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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세상은 각자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까닭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며, 오늘날에도 팔레스타인은 ‘중동의 화약고’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나라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나라 없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나라가 없었으나 유대교를 믿고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한편 어느 백인 혈통의 한 민족이 있었는데 유대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그들의 혈통은 황인종 아브라함 혈통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교를 믿으면서 자기들이 유대인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그들은 혈통적으로 가짜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민족이 한 땅에서 모여서 살면서 자기 나라를 형성하고 살아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민족은 있는데 나라가 없어서 흩어져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1. 왕들이 전쟁을 만들었습니다(창 14:1~2).
창세기 14장 1~2절에 “신알의 왕, 엘람의 왕, 고임의 왕의 날에 되며. 그들이 소돔의 왕과 고모라의 왕과 전쟁을 만든지라”라고 하였습니다.
19세기 동안 제국주의가 팽배하며 여러 열강이 식민지를 세우게 되고 그 힘 있는 나라들 가운데는 영국과 프랑스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그 서쪽으로는 지중해가 위치하는데 이 지중해를 통하여 유럽 대륙하고 아프리카 대륙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지중해를 차지하려고 역사적으로 제국들이 여기에다 눈독을 들였는데 2천 년 전에 로마제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유다는 속국이 되었습니다. 영국도 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지중해 남쪽에는 홍해가 있는데 둘을 연결하는 운하가 있는 것입니다. 배들이 지중해에서 홍해로 왔다 갔다 하면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데, 그 이권이 엄청난 이권입니다.
운하를 통과하면서 통행료를 내는데 그 이권을 빼앗기지 아니하려면, 영국은 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가짜 유대인이 있습니다. 동유럽계 백인종 혼혈인 아시케나지로 진짜 유대 민족은 지중해·중동계 셈족 세파라디입니다.
이 백인 가짜 유대인들도 나라가 없으므로 나라 건설을 원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시온에다 나라를 세우자고 주장하는 민족주의를 “시온주의”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레반트 지역의 영토 분할을 위한 비밀협정을 맺었고, 팔레스타인은 두 나라가 함께 통치하기로 잠정 결정하였습니다.1)
영국의 사이크스는 팔레스타인을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은 영 제국이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 울타리였습니다. 1917년 사이크스는 시온주의 지도자들을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사이크스는 영국과 시온주의자들의 이익이 같음을 확신하였습니다.2)
영국군은 예루살렘을 목표로 시나이와 팔레스타인 남부로 진격하였습니다. 밸푸어는 월터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서한(書翰)을 보냈습니다.3)
역사학자들은 고향 건설의 이 편지를 ‘밸푸어 선언’이라고 부릅니다. 이 편지는 이질적이고도 복잡한 동기들이 모여 탄생하였습니다.4)
영 제국의 입장에서 팔레스타인의 유용성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연합국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지원이 주는 가치가 컸습니다.5)
그러나 하임 바이츠만이 없었다면 모든 일은 생기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러시아 태생의 바이츠만은 영국에서 화학자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아세톤 생산 공정은 연합군의 폭발물 산업에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하나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바이츠만은 세계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바이츠만은 끈기로 영국 관청에 드나들며 설득을 벌였습니다.6)
바이츠만은 “탁월한 화학자이자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가되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현인의 지혜를 품은 사람이었습니다.7)
바이츠만은 웅변가로 무서울 정도로 설득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시온의 성취를 위해 지지를 모으고 양성하고 집중하였습니다.8)
선언이 발표되고 5주 후 영국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렇게 군정이 시작되었으나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이 크리스트교 제국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점령지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 칼리프와 술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모슬렘 사람들이 유대인의 고향을 건설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영국은 이슬람 당국을 강화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우선 카밀 알 후세이니를 무프티에서 대 무프티로 격상시켰습니다. 대 무프티는 곧바로 대중을 안심시키며 영예에 보답하였습니다.9)
그러나 설득은 쉽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아랍 언론을 통해 밸푸어 선언의 내용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무사 카짐 후세이니는 아랍인을 대표해 영국 군정에 편지를 보내었습니다.10)
무사(모세)는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무사의 아버지는 예루살렘을 대표하여서 오스만 의회에 진출하였으나 이제 자신이 대표하던 지역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무사는 돌아오면서 석탄 운반 장치에 빠져서 갈비뼈를 다쳤습니다. 배에 있던 유일한 의사가 그를 치료하였습니다. 아랍어를 구사하는 예루살렘 출신의 유대인 수의사였습니다.11)
이 여행에서 무사는 시온주의 유대인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들 유대인은 시온주의 운동의 찬가인 <희망>을 우렁차게 불렀는데, 무사는 그들에게서 경멸의 기색을 느꼈습니다.12)
바이츠만은 강을 건너서 아랍의 영웅 파이살의 주둔지로 갔습니다. 여기서 둘은 아라비아의 T. E. 로런스 중재로 협정을 맺었습니다. 파이살은 협정에서 밸푸어 선언을 사실상 지지하였습니다.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은 별도로 유지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13)
둘 사이에 존재하는 인종적 연대감과 오랜 유대감을 염두에 두는 때에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 열망 달성의 가장 좋은 법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파이살은 아랍의 꿈을 실현하여 달라고 조건을 걸었습니다.14)
미국도 밸푸어 선언에 찬성하였습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선언에 대한 지지를 재차 밝혔습니다.15)
이듬해 1920년 연합국은 레반트 지역의 분할을 공식화하였습니다. 옛 오스만제국 예루살렘 지구와 베이루트, 다마스쿠스의 일부 지역이 ‘팔레스타인’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창설된 국제연맹은 영국에 위임통치권을 부여하였습니다.16)
유대인은 이미 거기에서 임시 정부를 발 빠르게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시온주의자 집행부는 이민에서 재정까지 모든 일을 처리한 것입니다.17)
바이츠만의 성향은 자유주의, 심지어 자본주의에 가까웠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는 노동계 시온주의자가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은 자신과 유사한 사회주의 성향 유대인 이민을 선호하였습니다. 강력한 노동조합연맹에 유대인 중에 4분의 3이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이 노동조합연맹은 유대인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로비를 펼쳤습니다.18)
그 반면, 아랍인들의 관심은 예루살렘이 아닌 다마스쿠스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대시리아 건국을 꿈꿨습니다. 휴전 몇 달 후, 하지 아민은 그러한 왕국의 군주로 파이살을 언급하며 예루살렘의 신문에 그러한 취지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습니다.19)
예루살렘의 저명인사들이 모여 제국주의와 시온주의를 규탄하였으며, 첫 팔레스타인 아랍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20)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시리아 편입을 요구하였습니다. 시리아 남부가 대시리아 독립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21)
한편 이 시기 무사는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아마도 팔레스타인 아랍인으로서는 처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사는 남들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무사는 동료 학생보다 주로 교수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전공은 법학이었지만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22)
2. 왕들이 전쟁을 만들었습니다(창 14:1~2).
창세기 14장 1~2절에 “신알의 왕, 엘람의 왕, 고임의 왕의 날에 되며. 그들이 소돔의 왕과 고모라의 왕과 전쟁을 만든지라”라고 하였습니다.
봄은 예언자 모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는 계절이기도 하였습니다. 무사 축제 때는 사해 근처 사원까지 이슬람교도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104년 전 1920년에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깃발을 들고 몰려왔습니다. 군중의 규모는 전쟁 때보다 훨씬 많은 6만여 명이었습니다. “독립”이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23)
1,000여 년 전의 아랍 정복을 이야기하며 군중이 외친 내용이 있는데, “우리는 칼로 이 땅을 쟁취했다!”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우리는 칼로 지킬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하지 아민은 파이살의 초상화를 들고 “우리의 왕이다.”라고 외쳤으며, 무사 후세이니 시장은 아랍인에게 “피를 흘리자”라고 호소했습니다.24)
구시가의 군중은 유대교의 회당과 상점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남자는 유대인 구두닦이가 맞으면서 도망칠 때까지 때렸습니다.25)
영국은 계엄령을 선포하였지만, 회복될 때까지 사흘이 걸렸습니다. 유대인 다섯 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넘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총탄에 관자놀이를 맞고 창문에서 떨어져 숨진 소녀도 있었습니다.26)
경찰은 200명 이상을 체포하였습니다. 그중 4분의 1가량은 유대인이었습니다.27)
블라디미르 자보틴스키의 자택에서는 무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자보틴스키에게는 15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습니다.28)
시장이었던 무사 카짐 후세이니는 선동죄로 해임되었습니다. 그 조카인 하지 아민은 10년 형을 받았으나 피신하였습니다. 후세이니 가문의 숙적 나샤시비 가문의 수장이 시장이 되었습니다.29)
파이살은 다마스쿠스에서 자신을 시리아 왕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연합군은 시리아 위임통치령을 프랑스에 넘기려 했습니다. 프랑스는 파이살을 궤멸시키고 시리아 위임통치를 시작했습니다.30)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서로 피를 흘리고 공격하고 싸우고 폭탄 테러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일은 바로 100년 전에 뿌린 씨앗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의 피를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 돌리라고 한 것이고, 세계 각 나라로 흩어진 유대인이 돌아온다는 약속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가짜 유대인들이 나라가 없었으니까 팔레스타인에 건국하였고 영국은 수에즈 운하 권리를 차지하고 지중해에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자기 유익을 위해서 남의 땅에다 나라를 세우니까 분쟁이 생겨났습니다.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가 여기에서 살았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여기가 2천 년 전에 우리 땅이었다’라며 나라 세우면, 당연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화가 나고 그래서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 땅 뺏어 간다는데 누가 안 싸우겠습니까?
1) Oren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정영은 옮김 (서울: 위즈덤하우스, 2024), 32.
2)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2.
3)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2.
4)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3.
5)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3.
6)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3.
7)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3.
8)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4.
9)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4.
10)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4.
11)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5.
12)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5.
13)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5.
14)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6.
15)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6.
16)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6.
17)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6.
18)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7.
19)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7.
20)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7.
21)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8.
22)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8.
23)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9.
24)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9.
25)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39.
26)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40.
27)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40.
28)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40.
29)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40.
30)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