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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17일 금요일 아침입니다.
글 옮긴 이 <건강 바이블 연구소> 원장 박 한서
제목 : <와신상담>(臥薪嘗膽)를 아시나요?
<와신상담>(臥薪嘗膽)은
[臥:누울 와 , 薪:섶나무 신 , 嘗:맛볼 상 , 膽:쓸개 담]이며
"장작 위에 누워서 쓰디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의
한자성어. 복수나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가오는
어떠한 고난도 참고 이겨낸다는 말이다.
《사기》(史記)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뜻은
땔나무 위에 눕고, 쓸개를 맛보다.
원수를 갚기 위해 분발하는 것이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역사적 유래와 근거>
춘추 전국시대 말기에 연이어 패자로서 춘추 <오패>의 반열에 올라
춘추시대의 대미를 장식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는 사이였습니다.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인
<손무>(孫武)와 충신 오자서(伍子胥)의 보필을 받아 당시의
제후국들을 굴복시키고 춘추 <오패>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합려> 19년(BC496), <합려>는 <월>나라를 쳤다가
<월>왕 <구천>(勾踐)에게 패하고, 손가락에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합려>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월>나라를 절대로 잊지 말라.(必毋忘越)”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2년 후 <월>왕 <구천>은
<부차>가 밤낮으로 병사들을 훈련시킨다는 말을 듣고
대부 <범려>(范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부차>를 선제공격 했다가 도리어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부차>는 승세를 몰아 <월> 나라의 수도 <회계>(會稽)를 포위했습니다.
<구천>은 패잔병 5,000여 명을 데리고 회계산(會稽山) 꼭대기에 피신하여,
<백비>(伯嚭)에게 후한 예물을 바치고 강화를 요청했습니다.
나라를 바치고 <오>나라의 신하가 되겠다는 것이 강화의 조건이었습니다.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를 묵살하고 <백비>의 계책에 따라 <월>나라와
강화한 후, <구천>을 <오>나라에 불러 자기의 노예가 되도록 했습니다.
이를 ‘회계지치(會稽之恥)’, 즉 <회계>의 치욕이라 합니다.
<구천>은 나라의 정치를 대신들에게 맡기고 <범려>와 함께 <오>나라에 가서
3년 동안 <부차>의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는 일을 했으며, <부차>가 병이 들자
<부차>의 변까지 맛보아 가면서 몸소 간호하기도 했습니다.
(▶ 상분(嘗糞) 참조)
<부차>는 충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구천>을 석방했습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몸을 수고롭게 하고 속을 태우면서, 자리 옆에
<쓸개>를 놓아두고 앉거나 누우면 <쓸개>를 바라보았으며 먹거나 마실 때
또한 <쓸개>를 맛보며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느냐?’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설욕의 강한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吳旣赦越, 越王句踐反國, 乃苦身焦思, 置膽於坐,
坐臥卽仰膽, 飮食亦嘗膽也. 曰, 汝忘會稽之耻邪.)
<구천>은 손수 밭 갈고 부인은 길쌈을 하였으며, 고기를 먹지 않고
현인을 찾고 빈객을 우대하면서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했습니다.
<문종>(文種)에게는 나라 살림을 다스리게 하고,
<범려>에게는 군대 양성을 맡겼습니다.
<구천>은 10년 계획을 세워 생산을 장려하고
물자를 모으며 전쟁 준비를 했습니다.
<오왕> <부차>가 <제>(齊)나라를 공격하면서 <월>나라에 참전을 요청하자,
군사를 파견하여 <오>왕을 도와 그의 환심을 사 두기도 했습니다.
(▶ 삼십육계(三十六計)의 연환계(連環計) 참조)
그런 후에 <구천>은 <오>나라의 내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뇌물을 좋아하는 <오>나라의 대부
<백비>를 매수했으며, <부차>에게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습니다.
(▶ 동시효빈(東施效顰) 참조)
<오>나라에는 간신배가 득세하였으며, 자주 충간을 하던 <오자서>는
왕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결과로 왕의 의심을 사게 된 데다,
<백비>의 모함까지 받아 왕이 내린 칼을 받고 자결했습니다.
<오자서>가 죽은 다음 해,
<부차>는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 삼십육계(三十六計)의 연환계(連環計) 참조)
그 후 2년 뒤에 <오>왕 <부차>가 정예부대를 이끌고 북정을 하고,
황지(黃池)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여 한창 그의 위엄을 보이고 있는 동안,
<구천>은 <오>나라가 비어 있는 틈을 타 <오>나라에 침입하여
태자를 잡아 죽였습니다.
제후들과 회맹하는 자리에서 급보를 전해 들은 <오>왕은
모든 사항을 극비에 부치고, 서둘러 회맹을 마친 다음
(▶ 여화여도(如火如荼) 참조),
즉시 <월>나라에 사자를 보내 강화를 요청했습니다.
<구천>은 <범려>와 의논 끝에 강화를 수락하기로 했습니다.
북정을 하러 갔던 <오>나라의 정예부대가 돌아와 일전을 벌일 경우
승패를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화를 맺은 후,
<월>나라는 계속 군비를 확충했습니다.
하지만 <오>나라는 잦은 북정으로 군사들이 피로했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했으며, 그동안 많은 전쟁을 겪느라 병력의 손실도
적지 않았습니다. 4년 후, <월>나라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여 도처에서 <오>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3년에 걸쳐 <오>나라의 수도를 포위했습니다. <부차>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구천>에게 항복했습니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를
가엾게 여겨 항복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회계의 일은 하늘이 <오>나라에게 <월>나라를
준 것인데 <오>나라가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오>나라를 <월>나라에게 주는 것이니
하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 이렇게 <범려>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부차>는 자살했습니다.
<구천>은 <백비>를 잡아 죽였습니다.
<백비>가 그 임금에게 충성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으며 내통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평정하고 그 여세를 몰아 북진하여
회하(淮河)를 건너 서주(徐州)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춘추시대
최후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월 왕구천 세가(越王勾踐世家)〉》에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사기 〈월 왕 구천 세가》에 나오는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복수를 위한 노력에서 <와신상담>이 유래했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 이 전적에는 <구천>이 쓸개를 맛보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는 <상담>에 대한 이야기는 있지만,
<부차>가 땔나무 위에 누워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는
<와신>’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와신>에 대한 이야기는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차>는 복수에 뜻을 품고 아침저녁으로 섶에 누워
출입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시켜 외치게 했습니다.
“<부차>야, 너는 <월>나라 사람들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
(夫差志復讐, 朝夕臥薪中, 出入使人呼曰, 夫差, 而忘越人之殺而父耶.)」
<상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천>은 자기 나라로 돌아와 자리에다 <쓸개>를 매달아 놓고
누우면 쓸개를 쳐다보고 맛을 보며 말했습니다.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는가?”
(勾踐反國, 懸膽於坐, 臥卽仰膽嘗之曰, 女忘會稽之恥耶.)
이를 보면 <와신상담>’의 출전은 《십팔사략》이고,
전고는 《사기 〈월 왕 구천 세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업에 실패하여 날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날린 사장은 포기하지 않고
‘와신상담’하며 노력한 끝에 옛날에 날린 재산을 다 찾았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역사와 문화 자료─<상담>은 있는데 <와신>은 없다
<와신상담>’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면 일반적으로 <부차>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땔나무 위에서 기거하면서 복수의 칼을
간 데서 <와신>이 유래했고
나중에 <부차>에게 패한 <구천>이 <쓸개>를 맛보면서 복수의 칼을
간 이야기에서 <상담>이 유래한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구천>이 땔나무 위에서 자면서 <쓸개>를
맛본 데서 <와신상담>이 유래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어떤 자료에는 <부차>가 <좌신상담>(坐薪嘗膽)’했다고 하기도 하고
(여조겸(呂祖謙), 《좌씨전설(左氏傳說)》), <부차>가 <와신상담>(臥薪嘗膽)’
했다고 하기도 한다 (장부(張溥), 《춘추열국론(春秋列國論)》).
그런데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에 대한 당시와 가장
가까운 역사 기록에 <상담>에 대한 이야기는 있지만 <와신>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먼저 《사기(史記) 〈월 왕 구천세가(越王勾踐世家)〉》를 보자.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몸을 수고롭게 하고 애를 태우면서,
자리 옆에 <쓸개>를 놓아두고 앉거나 누우면 쓸개를 바라보았으며
먹거나 마실 때 또한 <쓸개>를 맛보며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느냐?’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吳旣赦越, 越王句踐反國, 乃苦身焦思, 置膽於坐,
坐臥卽仰膽, 飮食亦嘗膽也. 曰, 汝忘會稽之耻邪.)
이 사료에는 <상담>은 있지만, <와신>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월> 전쟁의 과정을 그린 《국어(國語) 〈월어(越語)〉,
〈오어(吳語)〉》와 《월절서(越絶書)》, <오><월> 전쟁을 시대 배경으로 하여
<오자서>의 복수를 그린 《사기(史記) 〈오자서 열전(伍子胥列傳)〉》에는
아예 <와신>이나 <상담>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월>왕 구천의 이야기를 대량으로 기록한 《좌전(左傳) 〈정공(定公)〉,
〈애공(哀公)〉》에도 <와신상담>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월춘추(吳越春秋) 〈구천귀국외전(勾踐歸國外傳)〉》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월>왕이 <오>나라에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몸을 괴롭히고 마음을 수고롭게 하였습니다. 피곤하여
눈이 감기면 여뀌로 문질렀고, 발이 시리면 물에 적셨으며, 겨울에는
얼음을 안고, 여름에는 불을 잡았습니다.
마음에 근심하며 뜻을 괴롭게 하고, 문에 <쓸개>를 달아 놓고
들어갈 때 나갈 때에 맛을 보며 입에서 끊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운 후에는
다시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말했습니다.
“왕은 어찌 그리 깊이 근심을 하십니까. 복수를 하고 옛일을 헤아리는 것은
왕의 근심할 바가 아니라 우리 신하들이 해야 할 급한 임무입니다.
”(越王念復吳讐非一旦也, 苦身勞心, 夜以接日. 目臥則攻之以蓼,
足寒則漬之以水. 冬常抱冰, 夏還握火. 愁心苦志, 懸膽於戶, 出入嘗之,
不絶於口. 中夜潸泣, 泣而復嘯. 於是群臣咸曰, 君王何愁心之甚.
夫復讐謀故, 非君王之憂, 自臣下急務也.)」
여기에도 <상담>은 나오지만 <와신>’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글에 ‘目臥則攻之以蓼’, 즉 ‘(피곤하여) 눈이 감기면
여뀌로 눈을 문질렀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에서 <와신>이 유래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와(目臥)’는 피곤하여 눈이 감긴다는 뜻입니다.
‘蓼’(어뀌 료)는 《설문(說文)》에 의하면 ‘신채(辛菜)’입니다.
그래서 ‘피곤하여 눈이 감길 때 매운 맛이 나는 여뀌로 눈을 문지르는 것’을
‘와신(臥辛)’이라 하게 되었고, 후에 ‘辛’이 음이 같은 ‘薪’으로 와전되어
‘와신(臥薪)’이 나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와신상담>’은 원래는 매운 풀로
눈을 문질러 잠을 쫓고, <쓸개>를 맛보면서 패배의 쓰라린 추억을
상기한다는 뜻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와신상담’>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당 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식(蘇軾)인데, 소식이 어떤 근거에서 <와신상담>이란 말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 이미 ‘여뀌로 눈을 문지르다’는 뜻이 아닌
‘섶 위에 눕다’는 뜻의 ‘와신’이란 말이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저는 황제의 유명을 받은 이래로 ‘와신상담’했습니다.(僕受遺以來, 臥薪嘗膽.)」
(소식(蘇軾) 《동파속집(東坡續集) 〈의손권답조조서(擬孫權答曹操書)〉》)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와신상담>’ 고사 중에서 ‘와신’에 대한 이야기는
남송(南宋) 말에서 원(元)나라 초에 활동했던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한 것인데,
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원(伍員)의 자는 자서(子胥)로 초(楚)나라 사람 <오사>(伍奢)의 아들이다.
<오사>가 주벌을 당하자 <오>나라로 도망해 <오>나라의 병사가 되어
(초 나라의 수도)영 초으로 들어갔다. <오>나라가 <월>나라를 쳤으나
(오 왕)<합려>가 부상을 당해 죽고 아들 <부차>가 즉위하니,
<자서>는 다시 그를 섬겼다. <부차>는 복수에 뜻을 품고 아침저녁으로
섶에 누워 출입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시켜 외치게 했다.
“부차야, 너는 월나라 사람들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
<주> 나라 <경왕> 26년 <부차>는 <월>나라를 부초에서 깨뜨렸다.
<월>왕 <구천>은 남은 병력을 가지고 회계 산에 머물면서
자신은 신하가 되고 자기 부인은 첩이 되겠다고 청했습니다.
<오자서>는 그럴 수 없다고 했으나 태재 <백비>는 <월>나라의
뇌물을 받고 <부차>를 설득하여 <월>나라를 용서하게 했다.
<구천>은 자기 나라로 돌아와 자리에다 <쓸개>를
매달아 놓고 누우면 <쓸개>를 쳐다보고 맛을 보며 말했다.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는가?” 그리고 국정을 들어 대부 <문종>과
<범려>에게 맡기고 더불어 군사 업무를 다스리고 <오>나라를
도모하려 했다.
(伍員字子胥, 楚人伍奢之子. 奢誅而奔吳, 以吳兵入郢, 吳伐楚,
闔廬傷而死. 子夫差立, 子胥復事之. 夫差志復讐, 朝夕臥薪中, 出入使人呼曰,
夫差, 而忘越人之殺而父耶. 周敬王二十六年, 夫差敗越於夫椒. 越王勾踐以餘兵,
棲會稽山, 請爲臣妻爲妾. 子胥言不可. 太宰伯嚭受越賂, 說夫差赦越, 勾踐反國,
懸膽於坐, 臥卽仰膽嘗之曰, 女忘會稽之恥耶. 擧國政, 屬大夫種與范蠡, 共治兵事, 謀吳.)」
이처럼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 당시와 가장 가까운
역사를 기록했던 전적에는 <와신>’에 대한 기록이 없었고,
《십팔사략》의 기록에서 ‘와신상담’이 유래했다.
그러나 이 책은 사실(史實)의 취사선택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별로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사의 유래 요약>
춘추시대, <양쯔강> 하류에 서로 적대적인 오나라와 월나라가 맞닿아 있었다.
서로 적대적인 데다가, 양국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초나라의 수도를 오나라가 정복하고
그들을 거의 멸망시킬 뻔한 일들 등 때문에 (진나라(秦)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멸망은 모면함)
강국이 자신들의(초나라) 바로 밑에 있는 것을 꺼렸기에, 월나라더러 오나라를 치도록 사주하여
그들은 항상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월>왕 <구천>이 병법의 대가인 <손무>가 <오>를 떠나고,
<오>왕 <합려>가 주색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계획을 세워 오를 공격했다.
이 전쟁으로 <오>왕 <합려>와 세자는 죽임을 당하고 <오>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둘째 왕자 <부차>는 <오왕>이 되어 그날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매일 장작더미 위에서 자며 부하들 더러 인사 대신에
<구천>에게 원수 갚을 것을 각인시키도록 했다.
그렇게 <오자서> 등의 도움으로 수년간 복수를 다짐하고 부국강병을
이룬 끝에, <오>나라는 <월>군을 몰살시키고 <월>왕 <구천>을 생포해
<오>국으로 압송, <합려>의 묘지기 일을 보고 왕후와 함께 삭발시키는 등
치욕을 주고, <월>나라를 철저히 파괴하고 돌아갔다.
그 수 년 후, <구천>은 <오자서>가 자신의 복수 의지를 알아채고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부차>의 신임을 얻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초>나라를 경유해 <월>나라로 돌아가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구천>은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밖으로는
<부차>에게 경국지색이라고도 불리는 <서시>를 보내고, 온갖 진귀한
조공 품이며 군대를 지원해 주는 등 진실한 신하로 보여서 20년을 기다렸다.
마침내 <부차>가 <제>나라와 <초> 양강을 굴복시키고 마침
또 다른 중원의 강국 <진>(晋)을 굴복시키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려는
틈을 타 <오>국을 기습, <라오허> 산에서 화공과 수전의 대승으로
<오>나라를 패배시켰다. 이후 <구천>은 <부차>를 죽이고
<오>국을 합병하였다.
이 고사로부터 <와신상담>은 '장작에 누워 복수를 다짐하고
곰의 쓸개를 핥으며 노력해서 고난을 이겨 낸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우리는 놀라운 발견의 중국 고대 춘추전국 시대
<월>나라의 왕<구천> 황제의 청동상 인
<와신상담>을 소장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 최고의 역사적 유물입니다 가치 평가는
중국 정부 관계자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소장자
<아리랑 연구소> 원장 박 한서
<오늘의 묵상>
<로마서>3장10절-12절
10절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절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아멘>
<박 한서 원장 건강 비방 공개>
제목 : 늙지 않는 방법
1). 칼로리 섭취를 절반으로 줄인다.
<장수 하는 鶴의 胃는 항시 절반만>
2). 열을 가해 조리한 음식을 가능한 삼가고
단순한 재료를 단순하게 조리하여
적당량 만 먹는다.
3). 음양수 물을 매일 2,000 cc 정도 마신다.
사람다운 체형 유지를 위해서
식사 전 30분, 식후 2시간에 마신다.
취침 전. 기상 후에 꼭 마신다.
4) 매일 1시간 정도 반드시 걷는다.
다리는 제2의 심장이라고 한다.
노화는 다리로부터 온다.
시선은 15 도 상단을 보고 걷는다.
땅을 보고 걸으면 다리가 벌어진다.
<중년이후 보기 흉해>
5) 호흡을 깊게 서서히 고요히 한다.
6) 무리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
과도한 운동은 수명단축,
무리한 유산소 운동은 활성산소(세포毒)이
생겨 세포에 악영향을 준다.
7) 즐겁게 살며 보람을 갖는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다.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을 발견하는 것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 지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8). 항상 타인과 자주 사귄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타인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다양한 자극이 되어 생명력을 높인다.
<적당한 SEX 도 효과적인 不老術 이다>.
9) 적당한 취미 생활을 한다.
10) 자신에게 맞는 약제를 구입 복용한다.
延年 益壽 開心 益智, 건망증 및
불노환 등 관련 약초가 있다
식초를 물에 타서 자주 먹으면
血栓症(혈액이 막히는 증세) 예방과
지방 분해로 인해 혈액순환이 잘되고,
위 3 항의 물먹기를 몇 개월 실천하면
아침에 누는 소변에 냄새가 없어지기도
하여 좋다고 한다.
오늘도 건강하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고 행복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