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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 일양지신공
대리 단씨의 전가지보인 일양지공은 천하에 독특한 절세의 기공이다. 무림의 허다한 문파 중 소림파(少林派)의 무예가 출중하고는, 달리 일양지공을 비견할만한 것이 없었다.
대리 단씨는 일국의 황족으로 명성 높은 무림세가(武林世家)요, 거기다가 일양지공까지 갖추어 그 칭송이 천하에 자자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은 세세에 드문 일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물론 무예를갖춘 명문지족이 일찍이 없지 않았으나 대리 단씨처럼 그 명성과 위세가 현혁(顯赫)한 가문은 몇 안 되었다.
천룡사 노승은 전변노괴의 장력에 심맥이 크게 상하긴 했으나 그나마 일속의 보호로 숨이 아주 끊기지는 않았다.
전변노괴는 이 한 번 장풍에 판가름이 났다고 생각했다.
'내친김에 천룡사 중 놈 한두 놈은 더 맥을 끊어 놔야겠다. 그래야 이 천룡사 중 놈들 앞에 내 위신이 서지. 또 그래야 이 일속녀석을 궁지에 몰아넣어 일양지 비본을 뺏을 수 있다.'
백응향비가 보니 제아무리 일속이라도 이번에는 영락없이 당하고야 말 것 같았다. 전변노괴가 득의양양하게 비웃음을 날리며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장풍을 내 쏘는데도 일속은 두 번 다 그저 막아내기에만 급급할 뿐 맥을 못 추고 있는 것 아닌가. 백응향비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바로 그때였다. 일순 일속의 이마에 땀방울이 숭글숭글 내돋고 머리 위로 하얀 김이 피어 올랐다. 그런데 그 김은 묘하게도 한데 서려 흩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전변노괴는 흠칫 놀랐다. 그는 번번이 일속에게 지긴 했으되 기실 그를 그리 대단치 않게 여겨 왔었다. 일양지공이라는 절학을 익혔다뿐, 그렇지 않다면 제깟 놈이 감히 자기 적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었다. 그러나 일속의 머리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을 보니 자기가 수십 년 간이나 연마해 온 내력과 견줄 만하지 않은가? 전변노괴는 적이 두려웠다.
반야원의 여섯 노승은 일속이 나간 뒤로 그때껏 눈을 내리 감고 아무 말도 없이 마치 잠이 든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좌정해 있었다. 그중 한 선사가 문득 눈을 뜨며 말했다.
"전변노괴야 그리 염려할 위인은 아니나 이제 곧 그보다 더 강한 적수가 올 것이니…… 하, 이 일을 어찌할꼬!"
빗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날은 이미 환히 밝아 있었다.
전변노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노승의 심맥은 탁 끊어져 나가고 말 터인데, 조급해할수록 웬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변노괴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다잡은 다음, 혼신의 힘을 모아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이미 기운이 다한 것이다. 전변노괴는 그만 맥이 탁풀려 두 팔을 툭 떨군 채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제야 일속은 얼굴이 불콰해지도록 웃었다.
"목숨은 다치지 않았으니 이만해도 다행입니다."
노승도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다소 펴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주님의 은덕으로 요행 죽음은 면했으니, 고맙습니다."
일속은 노승을 부축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전변노괴는 또 지고 말았다. 그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제정신을 차린 듯 얼굴이 온통 붉으락푸르락해지며 고함을 내질렀다.
"안 돼, 안 돼! 이대로는 못 끝내! 다시 해야 돼!"
"일언이 의당 중천금(重子金)이어늘 무림 중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 어찌 이렇듯 식언을 하십니까?"
일속은 정색을 하따 한마디 내쏘았다. 전변노괴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씩씩거리더니 이번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애먼 막북삼괴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며 소리소리 질렀다.
"모두 네 놈들 탓이야. 너희 막북삼괴 놈들만 없었어도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는 건데 너희 놈들이 온통 내 기를 흩트려 놓았어!"
졸지에 덤터기를 뒤집어쓴 막북삼괴는 어이가 없었다. 이거야말로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 차는 격 아닌가. 제풀에 제가 나가떨어지고는 엉뚱하게 트집을 잡다니……. 세 사람은 하나같이 두 눈
이 휘둥그래졌다.
"그럼 전변노조님, 우리가 비켜 드릴 테니 어디 한번 우리 없는데서 겨루어 보십시오."
백응향비가 불쑥 내뱉었다. 말은 정중하게 했으되 비로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전변노괴는 대번에 한색이 하얗게 질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뭣이? 네 따위 것들이 내 일에 참섭을 하려 들엇?"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번개같이 손을 휘둘러 백응향비에게 한 주먹 힘껏 내질렀다. 다음 순간퍽 소리가 나며 백응향비는 동가슴을 부여잡은 채 푹 꼬꾸라지고 말았다.
"시건방진 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렷! 내 오늘은 이쯤에서 사정을 두겠지만 앞으로 한 번 더 주둥아릴 놀렸다간 목숨이 남아 나지 못할 줄 알아라!"
전변노괴는 호통을 치며 발길질로 백응향비를 힘껏 밀치고는 대문을 박차고 나가더니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백응향비는 몸을 추슬러 일어날 염도 못 내고 뻘건 피를 울컥을컥 토해냈다. 얼굴마저 흙빛이 되어서는 눈까풀을 까뒤집고 땅바닥을 정신없이 기어다녔다.
"아이고, 형님! 이걸 어쩌나, 이걸 어째……."
세타명사는 안달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땐 이미 중상을 입은 노승도 다른 노승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고 일속만이 남아 운공양식(運功養息)을 하고 있었다.
왜금차호는 일속의 눈치만 살피더니 도저히 안 되겠는지 조르르 달려가 넙죽 꿇어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대사님 한 번만 봐 주십쇼! 어리석은 생각에 일양지 비본을 탐내기는 했으나 애시당초 사람을 해칠 생각은 없었습니다요. 대사님, 제발 자비를 베풀어 저희 형님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네 ?"
일속 대사는 눈을 내리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백응향비는 곧 숨이 꺽꺽 넘어가면서도 왜금차호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이 놈, 둘째야! 구차하게시리 목숨을 구걸하다니, 당장 집어 치우지 못할까! 어서 부축이나 해라. 가자!"
말은 비록 이렇게 했지만 실은 그 역시 낙담하여 눈앞이 캄캄했다. 사원 문 밖을 나서면 자기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전변노괴의 일격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앞가슴에 있는 참명혈(斬命血)을 직통으로 내질렀는데 혈 (穴)도 사혈 (Ff穴)이거니와 그 힘도 가히 돌을 빠갤 만했다. 백응향비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일속은 눈을 내리감은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때 불현듯 염불 외우는 소리가 들려 오고 이내 문이 열리더니 노승 여덟이 줄지어 걸어왔다. 맨 앞에 더 늙으려야 늙을 수도 없을 만큼 연로한 노승이 꼿꼿이 등을 세우고 자못 위엄 있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얀 눈샙꼬리는 뺨까지 휘늘어져 봉황 문양을 그렸고 얼굴엔 불긋불긋 혈기가 돌았다. 학수동안의 도(道)가 높은 고승 모습 그대로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시주님이 탐심(貪心)을 버린다면 부처님께서도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고승은 막북삼괴 앞으로 곧장 다가오더니 적이 정중하게 말했다. 막북삼괴는 대사막에서 지내며 서로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사내들이었다. 그렇게 서로 똘똘 뭉치지 않았더라면 그 메마른 중사 속에서 그나마의 명성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왜금차호와 세타명사는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고 있다가 고승의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그 어떤 말씀이라도 다 듣겠습니다."
백응향비는 이 고승이 자기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둘째, 셋째야, 그런 말은 듣지도 말아라. 난 이미 심맥이 끊긴터, 백방이 무효인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러나 세타명사는 백응향비가 뭐라든 아랑곳 않고 그저 무릎을 꿇은 채 일심으로 고승에게 사정사정을 했다.
"대사님께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어떤 분부라도 다 따르겠습니다. 일각이 급하옵니다. 저희 형님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귀 사원을 위해 죽으라 하셔도 기꺼이 죽겠나이다."
고승은 장탄식을 했다.
"모름지기 탐심이 사람을 성나게 하고, 성이 나면 노(怒)하게 되고, 노하면 원(怨)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원은 화를 부르게 되지요. 세 분이 진작에 이러한 인과 관계를 아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게 아닙니까."
세타명사는 자기가 이렇듯 애원하는데도 고승이 자꾸만 쓸데없는 말만 하자 화가 치밀어 홱 고개를 돌려 왜금차호를 바라보았다.
왜금차호는 도리질을 해 보였다. 우선 맏형의 목숨을 살리려면 무슨 모욕이든 참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세타명사는 화를 속으로 꾹꾹 삭였다.
노승은 함께 온 일곱 선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천룡사는 정지(淨地)입니다. 이 사람의 죄는 크나 불문의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구해 주십시다."
다른 노승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말이 없었다. 백응향비가 아무리 하잘것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구해 주지 않는다면 이는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고승들은 즉각 백응향비를 둘러싸고 앉아 그의 몸에 손을 얹었다. 일양지공으로 그의 몸에 공력을 불어넣으려는 것이었다.
이 대리 국사 천룡사의 본래 이름은 숭성사(崇聖寺)였다. 그러나 대리국 사람들은 숭성사라 부르지 않고 대개 천룡사라고들 했는데, 여기에는 이 국사에 대한 깊은 존경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오늘날 대리국이 흥성하게 된 것도 이 사원 덕이 컸다.
천룡사는 대리성(大理城) 밖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사원에는 탑이 세 개 있는데, 당나라 초에 세워진 이 탑 세 개 중에서, 제일 큰 탑은 16층으로 높이가 200여 자나 되었다. 탑 꼭대기에는
'대당 정관위 지경덕 조(大唐貞觀尉遲敬德造)' 라고 새겨 놓았다.
천룡사에는 다섯 가지 보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탑 세 개였다.
백응향비는 두 눈을 힘없이 감은 채, 가냘프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미 반은 저승 문을 넘어선 이 백응향비를 도로 살려내기란 그리 수월치 않은 일이었다.
여덟 고승 중 여섯 고승이 저마다 그의 여섯 개 맥을 짚어 눌렀다. 한 고승은 엄지손가락으로, 한 고승은 식지로, 또 한 고승은 중지로 그의 심맥을 짚었고, 다른 고승들도 제각기 손가락을 써서 여섯 개 심맥을 짚었다.
그 여섯 개 맥이란 수지육맥(手之六脈)인 태음폐경(太陰肺經), 궐음심포경(豚陰心包經), 소음심경 (少陰心經), 태양소장경(太暘小腸經), 양명위경(陽明胃經), 소양삼초경(少陽三焦經) 등이었다.
일양지공은 과연 신공으로 여섯 고승이 혈도를 누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응향비는 따뜻한 기운이 육맥을 따라 서서히 가슴속으로 흘러 들면서 차츰차츰 심장이 열리는 감을 느꼈다. 한참이나 지나서 여섯 고승은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말없이 읍을 했다.
성미가 불 같은 왜금차호는 백응향비가 아직도 두 눈을 감은 채로 있는 것을 보고는 속이 탔다.
"아니, 이러고 그만둘 참이오? 하다 말고 그래 저대로 팽개쳐 두면 어쩌란 말이오? 어서 끝까지 책임을 져요, 책임을!"
세타명사도 십분 걱정스런 기색으로 백응향비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백응향비는 몸을 꿈틀거리더니 또 서너 차례 피를 토하고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오래 전부터 천룡사 일양지공의 육맥신검(六脈神創)이 신묘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이제야 그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됐습니다. 이 은혜 실로 백골난망이외다."
"아니, 형님, 여전히 그 지경인데 그래, 그런 말이 나와요? 저 중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자 백응향비는 기가 탁 막혔다. 이 무지막지한 둘째 입에서 그 무슨 총명한 말이 나오리란 건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바이나 자기 목숨을 살려 준 은인에게 눈치코치 없이 구니 여간 낯뜨겁지 않았다. 백응향비는 왜금차호의 말엔 대꾸도 않고 다시금 정중하게 말했다.
"여러 고승들의 구명지덕은 앞으로 두고두고 보답해 드리겠나이다."
백응향비는 겨우겨우 허리를 일으키며 세타명사에게 어서 부축 하라고 눈짓을 했다. 그래도 왜금차호는 여전히 낮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구명지덕이고 뭐고, 형님 그럼 그냥 돌아가시겠다는 거요? , 형님이 그랬잖소, 이 대리 천룡사의 일양지공만 배우면 천하에 무서울게 없다고! 그런데 불원천리 예까지 와서 이렇게 멋없이 돌아가겠다는 거요?"
그러자 백응향비는 잔뜩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나마 간신히 목숨을 건졌는데 왜금차호가 계속 저렇게 나온다면 저 여덟 노승과 일속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노룻이었다.
백응향비의 기색이 마땅치 않음이 역력하자 눈치 빠른 세타명사가 얼른 나섰다.
"둘째형님,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어서 부축이나 하세요. 어서 여길 뜨자구요!"
"잘 생각하셨소이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절대 이 대리 천룡사의 일양지 비본을 넘보지 마시오! 천룡사에는 다섯 가지 보배가 있는데 그 다섯 보배 중에서 일양지 비본말고 천룡사 세 탑도 보배 중에 보배로 꼽히지요. 그 탑 세 개만큼은 다음날 시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소승이 친히 구경시져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일속이 읍을 하며 말했다.
백응향비는 간신히 몸을 굽혀 답례했다. 원래는 천룡사에 오면 단단히 트집을 잡아 일양지 비본을 뺏어 갈 작정이었는데 도리어 이렇게 큰 낭패를 보고 거기다 은덕까지 입고 떠나게 되니 실로 남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금차호는 마뜩찮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뻐들뻐들하니 백응향비를 부축했다. 백응향비는 둘째와 셋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걸음을 옮겨 대문 쪽으로 향했다.
일속과 여덟 고승이 문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세 사람은 읍을 하고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멀어져 갔다.
일속과 여덟 노승은 막북삼괴가 산비탈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우리 천룡사에 한동안 큰 재난이 따를 것 같습니다."
고승들은 일속이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대사막의 막북삼괴까지 쳐들어와 비본을 뺏으려 하는 판이니 앞으로 그런 자들이 수도 없을 것이 아닌가.
횐 눈썹의 노승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대개 스스로 걱정하여 마음이 번거로워지는 법이거늘 일속은 그럴 필요가 무엇이오?"
일속은 노승에게 깊이 허리를 굽혔다.
"사숙께서 일깨워 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막북삼괴는 백응향비를 부축하며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채 반 리(里)도 못 와서 벌써 힘이 빠져 버렸다.
"동생, 여기서 좀 쉬세나."
"그럽시다."
왜금차호가 한마디하자 세타명사도 백응향비를 길 옆으로 눕히고 나란히 앉았다.
비 온 뒤라 날씨는 그런 대로 선선했다. 세 사람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제각각 심란한 마음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언뜻 어디선가 모기처럼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여어, 이게 누군가? 막북삼괴 아닌가?"
왜괌차호는 흠칫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누구야?"
소심한 세타명사는 덜컥 겁이 나서 일어서지는 못하고 허리만 어정정하게 일으키며 물었다.
"게 누구요? 왜 나와서 말을 못하시고 그러는 게요?"
그러나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 응답이 없었다.
백응향비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간신히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세타명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님, 염려 붙들어 매요. 저런 녀석쯤이야 이 세타명사가 상대할 테니."
그리고는 주위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뉘신지 모르겠지만 어서 냉큼 나와서 통성명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몸을 숨긴 채 다시금 앵앵거리는 소리만 들려 왔다.
"자네들 막북삼괴는 정말 바보들이군. 헤헤헤…… 그래 그 늙은 중 놈들한테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면서? 보배산에 들어갔다가 낭패만 보고 빈손으로 돌아오다니, 그래, 이런 등신들이 어디 있나?"
막북삼괴는 결코 가벼이 넘길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대체 네 놈은 누구냐? 누군데 꼴같잖게 남의 일에 참견이냐, 참견이. 그럼 네 놈도 천룡사엘 다녀왔다 이 말이냐?"
왜금차호가 볼멘 목소리로 외쳐댔다.
"아니, 아니, 난 아직 못 갔지. 내가 천룡사엘 못 가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 두려워서……."
계속 목소리만 들려 왔다.
막북삼괴는 하나같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거야 진짜 알 수 없는 노룻 아닌가. 오직 한 사람이 두렵다니, 그게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그걸 왜 자기들한테 떠들어대고 있는 걸까.
"그래, 천룡사의 누가 두렵다는 게냐?"
왜금차호가 물었다. 그러자 목소리는 노래하듯 말했다.
"천룡사 중들 중에 일양지공을 아는 사람은 아홉 정도 되지. 그 중에도 일양지공을 정말로 팔구 할 정도 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인데……."
성미 급한 왜금차호는 상대방이 우물쭈물 변죽만 울리는 것에 부아가 나서 다그쳐 물었다.
"그래, 그게 도대체 누구냐니까?"
"그 사람은 바로 노화상 고선(枯祥)이다!"
왜금차호는 궁등이를 탁 쳤다.
"옳아, 우리 형님을 치료해 준 바로 그 노화상! 그 중이 형님을 치료할 때 보니까 손에서 발하는 공력이 대단하더군. 손가락 끝에서 막 식식 소리가 나더라니까. 공력이 깊지 않으면 그런 소리가
날 턱이 없지."
세타명사는 갈수록 미심쩍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누군데 우리 형제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요?"
"내가 누군가는 알 필요가 없다. 네 놈들이 일양지 신공을 앗아 내려면 나부터 먼저 찾아야 한다는 걸 알기만 하면 돼!"
목소리는 여전히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은 채 한껏 이죽거렸다.
백응향비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 보았다.
'저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필시 저자 역시 천룡사를 찾아가는 녀석임이 분명해. 뭔가 단단히 준비를 갖춘 모양인데, 천룡사 내막에도 훤한 것 같고……. 저자가 가면 과연 그 비본을 앗아 낼 수 있을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우리 막북삼괴에게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이오?"
이윽고 백응향비가 한마디 던졌다. 비록 중상은 입었을지언정 목소리는 우렁찼다.
"이상하다. 이상해. 강호에서 날 모르는 자라곤 하나도 없는데 너희 세 놈만 모른단 말이지? 난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다. 기어코 날 보겠다면 보여 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네 놈들 목숨이 붙어날까 걱정이구나."
목소리는 신명이라도 나는 양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백응향비는 잠시 말이 없더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좋소, 맘대로 하시오. 나오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나오라고 강요할 우리도 아니오. 무예가 모자라 이 꼴이 된 처지니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소. 우린 이제 대 사막으로 돌아가 다시는 운남 땅에 발을 들이지 않을 거요."
그러자 상대방은 또 깔깔깔 웃어댔다.
"아아, 이것 봐. 그렇게 기운 없이 돌아가려 하다니 애석하다, 애석해! 이왕 온 바에야 목적을 달성하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쩌나?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 또 없을 텐데."
막북삼괴는 제각각 속궁리를 해 보았다.
'말을 들어 봐서는 강호에서 이름난 명인 같은데 천룡사를 아주 만만하게 보고 있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큰소릴 칠 수야 없지. 대체 누구인가? 도시 알 수가 없군. 강호에 이름이 뜨르르한 서역 구양봉인가? 아니면 천하 제일의 방(努)인 개방(芍幇) 방주 소씨 거렁뱅이? 그도 아니면 금방 낭패를 보고 달아난 전변노괴?'
"어서 썩 나와! 정작 코빼기도 못 내밀면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누군지 어서 낯짝을 보이란 말야."
왜금차호가 성마르게 소리쳤다.
"좋아, 좋아. 정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 존안을 보여 주지. 상대방은 깔깔 웃었다.
순간 막북삼괴 앞으로 짙은 연기 같은 것이 확 끼쳐 오더니 이내 스멀스멀 사라지고 희뿌여니 사람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이윽고 뚜렷이 상이 잡혔다.
참 괴상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막북삼괴라고 자칭하는 그들보다도 더 괴상망측한 몰골이었다. 머리 꼭지는 대추씨처럼 뾰족하고 눈은 수수알처럼 작은데다가 가늘디가는 목은 남들보다 곱절이나
길었다. 그런가 하면 그나마 다리라고 붙은 것은 몽톡하니 짧아서 흡사 키 낮은 관목 사이에 세워 놓은 밀랍 인형 같았다.
"어때, 실컷 봤냐? 그래, 보신 소감이 어떤가?"
그는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며 말했다.
왜금차호는 그 생긴 모양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천하에 자기보다 못생기고 키가 더 작달막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 보면 볼수록 자기보다 더 못난 것이 신통해서 그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재미있는데,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분명 재미있다 그랬겠다? 재미있긴 뭣이 재미있냐?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마냥 날 두려워했을 텐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만 만하게 보인다 그거지?"
대추씨 머리는 수수알 같은 눈을 모로 뜨며 발끈했다. 그러자 왜 금차호는 배를 부여잡은 채 간신히 한마디했다.
"아이고, 만만하고 뭐고 그래 그 꼴을 해 가지고 나한테 상대나 되겠느냐? 나보다도 목 하나는 없겠는걸. 그래 가지고 무슨 수로……."
왜금차호는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하고 또다시 웃어젖혔다.
"그래, 만만하단 말이지? 정말 내가 두렵지 않단 말이지? 꼴같 잖게 허풍이 센 녀석이로군. 사람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날 무서워했다! 내 친어머니마저도 날 무서워했다구. 그런데도 뭐? 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내 이름이 뭔지 알기나 해? 이름만 대도 너희 놈들은 벌벌 떨 거다."
막북삼괴는 그 말에 코웃음만 쳤다. 세상 구경 할 만큼 하고, 그 만큼 견식도 넓다 할 수 있는데 이름 때문에 벌벌 떤다는 말은 또 금시초문이 있다.
"내가 누군고 하니, 바로 운남의 충피(蟲皮)다!"
그러자 막북삼괴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대리에는 강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인물이 여럿 있는데, 그중 으뜸이 천룡사 고승들이고, 황족 단씨 가문의 몇몇 고수들도 손꼽을 만했으며 또 대추씨 머리 이강(壽羌) 만족(蜜族) 충피 역시 결
코 매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충피는 운남에서도 독을 제일 잘 쓰기로 유명했다. 막북삼괴도 충피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는 터이나 그 충피가 이렇듯 한심하게 못났을 줄은 정말 생각 밖이었다.
세타명사는, 내심 겁이 나면서도 명성에 걸맞지 않게 몰골이 너무나 한심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 이것 봐라, 웃어? 이 운남에서도 대놓고 내 면전에서 웃는 사람이 없고, 하물며 한 나라를 차지하고 있는 대리 단씨네도 나를 보고 함부로 웃지 못하거늘. 감히 네 놈들이 나를 보고 웃어 ? 그렇담 네 놈들이 대리 단씨네보다 더 세다는 뜻인가?"
그래도 세타명사는 코방귀만 뀌었다.
'쳇 이름만 뜨르르했지, 이제 보니 다 허명이었군, 허명! 대추씨만한 녀석이 세면 얼마나 세다구 저따위로 거들먹거리는 거야. 기분도 그렇잖은데 어디 오늘 실컷 곯려나 줄까보다.'
그러다가 세타명사는 문득 백응향비의 상세(傷勢)가 걱정이 되었다. 마냥 입씨름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계속 지체되면 백응향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는 역정을 내듯 시답잖게 한마디 내뱉었다.
"됐다, 됐어! 충핀지 뭔지 대충 내막을 알았으니 어서 물러가기나해!"
충피는 막북삼괴가 이렇듯 무례하게 나오자 어이가 없었다. 그는 발끈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내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도저히 안 되겠다. 어디 너희 세 놈 다 오늘 내 손에 한번 죽어 봐라."
그러자 세타명사는 웃으면서 침을 퉤퉤 뱉었다.
"대사막을 주름잡는 우리 막북삼괴가 겨우 이까짓 대리국 정도를 겁낼 성싶으냐? 보자 보자 하니까 이젠 어디서 쥐씨알만한 놈까지 걸려들어 생 난리를 피우는군. 어디 한번 덤벼 봐, 덤벼 보라니까."
"하, 이거 정말 가관일제그려, 가관이야!"
충피는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자 왜금차호도 슬슬 짜증이 났다.
'이 손바닥만한 대리국에 거추장스런 게 뭐 이리도 많아. 우리 삼형제가 천룡사에서 당한 분풀이나 해 줘 버려? 그나마 여기서 그 수치를 씻어 버리지 않으면 장차 무슨 낯으로 강호에 나선단 말인가. 좋다!'
왜금차호는 백응향비에게 말했다.
"형님, 여기 좀 계시우. 내 동생과 더불어 저 놈에게 혼찌검을 내 줘야겠수."
백응향비는 그저 땅딸보를 바라보며 입술만 실룩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개중 가장 세심하고 재간 있는 위인은 백응향비였다. 그는 늘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둘째의 성미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간신히 죽다 살아난 백응향비로서는 도저히 말리려야 말릴 염도 못 내고 그저 두 아우가 하는 양을 속수무책으로 지켜 볼밖에 도리가 없었다.
충피는 두 사람이 다가들자 온몸을 비틀어대며 히히거렸다.
왜금차호는 이 난쟁이 괴물과 싸울 생각을 하니 신명이 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싸울 때면 언제나 키 때문에 깡충깡충 뛰어오르며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 난쟁이 괴물과는 그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수월하겠는가? 자기가 훨씬 더 크니 내려다보며 난쟁이 괴물의 가슴패기를 마음대로 콱콱 내지를 수 있으리라.
땅딸보 왜금차호는 난쟁이 괴물에게 닥치는 대로 주먹을 내지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 망할 놈의 자식, 네 눈엔 우리 막북삼괴가 만만해 보이더냐? 난쟁이 똥자루만한 녀석이 겁도 없이!……"
왜금차호는 주먹으로 충피의 머리통을 투닥투닥 방망이질을 해댔다. 바위라도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머리통을 북 치듯이 하는데도 충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
히 서서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세타명사는 한곁에 물러서서 지켜 보고만 있다가 사세가 영 이상하게 돌아가자 안 되겠다 싶어 잽싸게 달려들어 난쟁이 괴물을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충피는 끄떡도 안 했다.
"흥, 감히 먼저 손을 쓰다니, 버르장머리없는 녀석들이로군. 어이, 거기 땅딸보! 내 네 녀석부터 손을 봐 주겠으니 어디 한번 맛을 보아랏!"
충피는 왜금차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자 왜금차호는 대로 하여 외쳤다.
"이 멍청한 놈아! 다른 놈들은 널 무서워하는지 물라도 우리 막북삼괴는 어림도 없어. 너 따위는 시들방귀로밖에 안 여겨!"
"시들방귀고 나발이고 주둥아리 닥치고 그걸 보기나 하라니까!"
충피는 손가락으로 왜금차호의 주먹을 가리키며 여유작작 내뱉었다. 세 사람은 일제히 왜금차호의 주먹을 쳐다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충피에게 연신 휘둘러대던 왜금차호의 한쪽 손이 이미 시꺼멓게 죽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손가락사이로는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등골에 오싹 식은땀이 돋았다.
"너 이…… 이 놈…… 이 놈……."
왜금차호는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마에서는 땀이 주르르주르르 흘러내렸다.
"하하하…… 네 놈은 나한테 중독됐어. 네 놈이 꼼짝 않고 가만 있는다면 반시간은 더 살 수 있겠지만, 한마디할 때마다 그만큼 명이 줄어든다는 걸 명심해라. 말 한마디에 살아 있는 시간이 줄어든대도 마냥 지껄일지 내 어디 두고 보리라."
충피의 그 한마디에 왜금차호는 낮빛이 사색이 되어서는 입도 벙긋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백응향비는 애가 타서 충피에게 몇 마디 사정해 보려고 손을 내둘렀지만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왜금차호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털썩 엎어져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서는 정신없이 대굴대굴 굴렀다.
"나…… 나…… 나 좀……."
그는 눈까지 벌겋게 충혈되어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마치 목이라도 졸린 사람마냥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형님, 아이고, 형님!"
세타명사는 왜금차호와 백응향비를 번갈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몸을 홱 돌려 충피에게 덮쳐 들었다. 충피는 한바탕 박장대소를 하더니 세타명사에게 한번 잡아 보라는 듯 요리 피하고 조리 피했다. 충피가 하도 날쌔게 피하는 통에 세타명사는 헛손질만 하다가 숨을 헉헉거리며 제자리에 우뚝 섰다.
"이 독충 같은 놈아!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 행패냐?"
세타명사는 악에 받쳐 으르렁댔다.
"그래, 네 놈 말마따나 네 놈들과는 원수진 일이 없지! 천룡사라면 몰라도."
충피는 여유만만하게 한마디 던졌다. 그 말에 세타명사는 귀가 번쩍 뜨여 황급히 말했다.
"우리도 천룡사와 원수간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한편인 셈이다. 자, 어서 해독약을 써서 둘째형님을 살려내 넷이 함께 천룡사로 가서 원수를 갚자!"
충피는 있는 대로 입을 삐쭉거리며 같잖다는 듯 세타명사를 쏘아 보았다.
"그따위 얕은 꾀를 쓰려 들다니! 뭐? 네 놈들하고 같이 가서 원수를 갚아? 천룡사와 원수진 것도 나고, 원수를 갚는 것도 나다! 네깟 놈들이 그래, 도움이나 된다더냐?"
세타명사는 면박을 당하자 무안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왜금차호는 온몸을 불로 지지는 것만 같아,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기 몸을 마구 잡아뜯었다. 옷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제 살점을 마구 잡아뜯으며 성난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백응향비와 세타명사는 처참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이든 다 들어줄 테니 제발 둘째형님 좀 살려 주슈."
세타명사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애원했다. 그러나 충피가 들어줄 리 만무였다. 되레 그는 웃음을 질질 흘리며 왜금차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본자 세타명사는 한껏 독이 올라서 이를 사리물고 사납게 충피에게 덮쳐 들었다. 충피는 슬쩍 피하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네깟 막북삼괴들이 날 어쩌겠다구? 까마귀 링 잡아먹을 생각하지도 마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충피는 손을 한 번 척 내둘렀다. 그러자 시뿌연 연기가 세타명사에게 훅 휘몰려 왔다. 세타명사는 얼른 몸을 솟구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밑에서 뭔가가
힘껏 잡아채는 듯한 감을 느끼며 그는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이를 치고는 벌렁 나자빠졌다. 그리고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 애를 썼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희들 막북삼괴가 내 손아귀에 들어온 이상은 삼괴가 아니라 세 마리 벌레에 불과하다. 이 충피보다 더 작고 못난 세 마리 벌레 말이다. 흐흐흐……."
충피는 건들거리면서 세타명사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막북삼괴야, 얼마나 오래 버티나 보자. 죽지 않고 살아나는지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리라!"
세타명사도 그만 중독이 됐는지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죽겠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고, 가려워! 아이고 나죽는다, 나 죽어."
그리고는 왜금차호처럼 자기 옷을 마구 찢어발기고 제 몸을 있는 대로 잡아뜯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가려움을 견딜 수 없는지 마침 곁에 비수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자 그는 냉큼 집어 들어 제 살점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타명사의 온몸은 피가 낭자해졌다. 그는 몸을 뒤틀며 충피에게 쉰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살려 주시오, 제발 좀 살려 줘……."
그러나 충피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날더러 살려 달라고? 제 손으로 할퀴고 제 손으로 칼질을 해대고선 날더러 살려 달라니, 그래 내가 어떻게 살려 준단 말이냐? 살려 주려 해도 살려 줄 재간이 있어야지."
그러자 세타명사는 허옇게 눈을 까뒤집으며 악다구니를 썼다.
"네 이 놈 충피야, 내가 죽어 귀신이 된다 해도 네 놈을 끝까지 찾아내 씹어 먹고야 말리라. 네 놈을 꼭 잡아……."
그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일순 고개를 푹 떨궈 버렸다. 그리고는 더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한켠에 쓰러져 있는 왜금차호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는 이미 숨이 멎은 지 오래였다. 충피는 왜금차호 쪽으로 건들건들 걸어가더니 능청스레 가벼운 한숨까지 지었다.
"그래도 네 놈은 조용히 뻗었군그래."
두 눈 뻔히 뜨고 생사를 같이하기로 굳게 맹세한 형제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백응향비는 손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다.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충피도 저주하고 일어나서 싸우지 못하는 자신도 저주하면서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이윽고 충피가 설핏 곁눈질을 하더니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넌 맏이이면서도 아우들이 다 죽어 넘어가는 걸 구경만 하는구나. 그리도 살고 싶으냐?"
충피는 백응향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백응향비는 꺽꺽거리며 말을 못하다가 간신히 한마디 토해냈다.
"왜 우, 우리를 죽이는……."
충피는 히죽 웃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나도 천룡사의 일양지공 비본을 노린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날 이때껏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구. 만일 너희들이 일양지공을 익혔다면 지금 이 꼴로 죽지는 않을 게야……."
"우리가 도, 돕겠다는데도 왜 우리를 죽이는……."
백응향비는 가까스로 한마디 한마디 토해 냈으나 도저히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충피는 그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않고 째지는 소리로 소름 끼치게 웃어젖혔다.
"아무튼 넌 이젠 죽는다. 네 놈이 왜 죽어야 하는지 내 알려 줄까? 넌 바로 천룡사 때문에 죽는 거다."
백응향비는 그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가 왜 천룡사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걸까……. 그는 의아한 눈길로 충피를 올려다보았다.
충피의 손은 어느새 그의 목에 닿아 있었다. 백응향비는 닥쳐 올 고통을 미리 알고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조용히 깨끗하게 죽고 싶었다. 충피는 힘껏 목을 졸랐다. 일순 백응향비는 심하게 퍼들거리더니 이내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충피는 그의 목을 턱 놓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슨 궁리를 하는 것인지 뒷짐을 진 채 세 사람 사이를 한등안 서성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중얼거렸다.
"이렇게 놔둔다면 천룡사 덕 보게 하는 것 아니야?"
그는 왜금차호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더니 비수 하나를 슬쩍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왜금차호의 등을 더듬어 한 곳에 비수를 푹 꽂았다 뺐다. 방금 죽은 시체라 따뜻한 피가 주르르 흘러 나왔다.
"됐어, 됐어, 이만하면 충분하다."
충피는 적이 흡족해하며 약 한 봉지를 꺼내 칼자국이 난 왜금차호의 등에다 밀어 넣었다. 그랬더니 흘러 나오던 피가 순식간에 멎었다.
충피는 다른 두 시체에도 똑같이 이렇게 칼로 째고 약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내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어디선가 두 장정이 바람같이 달려와 머리 꼭지가 땅에 닿도록 공손히 인사를 했다.
"동주님, 무슨 분부십니까?"
"너희 둘은 밤낮을 이어 가며, 이 시체들을 대 사막으로 옮겨라. 가서는 대막(大漠) 옥수(玉樹)를 찾아라. 찾거든 그녀에게 시체를 건네고 말해! 훌륭한 세 제자가 그만 천룡사 중 놈들한테 해를 입어 죽었다고 말이야."
둘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라. 그녀의 이 귀한 제자들 시체에 내가 약을 넣어 주어 시간이 지나도 시체가 이렇게 생생하다고 말야. 그러면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천룡사로 찾아갈 것이다."
"예, 예, 분부대로 거행합죠."
두 장정은 크게 읍을 하더니 어디론가 힁허케 달려갔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마차 한 대를 몰고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막북삼괴의 시체를 마차에 던져 넣고는 자기들도 냉큼 올라타 채찍을 힘껏 휘두르며 북으로 향했다.
"그 늙은 여괴가 저걸 보기만 하면 대번에 펄펄 될 게다."
충피는 마차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며 흐드러지게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그때 갑자기 천룡사의 아침 종소리가 쩌렁쩌렁 고막을 울려 놓았다.
"아무래도 그 일속인지 뭔지 하는 주지 놈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도대체 상대가 될 만한 작잔지 한번 겨뤄 봐야 하잖겠어……."
충피는 갑자기 몸이 달아 천룡사를 향해 홱 돌아서서는 천룡사를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이 시각, 천룡사에선 중들이 대응보전(大雄資嚴) 앞에 한 줄로 늘어서서 조과(早課)를 하고 있었다. 부처님을 정중히 모신 대웅보전은 자못 장엄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이루 다 말하지 못할 선법(祥法)과 이루 다 밝히지 못할 현묘한 도리들이 이 자비로운 부처님 아래 감돌고 있었다.
양 옆에는 융단이 깔려 있고 그 위에는 각종 법기들, 종과 북, 북채와 경직들이 올려져 있었다. 모두 부처님께 재배하며 생령들을 위해 복을 주는 데 쓰이는 물건들이었다. 큰 중이나 작은 중이 나 할 것 없이 모두 한 줄로 늘어서서 목청을 가다듬어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적이 숙연했다.
충피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천룡사 경내로 숨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가사를 몸에 걸친 일속 화상이 복판에 좌정한 채 여러 중들과 더불어 염불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 화상들이 염불하는 양을 보면 부처님이 정말 있는 성싶기도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듯 독경에 열심일 수 있는가? 모두가 고개를 내저으며 웅얼거리고 있는 품이라니, 쯧쯧……. 어디 이럴 때 독약을 한번 슬쩍 뿌려 봐? 염불에 정신이 팔렸으니 누구 소행인지 알 게 뭐야.'
충피는 기둥 뒤로 더 바싹 다가갔다. 눈앞에 문득 내리드리운 불번(佛幡)이 보였다.
'저 불번 뒤에 숨어서 손을 쓰면 저 놈들은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꼴이다. 정신없이 우왕좌왕할 꼴이라니,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
그는 날쌔게 불번 뒤로 몸을 옮겼다.
바로 그때, 잠시 독경 소리가 멎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 노승이 말했다.
"어제 만과(晩課)에 풀지 못한 문제가 있으면 지금 주지님께 물어 보시오."
그러자 중 하나가 나와 합장을 하고는 물었다.
"소승이 《금강경 (金剛經)》을 읽으매, 범법지법(凡法之法)이 무슨 전례(典例)인지 알 수가 없으니 주지님께서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일속은 또렷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강해(講解)를 시작했다. 중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대응보전에는 오직 일속의 말소리만이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넌 너대로 불경을 강해하고 난 나대로 독약을 뿌려 보자. 너희 네 천룡사 중들이 하나같이 다 내 독약에 꺼꾸러지는데도 그 일양지 비본을 내놓지 않는지 어디 두고 보자.'
충피가 이렇게 작정하고 막 손을 쓰려 할 찰나였다. 갑자기 일속이 말을 뚝 그치더니 불쑥 한마디했다.
"오는 자는 맞이하고 가는 자는 놔두라고 하였거늘, 시주님께선 어이해서 숨어 계시기만 하는 겁니까?"
그러더니 일속은 충피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러자 팍소리가 일며 진력 한 갈래가 충피가 숨어 있는 불번쪽으로 획 몰아쳤다.
'아차, 들켰구나.'
충피는 이렇게 된 바에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러자 한 갈래 뽀얀 안개 같은 것이 중들에게 획 날아갔다.
그러나 일속은 이미 충피 앞에 날아와 우뚝 서 있었다.
"여기는 조용한 불문인데 어이하여 소란을 피우시오?"
그러자 충피는 일속에게도 독약을 훅 끼얹었다. 그는 일속의 무예가 경지에 다다랐음을 알고 있는 터, 좀전보다 독약을 더 많이 뿌렸다.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일속에 게도 끼쳐 갔다. 일속은 흠칫했다. 충피는 그 모양을 보고 일속이 자기 꾀에 걸렸다고 생각하며 기뻐서 소리쳤다.
"쓰러친다. 잘도 쓰러진다."
과연 노승 몇이 픽픽 쓰러지며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그대는 운남의 충피가 아닌가?"
일속은 엄하게 물었다. 충피는 희희낙락하며 조금도 거리낌없이 대꾸했다.
"그래, 내가 충피다. 나 충피가 아니고는 누가 이렇게 천룡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더냐?"
"나무아미타불. 무슨 연유로 이렇게 사람을 해치는 게요?"
"왜 사람을 해치냐구? 이봐, 너희들은 모두 구도자라고 자처하며 정직한 체한다마는, 정작 남을 해치는 천하 제일의 무예를 암암리에 수련하고 있지 않느냐? 잔말 말고 어서 일양지공 비본이나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단번에 이 절 중 놈들 씨를 말려 버릴 테니."
그러면서 충피는 턱짓으로 다른 중들을 가리켰다. 벌써 게거품을 물고 인사불성이 된 사람, 신음을 연발하는 사람, 두 눈 뒤집고 허우적대는 사람…… 실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충피는 독살스럽
게 웃어댔다.
"너희들이 일양지 비본을 내놓지 않으면 단 한 놈도 살아 남지 못한다는 걸 명심해라."
비록 지금은 꼿꼿이 서 있지만 일속도 이미 중독되어 있으니 충피는 마음을 턱 놓고 또 독살을 피웠다.
"어서 일양지 비본을 내놓으라니까. 천룡사 중 놈들 씨를 말리기 전에!"
그러나 일속은 조용히 충피를 지켜 보기만 했다. 충피는 속으로 생각했다.
'요행히 이런 절호의 기회를 잡았는데 지금 일양지 비본을 앗아 내지 않으면 이런 호기가 언제 또 찾아오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얻기 힘들다.'
충피는 잽싸게 한 노승 앞으로 다가가 다그쳤다.
"어서 말하지 못해? 일양지 비본은 어디다 숨겼지?"
그 노승도 단씨 가문의 사람으로 일양지공을 익히고 있었다. 노승은 충피를 엄하게 꾸짖었다.
"이 지독한 소인배야! 재간이 있으면 떳떳이 서로 겨루어 볼 일이지, 몰래 독약을 써? 이런 비겁한 작태가 어디 있느냐?"
그러든 말든 충피는 느물느물 웃기만 했다.
"뭐 비겁해? 그래 비겁하다 해도 좋다! 뭐라 해도 좋으니 어서 일양지 비본이나 내놔! 더 버티다간 이 큰 절간에 한 놈도 못 남아 날 테니."
충피는 대뜸 한 발 더 다가들어 손으로 노승의 눈꺼풀을 꼬집어 뜯으며 으르댔다.
"말하겠어, 안 하겠어? 냉큼 말하지 않으면 네 놈 두 눈을 아예 쏙 뽑아 버릴 테니 어서 말을 해,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