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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상상력으로 환기한 전위의 문장들
-신언관 시집 《그래 맞아》, 이문복 시집 《영혼의 뼈》중심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제 아무리 폭염과 땡볕이 온 지구를 불덩이로 달군다 한들 시간과 계절의 변화는 냉엄한 것이라서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 약간의 늦거나 빠르거나의 차이 정도이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지금도 날씨가 덥다가 흐렸다가 순간 잿빛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뚝 열기 오른 아스팔트 도로를 식히고 있다. 신언관, 이한복 두 시인의 시편이 내게로 넘어온 이후 며칠이 흘러가고 있다. 최소한의 시간을 통해 낯선 시인들의 시집 속의 세계관과 공감을 이루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두 분의 연륜과 시적인 삶을 살아온 시간이 녹녹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시의성이 문장으로 심층을 감싸고 있다. 특히 신언관 시인의 시집 《그래 맞아》는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연작시의 시제들로 표제가 된 것을 보면 그 말 속에 담긴 표상적 의미를 상회하고 있다는 심중이다. 또한 이문복 시집 《영혼의 뼈》에서 전개해 가는 시적 전언이 오래오래 귀에서 맴돌면서 서사의 전말들이 차츰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시적 사유를 서정의 세계에서 사회 의식으로 확장 흡인하고 있다. 두 분의 시적 형용으로 이루고자 한 시적 세계가 현실에서 구체화될 수 없는 불편들을 적시해 가는 것이라면 깊이 있게 공감해봐야 할 테제로 우선이어야 한다.
시 속에서 긍정한 말들
가장 아름다운 말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상응한 예우를 갖춘 말일 것이다. 신언관 시인의 연작시를 그런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면 어떨까 하는 감정 교란을 파동해 공감을 끌어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많은 말들 중 하필이면 ‘그래, 맞아’란 말에 집중된 의표는 무엇이며 또 다른 별개의 수사로 작동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깊이에 더한 사색과 고투가 고조되면서 존재론적인 성찰까지 이르게 한 표제가 된 ‘그래, 맞아’란 말이 반복적으로 활용되면서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감정을 이연시키고 있다.
니들이 뭘 알어
니까짓 것들은 몰라
얼마나 예쁜지
때론 눈물이지만
꽉 들어찬 행복이지
니들이 다 뺏어간 뒤 찾아온
뭐 그런 아름다움이지
니들은 몰라
암, 모르고 말고
<그래, 맞아 1> 전문
신언관 시인은 농부이면서 시를 쓰는 삶을 살아온 듯하다. 또한 농사일을 통해 한평생을 살아온 전업 농부인 셈으로 그 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대상(세계)과 대화를 하며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좌절과 혼란을 극복해 온 듯하다. 번번이 사람들과 부딪치며 마음을 진정하거나 위로하는 법을 고뇌할 때 이제야 인정받았다는 자존감에 한꺼번에 밀려든 감정에 눈물이 핑 도는 말, ‘그래. 맞아’ 니 말이 진실이었어라고 덧붙여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처럼 기쁜 일이 있을까? 여기에서 심연 깊숙한 곳에만 존재했던 말을 끄집어낸 사연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누군가와 대척점에 서 있는 치열함 속에서 언젠가 모든 것의 결말 같은 그 한마디 말을 듣기 위해 죽어라 일만 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일만 죽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젊은 호기 드센 적 있어 “내 이래 봬도/ 광한루 오작교를/ 새잎 돋는 따뜻한 봄날/ 연인과 손잡고 건넌/ 그런 사람이거늘/ 비록 견마 잡힐 권세는 없어도/ 사랑 담을 품은 넓어/ 세상이 날 보고 웃으면/ 그냥 허허 웃지요”라며 <그래, 맞아 2>에서 청춘의 한때를 낭만의 치기로 품었던 적이 있었다며 그나마 다행이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런 소중한 시간은 매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신생의 봄은 여지없이 반복되고 언제 그랬냐는 자연은 매번 새롭다.
그래서 봄은 모든 만물을 어루만져 생명을 충만하게 한다. 수선화도 그렇고 미선나무도 그렇고 어느 것 하나 제 맘대로 인 것이 없다. 시간의 변화에 충실한 자연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바빠졌다.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며 봄 맞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래, 맞아 4> “동트기 전부터/ 마을 고샅 헤집는 경운기 소리에/ 더럭 겁부터 나서/ 어떻게 한 해를 견뎌내야 하는지/ 눈앞이 먹먹해지는데// 명줄보다 질긴 게 사람의 서사라서/ 어딘가 돌 틈에서 싹트길 기다리는/ 낟알의 생명처럼 그렇게/ 나의 기다림을 찾아/ 두 팔 치켜들고 들로 나간다”라며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따른 삶의 지향이 곧 사람의 본심이란 것을 확인한다.
눈 많이 내린 어젯밤
부엉이가 울다 갔었지
익숙한 어둠에 잠이 들었고
몇 번은 와본 듯한 곳에 가게 되었지
맑고 푸른 바닷가
툇마루에서 낚싯대 드리우고
해거름에 통발 두 개 던져놓고
전복라면과 양갱으로 허기를 면하고
쉽게 시 한 편 쓰고
파도 소리에 잠 깨어 바라보니
등대 건너편 갈매기떼 날아와
훠어이 소리쳐 쫓아내는
열다섯 평 따뜻한 함석집
등대 옆 집…
꿈이었지
-<그래, 맞아 5> 전문
꿈속에서나 가능한 몽유는 누구나 경험한 바대로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현상으로 재현된다. 몽롱한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이내 사라지고 없는 허망함 그 자체다. 화자도 잠깐의 잠에 빠져들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빠져든 듯하다. 누구나 이상향을 쫓으며 살아가는 일상이 꿈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눈발이 자박자박 내려 사방이 단절된 곳으로 오직 그 집 안에는 화자만이 존재한다. 그 적막강산 속에 묻힌 깊은 시간을 왕래할 수 있는 것은 ‘부엉이’뿐이다. 마침 재현된 풍경도 낯설지 않아 훈훈해진 시간으로 “맑고 푸른 바닷가/ 툇마루에서 낚싯대 드리우고/ 거름에 통발 두 개 던져놓고/ 라면과 양갱으로 허기를 면하고/ 쉽게 시 한 편 쓰고/ 파도 소리에 잠 깨어 바라보니/ 등대 건너편 갈매기떼 날아와/ 훠어이 소리쳐 쫓아내는/ 열다섯 평 따뜻한 함석집/ 등대 옆 집…”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는 예전 언젠가 한 번은 살았던 곳처럼 편안하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현실은 꿈과 다른 환경이란 것을 말해준다. 설령 여유가 있다 해도 그만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즐길만큼 유유자적한 정도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어차피 꿈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렇다. 그렇게라도 화자가 꿈꾼 것을 이뤘으니 응당 추임새처럼 ‘그래, 맞아’란 말 이 절로 나올 법하다. 그렇게라도 무엇인가에 위로를 받으며 스스로를 추스르는 마음이 현실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시를 열망하는 생애를 지지라도 해주듯 버젓이 꿈속에서 시 한 편을 얻었으니 허기가 지쳐온다 한들 대수겠냐 싶다. 눈 내리는 밤 풍경에 부엉이 울어대는 심야의 풍경은 요즘엔 쉽지 않은 것으로 시의 풍경을 절묘하게 현실과 분리하여 고즈녘 한 시심을 깊게 해 준다. “열다섯 평 따뜻한 함석집”은 결국 화자가 꿈꾸며 그토록 소망한 세계란 것이 대단한 별유천지가 아닌 마음 하나 웅숭깊게 품어줄 수 있는 누옥이란 것을 말해준다. 화자가 열망한 것들은 작고 낮은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임을 말해준다. 비록 꿈에 불과한 순간이었지만, 꿈에서나마 이루었으니 화자는 남이 이루지 못한 그만의 세계를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일상으로 되돌아보는 삶은 아름답다.
<그래, 맞아 8_노을의 기도>에서 하루를 반성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 간절해져 그런 것이 아니라 하루 일몰 앞에서 세상 사는 것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자연을 통해 회복해 간다. 그런데 그 노을을 비집고 달려올 것만 같은 “안산 노을 빛을 잃어가고/ 땅거미 짙어지는 어둠에 서면/ 산등성이 따라 붉은 구름 헤치고/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은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는 올 수 없는 대상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 시간들이 지속되면서 스스로 체념하고 자신을 위로해 가는 화자다. 그 열망한 대상이 비록 노을 지는 그 풍경 안에 없다 해도 그 마음을 익히 알고 있는 듯하다. 풍경 그 어디엔가 있을 것으로 상상하며 노을을 가슴으로 품어 안은 것이다. 노을을 시적인 풍경으로 재현하여 화자가 평소에 품었음직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본다면 마음속 상처가 될 법한 과거 어느 시점에 대한 회상임을 알 수 있다. 독한 마음도 간혹은 붉어지는 노을 앞에선 허망하게 무너지는 법이다. “모든 것 사라지고 난 뒤/ 그리움마저 떠난 저 노을 속에/ 무엇이 남겨져 있었는지/ 잔불을 헤집으며 확인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결심 이전 연륜을 헤아려야 한다. 이미 상당한 세월이 흘렀으니 더는 인간적인 욕망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며칠 이어진 가을장마 그치니
귀뚜라미 울음 가득한 방
뒷문에서, 들창문에서, 뜨락 섬돌에서
떨어진 능소화 꽃잎에서
내 막막한 가슴에서
떼창으로 들려온다
살이 늙어가는 소리가 있다면
아마도 저 소리가 아닐까
닳아진 꿈을 찾는 소리가 있다면
아마도 저 소리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온
보름달 발원의 바람도
저 소리가 아닐까
그러다 울음이 옅게 사그라들면
화엄사 연기암 문수보살께 드리는
기도 소리로 들려온다
*백중百中 : 음력 7월 15일
<그래, 맞아 17 –백중의 밤> 전문
‘그래, 맞아’ 란 말에 참 좋은 의미가 담겨있구나 싶다.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긍정과 포용까지의 반경을 담아내고 있다. 연작시가 갖는 피로감이나 권태감을 쉽게 덜어내면서 할 말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장마가 끝나고 밤이 깊어져 뜨락에서 울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예전과 다르다. 날개를 비벼 내는 소리가 청명하게 들려오고 염천의 계절을 보내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실감케 하는 저 요란 것들의 “뒷문에서, 들창문에서, 뜨락 섬돌에서/ 떨어진 능소화 꽃잎에서/ 내 막막한 가슴에서/ 떼창으로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저 하찮은 미물도 계절의 변화를 간파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저 감상에 빠져든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감정이 고조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잘 견뎌낸 연륜으로 통찰에 이른 “살이 늙어가는 소리가 있다면/ 아마도 저 소리가 아닐까/ 닳아진 꿈을 찾는 소리가 있다면/ 아마도 저 소리가 아닐까”라며 나이 들어 더 깊어진 자연의 이치 속에서 울려 나온 소리마저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다. 분명 저 몸짓 어딘가에 있을 자연의 변화에 대한 이치가 곧 인간이 터득해야 할 지점이란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낼모레 할머니 만나면
아픈 몸 좀 낫게 해달라고 해야지
어릴 적 두드러기 났을 때
발가벗은 알몸으로
변솟간 옆에서 짚 태운 연기 쏘이며
무어라 주문을 외며
잇비로 몸을 쓸어주었었지
그래서 몸 가려운 게 나았지
낼모레 할머니 만나면
아픈 팔다리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해야지
-<그래 맞아 28> 전문
자연의 시간과 사유 사이에서 인간이 알지 못한 중력이 존재하는 걸까? 그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잊히지 않은 추억도 그와 상관된 일이라고 본다면 화자가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와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은 기억 안에 고스란히 존재한다. 유년기의 기억에는 할머니가 몸소 해주신 전래 방식대로의 처방을 떠올리고 있다. 몸에 두드러기가 발생하면 예전에는 짚불을 태워 발가벗은 온몸에 연기를 씌도록 하였고 할머니만이 알고 있는 신비한 주문을 읊어주셨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가에 대한 것은 차후일이고 그렇게 할머니는 모든 것에서 우월한 권능을 갖고 계셨다. 할머니를 떠올린 것도 화자의 몸이 여기저기 성치 않으니 더 간절해 졌다. 그로 인해 떠오른 것이 할머니의 전능한 힘이었다. 그 힘을 다시 한번 자신의 몸을 치유하는데 긴히 활용하고 싶은 것이다. “낼모레 할머니 만나면/ 아픈 팔다리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해야지”라며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몸과 마음이 성할 리 없다. 조금이라도 이해할라치면 뜬금없이 또 다른 말들이 사회를 혼잡하게 하고 만다.
그러한 일들이 참 많았다는 것을 <그래, 맞아 47>에서 말해준다. 냉전체제가 붕괴되기 직전 고르바쵸브 시절 소련을 방문했다. 얼마 되지 않아 보리스 옐친이 권력을 잡고 소련은 완전히 붕괴되어 “레닌의 동상은 무너졌고/ 붉은 바탕에 별과 낫과 망치를 새긴 국기는/ 삼색의 제정러시아 깃발로 바뀌었다”라며 공산주의의 멸망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가치 판단에/ 더 이상 혼란스러울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1968년의 통일혁명당이 2023년 지금까지/ 진보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한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며 세상 돌아가는 것이 딱히 옳고 그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말해준다. 이제는 그런 세상 흐름에 옳고 그름보다 그저 그러려니 하며 넘기는 것도 순리임을 알았다.
<그래, 맞아 50>에서 화자가 못다 한 말을 이어간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자칭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왜 변하지 않는가? 그들은 과연 참 진보인가? 진정한 진보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며 “편법으로 내 자식 챙기고/ 진보의 탈을 쓰면// 뭔가 있어 보이고 우월해 보이는가”라며 변질되어 버린 진보란 가치를 생각해 본다. “그 모습이 보여지기 시작한 건/ 내가 조오국이라며 서초동에 모여/ 두 손 치켜들었던 그때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화자는 혼탁해진 세상을 보며 판단을 유보하면서 ‘그래, 맞아’란 말로 보편적 가치를 추인하고 싶은 것이다. ‘진보’란 세상의 변화를 올바르게 추동해 가는 저항정신이고 사사롭지 않아야 하는 공동선을 위한 결사의 정신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 맞아’란 말은 그에 대한 항변을 담고 있음을 말해준다.
신언관 시인의 시집을 보며 못다 한 말들이 많다. 시의 세계란 것도 부분을 통해 전체를 아우른 것이라고 본다면 시집 속의 진정에 다가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속심 있는 말은 아직도 내면에서 발화되지 않았기에 판단도 유보해야 하는 것이 옳다.
수더분한 말 속 옹골찬 진정
이문복 시집 《영혼의 뼈》안에 실린 글들을 보았다. 다수의 시편들이 자연 상태의 사물성에 대한 전언으로 깨달아가는 과정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시 <자리>에서 전하는 말도 그 시적 형용은 간결하면서도 사람의 도리가 어떻게 현재화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말한다. 아무 인연이 없던 곳에서 느껴지는 삶의 처소를 떠나고 난 뒤의 모습이어서 은근하게 마음을 쓰이게 한다. “모르는 그 사람/ 앉았던 자리 따스하다.// 깻단 놓였던 자리에 남은/ 고소한 향기처럼// 햇살 머물던 자리에 피어나는/ 풀꽃의 미소처럼// 나, 앉았다 떠난 뒤에도/ 그랬으면 좋겠네.”라며 화자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또렷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화사한 삶을 꿈꾸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담담히 왔다가는 계절에 마음 붙이고 세상이 주면 주는 대로 받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맞춰살면 된다. 이문복 시인의 시집 속 말들이 그러하건대 시에서 과도한 욕망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참깨꽃 끝물 몇 송이에
꿀벌들 찾아와 칭얼댄다.
밥풀때기 같은 작은 풀꽃만 봐도
반갑다고 닝닝거린다.
재 너머 빈집에
가을이 숨어있더라고
머잖아 국화꽃 필 거라고
지나가던 바람이 속삭인다.
빈집 뜨락에서 훔쳐 온
향기 한 모금도 슬쩍
흘리고 간다.
<여름과 가을 사이> 전문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은 목가적인 심성으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도시적인 삶은 모든 환경이 편의 시설로 가득해서 사람 사는 데 있어 불편함이 없기에 그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부터 고뇌해야 한다. 산과 들이 바로 일터인 농촌 환경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화자는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풍경을 통해 삶의 전경을 보여준다. 마침 계절도 가을로 넘어가는 듯 참깨꽃이 죄다 떨어지고 몇 개 남은 꽃에 날아들어 꿀을 따는 꿀벌을 관상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을 잘도 넘기고 참깨꽃에서 끝물을 챙기느라 바쁜 모습에서 화자는 가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한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그대로 화자의 시속으로 들어와 가을이 곧 올 것이라는 기별을 흘리고 간다.
<처서處暑 무렵>에서 화자는 절기를 통한 계절의 변화를 예감한다. 생명성으로 충만했던 부추꽃도 옥수수꽃도 서서히 색채감을 잃으면서 제 할 바 소명을 다하고 있다. “송이송이 작은 꽃송이마다/ 초록 씨방 품어 키우느라/ 부추꽃 새하얀 꽃잎은/ 누렇게 시들어가고/ 끝물 옥수수 붉은/ 수염도/ 갈색으로 야위었네”라며 계절의 변화를 거스를 수 없는 순리를 보며 보이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도 따라 함께 변화하고 있다. 유달리 밤기운을 타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서늘해진 별빛을 더듬어/ 또르르륵 또르르륵/ 어둠 속 투명을 벼리는 비브라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가을을 알리는 소리가 화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질 수 있는 것도 다 나이가 차야 가능한 일이다. 철없던 시절은 그저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말았던 일들이 차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작은 변화에도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늦게 핀다는 것>에서 무리 지어 핀 꽃 중에서 한참을 늦게 핀 꽃을 발견한다. 이미 먼저 핀 꽃들은 시들어 버리고 만 그 속에서 저 홀로 “바위 밑 그늘에 숨어/ 이제 겨우 피어나는/ 산국화 꽃봉오리”가 꽃잎을 펼쳐 보였다. 무엇이든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넘긴 꽃을 보며 자신을 되돌아 본 것이다. 화자도 한 때 그런 시절을 경험했기에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화자도 활짝핀 시절을 넘긴 채 세상사를 관조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남루해진 일상의 현絃
툭, 끊어지는 어느 날
그대 안의 고비를 만나게 되리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지우지 못할
오로지 그대만의
고비를
-<고비를 떠나며> 부분
몽골 초원을 지나면 어딘가에 있다는 사막 그 사막을 몽골 사람들은 ‘고비’라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비는 특정한 지점이 아니라 사막 전체를 일컫는 말이란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화자도 몽골 고비 사막을 찾아간 듯하다. 그 광활한 사막에서 자신을 돌아볼 때 너무 작은 존재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워라, 그대/ 고비를 지워버려라”라며 지금껏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란 말로 경이로움을 전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모든 것들이 고비에서는 너무나 작은 것이다. 고비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일어나 묵묵히 사막을 걷고 해가 저물면 별자리를 따라 천지 사방에 말뚝을 세워 게르를 짓고 그 안에 하늘 구멍으로 낸 그만큼으로 별빛을 들여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아닌 마음으로 서로를 헤아리며 “고원에 쏟아지던 아득한 별빛과/ 바람이 들려주던 풀꽃의 노래/ 달빛에 설레어 뒤척이던 게르의 밤을”을 화자는 잊으라 하지만, 자연의 위대함만큼은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고비를 만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물욕으로 추구한 가치란 것의 무망함을 깨달았다. 화자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찾아갔던 ‘고비’라는 곳은 인간의 마음으로 욕망할 수 없는 순수 그 자체로 본래 모습 그대로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것 또한 사람 속이다. 도통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이었다. <개복숭아 나무>를 보며 화자도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한 사람을 생각한다. 본인의 토지 보상금에 이웃사촌들 영농자금까지 말아먹고 야반도주한 그는 거액의 보상금을 거머쥐기 전에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농부였다.”는 것은 동네 사람이 다 안다. 하루아침에 그런 상식을 뒤엎어버린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철석같이 믿고 살았던 이웃이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사람들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며 살고자 한 진실은 무엇일까? 거짓이 아닌 참된 말과 행동을 일컬은 것일까? 살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인생사다. 이웃으로 죽을 때까지 그럴 거라며 붙어살던 사람이 한순간 야반도주한 일도 세상사에 속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껏 두 눈으로 지켜보며 매실나무라고 알았던 나무가 하루아침에 둔갑하여 복숭아꽃을 피운 것이다. 그것도 산림조합에서 사다 심은 것이 그러하니 세상 믿을 것 하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본래부터 개복숭아나무 였다는 것이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데 화자만 예민할 이유가 없다는 듯 그냥 묻어가면 될 일이다. 안타깝게도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은 복숭아나무를 보며 다시 사다 심어줄 것이라는 말에 생각이 깊어졌다. “개 복숭아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생각한다. 나무를 구해주겠다던 그 약속, 거짓이 아니었을 거라고…. 지키지 못하였기에 더 깊이 가슴에 맺힌 약속들, 이루지 못한 진심을 내 안에도 지닌 까닭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꼭 남의 탓으로만 흠잡을 일이 아니었다.
<내 마음 어딘가에> 무거운 짐처럼 들어 마음을 짓누른 것들이 있다. 철들 무렵 가슴에 꿈만 같은 순정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곱게 마음먹은 대로 성장하여 그 꿈이 이뤄졌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대개 빗나가거나 그저 한때의 추억으로 머물고 만 경우가 많다. 화자도 그런 추억을 회상하면서 지나온 시간을 추억하고 있다. 그 언젠가 “지랑 풀 뽑아서 풀각시 함께 엮던/ 너의 이름 생각나지 않는다.”라며 순정했던 약속을 회상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뽀얀 풀줄기 씹으며 손가락 걸었던/ 너의 얼굴 떠오르지 않,”는 마음에 괜스레 미안하고 안타까워진다. 그토록 삶이 온통 화자를 옥죄어왔기에 아련한 추억을 들춰보지 못했던 탓이다. 그 모든 것이 몸부림치며 살아온 세월 탓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고통 같던 세월도 무던해져 슬핏슬핏 생각나는 것을 보면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까닭이다. 비록 “달큰하고 싱그럽던 풋 내음과/ 이루지 못한 그 약속만/ 내 마음 어딘가에// 다른 약속들 챙기느라/ 내 삶은/ 고단하고 분주했으나” 이제라도 그런 마음이 가슴에 들었던 것이 다행인 듯 싶다. 그 약속은 아직도 유효한 것처럼 가슴에 남아있다.
<멀리서 바라보다>의 지점도 앞서 말한 마음의 한 부분이다. 미세먼지 자욱한 바깥을 방 안에서 바라보며 어제는 그 참에 비까지 내려 밖을 나가지 못했고 오늘은 그 핑계로 두문불출이다. 거기에 몸까지 안 좋아 바깥만 응시한 것으로 자족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않더라도 풍경 속에서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 어제의 오늘이 아니다. 저 무심한 나무와 잎사귀를 보며 적절한 간극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간혹은 이렇게 멀리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도 또 다른 사유로 전이되고 있음을 알았다. 비록 연이은 날씨 탓에 바깥 출입을 못하면서 “너무 오래 가까웠다가/ 시나브로 멀어진 벗이여,/ 만나지 못하더라도 부디/ 편안하고 싱그럽기를…”를 마음으로 간구하고 있다. 그런 마음이 드는 날이 많아졌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뒷모습은 그랬다.
그리웠던 벗이 오랜만에 찾아왔습니다.
국화 향 그윽한 뜨락에서 벗과 나는
가을 정취에 잠시 젖었습니다만
따가워지는 가을볕을 피해
그늘진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지요.
깨진 벽돌, 빈 화분, 거름흙 자루, 모종삽…
앞뜰과 사뭇 다른 뒤꼍이 민망하였으나
벗은 환하게 웃었습니다.
-오오, 이런 곳이 있었네? -
향기로운 앞뜰을 위해 존재하는
잡동사니들의 거처에서, 벗과 나는
나무토막에 걸터앉아 국화차를 마셨습니다.
존재들의 앞과 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벗이 돌아간 후
뒤꼍을 정리하며 생각해보니
아아, 나는 아직 벗에게
내 영혼의 뒤쪽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뒤쪽> 전문
‘뒤’라는 곳은 흠결 있는 것들을 숨기기에 좋은 곳이다. 화자도 그런 때가 있었다. 미처 자신이 쉽게 생각하며 거슬린 것들을 그곳에 가져다 놓고는 깜빡했던 듯하다. 마침 친구가 찾아왔고 “국화 향 그윽한 뜨락에서 벗과 나는/ 가을 정취에 잠시 젖었습니다만/ 따가워지는 가을볕을 피해/ 그늘진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지요.”라며 아차 싶었지만, 그곳에는 “깨진 벽돌, 빈 화분, 거름흙 자루, 모종삽…/ 앞뜰과 사뭇 다른 뒤꼍이 민망하였으나/ 벗은 환하게 웃었습니다./ -오오, 이런 곳이 있었네? -”라며 화자는 짧은 시간 생각을 바꾸게 된다. 화려한 앞이 있다면 가려주는 뒤쪽이 존재한 것을, 살아 온 동안 자신의 뒷모습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잔잔한 미동이 커다란 파동을 일으키는 법이다. ‘뒤쪽’이란 말에 인생의 깨달음과 연륜에 찬 화자의 철학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차 한잔의 여여로움으로 그치지 않고 일상으로 다가오는 삶에서 작지만 소홀해 선 안될 지점으로 천착해 가는 사유가 아름답다.
<일부러 느릿느릿>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홍성에 간다./ 엄마 떠나신 후 아홉 해를 더 견디다 떠나신/ 아버지 유품 정리하러 친정에 간다./ 남장리 푸르지오아파트 101동 901호/ 그 집에 여전히 아버지가 계실 것만 같다./ 아버지~ 부르면서 들어가면/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시다가/ 어린아이처럼 웃으시며, 문벡이냐?/ 여전히 반겨주실 것만 같다.”라며 생전에 불편하게 들리던 아버지의 딸 이름 부르는 소리가 그리워진 시간이다. 아직도 아버지 생전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장항선 열차는 느릿느릿 간다. 변한 것은 없는데 아버지는 다시 만날 수가 없다. 한때는 이문복이란 이름 때문에 불만이 많았는데 그마저도 애달파져 가슴 아픈 말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바로 알게 되는 법이다. 마치 불편함을 속내로 감췄던 것처럼 그런 때를 아름다운 추억으로라도 기억할 수 있으니 다행인 것이다.
정상인의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란 것을 <아들에게서 온 편지>에서 전해 듣는다. 소중한 아들의 세상에 대한 절규를 들어 보자. “엄마,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졸업장 따지 못한 거 속상해하지 마세요. 졸업해봤자 어차피 취직 안 돼요.” 어렵사리 부모님의 피같은 돈을 들여 열심히 공부하고 별의별 짓을 다 해도 취업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행여나 해서 마음 없는 성형도 하고 토익도 만점을 따고 돈 들여 스펙을 쌓는 것이 보편화된 세상이다. 자기소개서도 정성으로 써보지만, 취업문은 열리지 않는다. 청춘의 꿈인 결혼도 아예 포기할 것이라며 아들의 편지는 이어진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들에게 더 강해져야 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니 무슨말을 전해야 할까? 이 세상의 청춘들이여 꿈을 가지란 말도 더는 무용한 세상이 되어버린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어이할 것인가?
우리가 사는 나라가 이토록 처절하게 된 원인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문복 시인은 <별>을 지목하고 있다. 밤하늘에 뜬 총총한 별이 아닌 “대일청구권 헐값에 팔아넘겨 뒷돈 챙긴 그가/ 야합과 밀약, 나눠 먹기로 민주화에 엿 먹이고/ 충청도 핫바지, 지역감정 부추겨 권세 누린 그가/ 큰 별이라고?” 그들을 도저히 ‘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윤동주, 알퐁스 도데, 빈센트 고흐, 게오르그 루카치…/ 그들을/ 그들의 별을/ 모든 별을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이라며 화자는 진정한 별의 의미를 떠올려 본다. ‘별’ 답지 않은 별이 이 나라를 그렇게 만들어버렸음을 떨칠 수 가 없다.
그 시작의 순간이 여차여차해서 세월이 되더니 나중에는 아버지(박정희)의 딸이 최고 권부에 오르는데 <데모가 아니여, 잔치여 잔치> 라지만, “아무렴, 또 올러가야지. 담에는 청와대까지 행진두 헐 작정이여. 테레비서 봤지? 출렁출렁 흘러가는 불꽃 강물 말이여.”라며 탄핵의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탄핵으로 세상이 물갈이가 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탄핵감이 너무 많다. <광화문통에 괴물이 산다>에서는 “언론은 개뿔! 언론입네 탈 쓰구서 나라 망치는 괴물이여. 일제헌티 붙어서 천황폐하 만세에/ 정신대, 징병 부추기구 우리 독립군을 흉악범, 비적이라구 욕혔던 매국언론이란 말이여.”라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언론관을 비판하고 있다. 참된 언론이라면 컴컴한 바다에서 반짝이는 등대와 같아야 한다는 지론일 터이다. 그들이 해온 역사의 과오는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 세상의 정의가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이태원뿐만이 아니고 <그녀는 결국 파이팅할 수 없었다>에서 “국내 최대 제빵 기업 SPC 계열사/ SPL 평택공장에서 일하던” 23세의 그녀가 무리한 야간작업에 목숨을 잃었다. 소중한 우리의 젊은이가 죽었는데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 목숨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모르는 듯 아무렇지 않은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런 시절이 지금뿐만이 아니라 수십 년 전에도 자행되었다. <메지골에 부는 바람> 은 그런 역사의 잊힌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참혹한 정경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종일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억울한 원혼을 떠올리며 이문복 시인은 “이 땅의 생명들/ 저마다의 색깔과 향기로 자유로울 때/ 나, 비로소 꽃바람 되어 돌아오리./ 메지 골에 무심히 피고 지는/ 꽃, 잎사귀들 어루만지는/ 명지바람으로 돌아오”라며 원혼들을 위로하고 있다.
이문복 시인의 시집 속 일상 같은 서사에 마음이 무거웠다. 시편 하나마다 시대의 가치에 대한 고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일들보다 가슴 아픈 일상이 더 많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산다는 것의 고통을 시적인 세계를 빌어 전하고 있다. 이문복 시인의 전언적 형용이 가슴으로 파고들어 조금이라도 세상이 변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