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년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
지략과 문무를 겸비한 장군은 불사조 처럼 고국을 지켜냈다.
수나라 군사 30만 5천 명을 물리쳤으며, 적군은 겨우 3천 명만이 살아 달아났다.
1478년 조선조 성종(成宗) 9년 서거정(徐居正)과 양성지(梁誠之) 등이
찬집(撰集)한 동문선에 기록이 보인다.
진중에서 �었을 시 ‘우정 야우’는 나라의 안녕을 바라는
장군의 깊은 심중이 잘 나타나 보인다
우정 야우(郵亭夜雨) / 을지문덕
여관에 늦은 가을비 소리 / 旅館窮秋雨
고요한 밤 한창의 불빛 / 寒窓靜夜燈
스스로 탄식하네 시름 속에 앉으니 / 自憐愁裏坐
이야 참으로 정(定)에 든 중인 것을 / 眞箇定中僧
여기서 정(定)은 삼매(三昧)의 역어(譯語)로 온갖 생각을 끊고 정신이 통일된 상태를 말한다.
청 나라 주이준(朱?尊)이 찬한 명시종(明詩綜)에는
단지 ‘高句麗起漢鴻嘉’ 한 편만이 실려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예문지(藝文志8)에 청대(淸代)의 문인 왕사진(王士示+眞)이 지은
지북우담(池北偶談)'이라는 저서에 시 1편이 실려있는데,
(중략)
고구려가 시작된 건 한나라 홍가 때로 / 高句麗起漢鴻嘉
옛날 궁전 남은 터엔 풀들이 우거졌네 / 宮殿遺墟草樹遮
슬프게도 을지문덕 그분이 죽었거니 / ??乙支文德死
후정화 부르라고 나라 망한 게 아니네 / 國亡非爲後庭花
후정화(後庭花)는 악부(樂府)의 가곡(歌曲) 이름으로, 남조(南朝) 때 진(晉)나라 후주(後主)
가 지었는데, 소리가 몹시 애달파서 후대에는 망국(亡國)의 음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612년 가을 7월 고구려 영양왕 23년, 수 양제 대덕 8년
(백제 무왕 13년, 임신년 신라 진평왕 34년) 의 기록을 보자.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이 수의 우문술 등 9군 30만과 살수에서 격전하여
대패시키니, 수주 광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수장(隋將) 우문술(宇文述)은 부여(扶餘) 길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樂浪) 길로 나오고, 형원항(荊元恒)은 요동(遼東)길로 나오고,
설세웅(薛世雄)은 옥저(沃沮) 길로 나오고, 신세웅(辛世雄)은 현도(玄?) 길로 나오고,
장근(張瑾)은 양평(襄平) 길로 나오고, 조효재(趙孝才)는 갈석(碣石) 길로 나오고,
최홍승(崔弘昇)은 수성(遂成) 길로 나오고, 위문승(衛文昇)은 증지(增地)길로 나와서
모두 압록강(鴨綠江)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술 등은 노하(瀘河)ㆍ회원(懷遠) 두 진(鎭)으로부터 군사를 발(發)하여
인마(人馬)에게 모두 1백 일분의 양식을 주고 또 무기와 의류ㆍ천막,
그 밖의 군수품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람마다 3석(石) 이상의 무게여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되,
“군량[粟米]을 버리는 자는 참형(斬刑)에 처하리라.”
하니, 사졸들이 모두 천막 속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렸으므로
겨우 중도에 가서 군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는 ‘울지문덕(蔚支文德)’이라고 하였다 은 침착하고
지모(智謀)가 있는 데다 겸하여 글을 잘 하였다.
고구려 왕이 중문(仲文)의 진영에 보내어 짐짓 항복하는 척하고,
허실을 탐지하려 하던차 중문(仲文)이 먼저 수 양제의 밀지를 받았는데, ‘
고구려 왕을 만나거나 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아라’ 하였다.
중문이 이를 잡으려 할 때 수의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이를 굳이 제지하니
중문이 그 말을 듣고 문덕을 돌려보냈다. 이윽고 보낸 것을 뉘우쳐 사람을 시켜 속여 이르
기를,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 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너 돌아왔다.
중문과 우문술 등은 문덕을 놓치고는 마음이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고, 중문은 정예군을 시켜 문덕을 추격하려 하니,
우문술이 굳이 막았다. 중문은 노하여,
“장군이 10만 군을 거느리고 적은 적군을 격파치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보겠는가?
군사(軍事)를 결정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견에 좇아야 하는데
지금 사람마다 딴 마음을 가졌으니 어찌 적을 이기겠는가?”
하니 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빛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이를 피곤하게 하려고 싸울 때마다 곧 도망하니, 문술 등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을 이기었다
술 등은 이 빠른 승첩을 믿고 동으로 살수(薩水)까지 건너와 평양성에서 근 30리 지점에 산
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문덕이 중문에게 시를 보내어 말하기를,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다 알았고 / 神策究天文
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했도다 / 妙算窮地理
전쟁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 勝戰功旣高
족함을 알거든 그만 그침이 어떠한고 / 知足願云止
*족함을 …… :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知足不辱 知止不殆].”란 말이 있다.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에 실린 5구 시이다.
요산당외기는 명(明) 나라 장일규(蔣一葵)의 찬(撰)으로 상고(上古) 적부터 명대(明代)까지의 전기(傳
記) 중에서 약간 기괴한 일들을 뽑아 엮은 것이다. 《四庫全書總目提要 卷 132》
하였다. 중문이 답서하여 효유하였다.
문덕이 또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는 척하면서 문술에게 말하기를,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면, 왕을 모시고 형재(行在)에 나아가 조회하리라.”
하니, 문술이, 군사들이 피곤하여 다시 싸울 수 없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여 졸지에 함락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문덕의 속임수에 빠져 방진(方陣)을 만들어 물러갔다.
이때 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에서 습격하여, 싸우면서 쫓아가다가,
추 7월 살수에 이르러 수군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수의 후군을 추격하니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여러 군사들이 다 괴멸되어 수습할 수 없었다.
장사들은 도망쳐 1주야 만에 압록수에 이르니, 4백 50리 길을 간 셈이다.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고구려군을 반격하여 물리쳤다.
고구려군이 백암산(白巖山)에서 설세웅(薛世雄)을 포위하니, 세웅이 분격하여 물리쳤다.
내호아(來護兒)는 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고,
오직 위문승(衛文昇) 1군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遼)에 이르렀을 때에는
30만 5천이었는데 돌아갈 때 요동성에 이른 것은 2천 7백 인이었다.
물자와 기계는 거만(巨萬)을 헤아렸는데 송두리째 탕진되매,
수주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구속하였다가 계묘일에 이끌고 돌아갔다.
때에 백제는 또한 국경에서 군사를 정돈하고,
겉으로는 수(隋)를 돕는 척했으나 실은 두 마음[兩端]을 가지고 있었다.
수인들은 이 싸움에서 다만 요수 서쪽의 고구려의 무려라(武?邏)를 빼앗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었다. 최씨는 말하였다.
“예부터 전쟁[兵家]의 승패는 군사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장군의 현명함에 있는 것이다.
부진(?秦 전진(前秦)을 말함. 그 임금 부견(?堅)의 성을 따서 말함)이
백만 군으로 진(晋)을 쳤을 때 사 현(謝玄)은 8만의 군사로도 도강해서 한 번 싸우매
진군(秦軍)이 감히 지탱[枝梧]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진(晋)의 군신들이 훌륭한 장수를 얻어서 임기응변하여 승리의 계책을 얻어서이다.
수씨(隋氏 양제(煬帝)를 가리킴)는 천하를 통일하여
그 군사 강함과 나라의 부성(富盛)함이 부진(?秦)보다 몇 배나 되었으나,
양제가 천하의 군사를 출동하여 한 작은 나라를 정벌하는데 고금을 통해 보아도
군사를 이렇게 많이 동원한 예는 없었다.
고구려의 계책으로는 속수무책으로 항복을 애걸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인데
을지문덕은 비록 몹시 혼란하고 어수선한 중에서도 조용히 주획(籌?)하고 틈을 엿보아 힘
껏 공격하기를, 마치 마른 나무를 꺾고 썩은 나무를 뽑아 버리듯이 함으로써 수(隋) 양제를
대파하고 돌아가게 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게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의 땅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데다가
강좌(江左)ㆍ서릉(西陵)ㆍ거록(鉅鹿)ㆍ초성(?城)ㆍ비수(?水)와 같은 요새[形勝]가 없고,
사안(謝安)ㆍ왕도(王導)와 같이 본래 양성했던 군사도 없었는데
한 평양의 고군(孤軍)으로 천하의 대병을 대적하여 마침내 전승(全勝)을 거두었으니,
사안과 견주어 보더라도 문덕이 오히려 장하다.
문무의 재능이 뛰어나고 지용이 겸전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랴!
이후로부터 비록 당 태종(唐太宗)의 신통한 무덕(武德)으로도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고,
요(遼)ㆍ금(金)ㆍ몽고(蒙古)의 흉악한 무리들도 우리 나라에 와서 크게 해독을 끼치지 못했
고,
금산(金山)ㆍ금시(金始)ㆍ합란(哈丹)ㆍ홍구(紅寇)의 군사가 모두 우리 나라에서 섬멸되었으
니,
천하 후세에 우리 동방을 강국으로 여기어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한 것은 문덕의 남긴 공
적이 아니겠는가?” <동사강목 제3상>
- 위 문장 낱말 해설 -
*사현(謝玄) : 동진(東晋)의 명신인 사안(謝安)의 조카인데,
자는 유도(幼度), 시호는 헌무(獻武). 전진(前秦)의 부견(?堅)이 남하하여
진(晋)나라에 쳐들어 갈 때 사안의 지휘에 따라 8만의 군사로
백만 대군을 비수(?水)에서 격파하여 용명을 떨쳤다. 《晋書 卷七十九》
*사안(謝安) : 순제(順帝) 말에 양주(揚州)와 서주(徐州) 지방에 도적이 들끓었다.
적(賊)의 무리 서풍(徐風) 등이 동성현(東城縣)을 공격하자 사안이 종친을 끌고 쳐부숴
그 공으로 평경후(平卿侯)에 오르고, 읍(邑) 3천 호를 받았다. 《後漢書 卷六十八》
*왕도(王導) : 진(晋)의 임기인(臨沂人). 남(覽)의 손자.
자는 무홍(茂弘), 시호는 문헌(文獻). 군모(軍謀)와 밀책(密策)을 잘 했다.
*금산(金山)ㆍ금시(金始) : 거란(契丹)의 왕자 금시(金始)와 거란의 유종(遺種)인 금산(金山)
은 1217년 몽고에 쫓기어 9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계를 침입하여 서해도(西海道)
로 침범해 왔다가 다음 해에 여진(女眞)에 들어간 나라이다.
*합란(哈丹) : 원(元) 태종(太宗)의 제이자(第二子). 고려 충렬왕 16년에 합단(哈丹)병 수만
(數萬)이 등주(登州)를 함락하여 17년에 고려와 원이 그를 연기(燕岐)에서 대파시켰다.
*홍구(紅寇) : 원(元)의 말기 중국에서 일어난 도적이다. 1359년(공민왕 8년) 이방실(李芳
實)ㆍ안우(安祐) 등이 홍적(紅賊)을 대파, 11년에는 정세운(鄭世雲)ㆍ안우(安祐) 등이 홍적을
대파하고 경성(京城)을 수복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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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당[諸祠]
○ 을지문덕사(乙支文德祠)는 평양 창광산(蒼光山) 남쪽에 있다. 현종(顯宗) 11년에 세웠는
데, 숙종 3년에 충무사(忠武祠)라고 편액을 내렸다.
을지문덕사는 또 안주(安州 평안남도)성 남쪽 3리 되는 곳에도 있는데, 숙종 23년에 사액하
여 ‘청천사(淸川詞)’라고 편액을 내렸다.
○ 삼성사(三聖祠)는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의 구월산(九月山)에 있으며, 환인(桓因)ㆍ환웅
(桓雄)ㆍ단군(檀君)을 향사(享祀)하는 사당인데,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
사를 지낸다.
○ 숭령전(崇靈殿)은 평안도 평양성 밖에 있으며, 단군과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을 향사하는
데,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리어 중간 제사[中祀]를 지낸다.
숙종이 근신(近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는데,
어제(御製)한 단군사(檀君祠) 시에 이르기를,
동해에 성인이 일어나시니 / 東海聖人作
일찍이 요와 한때라 들었다 / 曾聞竝放勳
산마루에 사당이 있으니 / 山椒遺廟在
박달나무에 상서로운 구름이 둘러 있도다 / 檀木擁祥雲
하였다.
영종(영조(英祖)) 원년에 ‘숭령전(崇靈殿)’이라고 편액(扁額)을 내리고, 기유년에 전참봉(殿參
奉) 두 사람을 두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한문수 2008. 2. 28. 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