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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자료는 이사무의 Soft한 해군사(http://home.paran.com/grim1980/)에서 퍼온자료임을 밝힙니다.
1. 요새가 건설되기까지
오늘날,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시의 입구인 마닐라 만을 통과하는 배의 승객은 만 한가운데에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마치 배처럼 생긴 이 콘크리트 구조물의 위에는 녹슬어버린 포탑도 2개 달려있어서 막연하게나마 전쟁 중에 쓰인 물건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저 낡은 구조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대다수는 거의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죠. 하지만 사실 저 낡은 콘크리트 구조물의 정체는 1919년에 완성된 마닐라 만 방위용 콘크리트 요새, 통칭 “불침전함 드럼 요새(Fort Drum)” 혹은 “콘크리트 전함(Concrete Battleship)” 이라고 불린 곳입니다.
[마닐라 만 한가운데에 떠있는 콘크리트 구조물]
이야기는 1909년으로 돌아갑니다. 1898년에 미서전쟁으로 필리핀을 획득한 미국은 곧바로 이곳을 서태평양 상의 항구적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방위계획을 수립했으며, 그에 따라 1909년에는 마닐라 만 입구에 있는 4개의 섬(코레히도르, 카발로, 카라바오, 그리고 엘 프레일)을 요새화하는 계획이 입안되었습니다. 이 요새들의 목표는 적함의 마닐라 만 출입을 거부하고 필리핀과 미국 군인들이 바탄반도에서 6개월동안 지연전을 펼치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었죠.
[(좌) 마닐라 만 요도 / (우) 엘 프레일 섬]
그들중 가장 크고 또 중요했던 것은 코레히도르 섬이었으나 요새 건축과 형상에 있어서 가장 독특하고도 특이한 양상을 보였던 것은 4개의 섬중 가장 작은 엘 프레일 섬, 바로 드럼 요새였습니다. 다른 3개의 요새들이 전통적인 요새의 모습-흉벽과 포좌와 대피호가 있는-을 간직하고 있었던 반면, 드럼 요새가 들어설 엘 프레일 섬은 작은 면적의 바위섬인 탓에 그런 여유공간이 부족했던 것이죠. 한정된 공간 안에 요구되는 모든 설비들을 탑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효율적인 공간활용이 필요했고, 기나긴 고민 끝에 설계진들이 이른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닐라 만 방위를 위한 요새라는건 적 전함을 상대하는 고정포대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전함 역시 바다 위에 떠있는 부유포대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요새를 전함처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한정된 크기와 배수량의 틀 안에서 합리적인 설계를 통해 최대의 전투력을 끌어내야 하는 전함 설계는 현재 드럼 요새가 처한 상황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설계는 진전을 거듭하여, 배를 만드는 강철 대신 콘크리트로 함체를 만들고 전함들의 그것과 같은 새장형 마스트를 설치하며 당대 전함들의 12인치 포를 능가하는 14인치 포를 2연장 포탑 식으로 2기 탑재하는 콘크리트 전함이 드럼 요새의 최종 설계안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드럼 요새의 내부구조]
어쨌거나.. 요새 건설은 엘 프레일 섬의 바위들을 수면 높이까지 남기고 모두 깎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바위를 기반으로 하여 콘크리트제 벽체가 올라가게 되었죠. 요새의 제원은 길이 80m, 폭 50m, 높이 13m였고, 벽체의 두께는 10~13m에 천정의 두께도 약 7m에 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요새 내부는 3~4개의 층으로 구성되었고 200명의 주둔군을 수용할 수 있는 내무실, 식당, 발전실, 그리고 요새와 갑판(?)을 연결하는 갱도 등등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좌) 내무실 / (우) 식당]
[(좌) 주방 / (우) 기관실의 발전기]
요새의 무장체계는 주포, 부포, 그리고 소함정 격퇴용 포와 대공포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주포는 당대의 전함과 완전히 같은 2연장 포탑방식-하부의 탄약고까지 세트로 이뤄진-이었고, 포탑의 장갑은 한층 더해 당대의 전함들보다 훨씬 더 두꺼운 것이었죠.(배처럼 상부가 무거워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다른 3개의 요새들이 여전히 고전적인 포좌 방식으로 무장들을 설치하여 방어력이 취약했던 것에 비하면 드럼요새의 포탑(+증가된 장갑)은 당시로서는 난공불락에 가까운 방어력을 보여주었고 이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훗날의 코레히도르 공방전에서 아주 중요한 변수로써 작용했습니다. 한편 부포로는 6인치 포 6문이 탑재될 예정이었는데, 이 역시 당대의 전함과 마찬가지로 요새 측면에 포곽식으로 각 현당 3문씩 설치되었습니다. 그 외에 어뢰정 격퇴용 및 대공포 용도로 3인치 포 3문이 갑판(?) 상에 장비되어 있었죠.
[(좌) 14인치 2연장 주포탑 / (우) 6인치 부포 포곽]
[(좌) 3인치 대공포 / (우) 갑판의 새장형 마스트]
또한 갑판(?)에는 탄착관측 및 사격지휘를 위해 높이 약 20m의 새장형 마스트(이것도 전함과 유사한)가 설치되어 있었고, 야간 전투를 위해 3m 직경의 서치라이트 2기도 배치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1919년 5월에 드럼 요새는 약 10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정식으로 요새로써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함과 유사한 외관과 기능을 갖춘데다 보통의 전함과 달리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 드럼 요새가 완공됨으로써 마닐라 만의 방위계획은 비로소 완벽해질 수 있었죠. 여담이지만, 준공 이후 드럼 요새의 외관 때문에 많은 수병들이 요새를 “USS Drum(USS는 미 해군 소속 군함을 의미함)”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마닐라를 방문하는 선박들이 종종 요새를 만내에 떠있는 전함으로 인지하여 신호를 보내오는 일도 잦았다고 합니다.
2. 코레히도르 공방전 : 전반
요새 완성후 약 20년,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필리핀 역시 곧바로 최전선이 되어서, 12월 10일에 이르면 일본기의 공습으로 각지의 비행장이 괴멸되었고 22일에는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이끄는 16사단, 48사단, 65여단 등 합계 43,000명의 일본군 주력부대가 마닐라 북부에 상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미군과 필리핀군의 총지휘관인 맥아더 대장은 이미 마닐라의 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12월 23일 부로 각 부대에게 작계대로 바탄반도로 후퇴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좌) 바탄으로 철수한 미군과 필리핀군들 / (우) 마닐라 시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일본군]
맥아더가 이토록 쉽게 마닐라를 포기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일본군이 마닐라를 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닐라 항이 기능을 발휘해야 하고, 마닐라 항이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입구인 마닐라 만을 장악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연합군이 코레히도르 섬과 다른 3개의 요새, 그리고 코레히도르 섬으로 이어지는 통로인 바탄반도를 장악하고 있는 한 일본군의 마닐라 점령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맥아더 대장은 이를 두고 '적은 병을 가지고 있지만 병마개는 우리에게 있다.'고 비유했다고 합니다만, 어쨌거나 이 때문에 일본군은 싫든 좋든 마닐라 만 장악을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12월 29일에 최초로 일본기에 의해 코레히도르와 다른 3요새에 대한 폭격이 있었고 해를 넘긴 1942년 1월 2~6일중 또다시 일본기의 폭격이 있었습니다. 이때 드럼 요새 및 다른 2요새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코레히도르 섬만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다만 미군의 대공포화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일본은 3월까지 항공기에 의한 공습을 중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좌) 바탄반도에 포진한 일본군 포대 / (우) 일본군의 92식 105mm 야포]
대신에 일본군은 1월 25일부터 마닐라만 남단의 카비테 군항 부근에 105mm 야포 4문과 150mm 야포 2문을 배치하기 시작했고 2월 5일부터는 드디어 만 입구의 요새에 포격을 가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첫날의 주 표적은 포대에서 가장 가까운 드럼 요새였는데, 약 103회 정도의 명중탄이 있었으나 요새의 기능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일본군은 만 입구의 4요새에 고르게 포격을 가해왔고 2월 중순에는 150mm 포를 2문 더 증강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요새들 역시 그들의 거포로 반격을 가했으나 일본측 포대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관계로 반격의 효용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죠.
2월말이 되자 일본군은 기존의 포대에서 포문 수를 줄이는 대신, 보다 요새들과 가까운 곳에 비장의 240mm 야포 10문을 배치하고 3월 15일부터 22일까지 약 1주일간 맹렬한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일본 육군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구경의 포병 화력이었는데, 덕분에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남단의 프랭크 요새는 요새포 전부를 파괴당하고 완전히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드럼 요새 역시 서치라이트와 대공포 전부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14인치 포탑은 전혀 손상 없이 멀쩡했으며 요새 외벽 역시 몇 군데 패인 것을 제외하고는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본래부터 전함에 준하는 방어력을 가졌던데다 포탑의 그것은 전함 이상이었기 때문에 240mm 정도의 화력으로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죠.
3. 코레히도르 공방전 : 후반
한편 이런 와중에 바탄반도는 점점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식량부족과 정글의 악조건, 그리고 일본군의 야습 등으로 인해 점점 지쳐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2년 3월말에 이르면 연합군 중에서 전투수행이 가능한 병사는 처음의 25%에 지나지 않았던데 비해, 일본군은 1차공격의 실패를 계기로 전력을 대폭 증강하여 150문의 야포와 60대의 폭격기, 30대의 전차가 증원되었습니다. 결국 4월 3일을 기해 일본군이 2차공격을 감행해오자 바탄반도는 결국 함락되고 말았죠. 이제 남은 것은 만내에 있는 코레히도르 섬 외에 3개의 요새뿐이었습니다.
[(좌)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일본군 / (우) 코레히도르 요새 내부]
4월 11일, 일본군은 바탄반도 끝에 75~240mm에 이르는 각종 화포 110문을 방열하고 만내의 요새들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오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월 이후 나타나지 않았던 항공기들마저 출현하여 매회 평균 50기 정도의 일본 육군 폭격기들이 수 일마다 한 차례씩 폭격을 해왔습니다. 게다가 지상과 공중에서 정확한 포격 관측까지 수반되어 요새들의 피해는 점점 더해만 갔죠. 요새들 역시 간간히 포격을 가하긴 했으나 여전히 관측 수단이 제한된데다 나날이 피해가 심해져서 반격은 이미 산발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4월 29일은 천황인 히로히토의 생일이었습니다. 이 날을 기념이라도 하듯 일본군은 더욱 더 막대한 포격을 가해왔고, 특히나 성가신 드럼 요새의 포탑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글라이더에 폭탄을 매달아 직접 요새에 육박시키는 전법도 감행했죠. 그것은 요새 측면의 우현 부포 포곽에 명중해서 포곽을 통째로 날려버렸으나 다행히 탄약은 인화하지 않아 그 이상의 피해는 없었습니다.
[(좌) 포격을 가하는 드럼 요새 / (우) 일본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코레히도르의 포대]
그 후로도 4일동안 일본군은 쉬지 않고 포격을 계속했고 마침내 5월 2일에는 코레히도르 섬의 마지막 탄약고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10톤이 넘는 요새포의 포신이 하늘을 날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으며, 덮개가 없는 진지들은 차례차례 파괴되어 5월 5일에는 드럼 요새의 14인치 포탑과 코레히도르의 12인치 구포 1문, 155mm 야포 수 문을 제외한 전 화력이 완전히 정지되고 말았죠. 그날 밤, 일본군은 일제히 코레히도르 섬에 상륙했고, 이들은 4시간이 되기도 전에 해안선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사령부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코레히도르 함락 직후의 일본군과 미군측]
[그동안의 포격으로 엉망진창이 된 포탑 주변. 포신이 파괴된 것은 항복 직전 요새 주둔군의 사보타지 때문]
그리고 마침내 5월 7일, 연합군 측의 총지휘관인 웨인라이트 중장(맥아더 대장은 사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이 필리핀 전역의 연합군에게 항복 명령을 내림으로써 5개월에 걸친 마닐라 만 공방전은 끝을 맺고 말았죠. 하지만 웨인라이트 중장이 항복 메시지를 방송할 때까지, 드럼 요새는 마닐라 만에 남은 최후의 화력으로써 여전히 불을 뿜고 있었다고 합니다.
4. 드럼 요새의 탈환
코레히도르 공방전이 종결된지 약 2년 후, 전황은 다시금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변했습니다. 미군은 1944년 10월 20일에 레이테 섬에 상륙함으로써 필리핀의 탈환을 시작했고 1945년 2월 3일에 마닐라가 함락될 때까지 일본군과 격렬한 지상전을 펼쳤죠. 마닐라에서 지상전이 격화되는 동안, 미 해군 역시 함대 거점 확보를 위해 마닐라 만의 입구로부터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요새들을 하나하나 공략해 들어가기 시작했죠.
문제는 드럼 요새였습니다. 2년 전의 코레히도르 공방전에서 최후까지 버텨냈던 드럼 요새인만큼, 이제 미군 측이 공격자로 입장이 바뀐 지금에서는 과거의 보루가 최대의 골칫거리가 되어있었던 것이죠. 물론 주포 자체는 2년 전의 항복 당시 요새 주둔병들이 사보타지를 가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큰 위협이 되진 않았지만, 이곳에서 농성하고 있는 일본군들이 만을 지나가는 선박에 총격이라도 가해오면 항구의 기능도 완전히 발휘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기에 반드시 요새를 함락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한데, 과거의 일본 육군과 달리 요새를 제압하기 위해 16인치 포 전함이든, 항모의 함재기든 아쉬울 것 없이 동원할 수 있었던 미군이 선택한 방법은 의외로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1945년 4월13일, 미군은 2척의 상륙정에 각각 1개 소대씩의 병력을 탑승시킨 후 조용히 요새로 접근하도록 했습니다. 1개 소대는 모조리 저격수로 구성되어 요새의 어느 틈바구니에서든 일본군이 나타나면 바로 쏴버리도록 하였고 다른 1개 소대는 요새에 장착할 폭약을 잔뜩 짊어진 공병들이었죠. 요새에 접안한 공병들이 저격수들의 엄호 하에 폭약 설치 작업을 마치자, 이번에는 또다른 상륙정 1척이 다가와서는 요새의 환기구를 통해 약 11,000리터에 달하는 기름을 들이붓기 시작했습니다.
[(좌) 폭발하는 드럼 요새 / (우) 드럼 요새에 진입하는 미군들]
[오늘날의 드럼 요새]
이 작업까지 끝나고 모든 상륙정들이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자 공병은 장치해둔 폭약을 기폭시켰습니다. 다음 순간, 요새 후방부에 설치된 직경 1m, 무게 1톤에 육박하는 강철제 출입문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고 요새는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전부 화염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미군들이 요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5일이 지난 후의 일이었고, 그들은 요새 안에서 숯덩이가 된 65명의 일본군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기능과 존재의의를 상실한 드럼 요새는 수복되는 일 없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코레히도르 섬이 복원되어 관광지화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2차대전의 치열한 격전지로써 기억되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조금 서럽다고나 할까요. 코레히도르 공방전에서 보여준 근성을 감안한다면 이곳 역시 복원되어 조금쯤 사람들의 발길이 닿아도 좋을텐데 말이죠.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http://www.concretebattleship.org
- http://www.travelsmart.net/ph/inquirer/issues/dec98/dec06/features/fea_main.htm
- http://corregidor.org/ct&n_index.html
- http://www.worldwar2history.info/Bat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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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엄청납니다^^
바다위의 요새라... 만화에서나 나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