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붉은 빛으로 물든 감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8-02-10 17:27:24
시골로 깊이 들어갈수록 날씨는 더 쌀쌀한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가을볕은 따사로웠지만 얼굴에 휘감기는 바람결만은 다가오는 계절을 막지는 못했다. 아직 늦은 가을은 아니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산과 들은 하나같이 가을볕에 물들어 붉게 달아올랐고 산길따라 하늘거리는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가을의 정취를 더 한층 달래주고 있었다. 처가에 들르고 나서 상촌 대실에 몸을 푼 시간은 오후 네 시, 산국이 무더기로 꽃을 피운 돌담 안 마당 안으로 차가 덜컹거리며 들어서자 마루에서 감을 깎고 있던 누나가 호들갑을 떨며 우리를 맞이했다. 차에서 내리는 장모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더니 왜 이렇게 늦느냐는 것이었다.
“광평에서 고구마를 캐다 보니 그만”
바람에 날리듯 한마디 말을 툭 내던지던 아내가 감 깎는 시범을 보인다며 곧장 마루쪽으로 향했다. 어딜 가나 아내는 앞에 나서는 것이 탈이었다. 방금 전 광평 밭에서도 고구마 뽑는 시범을 보인다며 맨 앞장을 서더니 여기 와서도 감을 깎아 보인다며 앞장을 섰다. 그러나 그 시범은 금방 부천 누나의 손사래로 막을 내렸다.
“지금은 감 깎는 도구가 있어 전과는 다른 것 몰라”
아내가 머쓱했다. 그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일일이 칼로 감 껍질을 도르르 깎던 그 때를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을볕을 쬐며 감을 따는 기분
아내와 누나가 감을 깎는 사이, 난 매형과 함께 둥글게 돌담을 두른 집 뒤편 샛길을 따라 비탈밭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비탈에 개간해 놓은 밭에는 몇 그루의 감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었는데 감나무마다 온통 붉은 물을 뿌린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감들이 뿜어내는 붉은 빛이 따사로운 가을볕에 물들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꼭 붓으로 점점이 붉은 물을 뿌린 듯했다.
나뭇가지가 부러질 듯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감들 사이로 투명한 하늘이 파랗게 채워져 있었다.
우선 손닿는 가지에 붙어있는 감들을 하나하나 땄다. 나뭇가지가 높다 싶으면 손으로 가지를 휘어잡아 감을 따는데 그 재미가 솔솔했다. 어림잡아 생각해도 5년 만에 감을 따는 것 같았다. 그 때는 어머니와 감을 땄다. 대전의 집 마당 한 귀퉁이에 서있던 감나무에서 가을이 되면 붉은 감들을 주저리 째 내려주던 일들이 추억처럼 지나갔다. 내가 간짓대를 들어올려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감들을 꺾어 내리면 어머니는 장대 끝에 꼭 끼워져 있던 감들을 똑똑 따냈다. 금방 한 다라이 채워진 감들을 보며 합죽이 미소를 짓는 어머니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얻은 것처럼 흡족한 표정이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어머니와 함께 감을 따는 기분은 풍성한 가을이 던져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도시 생활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발산하고 싶은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매형과 함께 간짓대를 높이 들어올려 정신없이 감을 따 내리는데 장모님이 밭으로 올라왔다. 아마 감 깎는 일이 시들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감을 따고 장모님은 포대에다 주어 담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이번에는 누나가 아내와 함께 올라왔다.
“벌써 이렇게 감을 땄어, 감 따는 선수네”
장하다는 투로 말을 하는 누나의 얼굴에도 상큼한 가을볕이 묻어있었다.
“곶감으로 만들지 말고 홍시 해먹어”
밭에 흩어진 감들을 보며 누나가 말했다. 꼭 애기주먹만 했다. 곶감으로 만들기는 턱없이 작고 그렇다고 홍시를 해 먹기에도 맘에 차지 않는 감들, 누나는 이것으로 홍시를 만들어 먹을 것을 권했다.
마음속 붉은 감들이 떠오르는 5년 전 그 때
홍시는 배가 출출할 때 간혹 간식용으로 제격이었다. 떡을 만들어 살짝 찍어 먹어도 좋고 그릇에 홍시를 풀어 숟가락으로 퍼 먹어도 좋았다. 거의 5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 마당에 가을볕이 들어차면 집안엔 감들로 수북했다. 마당 한 귀퉁이에 서있는 감나무에서 따낸 감들을 어머니는 일일이 골라내셨다. 흠집이 없는 성한 놈은 곶감을 만들고 바닥에 떨어져 깨지거나 흠집이 많은 놈들은 홍시를 만들어 먹었다. 지붕 처마 아래 긴 노끈으로 줄줄이 매달아 놓은 감에서는 가을볕에 익어가는 단내가 풀풀 넘쳐흘렀고 한쪽 선반에는 홍시로 익어가는 감들로 수북했다.
몇 달이 지나 감들이 물렁물렁해지면 그 새를 못 참아 게눈 감추 듯 날랑날랑 훔쳐 먹길 즐겼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부터 감나무와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감나무가 없다 보니 여간해서 감에 얽힌 추억을 만들지 못했다. 기껏해야 가끔씩 부천누나가 연락을 해와 시골에서 감을 따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돌담 안으로 펼쳐지는 여유로운 풍경
감이 세 포대 정도 되어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 차 뒷 트렁크에 감을 꽉 채워 싣고 내려오는데 산국이 노랗게 무더기로 핀 돌담 안으로 여유롭게 감을 깎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둥글게 테두리를 두른 샘가를 지나 가까이 가보니 마루위에 쌓인 것은 감뿐이 아니었다. 방금 도착해 보지 못했던 야콘 몇 포대와 노란 산국 꽃잎이 한 무더기 담겨있는 다라이도 눈에 띄었다. 산국은 가을을 대표하는 야생화답게 눈부시도록 상큼했다. 산국을 말려 차로 달여 마시면 고혈압에도 좋고 머리도 시원하게 맑아진다고 하는데 냄새를 맡는 기분으로도 효험이 있는 것 같았다. 단풍물이 든 산비탈에 땅거미가 내려앉는걸 보니 이제 대전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 온 것 같다. 원두막처럼 만든 감 덕장에 말쑥하게 깍은 감들을 노끈에 매달아 걸던 매형이 손을 툭툭 털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백 유리를 통해 뒤를 보니 잘 가라며 손을 흔드는 누나의 모습이 노랗게 무더기로 핀 산국과 함께 한 폭의 가을 풍경으로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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