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는 샤를 보들레르(1821~1867)에 이어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개척한다. 연구자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영향 아래 시작 활동을 시작한 말라르메의 시세계를 보들레르적인 우울과 이상, 현실에 대한 염증과 도피를 다룬 전기와 보들레르를 벗어나 독자적인 시풍을 구축하게 된 후기로 구분한다.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통해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현실도피를 추구했다면, 말라르메는 이상적인 세계의 본질을 지성적으로 탐색해나가며 두 시인이 지향하는 이상세계는 차츰 분리되고 구분된다.
말라르메의 이런 결심은 그가 1864년 집필을 시작한 《에로디아드(Hèrodiade)》에 '탈(脫) 보들레르'를 선언하면서 그의 문우 앙리 카잘리스(1840~1909)에게 보낸 편지글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의 필생의 야심작이며, 그의 시론을 정립해나가는 과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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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이렇게 결연히 작업 중이라네. 마침내 나는《에로디아드》를 시작했네. 무시무시한 일일세. 왜냐하면 필시 대단히 새로운 미학으로부터 생겨나는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그 새로운 미학으로 바로 이런 걸세: 사물을 그려내지 않고 사물이 발산하는 효과를 그리는 것. 그리하여 거기서는 시가 낱말들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의도로 이뤄지고 모든 언어는 그 감각 앞에서 사라져야만 한다네. 내 뜻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만 만약 성공한다면 내 계획을 인정해주게나. 왜냐하면 난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성공하길 원한다네. 여기서 무너진다면 난 영원히 펜을 놓을 걸세.
(1864년 쓴 편지)
지난 석달을 아주 간략하게 자네에게 말하려 하오. 그런데 굉장한 이야기라오. 《에로디아드》에 열중하며 보낸 그 시간을 내 램프는 알고 있다오. 음악적인 서두를 썼는데 아직 초고라오. 그런데 오만함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대미문의 효과를 자아내리라는 것이오. 이에 비한다면 자네가 알고 있는 연극적인 장면의 시구는 에피날의 저속한 이미지가 될 것이오. 서두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화폭에 견줄 만하다면 말이오. 이 작품을 완성하려면 서너 겨울이 걸릴 테지만, 포에 걸맞은 나아가 그의 시들이 넘어서지 못할 하나의 시를 이루고자 하는 내 꿈을 나는 마침내 이룰 것이오.
(1866년에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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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르메는 《에로디아드》를 쓰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미학의 언어'를 꿈꾸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낭만주의나 고답주의 시인들처럼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에 싣지 않고 영상이나 음악에 의해 암시를 구하는 방식이었다. 말라르메는 《에로디아드》를 써나가면서 "음악적인 서두"가 "전대미문의 효과"를 자아내고,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의 시편을 넘어설 작품이 되기를 염원한다. 애초에 이 작품을 희곡으로 구상했던 말라르메는 에로디아드와 그녀의 유모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시를 전개시킨다. 그는 이 작품의 소재를《구약성서》에서 가져왔지만, '역사'가 의미하는 진부한 일상의 영감들은 '숨 막히는' 우연의 단편들일 뿐, 필연의 절대의미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기에 역사나 사회 그리고 일상적 현실을 개입시키지 않고 오직 시인 자신의 이상적 시를 추구해나간다.
그는 이 세계가 '오직 한 권밖에 없는 책'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 책은 우주를 향하여 그리고 우주에 의해서 작성된다고 했다. 이 책은 '테두리가 없는 책'이며 광대무변한 '절대의 책'이라는 것인데 말라르메는 시를 통해서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말라르메가 '불가능에의 꿈'이자 '미완성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시론을 개진했던 것은 인간이 아무리 숭고하고 신성한 것을 꿈꾸고 노래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절대 진리'인 '허무(Rien)' 앞에서의 '영광스런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세계관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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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시구들을 이 정도까지 천착하면서 나는 나를 절망에 몰아넣은 두 가지 심연을 발견했네. 그 하나는 내가 불교를 알지도 못하고 도달해버린 무(無)인데 냐 아직 너무 비탄에 빠져서 이 시의 진실성을 확신할 수도 없고 너무 고통스런 생각 때문에 포기해버린 그 작업에 다시 착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네. (중략) 내가 발견한 또 하나는 내 가슴의 공허라네.
그리고 진실인 무 앞에서 이 영광스런 거짓말들을 선언하면서, 나는 물질의 그 광경을 내게 부여하고 싶소. 이러한 것이 내 서정적 책자의 설계도이며 아마도 그 제목은 거짓의 영광 아니면 영광스런 거짓이 될 거요.
(1866년 카잘리스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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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카잘리스에세 보낸 편지를 통해 말라르메는 《에로디아드》를 쓰는 도중 "두 개의 심연에 마주쳤다."고 말하면서 '시는 영광스런 거짓말'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에로디아드》를 집필하면서 시어의 본질을 집요하게 탐문했는데, 그 결과 무(Néant)'와 '공허(Vide)'라는 두 개의 심연 같은 절망에 빠지고 만 말라르메는 언어를 통해 바라보는 현실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공허 속에 완벽한 형태의 본질이 숨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시인이 할 일은 바로 그 본질을 감지하여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여긴 말라르메는 '절대 진리' 앞에서의 '영광스런 거짓말'을 시라고 선언했고 "알파벳이 가장 뛰어난 시"라고 생각했다. '낱말들이 상호 작용하여 원래의 의미와 다른 뉘앙스를 지향했던 말라르메는 오직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뉘앙스에 의해서만 판독되는 시를 썼기 때문에 그의 시는 '전대미문의 난해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정신의 순수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말라르메는 '무'를 이 세계의 본질인 '절대적 존재'로 인식하고 무'와 '언어'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색했다. 그는 시인의 개인적 감성을 배제시킨 채 사물과 현상의 '순수관념'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이때의 순수개념, 즉 순수관념은 플라톤의 이데아(Idea)를 연상시키는데, 이데아는 순수 지성의 산물이지만 말라르메의 시어가 노리는 '순수관념'은 인간이 접하는 물질적 감각이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물질 너머의 순수관념을 추구했고, 따라서 그의 시는 '절대의 책'이자 '절대의 무'를 향한 순수관념의 덩어리였다.
말라르메는 노년기였던 1885년에 이르러 베를렌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간의 시작 활동을 술회하면서 그가 평생토록 단 한 권의 '절대의 책'을 추구해왔음을 밝힌다. '절대의 책'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기획이었고 추상적 가설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시는 미완성이며 실패작이고, 예정된 실패작"인 셈이다. 말라르메는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을 아래의 '백조'에 담아두었다. 이 시는 작품 제목이 없는, '순결하고, 강인하고, 아름다운'으로 시작되는 소네트로 말라르메의 시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순결하고, 강인하고 아름다운 자는 오늘
달아난 적 없는 비상의 투명한 빙하가
서릿발 아래 들려 있는 이 망각의 단단한 호수를
취한 날갯짓 한번으로 찢어줄 것인가
지난날의 백조는 회상한다, 모습은 장려하나
볼모의 겨울 권태가 번쩍이며 빛났을 때
살아야 할 영역을 노래하지 않은 까닭으로
희망도 없이 스스로를 해방하는 제 신세를.
공간을 부인하는 새에게 공간이 떠맡긴
그 하얀 단말마야 목을 한껀 빼어 흔들어버린다 해도,
그러나 아니다 날갯깃이 붙잡혀 있는 이 땅의 공포는,
제 순수한 빛이 이 자리에 지정하는 허깨비,
그는 무익한 유적의 삶에서 백조가 걸쳐 입는
모멸의 차가운 꿈에 스스로를 붙박는다.
말라르메는 자신의 평론집 《발레(Ballets)》(1891)를 통해 "무희는 춤추는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여자가 아니라 우리들의 본질을 내포하는 원(圓)의 이미지들, 칼, 접시, 꽃 중 어느 하나를 내포하고 있는 은유일 따름이다. 그녀는 춤추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아주 장황하게 재현시킬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몸짓으로 암시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비춰볼 때, '백조'는 은유이며 상징이다. 즉 말라르메 자신이거나 시인의 운명을 말해주는 '표상'일 것이다. 여기서 백조는 자신의 '노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늘도 날갯짓을 하지만 '호수'의 수면을 박차고 오르지 못한다. 그 어떤 '희망'도 자신을 떠나버린 상태가 된 그의 날개깃은 이 땅에 붙잡혀 있고, 이젠 '허깨비'와 같은 존재가 되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유적(流謫)의 삶'에 갇혀 있다. 이 '빙하'와 '서릿발'과 '하얀 단말마'의 풍경 속에선 '취한 날개'와 '찢겨지는 호수' 그리고 '한껏 빼어서 흔드는 목'을 비대할 수 없다. 따라서 백조는 스스로 모멸하듯 순백의 얼음에 자신을 붙박고 만다. 이처럼 모든 시인의 시 쓰기는 '덧없는 날갯짓'이며 '모든 시는 실패작'이라는 게 말라르메의 시론이며, 이 시는 말라르메의 메타 시(meta-poe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