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신앙의 전개양상
(4)부암운묵(浮庵雲默)의 『법화경』 독송
부암운묵은 충숙왕대 고승으로 생존연대는 미상이다. 『석가여래행적송』의 서문과 발문에 보면, 그는 만덕산 백련사에서 스승 천책의 유저(遺著)를 정리하며 전통을 계승하던 「석교도승통각해원명불안정조대선사이안당」의 문하이다. 그의 저술이 충숙왕 15년(1328)에서 17년(1330)에 간행되었으므로 그는 이 시기에 생존했을 것이다. 그의 법명은 운묵, 자가 무기, 호는 부암이다. 이안당 문하에서 천태교의를 배워 통달하고 승선의 상상과에 합격하여 굴암사 주지가 된다. 그러나 높은 명예직을 미련없이 던져버리고 금강산, 오대산 등 명승지를 유력하다가 시흥산 탁일암에 20년 동안 머무른다. 어느 시기인지 분명하진 않으나 이 유력기간 동안 중국 천태산에 올라가 공(空)⋅가(假)⋅중(中)의 3관(觀)을 닦고 돌아왔다. 그는 머무르는 동안 『법화경』을 송경하고 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불화를 그리며 경전을 서사하는 일을 일과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 새로 입문한 사미승들의 계몽을 위해 『천태사교의』와 불전과 조사들의 글을 가려찾아 『석가여래행적송』 2권을 지었다. 그후 만년에는 시흥산을 떠나 전남 장성군의 취령산 취서사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제자들이 석종을 세워 유해를 봉안하였다.
그의 사상은 『석가여래행적송』 2권(이하 행적송)에서 볼 수 있다. 『행적송』은 신참 사미승들을 위해 저술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시흥산에서 그는 단순히 혼자 수행에만 열중한 것이 아니라 천태종에 입문한 사미들에게 강의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행적송』의 형식은 송(頌), 즉 시로 되어있고 시마다 주(註)를 부쳐 해석하였다.
모두 776구의 5언송으로 되어있는데 시와 해석에서 운묵의 사상이 보인다. 여기에는 인도 원시 경전⋅율전⋅부파논소⋅대승경전⋅대승논소 그리고 중국의 역사서와 천태삼대부 관계 논서들이 다수 인용되고 있다.
상권의 서술전개의 기반은 제관의 『천태사교의』에 두고 천태교학의 개념을 명확히 전달하였다. 형계담연 이래 5시8교의 교상판석은 고려에서는 제관⋅의천⋅천인⋅천책으로 계승되어 고려 천태교학의 기본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5시8교가 운묵에 이르러 석존의 교설의 시간과 내용으로 교과서적 이해로 정착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천태사교의』에서는 약간의 논리적 복합성을 띄고 있는데 『행적송』 상권에서는 간명해진다. 5시는 화엄⋅녹원⋅방등⋅반야⋅법화열반시의 시간적 개념에 치중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화의4교의 장교⋅통교⋅별교⋅원교를 설명하였다. 이 5시 8교의 해설은 입문자를 위해 간명하게 천태교학을 이해시키려는 목적이었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운묵의 사상은 제관 이래의 5시8교적 교학을 전승하고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그의 교문(敎門)은 어떤 것인지 살펴본다.
그는 『법화경』을 송경하며 불화를 그리고 『법화경』을 서사했다. 이것은 법화사상에 근거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불화를 그리고 모래로 불상을 그려도 그 사람은 성불한다'라고 있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사상을 서민적 염불사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이것도 백련사의 법화참법도량의 『관무량수경』에 근거한 마음에 약(約)한 '관불(觀佛)', 즉 약심관불(約心觀佛) 신앙이라고 하겠다. 운묵의 사상에서도 선과의 교류가 보인다. 『행적송』 상권 말미에 서토(西土) 24조(23)를 열거한 후 다시 보리달마가 28조를 전등한 것으로 들고 있다. 그에게 보인 『전등록』이 있었기 때문에 열거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의 교관(敎觀)사상 이해에 의문을 던진다. 그의 선교회통사상은 천태지관에 의해 전개되는데 '삼세의 여러 부처님과 모든 보살이 선문(禪門)으로 들어가지 않는 분은 없다'라고 6바라밀의 선정을 해석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모든 생각을 쉬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때 한 곳이란 문자도 포함한다. 선가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석가여래의 설교는 모두가 '가르침'인데 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제법이 불법아님이 없으므로 문자도 떠나지 않고 진리는 현현한다고 말한다. 천태 『법화현의』에서는 경의 1자(一字) 해석을 '일제즉삼제(一諦卽三諦)'의 논리로 논증한다.
"만약 자(字)⋅비자(非字)⋅비자비비자(非字非非字)를 알면 두 변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淨)이라고 한다. 정(淨)이면 업이 없으니 아(我)라고 한다. 아는 곧 고(苦)가 없으니 락(樂)이라고 한다. 고가 없는 즉 생⋅사가 없으니 상(常)이라 한다.
여기서 그는 자⋅비자⋅비자비비자의 어느 한 쪽에도 집착않으면 상⋅락⋅아⋅정의 경지가 터득됨을 설명한다. 또 "그 글자는 바로 속제(俗諦)이고, 글자 아님은 진제(眞諦)이고, 글자 아님과 글자 아님도 아님은 바로 1제(一實諦)이며, 이 1제는 곧 공⋅가⋅중제의 3제이며, 이 3제는 곧 1제이다"라고 원융삼제(圓融三諦)의 논리를 '문자⋅글자'를 푸는데 사용한다. 이 논리는 다시 "비록 경권이 아니라도 경권을 떠나지 않고, 비록 마음과 입[心口]이 아니라도 마음과 입을 떠나지 않는다. 이 두 쪽에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부사의한 미묘삼관이다"라고 전개된다.
따라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부사의 미묘삼관에서 나온다고 결론 짓는다. 그리고 그는 "글자 하나 구절 하나에 요달할 수 있으며 3덕(三德)을 비장하고, 독송으로 마음을 훈습하면 곧 심성은 원융삼제를 갖추고서 훈습하게 되는데, 어찌 문자를 떠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여기에서 운묵의 마음과 가르침(心⋅敎)의 둘아님의 논리가 가르침밖에 달리 전한다[敎外別傳]라고 하는 선가 독특한 마음을 비판하게 된다. 그 마음의 존재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고 "세존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임으로써 달리 전하다"고 하지만 이것도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인데,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은 모순이 있다고 반박하였다.
운묵의 이와 같은 선관(禪觀)은 당시의 조사선적(祖師禪的) 선풍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비판은 천태지관의 관심(觀心)인 일심삼관⋅원융삼제의 철학을 적용함으로서 교⋅선의 회통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천태원돈지관의 내용인 것이다. 운문의 천태원돈지관이란 4종삼매에서 비행비좌삼매의 관법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전⋅문자를 매개로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실현되는 궁극적 깨달음의 세계가 현현됨을 밝힌 그는 『천태원돈지관』의 실천자였다고 보는 것이다.
천태종은 운묵 이후의 발전을 볼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묘련사계가 천태소자종으로 되고 만덕산 백련사 계통이 천태법사종으로 분파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으나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조선 태종(1406) 6년에 이 두 파가 있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교단형태로서의 천태종의 양종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고승 부암운묵이 시흥산에서 20여 년 간 머무르면서 불법을 흥포(興布)하였다. 그는 의선의 사승인 원혜국통(圓慧國統) 경의(景宜)의 법형제 무외정오(無畏丁午, 1278~?)의 도려였던 정조이안(靜照而安)의 문도였다. 그는 경기도 시흥산 탁일암에서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고 화불․서사하면서 미타참회를 염송하였고 1328년(충숙왕 15)에 『석가여래행적송』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천태사교의』의 시간관에 골격을 두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그의 스승인 정조이안이 주관하고 정오가 발문을 남긴 『호산록』을 이용하였다 한다. 따라서 그는 법화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정토관과 선문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보현도량을 실천하였던 백련결사의 계승자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휴상인이나 요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백련사 결사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부암운묵의 결사정신은 시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원 만의사(萬義寺)에도 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수원 만의사는 조인규 가(家)의 형인 혼기(混其)가 법화도량을 개설하고 의선이 머무르는 등 조인규 가(家)의 원당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수원 만의사에는 귀족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하겠으나 『법화영험전』을 간행하는 등 민중 지향적인 성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법화영험전』은 『법화경』 28품의 천태소에 대한 과문설정과 대략 상통한다고 한다. 묘련사에서 『법화경』을 중시한 경향과 같다는 견해도 있으나 민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만의사에서 『법화영험전』이 간행된 것은 의선(義璇) 이전과는 다른 기풍이며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백련사 결사정신의 회복 운동이라 볼 수 있다.
『법화영험전』은 요원이 『법화경』을 지니고 독송․필사․강설하는 가지가지 영험들의 실례를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여러 경전과 논서에서 찾아 모은 것이다. 이는 의선의 『예념미타도량참의』 간행에 이은 것이며 고려말의 혼란기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한 실천적인 행위였다. 이렇듯 만의사에서 『법화영험전』을 간행하고『법화경계환해(戒環解)』를 독송하는 등 백련사의 전통을 표방하였던 법사종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천태종계에서 신조(神照)가 조인규 가문의 원당인 만의사에 머무르게 되며 조구(祖丘)가 『자비도량예참』을 간행하고 조선건국초 국사로 책봉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태종에서는 근기지방을 중심으로 부암운묵의 시흥산과 조인규 가(家) 승려들의 과천 청계사․수원 만의사에서 흥법운동이 일고 있었다. 이러한 천태종계에서의 운동은 조계종 수선사계통에서 근기지방인 양주 회암사를 중심으로 혜근(慧勤)과 그의 상수제자 자초(自超)가 흥법을 펴려고 했던 것과 유사하다.
<한국 법화신앙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 진경찬(顯潭) 위덕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