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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수고하는 일꾼들 (로마서 16장 1~16절)
어떤 아버지가 죽을 때가 되자 아들 셋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여기 나뭇가지 하나씩 있는데 줄 테니 꺾어봐라.
아들들은 가볍게 그 나뭇가지 하나씩을 꺾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두 개로 묶어진 나뭇가지를 주면서 이것을 이번에는 꺾어봐라 그랬습니다.
아까보다는 좀 힘이 들었지만 장성한 아들들은 그것을 또 꺾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세 개로 묶어진 가지 다발을 주면서 그럼 이번에는 이걸 꺾어봐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아무리 힘을 써도 꺾어지지를 않았습니다.
아들들이 그걸 꺾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얘들아 너희 사형제가 이 막대기처럼 한마음이 되어 위에 있게 살면 이 세상에서 아무도 너희를 건드릴 수 없을 거다.
그래서 그 아들들은 한 평생 아버지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이러한 연합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세개의 막대기는 하나의 막대기보다 얼마나 힘이 강할까
3배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물리학의 정확한 공식에 의하면 가로 5cm, 세로 10cm의 나무가 견딜 수 있는 하중은 나무마다 좀 다르긴 하지만 대개 275kg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두 개의 나무가 결합되면 몇 kg의 하중을 견뎌야 되느냐 하면은 550kg를 견디면 되는데 이상하게도 826kg을 견딘다는 거죠.
그런데 이 나무가 3개가 묶여지면 3847kg로 기하급수적으로 하중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늘어납니다.
이러한 이상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용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여러분 제가 한번 묻겠습니다. 1 더하기 1은 얼마죠?
뭘 그걸 주저하세요? 어떤 트랙이 있는 게 아닌데 기초수학에서는 1 더하기 1은 2죠?
그죠? 근데 현실 속에서는 그게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1 더하기 1을 했는데 1이 안 돼 이런 상황을 대립이라고 말해요.
1 더하기 1을 했는데 1보다는 낫지만 이보다는 작아 이것을 타협이라고 합니다.
1 더하기 일을 했는데 2가 나왔어. 협동이지요.
그런데 1 더하기 일을 했는데 1보다 훨씬 큰 결과가 나왔어.
이것을 시너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경영학의 주제 중에 하나는 목적과 시너지인데요.
옛날에는 사업을 하면은 왜 사업하세요? 그러면 돈 벌려고요 그럼 끝났어요.
근데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목적을 가지고는 돈을 벌 수도 없고 직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낼 수도 없고, 더 중요한 건 그렇게 해서 돈 벌어봤자 행복하지 않다는 거야.
그거보다 훨씬 더 높고 위대한 목적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우리 회사가
경영되는 이유는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 넘어서는 어떤 가치 목적을 추구하고 나갈 때 사람들의 마음이 그것에 동화되고 그것을 향하여 한마음이 될 때 거기서 파워가 나오는 거라는 거죠.
이걸 다른 말로는 사명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더 차원 높은 목적이 제일 소중한 것이고, 두 번째는 그것을 이루는 방법인데 환경이 점점 더 무한 경쟁으로 들어가는 이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과 대립해서는 살 수가 없는 거죠.
타협 가지고는 역부족이고 협동을 해도 이길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극대화하는 방법, 시너지를 어떻게 창출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겁니다.
좋은 목적을 설정하는 것과 그것을 위하여 모든 힘을 모아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 이게 요즘의 사람들의 주제인 거죠.
그래서 옛날에는 생각 못했던 경쟁자와 손을 잡기도 하고 위는 전략을 세우기도 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 목적과 시너지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도 똑같습니다.
20세기 교회의 가장 큰 변화는 뭐냐 하면 평신도에 대한 가치 발견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요.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은 존재의 가치가 굉장히 낮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누가 했냐 하면 교역자들이 했습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면은 운동을 할 때 교역자들은 선수고 성도들은 관중과 같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개신교는요. 그래도 나아요. 그리스 정교회나 천주교회 같이 보수적인 시스템을 가진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존재는 없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근데 이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영향으로 엄청난 손해를 본 것을 깨닫게 되면서 교회들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의 추세에 맞춰서 성도들 개개인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가진 은사를 따라 섬겨야 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하는 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봤더니 성경에서는 옛날부터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역할을 그림자가 아닌 주역으로서 충분히 감당하고 있더라 그런 얘기죠.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성도의 재발견, 평신도의 재발견이라고 합니다.
1517년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종교개혁 이후에 가장 강력한 변화는 성도들이 사역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 더 나아가서 사역의 주체로 성도들을 인정한다는 이 생각의 변화가 제2의 종교개혁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능동적 사역의 주체다.
이것이 요즘 교회가 생각하는 성도에 대한 관점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 전문가인 마크 깁스와 랄프모트는 사역의 주체는 평신도다.
그런 말을 서슴없이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제 운동 경기로 말하자면 선수가 누구냐? 성도인 거죠.
그럼 교역자는 뭐냐 코치!
그래서 성도들이 사역의 주체이며 이것을 알고 실천할 때 교회는 진정으로 새로워지고 강력해져서 이 말세에 주님이 허락하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그런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일할 것인가?
그 목적과 방법을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의 은사를 따라 일한다.
이게 이 시대 교회의 캐치프레이드죠.
하나님을 위하여 목적입니다. 은사를 따라 일한다.
방법이 있는 거죠. 우리 한번 따라해 볼까요.
하나님을 위하여 은사를 따라 일한다.
우리 가슴속에 이 말씀이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로마서 16장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향한 문안 인사가 나오는데요.
한 30여 명의 사람들이 등장을 해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느냐 그 이름을 열거하는 이유가 많지만 세 가지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바울은 위대한 사도죠. 세기에 나오기 어려운 슈퍼스타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이라는 독특한 사람을 중심으로 불러내십니다.
그를 홀로 두는 게 아니고, 그와 함께 일할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아서 바울에게 붙여서 함께 거룩한 일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함께 위대한 일을 감당했던 것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빌리그래함 목사님 있죠.
그 빌리그래함 사역위원회가 있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역을 했죠.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내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단체에서 함께 일하지만 누가 더 큰 상을 받을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랬어요. 참 중요한 말이죠. 여러분 빌리그래함 이름을 중심으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누가 더 큰 상을 받을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하나님은 홀로 일하게 두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모아져서 거룩한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거예요.
두 번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잊지 않으신다는 거야.
여러분 세월은 참 무서워서요. 내가 한 일도 시간 지나면 잊어버리죠.
남이 한 일은 뭐 아무도 기억 못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다 기록하시고 기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거죠.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많은 사람 중에 3분의 1이 여자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있는 여자가 수동적이 아닙니다.
이 이름 중에는 노예들의 이름도 있습니다.
암블리아 우르바노 노예 이름이거든요.
그런가 하면 나이스 아리스도 블로 황제의 친척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또한 여기에는 이방인도 있고 유대인도 있습니다.
바울의 친척도 있고 여러분 이 이름을 보면 우리는 아무 감이 없지만 그 당시에 로마 교회의 사람들이 이 이름을 읽을 때는 어떤 충격을 받을 수 있냐 하면 이 사람들은 결코 세상의 기준에서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한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거예요.
놀라운 얘기죠. 황제의 친척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와서는 노예들과 만나서 형제님 자매님 교제를 했고요. 때로는 노예에게 성경 말씀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이것이 교회입니다.
사회적인 모든 차별이 십자가 안에서 다 깨끗하게 사라진 곳 그곳이 바로 교회였던 것이죠.
요즘 사회학자들이 이 교회들을 분석하고 있는데 갈수록 교회가 동질그룹으로 묶인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을 닮아간다는 뜻이에요.
여러분 세상은요. 점점 더 자기들끼리 모이는 힘이 강화됩니다. 왜냐하면요.
권리를 보호하고 특권을 잃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자꾸 움직여요.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는 모든 계층이 다양하게 모여야 되는 거죠.
그리고 그 모든 계층들이 이 안에서 차별 없이 하나님 안에서 동등한 자녀가 되어야 하고 서로 간의 형제자매로 소외감이 없어져야 되는 거죠.
이것이 교회의 힘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름들 속에 바로 이러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세 번째는 각자의 은사를 따라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온 사람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일했지만 같은 일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받은 은사를 따라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감당했던 거예요.
다 다른 일을 했지만 특별히 세 팀만 소개를 하겠습니다.
맨 먼저 나오는 사람이 누구냐? 1절과 2절인데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롬 16:1-2, 개정)
뵈뵈라고 하는 여자 집사님이 나옵니다.
겐그레아 교회라고 그랬는데 이 겐그레아는 고린도 옆에 있는 도시에요.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어디서 썼냐면 고린도에서 썼습니다.
고린도에서 로마로 보낼 이 로마서를 다 쓰고 나서 사도바울은 이 귀한 편지를 누구에게 부탁해서 로마 교회에 전달할까를 고민해요.
그리고 기도하다가 마침내 옆에 있는 겐그리아 교회 여자 집사 뵈뵈를 그 사람으로 선택합니다.
여러분 이 로마서를 전달하는 일이 쉬운 일이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고린도에서부터 로마까지 먼 길을 여행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편지를 잃어버리거나 훼손시키면 절대로 안 돼요.
이건 복사본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전해주고 달랑 오는 게 아닙니다.
이걸 전해주고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의 목적과 의도를 잘 설명하고, 그래서 바울과 로마 교회를 연결해 주는 어려운 과제예요.
이걸 아무에게나 부탁하겠어요? 고민하다가 뵈뵈 집사님을 선택한 거죠.
왜 그만큼 책임감 있고 끝까지 일을 완수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과연 그 집사님이 이 일을 완벽하게 해냅니다.
이 로마서를 잘 전달했을 뿐 아니라 뵈뵈 집사님이 어떤 일을 했는지 2절에서 말하죠.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롬 16:2, 개정)
바울과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의 스폰서가 되었다는 거예요.
고린도에 있을 때 이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인 이 베베는 물질로도 신분 보장으로도 바울과 그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사도바울이 베베를 믿었는가 하면은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그랬어요.
깎듯이 이분을 좀 맞아주고 나를 맞이하듯이, 그리고 만약에 그분이 뭔가 필요하다고 하면 나를 위해 주듯이 아낌없이 그 말 다 믿어도 좋다.
100%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 베베라는 여자가 등장을 하고요.
두 번째는 3절과 4절인데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두 번째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인데 브리스가가 아내고 아굴라가 남자예요.
그 여자가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이 두 사람 이 부부가 바울을 위해 무슨 일을 했다고 그랬습니까?
목이라도 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 목이라도 내놓으려고 한 일이 뭐냐?
이 브리스가와 아골라는 성경에서 이사를 제일 많이 다닌 사람입니다.
왜 이사를 다녔냐며는 사도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와주기 위해서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내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전도를 하러 가야 되겠다.
이렇게 말하면 그 부분은 저희들이 먼저 가지요. 그래서 에베소에 가서 집을 얻고 직업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귀고 초청하고 자기 집으로 불러 모아 성경 가르치고 전도하고 그래서 모임이 이루어지면 이제 앞으로 더 좋은 사도가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줄 거라고 기대하게 한 후에 바울에게 편지를 써서 올 때가 됐습니다.
그럼 바울이 그곳으로 가는 거죠.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모아놓은 정보를 가지고 그 도시를 복음화 하는 일에 사용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교회 그 도시에 교회가 쓰고 이제 웬만큼 안정이 되면 내가 이제 다시 다른 곳으로 전도하러 가겠소 하면 그 부부가 짐을 싸서 저희들이 먼저 가지요.
그래서 새로운 도시에 가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한 평생을 보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수많은 손해와 목숨의 위협이 있었지만 아랑곳없이 사도 바울의 선교를 위하여 자신들의 삶을 바쳤다는 거죠.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사람들이었다. 그런 얘기죠.
여러분 이사하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죠. 자식의 학군을 위해서도 이사 갈 수 있고 좀 더 넓은 집을 위해서 공기 좋은 곳을 위해서 갈 수도 있지만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집을 옮겼습니다.
그래서 4절 끝에 보시면 이렇게 말했어요.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뭐 한댔어요?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왜요? 그들이 그들의 집이 교회였거든요.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4)
도시마다 교회가 시작될 때 그 집에서 시작했거든요.
여러분 초대교회가 무슨 힘이 있어서 성전을 지었겠어요?
안 믿는 도시에 가서 전도를 해야 되는데 이런 사람들이 자기의 집을 오픈하우스 한 거야.
교회로 오픈한 거야. 자기들의 사생활은 다 포기한 거죠.
초대교회의 교회들은 전부 다 성도들의 가정이었습니다.
그 모델이 누구냐 하면 브리스기아와 아굴라였던 거예요.
이런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정착되고 번창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하는데 13절입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그랬어요.
루퍼는 누구냐 하면은요. 마가복음 15장에 나옵니다.
알렉산더와 루퍼의 아버지 구레네 시몬 이렇게 나와요.
여러분 구레네 시몬이라고 들어보셨죠? 뭐 하는 사람이에요?
십자가를 억지로 진 사람이에요. 그가 구레네 사람인데 북아프리카 사람이에요.
유월절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는데 마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채찍을 맞으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전설에 의하면 이 구레네 시몬이 로마 군인에게 말합니다.
“뭐 그렇게 가혹하게 때릴 게 있어 이 약한 사람을” 그러자 로마 군인이 말합니다.
“이 자식아 니가 뭐야? 그렇다면 니가 져!”
그래 가지고 재수 없이 그 무거운 십자가 사형수의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간 사람이 구레네 시몬이에요.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옆에 있던 예수님을 보게 되는 거죠.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시는 모습을 다 바라봅니다.
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 후에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요. 그러고 나자
자기가 졌던 그 십자가가 감격스러워지는 거야.
내가 뭔데 나 같은 죄인이 온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잠깐이라도 도와드릴 그 고난에 참여할 수 있었던 영광 그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였는지를
감격하면서 그 사람이 일생을 보냈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누구예요?
알렉산더와 루퍼예요. 이 두 아들이 초대교회의 유명한 지도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루퍼의 어머니가 누구냐? 시몬의 아내인 거죠.
그런데 그분을 보고 바울이 뭐라고 그랬느냐? 그는 내 어머니라 그랬어요.
바울의 친어머니는 아니죠. 근데 왜 어머니라고 그랬을까요?
여러분 어머니의 특징이 뭐죠?
제가 볼 때 말입니다. 이 세상에 어머니처럼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자식의 문제를 자식보다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같아요. 누가? 어머니가!
그리고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 편이에요. 언제나 자식을 편들어 줘요!
위로해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이에요. 여러분 사도바울도요.
인간이잖아요.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도 이 많은 사역을 감당할 때마다 힘들고 어렵고 눈물 나고 낙심될 때가 없었던 게 아니야.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가 어디서 위로를 받았느냐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낙담해 있을 때 알렉산더의 어머니, 루포의 어머니가 와서 말합니다.
사도바울 선생님 힘드시죠. 그러나 힘내셔야 합니다.
지금 이 일이 어렵고 힘들어도 나중에는 영광이 될 겁니다.
제 남편을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를 질 때 얼마나 힘들고 불평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양반이 나중에 얼마나 그 사실을 감격스러워하고 영광으로 알고 축복으로 알고 기뻐했는지 아시지요?
오늘 주어진 이 일도 어렵고 힘들지만 나중에 주님 앞에서 감사로 충만한 일이 될 것입니다.
힘내세요.
그런 위로를 받으면 사도바울이
맞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이렇게 사도 바울을 언제나 위로하고 바울을 위해 뜨겁게 기도해 줬던 거예요.
바울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알고 그래서 바울은 내 어머니다.
그렇게 말했던 거예요. 여러분 교회 안에 이런 기도의 어머니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기도를 부탁하면 탓하지 않고 위로해주고 내 문제처럼 알고 뜨겁게 기도해주는 분 그런 교회라면 참 좋은 교회겠죠.
마지막 결론입니다.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그랬어요.
문안하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어요. 이런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기의 은사를 가지고 충성하면서 위로는 옆으로는 성도 간에는 서로 교제하고 무난하며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교회 생활이다 그런 말입니다. 작년에 제가 존경하는 은사님이 책을 한 권 쓰시고 저한테 그 책을 보내면서 그 책 표지 안쪽에다가 이런 문구를 적었어요.
“인생이란 믿음의 길동무와 함께 떠나는 영혼의 순례 여정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고, 제가 제자지만 영혼의 길동무가 돼서 고맙다 그런 얘기인데 제가 그 글을 읽으면서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이 내 영혼의 순례 과정을 위해서 지금까지 참 많은 분들을 보내주셨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순례 여정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습니다.
홀로 갈 수 없는 길이기에 믿음의 길동무들을 함께 해 주세요.
아멘입니까? 그 예가 뭐냐 하면 교회예요. 교회.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우리 성도들은 서로를 어떻게 바라봐야 되느냐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내 믿음의 영혼의 순례길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길동무”로 받아들여야 돼요.
인정할 수 있나요?
왜 하필이면 내가 이 사람을 만났지 안 만났으면 좋을 껄!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마는 내가 왜 구역에서 이 사람을 만나고 우리 교회에서 이 사람을 만났느냐?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너 이 사람들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 보렴.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영적 성숙에
그래서 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내 옆에 있는 성도들은 내 신앙을 위해 주신 최고의 선물인 거예요.
아멘입니까? 우리 한번 따라해 볼까요?
“당신은 나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문안하라는 거야. 그럴 때 진정한 교회가 된다는 거야.
우리는 각자 다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어요. 그 은사를 가지고 위로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옆으로는 서로 무난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감사하는 그러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는 거예요.
우리 모두는 잘 살기를 원합니다. 맞죠?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잘 산다는 개념을 오해해요.
부자가 되면 잘 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뭐라 그러느냐 뭐라 그래요?
못 산다고 그래요. 그러나 여러분 잘 사는 것과 못 사는 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에요.
지갑이 두둑하면 잘 사는 거예요. 그렇습니까? 아니죠.
정말 잘 산다는 말은 내가 어디에 쓰임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잘 사는 비결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께 잘 쓰임을 받는 데 있는 거예요.
아멘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에요.
정말 잘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우리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실지는 모르죠.
베베처럼 평가하실지, 브리스가 아굴라처럼 평가하실지, 혹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처럼 평가하실지 모르겠어.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 나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잘 감당했을 때 하나님은 내게 마지막 날에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 우리에게는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항상 문안하며 서로에게 감사하고 함께 걸어갈 믿음의 동료들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성도의 교재가 더 마음을 열고 서로를 영혼의 파트너로 무난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세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기도 제목입니다. 수서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각자의 은사를 따라 잘 쓰임 받게 해주소서 기도하겠습니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함께 수고하는 일꾼들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위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함께 수고하게 하시고, 옆으로 성도들을 향해서는 진심으로 무난하며 영혼의 순례 여정에 주신 믿음의 길동무인 줄 알아서 그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무난하며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정말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 사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단순히 돈이 많은 부자의 삶이 아닌 하나님께 쓰임받는 잘 사는 인생,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고 그 면류관을 받는 인생이 되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아 주옵소서.
두 번째 기도 제목입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세상의 차이가 극복되게 해주소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옆에 있는 성도는 내 영혼의 순리의 여정을 위해 주신 믿음의 길동무입니다.
작은 것 때문에 갈등하고 서로에게 상처 주는 관계가 아니고 이제는 좀 더 깊은 믿음의 교재와 서로를 향한 환대와 그리고 진정한 문안이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하고, 서로를 통해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는 거룩한 교재가 되도록 복 내려주옵소서.
세 번째 기도 제목입니다. 성전 건축이 끝까지 안전하고 효율적인 공사가 되게 해주소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 수서교회 성전 건축이 지금까지 은혜 가운데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제 완공을 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 끝까지 안전하게 하시고 다양한 분들이 자기의 재능과 은사를 따라 연합하여 효율적인 공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건축에 참여하는 수고하는 일꾼 모두에게 복을 더하여 주시고, 성도들, 각자의 헌신을 주께서 기억하여 주옵소서 때때로 지금은 힘든 것 같지만 이것이 얼마나
감사의 조건이며 영광인 줄을 우리로 알게 하여 주시고, 끝까지 기쁨으로 잘 감당하는 충성된 수소 교회와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는 곳, 각자의 은사를 따라 주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곳, 그리고 서로에게 무난하며 서로를 회복시키는 곳, 그곳이 교회임을 믿습니다.
우리 수서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게 해 주시고, 그래서 서로 안에서 서로가 새 힘을 얻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수석 교회에 오늘 있기까지 수고한 사람들을 기억해 주시고, 앞으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추슬러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정말 잘 사는 인생 되게 하여 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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