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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건국과 발전
중국 문명이 일어났던 황하 유역에서 동북쪽으로 계속 가면 그 끝에 한반도가 자리하고 있어요.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70만 년 전이었어요. 그리고 신석기 문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8천 년 전쯤 시작되었어요.
한반도 구석기 문화 유적 주먹 도끼한반도 구석기 시대에 쓰였던 주먹 도끼이다.
한반도 신석기 문화 유적 조가비 탈조가비에 세 개의 구멍을 뚫어서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다. 주술에 쓰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 청동기 유물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왼쪽부터 청동검, 청동방울, 청동거울이다. 주로 제사 지낼 때 사용했다.
이어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사람들이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약 3천 년 전부터였지요.
이즈음 이미 유럽의 그리스에서는 여러 작은 도시 국가인 폴리스가 형성되어 있었고(기원전 800년), 얼마 후에는 로마가 나라를 세웠어요(기원전 753년). 중국에서는 춘추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지요(기원전 770년).
한반도 일부와 만주 지역 사람들도 부족끼리 서로 싸우고 뭉치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더 큰 무리가 되었어요. 그리고 나라를 이루었어요. 바로 고조선1)이지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의 첫 임금은 단군왕검2)이었어요.
아주 오랜 옛날 하늘의 임금 환인은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였지요. 이에 환웅은 천부인3) 세 개와 3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4) 아래로 내려왔어요.
“이곳을 ‘신시’라 부르겠소.”
아울러 환웅은 바람을 다스리는 풍백, 비를 다스리는 우사, 구름을 다스리는 운사라는 신하들을 데려와 함께 인간 세상을 다스렸어요. 곡식을 잘 여물게 하고 질병을 고쳐 생명을 지켰어요. 뿐만 아니라 선악을 가리고 형벌을 주는 일도 하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며 간곡하게 부탁을 했지요. 그러자 환웅은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쪽을 건네주었어요.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이것만 먹고 지내면 사람이 될 것이니라.”
환웅의 이야기를 들은 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가지고 동굴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호랑이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가고 말았어요. 다행히 곰은 더 오래 참아서 삼칠일(21일) 만에 어여쁜 여자의 몸이 되었지요. 환웅은 그녀를 웅녀라고 불렀어요.
얼마 후, 웅녀는 신단수 아래로 가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빌었어요. 그런 웅녀의 모습을 본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였지요. 덕분에 웅녀는 열 달이 지난 후에 아들을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단군왕검이에요.
단군은 평양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새 나라를 세웠는데, 이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에요. 《동국통감》5)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해요.
마침내 고조선은 영토를 점점 넓혀 갔고, 그 힘이 더욱 강해졌어요. 기원전 4세기에 들어서자 이를 지켜보던 중국의 연나라는 고조선을 몹시 경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마침내 군사를 보내 고조선을 침략해 서쪽 땅을 빼앗았지요.
얼마 후, 중국 땅에서는 진나라가 나타났다가 멸망하고 다시 한나라가 세력을 잡았어요. 그러는 동안 중국 땅은 거듭되는 전쟁으로 아주 혼란스러웠어요. 그러자 난리를 피해 수많은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넘어왔어요. 이들 중에는 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위만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 1천여 명을 데리고 고조선의 국경을 넘어왔어요.
“왕께서는 너그럽게 저와 저의 백성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에 준왕은 위만에게 높은 관직을 주고, 고조선의 서쪽 땅 100리를 주어 다스리게 했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위만은 철기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왕검성6)을 점령하고 준왕을 내쫓았어요. 그런 뒤 왕 노릇을 하며 사방의 여러 작은 나라를 점령하고 고조선의 국력을 더욱 키워 나갔지요.
위만은 연나라에서 배운 우수한 철기 기술로 무기를 만들고, 그 외에도 중국의 앞선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힘을 쏟았어요.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애쓰기도 했어요.
할아버지가 쌓은 업적을 바탕으로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더욱 힘을 키웠어요.
그러자 한나라는 고조선이 한나라와 주변 나라 사이의 교류를 중간에서 방해하고 있다는 둥, 한나라 백성들을 유인하여 고조선에 들어와 살도록 하고 있다는 둥 트집을 잡았어요.
그리고 사신을 보내, 흉노 족7)과의 외교 관계를 끊으라며 고조선의 정치까지 간섭하려 들었어요. 뿐만 아니라 사신8)을 배웅하러 나온 고조선의 신하까지 함부로 죽였어요. 우거왕도 화가 나서 군사를 보내 한나라 사신의 목을 베었지요. 결국 이를 핑계 삼아 한나라는 기원전 109년, 고조선을 침략했어요.
고조선은 한나라의 공격에 맞서 수도 왕검성을 굳게 지켰어요. 때로는 왕검성에서 나와 한나라 군대를 불시에 습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협상도 했어요. 1년 동안 전쟁이 이어진 끝에 마침내 한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왕검성을 포위했어요. 물론 고조선의 병사들은 성문을 닫아걸고 필사적으로 버텼지요. 그러자 한나라는 꾀를 썼어요.
“만약에 항복한다면, 그 누구든 간에 한나라의 벼슬을 내리겠소.”
그러자 고조선의 몇몇 귀족들이 항복을 하자고 나섰어요. 하지만 우거왕은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했지요. 항복하자는 쪽과 끝까지 싸우자는 쪽이 나누어졌어요. 마침내 신하 ‘참’이 우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해 버렸어요. 이어 태자마저도 투항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대신 성기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한나라에 맞서 싸웠어요.
“우리는 한나라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울 것이오.”
하지만 한나라는 이미 투항한 태자와 또 다른 신하에게 고조선 백성들을 달래게 하고 대신 성기의 목숨을 빼앗도록 했어요. 결국 성기가 죽고 성문이 열리면서 왕검성은 함락되고 말았지요. 기원전 108년의 일이었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 (처음 세계사 2 - 통일 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탄생, 2014. 8. 8., 초등 역사 교사 모임, 한동훈, 이희은)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古朝鮮)의 건국자이며, 우리 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인물.
[내용]
단군 신화에 따르면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천제(天帝), 곧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과 곰에서 변한 웅녀(熊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사달(阿斯達)을 도읍으로 하여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환웅은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외부에서 이주해 온 세력의 대표로 보고, 웅녀는 곰을 숭배하는 토착 집단의 대표로 파악하여, 이주민과 토착민의 결합에 의해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본다. 즉 북방에서 이주해 온 세력이 중심이 되어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토착 세력을 통합하면서 우리 민족이 형성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형성과 고조선의 건국은 청동기 시대에 이루어졌으며, 고조선은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사회였다고 보고 있다. 본격적인 농경 사회로의 전환은 보통 청동기 시대에 이루어지는데,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올 때 거느렸던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는 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날씨를 관장하는 존재여서 농경 문화를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단군왕검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제사장을 의미하는 ‘단군’과 정치적⋅군사적 지도자인 ‘왕검’이 합쳐진 용어로, 아직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 단계인 고조선의 왕을 지칭하는 단어로 이해된다. 한편 단군왕검이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왕위에서 물러나 산신이 될 때 나이가 1908세였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그 기간 동안 단군왕검의 칭호를 가지는 지도자가 대를 이어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결국 단군왕검은 역사적 실체로서 특정 개인이 아니라, 고조선의 건국 세력 및 지배층의 문화적 기원과 발전 단계를 반영하는 관념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단군을 우리 민족의 혈연적 조상이나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이라고 보는 인식은, 한국사 체계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단군 신화에 나오는 단군왕검의 탄생 내력은 신과 동물의 결합이라는 신이(神異)한 탄생 과정을 보여 줄 뿐, 어떠한 역사적 사실과 연결하여 해석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2) 고조선의 건국
단군과 고조선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군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이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군장은 주변의 여러 사회를 통합하고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갔다.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단군 왕검(檀君王儉)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한다(B.C. 2333). 단군 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1).
참성단(인천 강화)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군장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로까지 발전하였다고 보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의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이 나오는 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2).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승되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요소는 후대로 가면서 새로이 첨가되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된 속성의 하나로서,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단군의 기록은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단군 왕검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구릉 지대에 거주하면서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사유 재산의 성립과 계급의 분화에 따라 지배 계급은 농사와 형벌 등의 사회 생활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에 계급의 분화와 함께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弘益人間〕.”는 것도 새로운 질서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진적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여 갔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되었다.
단군은 제정 일치의 지배자로서 고조선의 성장과 더불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 즉, 각 부족 고유의 신앙 체계를 총괄하면서 주변 부족을 지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고조선은 초기에는 요령 지방에 중심을 두었으나, 후에 와서 대동강 유역의 왕검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3). 고조선은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때 세력이 약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B.C. 3세기경에는 부왕(否王), 준왕(準王)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相), 대부(大夫), 장군(將軍)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하를 경계선으로 하여 중국의 연(燕)과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위만의 집권
중국이 전국 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게 되자 유이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안배하여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하여 왔다. 그 중 위만(衛滿)은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처음에 준왕에게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거주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며, 그 뒤에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 때, 위만은 그 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게 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 194)4).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를 사용함으로써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이 더욱 성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예(濊)나 남방의 진(辰)이 중국 한(漢) 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한과 대립하게 되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
이에 불안을 느낀 한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의 무력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완강하게 대항하였으나, 마침내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B.C. 108).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드디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313).
고조선의 사회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려 주는 것으로 8조의 법이 있었다. 그 중에서 3개 조목의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상처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하게 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사회에서는 생명과 사유 재산을 중히 여기고 보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것은 당시 사회에 권력과 경제력에 차이가 생겨나고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지면서 형벌과 노비도 발생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를 짓는 것을 수치로 여겨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아 문을 걸어 둘 필요가 없었다고 하며, 여자는 정절을 귀하게 여겼다고 하는 데에서 가부장제적인 가족 제도가 확립되었음도 알 수 있다.
한의 군현이 설치되어 억압과 수탈을 가하게 되자, 토착민들은 이를 피하여 이주하거나 단결하여 한 군현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 군현은 엄한 율령을 시행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법 조항도 60여 조로 증가되었고, 풍속도 각박해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