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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주먹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대결은 영원하다. 인간과 비인간은 애초에 가는 길이 다르다. 둘은 평행선을 그린다. 서로는 만날 수 없다. 라쇼몽의 깨우침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인간을 믿지 못하는 자는 게임에 지고 끝끝내 인간을 믿는 자는 이긴다. 이긴 자는 다음 스테이지로 올라가고 진 자는 게임 밖으로 밀려난다. 설국열차는 멈추지 않는다.
신이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은 다르다. 신을 믿으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게임에 갇혀 있고 게임에는 대본이 있다. 경로의존성이 게임의 대본이다. 윤석열은 창피당한다고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남탓한다. 왜 내란의 위험성보다 개인이 창피당하는 문제가 중요한가? 그게 대본이다. 집단을 격동시켜 흥분한 군중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몰려갈 때 묻어가려는 수작이다.
인생은 신과의 일대일이다. 신을 이기면 자유를 얻고 지면 의무를 진다. 내가 졌고 신이 이겼다. 내가 졌기 때문에 의무를 다하려고 사회로 돌아왔다. 신의 훈수 덕분에 나의 예견이 적중했다. 명박근혜석열중권의 예정된 멸망을 나는 알았다. 게임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신뢰 여부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이겼다. 내가 자유로운 이유다. 타인을 이겨먹으려는 자가 언제나 진다.
불신을 들키기 때문이다. 이긴 자는 핸들을 쥐고 의사결정을 하고 진 자는 의무를 진다. 명박근혜석열중권은 인간 존엄에 대한 불신을 들켰다. 조국당과 합친다니 하며 투쟁이 활발하다. 인간을 믿지 못해서 가두리에 가두려는 것인가? 인간을 못믿기 때문에 합당을 반대하는 것인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자가 끝내 이 게임의 승자가 된다는 규칙은 정해져 있다.
똥파리 총량 보존의 법칙 있다. 그때 그시절 김대중 죽이기, 노무현 죽이기 하던 자들이 이재명 죽이기, 문재인 죽이기로 갈아탄다.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인간실격이다. 인간과 비인간은 가라지와 보리처럼 갈라진다. 왜 이런 짓을 할까? 대본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게 경로의존성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이겨먹으려는 마음 때문이다. 불신을 들켜 핸들 뺏긴다.
구조론은 에너지 전달경로를 규명한다. 에너지는 질, 입자, 힘, 운동, 량 순서로 언밸런스를 밸런스로 바꾼다. 물리적 근거는 관성의 법칙이다. 사회학, 경제학으로는 경로의존성으로 나타난다. 우리네 속담으로는 소도 누울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거나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말이다. 카오스이론으로는 초기조건의 민감성이다. 정치학, 역사학으로는 지정학이다.
섬이냐, 대륙이냐, 반도냐에 따라 꿰는 첫 단추가 달라진다. 대륙거대화냐 섬왜소화냐다. 확대지향과, 축소지향과, 변덕지향이 있다. 심리적 지정학도 있다. 지정학적 경제학도 있다. 네거리는 장사가 잘 된다. 네거리에 사는 사람은 만약 장사가 안되면 자기 탓이다. 한국인들은 원래 남이 하면 나도 한다. 변명 필요없다. 열심히 해야 한다. 장사가 안 되면 내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이라면 어떨까? 열심히 안 한다. 이곳은 원래 장사가 안 되는 곳이라는 확실한 변명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경로의존성에 따라 북인도, 북베트남, 북중국, 북한, 북일본이 가난하고 남인도, 남베트남, 남중국, 남한, 남일본이 잘 산다. 수에즈 운하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항로에서 가까운 남부지역이 부유하다. 남한은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가 더 부유하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심리적 이유로 증폭되기 때문이다. 교통로에 가까운 지역은 네거리와 같다.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한다. 왜?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처음 미국의 신무기를 보고 열등의식을 느꼈다. 총과 대포로 미국을 이길 수 없다. 쇄국할 밖에.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 자기보다 멍청한 조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반걸음 앞서면 된다.
겁쟁이 양들은 늑대를 무서워하지만 자기보다 멍청한 양을 발견하면 태연해진다. 반걸음만 앞서 있으면 다른 양이 대신 먹힌다. 태도가 돌변한다. 대장늑대 앞에서 태연히 방귀를 뀌고 지나간다. 극도로 교만해진다. 유태인이 나치한테 먹혔다고? 다음은 내가 먹힐 차례인가 하고 걱정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가 된다. 빵셔틀 면했다고 좋아한다. 이지메와 왕따의 작동원리다.
일본 남부의 조슈와 사츠마는 가난한 동북지역을 내부 식민지로 삼았다. 중국이라면 내륙의 운남성, 귀주성, 호남성이 만만한 내부 식민지다. 해안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해 있다. 미국인은 중서부가 해먹을 배후지다. 러시아인은 시베리아가 그러하다. 타인의 약점을 보면 갑자기 흥분해서 마구 날뛰는게 인간이다. 똥파리가 문재인의 약점을 보고 흥분한 것과 같다.
우리는 막연히 노력을 강조한다. 전혀 먹히지 않는다. 경로의존성 때문이다. 게으런 자도 상대의 약점을 보면 노력한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 있다. 우연히 권총을 입수하게 되면 갑자기 흥분해서 날뛴다. 의욕이 넘친다. 기세가 오른다. 무언가 물리적 도구를 장악했을 때 인간은 갑자기 흥분한다. 지정학적 잇점이 인간을 흥분하게 하는 도구다. 이겨먹으려는 인간 본성이다.
영국은 귀족에 의해 분열된 프랑스의 약점을 봤다. 백년전쟁. 프랑스는 다민족국가 오스트리아의 약점을 봤다. 나폴레옹 전쟁. 독일은 농노제에 찌든 슬라브족의 약점을 봤다. 양차세계대전. 윤석열 일당은 말만 많은 진보의 약점을 봤다. 12.3 내란. 인간을 이겨먹으려고 하므로 진다.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는 약점을 들키기 때문이다. 사권師拳은 없어도 신권神拳은 있다.
세상을 바로잡는 퍼즐을 완성해야 하는데 인간에게는 언제나 하나가 부족했다. 부족한 하나는 신에게 빌어와야 한다. 약간 모자란듯한 것이 오히려 완전한 이유다. 그것은 신의 주먹 속에 감추어진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자기 손으로 마지막 퍼즐을 채우려는 자는 망하고 하나를 비워놓고 뒤처진 사람이 쫓아올때까지 기다리는 자는 흥한다. 그것이 신이 개입하는 방식이다.
인생의 성공비결 돈, 운, 도덕
우리는 ‘라고한다의 법칙’을 배워서 안다. 실속은 내가 차리고 도덕은 다른 사람에게 권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초딩 때 선생님이 말했다. ‘인생은 요령이야. 얍삽하게 살아야 성공해.’ 저항감을 느꼈다. 요령은 내가 챙기고 제자들에게는 도덕을 가르치는게 교사의 요령이지. 요령없는 선생님이었다.
인생의 3박자는 도덕과, 힘과, 운이다. 도덕은 자기 통제력이다. 도덕이 없는 자는 호르몬에 무너진다. 흥분하면 망한다. 도덕이 없는 자는 인생이 전쟁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언제든 자기 목에 칼이 겨누어질 수 있다.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 약자에게 도덕이라는 갑옷이 없으면 바로 죽는다.
도덕도 일종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적 토대에 기초한 도덕에 힘이 있다. 이미 힘이 있는데 거기에 명성과 명분이 더하면 금상첨화다. 뭣도 없는 주제에 도덕성만 가지고, 명분만 가지고, 명성만 가지고 들이댄다면 비웃음을 살 뿐이다. 물리학이 1단 로켓이고 심리학은 2단 로켓이다.
도덕타령은 대개 언론이 만들어낸 거품이고 착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언론은 도덕장사, 진정성장사, 생태장사, 유기농장사, 성찰장사로 동원력이라는 힘을 과시하는 것이다. 언제든 도덕성에 흠집을 내서 생매장을 칠 수 있다는 위협이다. 도덕 강조는 그게 동원력으로 죽인다는 협박이다.
돈은 힘이다. 실력은 믿을 수 있지만 단기적이다. 뒷심이 붙으려면 도덕과 명분이 받쳐줘야 한다. 국힘당처럼 힘을 과시하는 자는 그게 뒷심이 없다는 증거다. 그들은 초조해 있다. 안달복달하는 마음을 들킨다. 힘을 과시할수록 전력이 노출되고 상대는 대응방법을 찾아내므로 장기전을 못한다.
도덕타령 하는 자는 미디어의 배반에 망한다. 힘에 의지하는 자는 상대의 맞대응에 죽는다. 단 청구서가 날아오는 데는 상당한 시간차가 있으므로 잠시 흥할 뿐이다. 운이 좋은 넘이 흥하고 그 운을 설계하는 자가 오래간다. 도덕은 운을 설계하는데 필요한 떡밥들 중 하나다. 이재명은 운이 좋다.
타이밍 잘 잡았다. 4년 전에 당선되었다면 조중동 등쌀에 고전했을 것이다. 운을 설계하는 방법은 좋은 집단과 좋은 환경에 소속되는 것이다. 많이 돌아다닌 사람이 운이 좋다. 지갑 주우려면 사람을 만나야 하고 돌아다녀야 한다. 밟이 넓어야 한다. 개방적이어야 한다. 도덕장사는 운을 닫는다.
도덕 - 수비수가 갑옷으로 무장하여 리스크를 줄인다.
힘(돈) – 공격수가 단기전에 강하나 공세종말점에서 상대 맞대응에 무너진다.
운(의리) – 외연을 확장하는 팀플레이는 확실히 성공의 확률을 높인다.
성공의 비법은 첫째 도덕이라는 든든한 갑옷을 입고, 둘째 외연을 확장하여 성공의 확률을 높이며, 셋째 찬스가 오면 물리적 수단을 사용하여 단기적인 치고빠지기를 하는 것이다. 힘으로 오래 끌면 좋지 않다. 물리적 힘을 믿는 자는 무리하게 전선을 확대하다가 공세종말점에서 무너지곤 한다.
운은 지정학이다. 지정학은 환경과의 팀플레이다. 사람과 팀플레이를 만드는 것은 의리다. 운은 의리다. 도덕가는 수비만 하다가 득점을 못해서 죽고, 실력자는 찬스에 기세를 올리다가 탄력이 붙으면 방향전환을 못하므로 되치기에 죽고, 팀을 만든 자가 최후에 승리한다. 역사이래 늘 그래왔다.
도덕은 방어술이고 힘은 공격술이다. 전술일 뿐 전략이 아니다. 운은 팀의 전략이다. 운을 설계해야 한다. 사람운과 환경운이 있다. 사람 운은 의리를 따르고 환경 운을 지정학을 따른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운이 좋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 옆에 있으면 흥한다. 좋은 환경을 만나도 흥한다.
자기편을 찌르는 똥파리를 조져야 한다. 그들은 흥분해 있다. 흥분한 자는 흥분상태를 유지하려다가 죽는다. 흥분은 도덕의 반대다. 도덕은 갑옷이다. 함부로 갑옷을 벗으면 작은 화살에 치명상을 입고 죽는다. 그들은 의리의 사슬을 끊어서 우리의 행운을 불운으로 바꾼다. 팀플레이를 방해한다.
언어가 잘못했다
언어가 잘못했다. 인간들이 언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사건은 시간을 중심으로 원인측과 결과측이 있는데 인간의 눈은 공간을 본다. 여기서부터 잘못되었다. 에너지는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있고 의사결정은 능동적으로 움직여 주는 자에게서 일어난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수동적으로 멈추어 있는 공간에만 주목하므로 받는 자를 추적하게 된다. 때리는 사람은 놔두고 맞는 사람만 탓하게 된다.
주는 자의 관점과 받는 자의 관점
구조어와 원자어
연역어와 귀납어
사건어와 사물어
원인어와 결과어
맥락어와 낱말어
능동어와 수동어
에너지어 물질어
깨달음어 관측어
의하여와 위하여
주는 자는 시간을 타고가며 움직여서 주고 받는 자는 공간에 가만이 멈추어 받는다. 우리는 움직이는 자와 멈춘 자 중에 멈춘 자를 본다. 멈춘 사람이 눈에 잘 보이기 때문이다. 쏘는 활은 헷갈리지만 멈추어 있는 과녁은 확실하다. 고수는 궁수의 자세만 보고 점수를 매기지만 봐도 모르는 하수들은 과녁만 본다. 올바른 언어는 주는 자 중심의 연역어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받는 자 중심 귀납어다.
원자어, 사물어, 결과어, 낱말어, 물질어, 관측어, 위하여를 버리고 구조어, 사건어, 원인어, 맥락어, 능동어, 에너지어, 깨달음어, 의하여로 갈아타야 한다. 이런 것은 초등학생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자동차라도 물려있는 핸들이 결정하지 도로와 떨어져 있는 바퀴가 결정하지 않는다. 활과 물리고 궁수의 손과 물려 양쪽에 물려있는 활이 쏘지 화살이 활을 쏘지는 않는다.
인류의 문명은 통째로 결과측에 맞추어져 있다. 우리는 사건의 원인측은 볼줄 모른다. 문제는 관측자의 개입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는 점이다. 거울에 비치는 상은 뒤틀려 있다. 눈동자의 망막에 맺히는 상은 거꾸로 맺힌다. 우리가 똑바로 보는 이유는 뇌가 해석해주기 때문이다. 구조론이라는 필터를 거쳐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되지 않은 모든 관측은 오류다. 외부에서 관측하면 무조건 잘못된다.
버스 밖에서 보는 관점은 틀렸다. 버스가 앞으로 가는지 아니면 가로수가 뒤로 가는지 헷갈린다. 도구는 최소 2점 링크가 아니면 안 된다. 자기 자신까지 세 지점이 맞물려야 한다. 입력과 출력을 더하면 5점링크가 된다. 존재는 모두 5점 링크다. 의자의 다리도 셋이다. 사람과 지구까지 5점링크가 된다. 젖가락 두 짝에다 손가락 둘에 음식까지 5점링크가 완성되어야 음식의 중력을 감당할 수 있다.
사수의 눈은 가늠자와 물리고 표적은 가늠쇠에 물린다. 가늠자, 가늠쇠, 눈동자, 총열, 타겟을 합치면 5점링크가 완성된다. 도구는 망치와, 모루와, 재료와, 손과 힘까지 5점링크를 완성한다. 만약 5점에서 하나가 빠지면 반드시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 있다. 원자어, 귀납어, 사물어, 결과어, 수동어는 5점링크가 아니므로 틀렸다. 그게 잘못되면 우리는 직관적으로 뭐가 하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올바른 관측은 객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관측하는 것이다. 활몸의 오류를 활시위는 알고 있다. 활과 화살 양쪽에 물려 있기 때문이다. 투수의 오류를 타자는 알고 있다. 공의 궤적을 보기 때문이다. 궤적은 양쪽에 물리는데 공만 보면 헛스윙을 하게 된다. 강호동은 이만기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손으로는 샅바를 잡고 발로는 모래판을 디디고 있기 때문이다. 오점링크가 깨지는 순간 패배하게 된다.
씨줄의 오류를 날줄은 안다. 주고받기 에너지 메커니즘에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국힘당이 극우로 가면 오점링크가 깨진다. 국민과의 접점을 잃는다. 국민이 돌아서도 그 정보가 국힘당에 전달되지 않아 망하는건 자동이다. 우리가 외부 관측자의 눈이 아닌 내부 메커니즘의 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외부 관측자는 5점링크가 깨지므로 무조건 틀렸다. 삼각측정, 삼각검증이 아니면 무조건 틀렸다.
삼각측정에 주체와 객체를 더하면 5점링크가 완성된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정지한 것은 그냥 봐도 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은 5점링크가 짐벌을 이루지만 정지한 것은 그냥 봐도 틀리지 않으므로 자신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짐벌이 요잉과, 피칭과, 롤링을 잡으려면 관절 셋에 주체와 객체를 더하여 다섯이라야 한다. 정지한 버스와 달리는 버스의 관측법은 다르다.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내부에 들어가서 관측해야 한다. 구조가 아니면 안 된다. 낱말은 뜻이 없다. 주어와 동사가 연결되어야 의미를 가진다. 맥락어를 획득하고 깨달음어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핸들은 스티어링 기어와 맞물린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인류사 1만년 동안 누구에 의해서도 제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황당하다. 딱 보면 모르겠냐? 본능적으로 느끼잖아. 하나가 빠지면 허전하잖아.
뭔가 불안하잖아. 천칭은 양쪽에 접시가 있다. 양쪽에서 잡아줘야 안심된다. 물고기를 잡아도 양쪽에서 몰이한다. 하나가 빠지면 불안하다. 이건 생각할 것도 없이 몸으로 전달된다. 음식이 담긴 접시를 한손으로 들면 불안하잖아. 모든 것의 시작은 언어다. 언어는 세살 아기도 사용법을 안다. 인류는 여전히 세살 아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언어를 잘못 사용하는 밥통들과는 대화 자체가 불성립이다.
게임의 무오류 법칙
게임은 승부가 있으므로 오류가 없다. 게임은 선수의 실력을 감별하는 측정장치다. 저울은 오류가 없다. 오류는 저울에 올려지는 달란트에 있다. 오류는 시합에 참여하는 선수에 있다. 진리는 저울이다. 진리는 오류를 측정한다. 오류를 감별하는 잣대는 오류가 없다. 오류는 감별대상에 있다.
저울은 됫박 두 개를 연결하고, 됫박은 컴퍼스 두 개를 연결하고, 컴퍼스는 자 두 개를 연결하고, 자는 낱개 두 개를 연결한다. 자는 오류가 없다. 만약 자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자가 아닌 낱개다. 오류가 있으면 차원이 떨어지므로 오류가 없다. 저울이 고장나면 저울이 아닌 됫박이다.
천칭의 저울접시는 그릇으로 사용된다. 고장난 계는 체, 고장난 체는 각, 고장난 각은 선, 고장난 선은 점이다. 점은 이미 고장나 있으므로 고장나지 않는다. 선이 끊어지면 그 잘린 지점이 점이다. 결국 고장난 것은 저울이 아니라 그 저울을 사용하여 계량하는 사람의 분별력이라는 말이다.
단순한 게임과 복잡한 게임의 차이는 있다. 저울이 고장나면 차원이 떨어지고 차원이 내려가면 단순해진다. 진리는 게임의 규칙이다. 마라톤은 단순하고 축구는 복잡하다. 야구는 복잡하다. 어느 쪽이든 밸런스가 탑재된다. 밸런스는 기울이는 만큼 돌아온다. 많이 기울이면 많이 돌아온다.
시계추가 어느 쪽이든 많이 가면 많이 돌아오므로 오류가 없다. 밸런스가 복원되기 때문이다. 오류가 있으면 게임은 불성립이다. 필승법이 있는 게임은 불성립이다. 오목은 먼저 두는 사람이 무조건 이기므로 3.3에 두지 못한다든가 하는 추가 규칙이 생긴다. 밸런스가 무너지면 자가 아니다.
진리는 참과 거짓이 없다. 게임은 참과 거짓이 없다. 단순한 게임과 복잡한 게임이 있을 뿐이다. 거짓말 시합은 무조건 나중에 말하는 사람이 이긴다. 누가 더 큰 거짓말을 했을까? 상대방이 한 거짓말 받고 플러스 1 하면 된다. 구조론은 게임의 규칙이므로 오류가 없는 대신 복잡성은 있다.
원자론은 단순하고 구조론은 복잡하다. 뉴턴의 거시세계는 단순하고 아인슈타인의 미시세계는 복잡하다. 양자역학은 더 복잡하다. 구조론은 더 복잡한 공간의 출렁임 세계를 다룬다. 옳고 그름은 해석의 영역이다. 구조론은 객체를 해석하지 않으므로 오류가 없다. 진리는 원래 오류가 없다.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기 전까지는 오류가 없다. 오류는 게임이 시작되면서 발생한다. 도량형은 다섯 가지다, 개도규량형이다. 수량, 길이度, 너비規, 부피量, 무게 衡를 잰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저울은 멈춘 것을 재는 것이고 움직이는 변화를 재야 한다. 압력계가 사용된다.
기압이나 수압은 변화를 측정한다. 온도계는 온도의 변화를 잰다. 가속도를 재는 센서도 있다. 공간적 압력의 변화를 압력계가 잰다면 시간적 압력의 변화는 어떻게 잴까? 세차운동이다. 세차운동이 정원이 아니고 타원이라면 어떻게 재는가? 핼리혜성이 태양에 근접했다가 다시 멀어진다.
구조론이 더 복잡한 게임을 다루지만 균형으로 복원되는건 같다. 진리에 오류가 없는 이유는 게임은 밸런스가 복원되기 때문이다. 만약 오류가 있으면 차원이 떨어지므로 오류가 방지된다. 고장난 저울은 깨지고 휘어진 자는 버려진다. 고장난 자동차는 수레로 사용된다. 무한한 복잡은 없다.
저울
압력계
가속도 센서
세차운동 센서
타원세차운동 센서
우리가 보는 것은 복잡한 것이 단순화되는 마이너스 과정이다. 우리가 뭔가를 봤다면 이미 깨졌으므로 단순할 수밖에 없다. 씨름선수가 겨루고 있으면 복잡하지만 승부가 나면 단순하다. 활을 쏘는 과정은 복잡해도 과녁에 박힌 화살은 단순하다. 모든 변화는 차원이 하락하여 단순하다.
진리는 게임이고, 게임은 밸런스의 복원이고, 밸런스가 복원되면 눈금이 일치하고, 눈금이 일치하면 하나가 되고, 하나는 단순하므로 오류가 없다. 끈이론에 여분차원이니 26차원이니 하는데 내 생각에 타원궤도 세차운동을 말하려고 한게 아닐까 싶다. 우주에 그보다 복잡한 구조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