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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위기를 무서워합니다. 사람들이 위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위기 때문에가 아니라 위기로 인해서 일어날 일 때문에 위기를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위기가 무서운 것은 좋은 결말보다는 좋지 않은 결말이 가져올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기를 두려워하고 위기를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위기 자체도 무섭지만 위기가 가져오는 것들 때문에 위기가 두려운 겁니다. 위기로 인해서 죽음이라는 결말을 맞을 수도 있고, 위기로 인해서 사회로부터 영원히 매장당할 수도 있고, 위기로 인해서 사람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위기를 두려워합니다.
야곱에게 큰 위기가 왔습니다. 형과 화해하기 위해서 얍복강에 섰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기가 야곱에게 닥쳤습니다. 야곱에게 형 에서도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에서의 성격이나 또 에서와 야곱 관계에 있었던 원한의 문제나 그리고 에서의 군대들도 무서운 존재였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얻고 얍복강을 건너게 됐고, 그래서 형과 화해하게 됐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답이 아니었으면 야곱도 형과 화해할 수 없었을 거예요. 밤새 기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얻었기 때문에 그가 얍복강을 건너고 형과 화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와의 관계로 인한 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위기가 야곱에게 왔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여동생 디나의 사건으로 인해서 세계성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다 죽였기 때문인 거예요. 형 에서와의 감정의 문제는 풀면 돼요. 물론 그것도 어려운 일이긴 해요.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 엇갈리면 쉽게 풀려지지 않더라고요. 감정을 푸는 것도 되게 어려운 일이지만 세계 성에 일어난 일은 목숨과 결부된 일인 거예요. 형 에사와는 그냥 감정을 불편하게 가지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잖아요. 근데 세겜성에 일어난 일은 만약에 이게 사건이 커지면 아무도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야곱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자녀들은 원수를 갚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가나안 족속을 건드린 거예요. 그냥 세계성에 있는 남자들만 죽인 게 아니라 가난은 부족별로 나누어 있지만 실제로는 한 공동체인 거예요. 결국 가나안에 있는 모든 족속을 다 건드린 거기 때문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목숨이 달려 있는 위기가 공동체에 오게 된 것입니다.
형과의 문제는 가족 간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민족과 그리고 문제가 발생한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전쟁이 일어난 거죠. 그냥 좌절한 감정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풀리기도 하고 해결되기도 하지만 민족 간의 전쟁은 이게 풀릴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미 자녀들이 몰살당했기 때문에 야곱에게 원수 갚을 것은 확실했어요. 이대로 있다간 한 명도 목숨을 건지지 못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절대절명의 위기에 야곱이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등장하셨고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도 그 성도들의 삶에 동참하세요.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인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모양과 어떤 역사로 나와 함께하셨고 내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을 여러분과 저가 모를 뿐이지 하나님은 우리의 위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위기 가운데 어떤 모양으로든 반드시 함께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여러분의 삶에 위기가 있다면 그 위기 가운데 하나님은 어떤 모양으로도 함께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위기를 넘어서려면 나와 함께 계시고 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보게 된다면 우리가 위기를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의 삶 어딘가에는 등장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위기가 있다면 개인의 삶에 어려움이 있다면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삶에 큰 고난과 고통이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모양으로든 지금 여러분 가운데 계실 것이고 우리의 과제는 그 하나님을 빨리 발견해내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빨리 듣고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빨리 깨닫고 그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빨리 순종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뭐냐 하면 벧엘로 오라 하라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지금 있는 야곱이 있는 이 지옥과 벧엘은 더 가나안의 중심부인 거예요.
여러분 위기를 넘어서면 위기로부터 더 멀리 달아나야 정상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것이 그래도 그래도 가장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최선의 길이었을 거요.
근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위기의 중심부로 야곱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어요. 벧엘은 가나의 돌 훨씬 중심부예요. 더 높은 곳이고 그래서 그곳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야곱이 세계 세에서 떠난다면 벧엘이 아니라 외삼촌의 집으로 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근데 하나님은 위기를 맞은 야곱에게 위기의 대책으로 내놓으신 것이 중심부로 가라는 거예요. 문제의 중심부로 더 큰 위기 가운데로 가라는 거예요. 달아나지 말고 이게 하나님의 해결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대책으로 주신 것은 대책이 아니라 더 큰 위기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야곱을 피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더 큰 위기 가운데로 그를 끌고 가셨을까요? 그래야 야곱의 인생이 정리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베델로 올라가서 거기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35장 1절입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베델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이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왜 위기에 처한 야곱을 상대적으로 안전한 외삼촌의 집이나 형 에서의 집으로 가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안전한 것은 방금 화해한 형의 집일 것이거나 아니면 그래도 효력인 외삼촌의 집이 야곱에게 있어서 훨씬 안전한 곳이었을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그곳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가나안의 중심부인 베드로로 향해서 올라가라 그곳에 제단을 쌓으라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여러분과 저는 이 말을 들으면 잘 이해가 안 될 거예요. 왜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했지? 그런데 야곱은 아마 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 그 명령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달은 것으로 보여요. 왜냐하면 자기와 하나님과의 언약 곧 약속이었기 때문이에요. 자기와 벧엘로 올라가 다시 그곳에 단을 쌓고 그것이 하나님의 집 되게 하겠다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장소가 약속의 장소가 벧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2절처럼 하게 된 거예요. 야곱은 야비하고 속이는 자이고 뺏는 자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읽을 수 있었어요.
우리가 야곱을 좀 무시하잖아요. 여러분 오늘 야곱의 삶을 보세요. 우리보다 훨씬 나아요. 최소한 야곱은 자기 삶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뭔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만 읽어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어요. 어려움을 금방 벗어나요.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못 읽는 거예요. 오늘도 이 예배 중에 하나님이 분명히 여러분의 삶을 향한 메시지를 선포하실 거예요.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이 선포된 말씀 중에 나를 향한 메시지를 내가 깨닫고 알아차리는 일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만 읽어도 살아날 수 있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5장 2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하나님의 명령을 깨달은 야곱은 순식간에 이제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도 알았어요. 위기 가운데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었고요. 그 하나님의 음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야곱은 알 수도 있었고요. 알았고요. 더 나아가서 이제는 자기가 그 말씀 앞에서 하나님 명령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았던 것입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방 신상을 버린다는 것은 이방신 낯선 신을 버리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방신을 의미해 낯선 신이라는 의미도 있어요. 그러니까 야곱이 어쩔 수 없이 이방에서 섬기게 된 신들 야곱의 아내가 드라임도 이렇게 훔쳐도 왔잖아요. 그러니까 이방의 신들이 야곱 가정에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 신들은 낯선 신인 거예요. 하나님은 낯설지 않는 왜 만난 적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씀도 하셨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어리석게도 이런 하나님은 버리고 친숙한 하나님은 버리고 낯선 신을 자꾸 찾아다니는 거예요. 야곱의 삶이 그랬던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이제 자기에게 낯선 신을 버리겠다고 각오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이방 신상을 다 버리게 하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이양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야곱에게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그것을 세계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다 묻었습니다.
뭘 의미할까요? 결별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제 우리 가정은 이 낯선 신과는 그 어떤 접촉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별을 선언하고 그 우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땅에 묻어버렸던 것입니다. 야곱은 안 거예요. 왜 자기 인생의 위기가 왔는지 그러니까 자기의 위기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의 대표적인 것인 이방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다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땅에 파 묻음으로 말미암아 결별을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살 길은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리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신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꿔 입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어요. 그러니까 준비된 자로 다시 언약을 갱신할 수 있는 자가 되어서 다시 야곱으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야곱은 다시 하나님과의 언약의 자리에 서기에는 너무 야비한 사람이었어요. 긴 시간 동안 외삼촌의 집에 있었지만 아직 여전히 옛 모습이 버려지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어요. 이것과는 자기가 이런 모습은 베델로 올라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를 정결케 하고 난 후에 벧엘로 올라가게 됩니다. 창세기 35장 3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벧엘로 올라가려고 하시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위기도 베델로 올라가면 해결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벧엘은 지금 있는 것보다 위치적으로 더 위험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그곳을 향해 가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를 덕지덕지 달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어요. 하나님과 만나기도 어렵고 하나님의 일도 하기 어려워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바란 것은 그러니까 인간 이스라엘이 아니라 정말 영적 이스라엘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등장하기를 기도했던 거예요. 기다리셨던 거예요.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쓰고 이제 이 사건 이후에 정말 이제 이후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불리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야곱이 과거 일을 덕지덕지 달고서는 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이 언약의 사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셨어요. 그래서 오히려 그를 더 위기 가운데 몰아내셨고, 야곱 자신도 자신의 과거의 삶으로는 다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리에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어요. 그 언약을 지킬 수 없음도 알았어요. 그래서 모든 이방 신상을 다 묻어버리고 벧엘로 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 왕의 기도로도 야곱의 과거는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진짜 이스라엘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리되지 않는 야곱의 과거는 야곱을 더 큰 위기로 몰아넣었어요. 그래서 벧엘로 가지 않고 새김으로 갔던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인간적인 삶은 더 큰 위기를 가져왔고, 결국 목숨까지 위태로운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 따라가겠습니다.
정리되지 않는 삶은 위기를 만듭니다.
할렐루야 정리되지 않은 삶은 성도의 삶은 교회도 안에서도 위기를 만들고, 정리되지 않은 성도의 삶은 자신의 삶의 위기를 만들어요. 여러분 대부분의 위기는 내가 만든 것이지 남이 준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남이 아니면 회사가 아니면 교회가 나에게 위기를 줬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위기는 남이 나에게 준 것이 아니라 대부분 내가 만든 거예요.
나의 정리되지 않는 삶이 위기를 만들었던 거죠. 정리되지 않는 삶은 위기를 만듭니다. 축복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의 문을 정리되지 않는 삶이 만듭니다. 야곱은 자신의 삶의 위기를 만든 것을 모아서 땅에 다 파묻어버렸습니다. 창세기 35장 11절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애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내 허리에서 나오리라.
야곱이 과거를 정리하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의 말씀을 선포해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벧엘에서 하나님이 예전 예수를 피해 달아날 때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이제 다시 베드로 돌아왔을 때 그대로 야곱에게 선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 에서서 빼앗아서 이 축복은 형의 축복이었어요.
근데 형에게 빼앗은 거잖아요. 지금까지는 빼앗은 축복이었어요. 과거가 정리되지 않을 때까지는 그가 다시 베드로 돌아오지 않을 때까지는 야곱의 축복은 남에게서 빼앗은 축복이었어요.
근데 야곱이 과거를 다 정리하고 베드로 돌아오자 다시 벧엘에서 단을 쌓기 시작하자 하나님은 이제는 그 모든 축복을 이제는 진짜 야곱의 축복으로 만들어주신 거예요.
놀랍지 않나요? 과거가 정리되지 않으면 새로운 삶도 시작할 수 없고 새로운 사역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정리되지 않는 과거는 과거만 계속 되풀이하게 해요. 지금 여러분의 삶에 과거가 계속 되풀이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가정에 옛날에 있었던 문제가 또 되풀이되고 내 어릴 때 있었던 문제가 또 내 삶에 지금 되풀이되고 내가 젊었을 때 내게 있었던 문제가 지금 계속 반복되고 일어나지는 않습니까?
바로 과거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정리되지 않으면 과거만 되풀이되는 거죠. 야곱이 과거를 정리하자 그의 인생에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고 진짜 축복이 시작되었어요.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야곱이 상상할 수 없는 축복들을 약속해 주셨어요. 야곱은 과거를 극복하지 못함으로 이 축복을 누리지를 못했어요. 형에게 뺏은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회를 시작했지만 과거를 극복하지 못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반복되는 목회자들도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과거를 버리지 못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사는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과거가 반복된다는 것은 과거를 버리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과거를 버리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세레머니가 필요해요.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으로 말씀을 준비했어요. 근데 새로운 시작은 정리되어야 시작되는 거예요. 내게 인은 안 좋은 감정들과 기억들과 상처들을 정리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어요.
여러분 결혼을 한다고 새로운 시작이 될까요? 직장을 다시 간다고 다시 학교를 진학한다고 새로운 시작이 될까요? 아니요. 과거가 정리되지 않으면 계속 과거만 되풀이될 뿐인 거예요. 그냥 모양만 새로운 시작으로 보여질 뿐이지 실제로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양상은 과거의 형태 그대로인 거예요. 내가 어렸을 때 겪던 나의 과거가 사춘기 또 20대에 그대로 나타나고 직장생활에도 그대로 반복이 되고 결혼 후 가정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과거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모든 신상을 땅에 묻고 하나님의 언약의 땅인 베델로 올라가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정리되셨습니까? 여러분의 과거를 땅에 다 파묻으셨습니까? 혹 아직도 과거의 성품에 과거의 삶에 종 노릇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밭을 정리하지 않으면 씨앗을 뿌릴 수 없고 결과적으로 열매 맺을 수 없어요.
어제 저희 목장에서 아마 이제 밭에 밭일을 하신 것 같아요. 고를 정말 잘 탄 이 밭의 풍경을 찍어서 저희 단톡방에 이렇게 올려놓으셨더라고요. 그렇게 밭 고랑이 정리되지 않으면 여러분 씨앗을 심어도 아무런 효력이 없어요.
여러분 논을 우리가 가끔 돋우워서 논에 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어요. 신기하게 수분이 있으니까 1년 2년 차는 나무가 잘 자라는데 보통 3년, 4년 되면 나무가 다 죽어요. 왜요? 논에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에요. 논에는 벼를 심어야 되는데 논에 나무를 심었어요. 논의 토양을 다 바꾸지 않고 객토를 해서 마사토를 해서 그냥 물이 잘 빠지는 땅으로 바꾸지 않은 채 그냥 이 두둑만 덮어서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첫째 두에는 나무가 잘 자란 것 같지만 셋째 넷째 때니까 나무가 다 말라 다 죽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과거를 땅에 묻고 그 마음과 삶을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하자 야곱의 공동체에는 기적이 일어났어요.
물을 거 아니에요? 과거를 정리하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과거를 정리하면 목사님 내 삶에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나요라고 물을 수 있겠죠? 창세기 35장 5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이 거울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과거를 정리한 야곱의 삶에 그 누구도 야곱을 추격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그의 대적에 야곱의 대적에게 두려움을 주셨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야이 각오를 정리하고 하나님께 벧엘에 올라가자 하나님은 그의 대적들을 다 물리쳐 주셨어요. 두려움을 주셔서 전쟁이란 말도 꺼내지 못하게 만들어 주셨던 겁니다. 정리되지 않는 과거를 정리해야 합니다. 정리되지 않는 과거의 감정들을 정리해야 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다 보면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 많을 거예요. 부부 사이에도 성도 사이에도 뭐 저와도 그럴 수도 있으시고요. 직장 동료들과도 친구들과도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 분명히 많이 있어요. 과거를 정리한다는 건 정리되지 않는 감정을 정리한다는 의미입니다.
정리되지 않는 과거의 상처도 정리돼야 됩니다. 상처가 정리되지 않으면 그 상처는 계속 덧나고 덧나고 덧나서 결국은 더 큰 상처가 됩니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불신앙의 흔적들도 땅에 파 묻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직분을 받고 신앙으로 살기를 맹세하고 다짐은 했지만 여러분 불신앙으로 산 흔적들이 얼마나 많아요 오늘 그 불신앙의 흔적도 우리가 땅에 다 다 묻어야 됩니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관계들도 정리해야 됩니다.
여러분 정말 만나도 만나도 필요 없는 사람,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 안 되지만 내 영혼과 교회와 나를 위해서, 우리 가정을 위해서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이 꼭 있어요. 만나지 마십시오. 관계도 정리해야 합니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범죄들도 정리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은 죄가 많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많으면 남들은 교회에 오지도 않는데 우리는 교회도 오고 맨날 교회에 와서 죄 지었다고 회개할까요? 그 때문에 온 건 아니지만 어떻든 정리되어지는 과거의 범죄들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이게 정리되지 않으면 그 범죄는 내 삶에서 또 반복이 돼요. 정리되지 않는 감정은 반복이 되고요. 정리되지 않은 상처도 반복이 되고요. 정리되지 않는 불신앙도 계속 반복이 되고요. 정리되지 않은 관계도 또 반복이 돼요. 그래서 사람은 바뀌었는데 똑같은 관계를 그 사람과 하고 있게 되는 거예요.
정리되지 않은 범죄도 또 반복이 됩니다. 어떤 성도들은 신앙을 정리하면 자신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정리합니다. 신앙은 정리 대상이 아니에요. 잘못 판단한 거죠.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떠난다고 우리의 잘못된 삶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내가 믿음에서 멀어져 간다고 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해진다고 해서 내 믿음이 정리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정리할 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에요. 교회 안에 있는 세상, 내 안에 있는 세상, 내 안에 있는 과거 잘못된 삶과 행적들, 불신앙들 이것이 정리돼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새 길이 열리지 않는 것은 과거가 정리되지 않아서입니다.
여러분 정말 저는 새 길을 기대하고 요즘 살아요. 하나님 나에게 새로운 길을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내가 제가 새 길을 맞이할까요? 제가 과거를 정리해야 그 새로운 길을 제가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야곱의 나이가 대략 얼마일까요? 한 100세 정도로 추정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의 아들을 낳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요. 야곱은 100세의 벧엘에서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여러분 나이가 들었다고 새로운 출발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과거를 묻으면 누구든지 20대든 50대든 80대든 새 출발을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겪고 있는 삶의 위기나 삶의 절망들은 과거를 우리가 정리하지 않아서 과거를 묻지 않아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찬양을 하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과거가 묻혀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과거 묻으면 여러분 새 출발할 수 있어요. 우리 교회도 새 출발 새 출발했죠. 그러나 더 나은 출발이죠. 더 좋은 출발들, 더 위대한 출발을 할 수 있어요. 과거가 정리되면 정리될수록 더 위대한 출발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야곱이 과거를 묻고 다시 시작하자 하나님은 에스소에게서 뺏은 축복을 이제 완전히 야곱의 것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직장을 옮기고 교회를 옮기고 가정을 다시 꾸미고 관계를 다시 맺습니다. 다른 장소를 찾고 다른 사람을 찾고 다른 일을 찾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는 않습니다. 과거를 정리해야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에게 임할 축복을 발목 잡는 여러분의 과거를 정리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너의 과거를 정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 들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곱에게는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려주셨고, 오늘 하나님 여러분과 저에게 야곱에게 들렸던 소리와 같은 종류의 소리를 또 들려주실 거예요. 그럼 우리는 이 소리를 들어야 돼요. 듣고 과거를 정리하고 그래야 새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열매를 맺고 싶죠? 열매도 과거가 정리돼야 맺어질 수 있는 거예요. 멋진 사역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과거가 정리돼야 멋진 사역을 할 수 있어요. 근데 우리는 정리되지 않는 과거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미련스럽게 붙들고 다녀요. 제가 덕지덕지라는 단어를 썼죠. 가끔 유기견들이죠. 유기견들이 구미에서는 잘 못 지만 저희 시골이나 이런 데는 많더라고요. 그래서 들개가 되고 근데 이 개들이 이 털들이 제때 이렇게 비겨지지 않으니까 그 털과 오물질이 붙어서 막 덕지덕지 그래서 실제로 개는 유무한데 이것이 덕지덕 달려서 이렇게 큰 개처럼 보이게 돌아다니는 개들이 있어요. 그 덕지덕지 붙은 그 과거의 흔적들은 이 강아지를 자라지도 못하게 하고요. 오히려 병이 들어서 죽게 하더라고요. 등과 이 강아지를 구조해서 이 모든 걸 잘라내고 잘라내면 이 강아지는 새털이 나고 다시 치하게 되는 겁니다.
새 역사는 새 출발은 과거가 정리된 과정에서 공동체에서 시작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음성을 다 듣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