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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만한 물가가 있는 관포교회에서 드리는 새벽이슬 같은 이야기 (주일오전예배)
하늘 나그네의 삶
설교 : 조용안 목사
날짜 : 2022. 1. 16.
본문 : 베드로전서 2:4-5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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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조용안 드림
하늘 나그네는 자신의 신분을 알고 그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도, 그리스도인, 하늘 나그네를 신령한 집인 성전과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에 비유합니다. 성전과 제사장은 모두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성전에 비유한 것은 거룩한 신분이 되지 못하면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세상에 알릴 제사장이 되지 못하면 위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 그리스도인, 하늘 나그네의 사명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원하시는 삶은 거룩한 신분에 걸맞은 거룩한 삶입니다.
첫째, 예수님께 인정받는 삶
본문 4절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예수님께 인정받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버림 바 되셨지만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33년 삶의 정확한 서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갖은 오해와 모욕과 비방으로 철저히 외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보배로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에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게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평가와 박수와 인정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의 부와 명예를 좆아 사는 것이 화려해 보여도 오로지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렘 38:19).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먼저 신경을 씁니다. 자신의 체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맞지만 바벨론에 투항하는 것부터 왕 체면이 구겨집니다. 사람들이 조롱함으로 체면 깎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우리는 체면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상 차릴 때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립니다. 성대한 결혼식을 합니다. 나보다 남을 의식하는 체면문화는 한국 사람들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청소년들이 롱 패딩이 유행을 타면 너도나도 롱 패딩을 구매합니다. 새로운 핸드폰이 출시되면 먼저 구입하려 합니다. 옛날에 인사말은 “진지 드셨습니까?”였지만 요즘에 인사말은 “어디 사세요?”입니다. 상대방이 어디 사는지를 통해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반영된 질문입니다. 소형 자동차보다는 중형 자동차를 선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버림이 되고자 하는 각오, 나를 희생하며 남을 살리고자 하는 각오가 없다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바울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스도께만 충성합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여름에 봉선화 싹이 났습니다. 쌀쌀한 가을 날씨를 감지한 봉선화는 10cm정도 자라자마자 바로 꽃을 피웠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니까 너무 급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이것저것 눈치 볼 것 없습니다. 오직 주님입니다.
둘째, 연합하여 신령한 집으로 세우는 삶
본문 5절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에서 산 돌에 비유되었던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5절에 성도, 그리스도인, 하늘 나그네가 산 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표현했던 산 돌은 단수로 표현하지만 5절에 “너는”이 아니라 “너희가”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성도, 그리스도인, 하늘 나그네는 연합하여 신령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지어지는 집은 홀로 지을 수 없습니다. 혼자 독불장군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축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해서 교회를 세우면 자기가 그 교회를 지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가 아니면 교회가 무너지고 안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지체를 무시합니다. 어우러짐, 함께, 더불어, 연합해야 합니다. 성도는 운명을 함께할 공동체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분량을 따라 최선을 다할 때 신령한 집이 지어집니다.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지어져 가느니라’는 진행형입니다. 교회는 계속 자라야 합니다. 이만하면 다 자랐다는 순간 성장은 멈춘 것입니다. 신령한 집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신앙공동체를 집으로 표현했습니다. 집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터 위에 쌓는 벽돌 하나하나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 접착제 시멘트가 들어가야 콘크리트 집이 됩니다. 하나 되게 하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교통해야 합니다. 뜨거운 사랑열기와 성령의 교제가 풍성해야 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몸과 지체의 관계를 교회에 비유합니다. 인터넷 예배로는 결코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이지만 성도의 삶은 결코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산 돌이 되어야 신령한 집이 지어질 수 있습니다. 뜨거운 사랑열기와 성령의 교제가 풍성하면 거룩한 제사장 사역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셋째, 거룩한 제사장의 삶
본문 5절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그리스도인, 하늘 나그네들을 거룩한 성전이라고 합니다. 구약에 하나님의 택함 받은 레위인들만 제사장이 됩니다. 죄인 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유대교는 제사장이, 카톨릭은 신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직접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막혀있던 휘장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완전히 찢어졌기에 누구라도 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거룩한 제사를 집행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더 이상 소 양 잡지 않아도 됩니다. 제사장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사람 앞에 가서 부끄럽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간편해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하나님 앞에 나가 우리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그분께 오는 은혜를 직접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적 게으름에 빠져있지 않습니까? 제사장 찾아 먼 길 가고, 절기 지키고, 율법 지켜 노력하는 유대인보다 열정이 적은 것 같습니다. 카톨릭에서 행하는 묵상, 기도, 교회 공부, 신앙 생활에 비해 우리 신앙 깊이가 더 얕은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에서 기억되는 한 가지는 베드로 기념교회입니다. “서세요. 사진 찍읍시다. 갑시다.” 베드로 기념교회 앞 강가에 묵상하는 사람들은 성당 사람들이라고 여행 가이드의 설명이었습니다. 간소화되고 편해졌다고 방종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명심하고 날마다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48 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더라 49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제사를 드리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모든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대상 6:48-49). 제사장 역할은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사역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포로 생활 가운데 회상합니다. 제사장을 통하여 흔하게만 보였던 예배 생활이 평범함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라”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역할이 구약 제사장의 역할과 같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 그리스도인, 하늘 나그네들은 이웃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주는 중보사역을 해야 합니다. 153전도 사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사장처럼 이웃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묵상(하가)'은 깊이 생각하다, 으르렁거리다는 뜻입니다. 맹수가 먹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듯이 말씀 앞에서의 내 모습이기 원합니다. 댓글은 사귐입니다. 댓글은 영의 생각입니다. 댓글은 믿음 생활의 동력입니다. 말씀댓글에 참여하시면 말씀의 풍성함이 더하여집니다. |
@ 아멘.
@ 주일 말씀을 듣고 큐티 나눔을 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로다(신명기 33:29).~♡♡
@ 예수님께 인정받는 삶.
체면문화에서 사람들의 평가와 박수와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보배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 연합하여 신령한 집으로 세우는 삶.
예수님의 터 위에 계속 지어져 가는 신령한 집은 뜨거운 사랑의 열기와 성령의 교제로 함께 더불어 짓겠습니다.
@ 거룩한 제사장의 삶.
유대인들이 흔하게 여겼던 제사장의 제사 집례를 포로 생활에서 평범함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거저 시간이 남아서 드리는 예배 또한 흔한 예배가 아니기에
153도전으로 불신자를 하나님께 중보하는 거룩한 제사장의 삶을 살겠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예배자가 되길 원합니다.
@ 신령한 집인 관포교회를 믿음으로 연합해서 섬기는 은혜를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 세상 사람들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께 평가받는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늘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열정이 있는 예배가 되는 하늘 나그네의 삶을 살겠습니다.
@ 하나님께 평가받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찾으며 구하는 자로 살았음을 회개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서 주 안에서 연합하여
농어촌 모델 관포교회로 세워 가도록 예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세상, 이웃, 옆 사람의 눈치 볼 것 없이 경건 생활, 복음 전함, 직분 감당을 우선으로
나의 믿음을 성장시켜 가는 하늘 나그네의 삶 되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전 된 자로 거룩한 제사장으로 예수님께 인정받는 삶 되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 함께 연합하여 벽돌을 쌓아 올리듯 성도님들과 관포교회를 신령한 집으로 만들어가겠습니다.
@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집중하며 맞추어 살아가는 자가 되어
예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제가 되길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학생은 방학 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다음 학기가 달라진다”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이번 겨울 방학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방학이라고 늦잠 자고 노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방학을 중학교 입학 준비, 공부, 숙제, 목표한 것, 말씀 댓글 책, 성경 등
부지런한 삶을 살아서 중학교에서 잘하는 제가 되길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예배, 내 체면을 살리기 위해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주님을 닮기 위한 주님께 인정받기 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과 연결 짓는 작업을 부지런히 할 수 있는 제가 되길 원합니다.
@ 하나님, 교회에 갈 때 그냥 가서 멍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예배에 집중하는 주일과 무슨 일이 있어도 큐티를 매일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제가 되게 해주세요.
@ 하나님,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예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제가 되게 해주세요.
@ 주일 오전 나에게 주신 말씀의 키워드(key word)는 ‘예수님께 인정받는 삶’입니다.
@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바울의 고백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라는 말씀이 늘 내 삶에 살아있게 하소서.
사람의 눈치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자녀 된 삶을 살기를 원하고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체면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위함이 우선이 아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는 삶이길 소망합니다.
@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조롱당할까 염려한 시드기야 왕,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보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한 사도바울.
지금 나는 시드기야 왕에게 가깝게 느껴지지만
2022년에는 주님의 은혜 안에 사도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주일 오전 나에게 주신 말씀의 키워드(key word)는 ‘거룩한 제사장의 삶’입니다.
@ 하나님을 믿을 때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흔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에 남는 예배가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