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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이 참 재미있을 줄 알았다.
적어도 내 남은 노후에는 그럴 것이라 믿었다.
아침에 일어 나면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 좋았고
갓 사다 놓은 예쁜 취설송을 바라 보면
더없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늘 내 곁에 있으리라 믿었다.
동래 온천장 허심청에서 제법
따뜻하고 평화로운 온천욕을 즐긴 후
가까이에 있는 카페 모모스에서 여유로운 차 한 잔을
줄기는 기쁨이 늘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는
사치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늘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아무 걱정이나 구애를 받음 없이
평화롭게 한 두끼 식사를 즐길 줄 알았다.
그러나 요즈음엔 그렇지가 않다.
편안하지가 않다.
마음이 편치 않고 몸도 편치 않다.
커피에서도 달콤한 맛이 아니라
그저 쓴내만 잔뜩 혀 안에 가득 묻어 오고
좋은 곳엘 가도 그저
그저 그 곳에 갇힌 기분이다.
그래서 그럴까
요즈음엔 차라리
아무 표정이나 생각이 없어도 보는 즐거움을 주는 장난감이 부럽고
물을 주지 않아도 늘 싱싱한 조화가 좋다.
자식이 뭐라고
자꾸 그 자식이 걸린다.
도저히 그 생각이나 행동거지가 이해되지 않아도
자식이 걸린다.
무엇에 씌었을까
무엇이 순수한 그의 영혼에 달콤한 유혹으로 가득한 악의 뿌리를
심어 줬을까
주식.
언뜻보면 참 건전한 놀이요 투자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그의 이면에는 간교한 여우의 사탕발림이 있고
사악한 뱀의 혀가 낼름거리고 있다.
특히나 소액 투자자에게는 더욱 더.
그런데 그 유혹에 아이가 빠져버렸다.
그것도 아주 깊게.
나의 경우는
아주 오래전에 그것도 거의 오십년 전
1973년도부터 이 간교하고 사악한 주식의 유혹에 젖어들었지만
내 아이만큼 그렇게 영혼까지 빨려들지는 않았다.
평생 기껏해야
일 이천 이내에서 혹은 많아봐야 삼 사천 이내에서
50년 동안 해 오던 것을
아이는 몇 년 사이 그것도 단숨에
몇 억 혹은 그 열배에 달하는 주식이란 도박에 빠지고 투기에 빠져 버렸다.
그는 도움을 청하지만
이미 내가 도울 수 있는 한계도 벗어 났다.
그가 며칠 전 카이로스에서 뽑아 준 자료에 의하면 그렇다.
다만 아주 작은 희망이 있다면
그가 뽑은 자료가 컴의 오류이기나 사실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 작은 바램이 이루어질 지는 모르겠다.
그가 한 말이 그가 보여 준 자료가 사실일 수도 있으니.
그래도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가져 봐야 겠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희망이라는 녀석이
우리 뒤에서 우리를 지켜 주고 있으니.
그는 벌써 사십이 넘은 성인이고
난 이미 고희를 넘어 선 70의 나이가 아닌가.
누가 누구를 돕고 의지를 할 나이가 이미 넘어섰지만
그렇다고 아주 외면을 할 수도 없는 게
가족이고 식구고 또 부모 자식 사이가 아닌가.
남들에게 하기 좋은 말로는
이미 성인을 넘어서서 한 가정을 이룬 자식인 데
부모라고 자식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잊고 모른 척 하라고
하지만
그게 어찌 또 인지상정이 그러한가.
부모란 무덤 속에서도 잊지 못하는 게 자식 일이
아닌가.
해 주긴 해 줘야 할텐데.
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 해 주어야
부모의 도리라고 할 수 있을까.
한 점 희망의 빛이라도 있긴 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