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남한산 일대의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핵심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서·남 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시설 및 군사훈련시설이 남아 있다.
성곽(사적 제57호)과 행궁(사적 제480호) 등 국가지정문화재를 비롯해 유형문화재(6점), 문화재자료(2점), 기념물(2점) 등 유적이 즐비하다.
남한산성은 둘레 11.76㎞, 면적 52만8000㎡인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 때 왕성(王城)으로 처음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신라 문무왕 13년(673)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는 기록도 있다.
남한산성이 지금 모습으로 대대적인 보수를 한 것은 밖으로는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안으로는 이괄의 난을 겪은 1624년(인조 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에게 산성 축조를 명했다. 2년 후 둘레 6297보의 성곽 안에 여장(女墻·성 위에 낮게 쌓은 담) 1897개, 옹성(甕城·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 3개, 성랑(城廊·성 위에 세운 누각) 115개, 문 4개, 암문(暗門·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만든 작은 성문) 16개, 우물 80개,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 73칸을 두었다.
남한산성의 방어는 5군영 중 하나인 수어청이 맡았다. 수어청에는 동서남북 네 장대(將臺)를 두어 각각 진을 치게 했다. 이 가운데 서쪽의 수어장대만 현재 남아 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 하지만 강화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로 나아가 머리를 땅에 닿으며 항복했다. 자신이 축조한 성에서 당한 치욕이었다.이후 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1964년 동문을 새로 짓고, 66년 연무관과 현절사, 67년 지수당과 영월정, 69년 남문, 72년 연무대와 이서사당, 74년 연못과 성곽 부분을 각각 보수했다. 90년대부터 남한산성 일대가 등산로로 각광받으면서 주변에 음식점과 러브호텔이 난립하기도 했으나 2000년대 들어 일제 정비에 나서 산성 입구에 주차장과 함께 한옥 음식점 및 숙박시설을 조성했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조선시대 20여개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추었다. 국가전란 시 임시수도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다. 또 관아(행정)시설이 300년간 운영된 조선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도시이기도 했다.
남한산성이 파란만장한 한국사를 상징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현대 도시생활과 밀접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세계유산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석굴암·불국사(1995) 창덕궁(1997) 수원화성(1997)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 경주 역사 유적지구(2000)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 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남한산성 (1963.1.21. 사적 제57호로 지정.2014년6월 2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자문기구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남한산성에 대해 실사를 벌인 결과 아래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의거 '등재(Inscribe) 권고' 판정을 내렸습니다.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에 축성된 남한산성은
1.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역사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게 건설된 산성입니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17세기 초, 중국 만주족이 건설한 청나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여러 차례 개축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은 승군이 동원되어 축성되었으며 이들이 산성을 지켰습니다.
2.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전해온 성제의 영향과 서구의 화기 도입에 따라 변화된 축성 기술의 양상을 반영하면서 당시의 방어적 군사 공학 개념의 총체를 구현한 성채입니다.
3. 남한산성의 성곽 안쪽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군사·민간·종교 시설 건축물의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한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출처:지식인
첫댓글 우리 나라. 남한산성의 . 역사을. 자세히.올려주셔서.다시 배우고 갑니다
항상열열에 감사합니다~~
병자호란의 전개
청이 침입하자 조정은 극도이 혼란에 휩싸입니다. 침입 14일 만에 청군이 개성에 다다르자 도성내의 주민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합니다.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인조 자신도 그날밤 도성을 빠져 나가려고했으나 벌써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길을 봉쇄하였다는 보고를 듣자 이를 포기하였습니다.
인조는 대책을 논의한끝에 세자와 백관들을 대리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합니다.
이날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떠나려했지만 폭설이 내려 포기합니다.
남한산성에는 약 50일 정도 버틸수있는 식량이 있었습니다.
청태종과 청군은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군사 20만에 항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