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없는 길을 간다는 일은 분명 무모한 짓이다. 그러나 선각자들이나 선구자들은 과감하게 길 없는 길을 서슴없이 나서서
길을 열어 놓는다. 개척의 시기에는 많은 시련과 박해가 따르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향해 나가는 길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피를 박해의 제물로 삼으며 지금의 교회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것이다. 당시 박해를 피하여 동진(東進)하며 깊은 산속에 운둔하고 살었던 순교자들, 그 순교자들을 양산하게 한 단초를 제공한 이가 바로 이존창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교는 활화산처럼 타올라 그 영향권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음을 많은 문헌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분명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고 안주하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선교의 사명과 천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하여 나의 종교의 길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으려 하는 것이 바로 내포지방 성지순례와 그 부근에 대한 트레킹이다. 이존창 루토비코란 걸출한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그에 교회활동과 선교활동을 통하여 나의 새로운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도가 바로 2014년 내포지방 성지순례와 이존창 루토비코에 대한 발자취 추적인 것이다.
내포(內浦)란?
바닷길이 내룍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는 곳을 말하는 것으로 충남의 삽교천 부근, 당진, 합덕, 홍성, 등등 서해와 연결되는 지역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지역들은 중국과 여러경로를 통하여 문화와 산물들 교환이 빈번했던 곳이었다. 백제문화가 꽃을 피었던 곳이 였으며 천주교회가 일찍부터 터전을 잡고 번성했던 곳도 바로 내포 일대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내포의 사도라 불려 온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1759-1801)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병인박해 이전까지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했던 다블뤼(A,Daveeluy, 安敦伊) 주교는 한양,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서 체포된 순교자 대부분은 이존창이 입교시킨 후손들이라는 1850년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존창은 자신의 이름처럼 존재할 수 있었기에 천주교회를 창대함으로 나가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2014년부터 새롭게 시작할 성지순례지 중심을 내포로 정한 이유는 바로 내포지역이 이존창이 태어난 생가가 있으며 그가 천주교회 사도로서 활동하여 큰 업적을 남긴 곳이 바로 내포지방이기 때문이다. 이존창은 단원이란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예산 여사울에서 태어났다. 여사울은 그 지방에 여우들의 출몰이 많으곳이라 불려진 이름이며 애시당초에는 여울이라 불려지다 추 후 여사울이라 불려지게 된 고장이다. 현재주소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이다.
다블뤼주교의 기록에 의하면은 이존창은 양인 즉 상인출신이었다. 눌암기략(訥庵記略)이나 관변자료에 나오는 이존창에 대한 신분을 상천(常賤), 상한(常漢) 등 미천한 부류로 표현한 것을 보아 양인출신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안의 부유한 정도를 보았을 때 경영 부농 출신이라 판단을 두는 곳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시대의 기존의 신분질서 안에서 그는 그 신분에 안주하지 않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지식계층들과 인연을 맺어가며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우린 조심스럽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분변화의 극복점에 있어 천주교 교리는 이존창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해 진다. 조선시대 국방의 의무격인 군역(軍役)에서 벗어난 그는 1774년 16세무렵에 학문의 길로 가고자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이존창은 홍유한(洪儒漢), 권철신(암브로시오,1736-1801) 권일신(프란시스코,1742-1792) 이기양(李基讓) 그리고 학문을 배우는 초기에는 이병휴(李秉休 1710-1776) 제자였던 이기양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1776년 이기양이 경기도 남천(지금의 이천)으로 이주하게 되자 왕래를 해나가다. 5월경 이기양의 아들과 함께 녹암권철신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권일신으로부터 이존창은 유럽의 학설인(Dooctrines enuropeennes)인 서학에 대하여 배우게 된다.
이렇게 이존창의 천주교 신앙과 만남은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이나 관료지향적 성향에서 벗어나 혁신적 삶을 추구하였던 녹암권철신 성호학파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이다. 권철신을 비롯한 성호학파 인물들이 서학책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1724년 무렵이었다.그리고1776년부터 1782년 사이에는 학문적 관점에서 신앙의 교리로 받아 드리기 시작한다.
이어서 1782년부터는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스스럼없이 받아 들이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A,Davelly,op,cit 책 p18기록에 의하면은 이존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이존창의 훌륭한 정신과 자질을 좋게 본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그에게 정성을 쏟았고 이존창은 서학을 깊숙히 알게 되어 갔다. 권일신은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신조를 정성껏 가르쳐 주었으며 천주교의 의무를 실천하는데 힘을 기울이도록 교육시켰다. 이존창의 천주교에 대한 교육은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어 이존창 루도비코는 가족친지는 물론 이웃들에게도 천주교를 가르치고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고 고향 여서울로 돌아 오게 된 것이다.
돌아 온 그는 1784년 겨울에 이뤄진 세례식을 통하여 내포지방 천주교회의 창설을 주도하게 된다. 신앙인으로서 이존창 루토비코 곤자가의 활동시기는 몇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가 입교활동기인 1784년 - 1791까지로서 내포신앙공동체를 설립하였으며 타지역으로 교리를 전파해 나간시기다. 이 당시 이존창에게 전교에 힘을 실어준 일이 있었는데 바로 1786년부터 시작된1787년까지 가성직제도였다. 이승훈과 홍낙민, 권일신, 정약전이 신부로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내포의 이존창과 전주의 유항검도 신부로 임명된다. 이존창은 1787년까지 근 1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며 신자들에게 성사도 집전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잘못되었음을 안 이존창은 1789-1790년에 있었던 윤유일 바오로 북경 파견에도 깊이 간여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 천주교는 1790년 커다란 시련에 봉착하게 된다. 북경주교가 금지시킨 조상 제사 금지령 때문이었다. 양반층 신자들이 많았던 한양, 경기일원은 시련을 겪게 된다. 그렇지만 내포지역 공동체는 한양, 경기처럼 큰 시련에서 벗어나 유지되어 갈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한양,경기일원과 달리 내포공동체는 하층민들 중심으로 폭 넓게 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는 내포 공동체와 이존창에게도 많은 시련을 안겨 주었다. 이존창은 1791년 11월 3일 체포되어 읍에서 형벌을 받았지만 다시 공주감영으로 끌려간다. 관찰사는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린다. 이존창은 이젠 사학은 요술이라 하며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정도로 돌아 올 뜻을 알렸다 라는 보고에 의하여 석방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배교였던 것이다.
두번 째는 석방 후 회두 활동기인 1791-1795년 삶의 근거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복음선교에 매진하였으며 1795년에는 전주 유항검과 함께 한양으로 가 주문모신부를 만나 더 더욱 철저한 신앙생활과 전교에 힘을 쓰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795년 5월11일 주문모신부의 체포령과 더불어 을묘박해(乙卯迫害)가 시작 되자 주문모신부는 남대문 부근에 있던 강원숙 골롬바의 집과 양근 등으로 숨어 다니다 충남 연산으로 도피하는데 이 당시에 주문모신부님을 인도한 자가 바로 이존창과 유항검이었다. 그리고 내포지방 곳곳을 다니며 사목활동을 한 주문모신부님의 영향과 이존창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내포지방은 신앙공동체 확대기에 들어 서게 된다.
세번 째 이존창의 시련기인 체포되어 순교할 때 까지 정황이다. 그 시기는 대략 1795년부터 1801년 사이로 을묘박해로 체포된 후
공주 천안등으로 이송되며 혹독한 문초를 받던 시련 순교기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추적하던 포졸들에게 고산에서 체포된 이존창은 공주감영으로 압송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 당시 충청도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정사박해(丁巳迫害) 다시 문초를 당해야 했다. 감영의 옥에 있으면서도 이존창은 1796,97년 밀사 황심을 북경 파견함에 있어 관여 하였으며 1799년에도 명도회장 정약종의 서한을 갖고 북경을 다녀 오도록 하였다. 이러한 이존창의 의지는 다름이 아니라 성직자의 영입과 신앙의 자유획득을 위한 노력이었다. 이러한 시기를 거친 후 이존창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다시 공주감영에서 갇힌 후 그 해 2월16일 한양으로 압송되어 추국을 받게 된다. 추국끝에 정법으로 인정된 이존창은 다시 공주감영으로 이송되어 2월28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길을 걷게 된다. 참수형을 받을 당시 이존창의 목은 여섯번 째 칼날에 의하여 떨어졌다 한다.
순교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합당해야 한다.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에 의하여 초래되어야 하며, 그 죽음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自發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존창은 그러한 조건을 다 갖춘 순교자지만 과연 그를 하느님의 종(Scrvus Dei)으로 선정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그가 잡혀 문초를 받을적 마다 쉽게 풀려났던 행적 때문이다. 특히 황사영은 이존창을 평가하면서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1858년부터 1859년까지 한국주요 순교자 약전을 정리한 다블뤼 주교는 이존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 정리하고 있다.
" 이존창은 마지막 순간까지 비난을 받을 어떤 나약함도 보이지 않았다. 정황을 몰랐노라라고 고백한 황사영 알렉시오의 한마듸가 애매모호한데, 그가 당국을 우롱한 처사인것 이었을까? 그의 친지 여러명이 현장에 와 있었다. 그의 머리는 여섯번 째 칼에 떨어졌으니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아연 실색하였다. 그의 가족은 얼마 지나서 그의 유해를 거두었다. 사람들은 그의 몸을 거둘 때 머리가 목에 붙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의 형제들에 말에 의하면 목 둘레에 흰줄만이 칼자국을 나타냈을 뿐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옮겨 선산에 이장했다.
이존창은 특유의 친화력을 지녔던 사람이었다. 단 한번만 그를 만나도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친화력의 소유자였으며 끈기와 은근함과 열정을 갖고 동화의 길을 텄던 것이다. 말과 표정에도 조리와 온화함이 깃든자로서 그와 만났던 사람들은 쉽게 그가 인도하는대로 천주의 길로 들어 섰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령의 뜻에 힘입어 진행된 일이 아니가 한다. 이러한 역사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이존창의 생가를 찾은 후 참례하며 그분의 뜻을 가슴에 담고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성직자! 한국최초 성직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연관되어 있는 솔뫼까지 도보 순례를 하며 내포지방의 첫 문을 열려고 하는 것이 바로 내포지방 성지순례와 트레킹의 목적이다. 평화의 걸음으로 은총의 기쁨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사부 성프란치스코를 통하여 천주님의 평화의 은덕을 받기 위하여 형제적 친교안에서 걸을 것이다. 그 시기는 지금 계획으로서는 2014년 2월 정기 트레킹 날이다. 1월에는 황사영, 남종삼 성인들의 묘역 참례하려고 한다. 야고바트레님들의 평화를빌면서 이만 총총......
ps: 이존창이 그토록 염원했던 조선 성직자의 탄생에 대한 열망은 결국 혼맥으로나마 뜻을 이루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고, 최양업(崔良業)신부는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되는 등, 조선 말기의 신자 중 대부분이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였다. 그리고 머나 먼 타국으로 신학공부를 하기 위하여 떠났던 세명의 소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의 출신은 전부 내포지방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이존창의 전교 영향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참고문헌
카돌릭대백과사전. 차기진著 이존창의 생애와 신앙,
A , Daveluy ,op,cit, 내포연구소 刊, 내포천주교신앙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