 누가 다 먹어 치웠다고 난리가 나셨었지요 .
하박국 이저씨!
그렇게 기계처럼 농장일, 제2축사도 지으시고 동분서주 일을 많이 하셨지만 느을 배고팟겠지요. 그날 아침 배탈이 나서 체조시간에 결국 못나오셨답니다 ㅠ ㅠ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까웁지요
힘센 장정이 일에 비해 얼마나 먹는게 부실했어면 밥도 훔쳐먹고~~총각이었던것 같았는데
어디선가 행복하게 잘 사셨어면 좋겠어요.
아랫동네 남자애 하나가 남자숙소에 기거하면서 소똥도 치우고 목장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애가 있었는데 참눈이 잘 생겼었어요. 너무 가난해서 걔 엄마가 밥만 먹여달라고 보낸것 같았어요. 그분 엄마가 한번씩 오시곤 했는데 역시 엄마의 눈이 젊었을땐 이뻣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문제는 걔 여동생이었어요. 오빠 만나러 온다고 찾아왔는데 짧은 치마에 굽 높은 샌달을 신고 긴 머리를 하고 나타났었지요.
역시 눈이 장난아니게 예뻣어요~~ㅋㅋ 아휴 호수같이~~
남자도 아니고 여성 동지들이 말은 아무도 안했지만 단체로 시험에 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였답니다. 거무티티한 작업복에 어디 하나 다듬고 가꿀 기회도 없이 매일 고구마도 캐고 콩 추수도 하고~~ 육신을 가꾸는 자체도 죄였어니까요.
(akj3180의 답글 중에서, -이단의 추억 # 56 주학목장의 밤- 답글)
정화수기도란 조그만 차상같은 나즈막한 탁자위에 종바리 같은것을 놓아두고 거기에 매일 자정에 주전자에 받아놓은 물을 한잔 가득히 부어 놓고 그 앞에서 두 손을 펴서 가슴께에 모으고(성화에 그려진 사무엘의 기도자세, 세칭 동방교에서의 기도자세는 전부 이렇게 통일되어 있다) 무릎을 꿇어앉은 자세로 기도를 하는데 맨 처음 동쪽을 향해서, 그 다음은 돌아 앉아 서쪽을 향해서, 그 다음 남쪽을 향해서, 마지막은 북쪽을 향해서 기도를 하는것이다. 무슨 기도를 그리도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간절하게 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은 두손을 비벼가면서 열심히 중얼대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길이 없지만 꼭 무당 집 잡신에게 무엇을 비는 형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화수 기도를 마치고 나면 그 종바리 물을 서로 나누어 마시기도 하였다. 지방에서는 믿음이 솟아난(특출하다는 세칭 동방교식 표현) 신도들이 새벽 일찍 산속 깊은곳 까지 일부러 가서 정화수 기도할 물을 옹달 샘에서 떠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도시에서는 자정에 수돗물을 받아 놓았다가 사용하였다. 정화수 기도는 가족 모두가 세칭 동방교의 신도인 경우에는 가정집에서도 할 수는 있으나 여건이 허락하는 집이 많지 않았고 세칭 동방교의 성전에서는 반드시 시행하던 제도였다.
(이단의 추억 # 25, 신생활이라는 것 중에서)
천국 가기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대기처에 들어온 사람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강행군의 연속이다. 어떤 사람은 농장에 가서 하루종일 노동하다가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고 어떤 사람은 쉴새없이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이고 지고 나르고 수리하고. . . , 모든 것을 가능하면 돈 들이지 않고 근검절약(?)해서 순전히 노동력으로만 해결하고자 하는 세칭 동방교의 특성 때문에 항상 일속에 파묻혀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검절약이 아니라 노동의 댓가없는 무임금 착취의 전형이고 오작죽 팔작밥은 식비를 줄이기 위한 세칭 동방교 교주의 지독한 구두쇠 행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악착같이 긁어모아 어디에 쓰려고 했던지, 그 욕망의 끝은 어디였는지, 돈이란 가질수록 배가 고프다는 사실, 그리고 한 인간이 욕망의 늪에 목을 매고 허위적 거리다가 한세상 무참히 가버리는 참담한 모습을 세칭 동방교에서 볼 수 있었다. 여자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조금만 틈이 생겨도 집안 구석 구석 쓸고 딱고 청소하는 일만 해도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동방교가 자랑하는 정리정돈이란 이를 말한는데 즉, 시간의 틈이 생기지 않게 만들어 잡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잡생각이 무성하면 도망자만 양산되기 때문이다. ‘팔작잡에 오작죽’은 대기처 생활의 기본이다. 한사람 한끼 식사량이 쌀 한홉이 안되는 팔작(0.8홉)밥이라는 말이다. 죽은 오작(0.5홉)이고. 세칭 동방교에서 그토록 입이 아프게 자랑하는 근검절약정신은 이것을 말한다. 바로 인색(吝嗇)일 뿐이다. 혈기왕성한 청년의 식사량으로는 팔작밥 오작죽은 너무 배가 고프다. 거의 영양실조 수준인데 매일 매일의 할 일은 만만찮다.
(이단의 추억 # 40, 야밤에 춤추는 빳다 중에서)
이땅의 정상적인 모든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드릴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무리하게 된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한복음 14:14) 그러나 세칭 동방교의 신도들은 ‘여호와 이래 조부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무리 한다.
(이단의 추억 # 2, 세칭 동방교의 주요 용어설명)
노광공을 이래 할아버지요, 이땅의 창조주, 재림의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는것이 아니라 은밀하게는 ‘이래 조부님(노광공을 지칭)의 이름으로 기도’ 하는 세칭 동방교의 구(舊)성민 신도에게는 가당찮은 질문이 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예수는 역사속의 4대성인 정도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이단의 추억 # 72 인연깊은 친구 D 중에서)
나는 퇴근 후 곧 식사를 하고 초저녁에 서너시간 잠을 잔 다음 열시 정도에 일어나 재경이가 낮 동안 양목사의 구술을 정리한 내용을 듣고 함께 개요를 짜서 살을 붙여 글을 만들었다. 특집은 하나의 큰 주제를 너댓개의 제재로 나누어 썼는데 다섯 개라면 세 개 정도는 재경이, 나머지는 내가 맡아 썼다. 그러다 보니 청해의원은 나의 거처도 되어 버렸는데 그곳에는 애초부터 의사는 없었고 두어명의 간호사가 있었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정식 간호사 자격을 가진 사람들로서 사무실 아래층의 청해약국과 함께 주로 대기자들의 진료를 담당하는 일이 주업무였다.
서울 안의 각 대기처, 지방의 파송 전도사 및 연단선님들 중 지병을 가진 성민들이 이따금씩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고 약을 얻어 갔다. 때로는 입원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의사는 없었지만 간호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았던 것 같다. 나는 가끔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환자들은 여자가 월등 많았는데 대부분 위장병, 심장병 등의 고질적인 병들이었고 계속되는 긴장, 조악한 식생활 등이 원인이었다. 지방 파송전도사일 경우엔 사이비 종교라는 이유로 주위의 핍박을 받기 일쑤여서 평성민들의 가족들로부터 기습적인 가택수색, 침입 등을 당할 위기감 속에 살다보니 심장병을 얻게 된 것이었고, 대기자나 연단선님들은 열악한 주거환경, 영양의 결핍 등으로 위장병을 얻게 된 것이었다.
(내 영혼에 햇빛비치니 ⑤ 갈등과 탈퇴(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