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Tube "화천농부신학자"
한번은 연변제1중학교의 교장 선생을 만나서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나는 수돗가에서 연신 수돗물을 마시는 한 학생을 마주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다음 일정에 여유가 있어서 그와 짧게 몇 마디를 나눴다.
“학생, 점심시간인데 왜 수도에서 물을 들이켜고 있니?”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점심을 싸 올 상황이 아니라서요….”
교장 선생은 그 학생의 상황을 내게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는 전교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인데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그 학생의 얼굴이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렸다.
‘수돗물로 점심 대신 배를 채우는 고등학생이라.’
유학을 준비하던 나는 몇 개월 후에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정작 미국 유학을 위한 재정 계획도 분명하지 않았다. 유학을 가면 또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시겠지 하는 천진한 생각만 갖고 있었다. 그래도 신학을 하는 이상 내가 좀 더 그리스도인답게 살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현실을 내가 못 본 체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본 대로 배운 대로 산다. 그래서 앞 사람의 삶의 모범이 중요하고, 개개인의 경험과 교육이 중요하다. 두레연구원에서 배운 사람의 중요성은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으로 고생한 내 삶의 기억과 마주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그래. 내가 방룡이를 비롯해 이런 아이들을 키울 장학재단을 만들어봐야겠어.’
p.45~46
약간의 부담감과 즐거움을 갖고 같이 지낸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우리 두 사람은 이제 제법 친해졌고 최종천 목사는 내 이름을 부를 정도로 스스럼이 없어졌다. 나는 그때 내가 생각하던 소망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교회가 크고 힘이 있을 때 보수 교회가 한국 교회의 미래를 이끌 사람을 키우는 일을 한번 해 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사람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 역시 한국 교회의 희망은 사람에 있다고 강하게 믿었다. 하지만 교회가 크건 작건 돈이 남아도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사실 한 교회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교회는 교회가 해야 할 기본적인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최종천 목사는 그 자리에서 답을 하지 않았다. 나도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내 맘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프린스턴으로 내려온 지 몇 달이 지난 1999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사이 별다른 연락이 없던 최종천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 교회가 비도 새고 해서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할 시점인데 대충 계산해 보니 200억쯤 들것 같구나. 그런데 지금 200억을 들여 건축하는 것보다는 사람에 투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캠브리지에서 헤어진 후 한참이나 연락이 없더니 대뜸 인재 양성에 대한 의지를 그렇게 내게 내비쳤다. 여전히 사람에 미쳐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숨이 멎는 듯했다. 더군다나 보수적인 교회는 자기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이런 일을 시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종교 일반의 교세나 기독교 내부의 교단별 성도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음세대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덜했다. 더군다나 교회의 미래를 건축과 동일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는 상황이었다.
분당중앙교회 인재양성원의 해외신학인재양성프로그램은 1999년 늦가을 내가 프린스턴신학대학 박사과정 첫 학기 때 그렇게 시작되었다.
p.55~57
참 분주하게 지내던 2016년 초여름이었다. 나는 정운찬 총장을 모시고 울산시가 후원하는 청소년 토크쇼를 다녀왔다. 500여 명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운찬 총장의 강연과 토론 일정을 마치고 울산역에서 서울행 KTX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 시간이 한참이나 남아서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회장님, 우리도 스코필드 할아버지처럼 중고등학생들에게 장학사업을 통해 꿈과 희망을 심어주면 어떨까요?”
스코필드 내한 100주년을 행사로만 채우는 것은 어딘지 아쉬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내가 늘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을 키우는 일에 대해 말씀드렸다. 그때가 마침 정운찬 총장이 나이 69에 이르렀을 때이다. 스코필드 박사가 세계적인 수의학자로 입지를 굳히고 은퇴 후에 한국에 들어와 한국에서 노년을 보내겠다고 하면서 10대의 젊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인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의 나이 69세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교육자로 살아오신 정운찬 총장이 스코필드 할아버지처럼 중고등학생들을 키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코필드 박사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 특히 청소년들에게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정운찬 총장이야 나보다 일선에서 훨씬 더 큰일을 해 보셨기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파악하셨다.
“좋은 생각입니다. 한번 기획해 보세요.”
스코필드장학문화사업은 이렇게 시작해서 2023년까지 만 7년이 지속되었다.
p.80~81
신앙의 교집합이란 개별 교단이 가르치거나 강조하는 차이를 뛰어넘어 세계 기독교인 전체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신앙고백과 믿음을 뜻한다. 주일마다 우리가 같이 읽고 고백하는 사도신경과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대표적인 예다. 이 안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고백하는 핵심적인 신앙 규칙이 담겨 있다.
이런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집합은 가능한 최소한으로 삼자. 작은 것, 작은 불씨가 힘이 세고 변화에 더 강한 원동력을 제공한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수록 세상의 온갖 번잡함과 가식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는 한국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갈기갈기 분화된 개신교의 교단 상황에서 기독교인 사이에 생산적 연대감을 확대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기독교인과 교회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오늘날에는 더욱더 교집합에 충실하면서 합집합의 영역을 열어놓는 ‘종교적 겸손’이 필요하다.
작지만 강한 기독교 신앙의 교집합을 지키면서 우리는 합집합의 영역을 하나둘씩 넓혀가야 한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영역에서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온 세계를 조금씩 더 넓게 알아가는 것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더 넓고 높고 깊게 알아가는 복된 과정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인간은 세계의 정복자나 지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보다 풍성하게 찾아가는 ‘겸손한 나그네’의 자세가 필요하다.
p.97~99
사람을 키우는 사람의 관점과 마음 씀씀이에 따라 거기에 걸맞는 다음세대 인물이 나온다. 마치 튼튼한 묘목이나 과실수가 더 좋은 농작물을 만드는 것과 같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을 듣고 자라듯이, 사람은 리더의 사람됨을 보고 자란다. 좋은 건물이나 넉넉한 재정도 유용하지만 그 자체가 사람을 키우지는 않는다. 제도가 사람을 키우는 것도 아니다. 제도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제도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은 사람이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리더가 좋은 다음세대를 키운다.
p.192
때론 어른세대의 과도한 열정과 확신이 다음세대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 우리 눈에 보인다고 해서 우리 시대에 모든 것을 행하거나 누리려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다. 열정과 욕망은 동전의 양면이다. 라틴어 데시데리움(desiderium)의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열망, 열정, 욕망, 탐욕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는 이유는 다음세대가 먹고살 그들의 재산을 확보해주는 것과 같다. 때로 어느 순간 나의 간절한 욕망을 멈출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순간에 세속적 욕망이 거룩한 열망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는 다음세대, 우리 자녀들이 자신만의 고백록을 써내려가기를 소망한다. 어른세대는 자신들의 삶이 다음세대의 본보기가 되기를 소망하지만, 다음세대는 자신들의 시각에서 어른세대를 분석하고 평가할 것이다. 매 세대는 자신들의 삶과 신앙의 고백록을 남긴다. 다음세대가 어른세대를 뛰어넘는 삶의 오디세이와 신앙 고백록을 남길 것이다. 우리가 미래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 하더라도 멀리서 보고 기대하는 자체로 가슴이 벌렁이지 않는가.
p.204~205
언젠가 한 번은 10월에 캐나다 밴쿠버 한인장로교회 박철순 목사의 초대로 사경회를 인도한 적이 있다. 사경회 기간 우리는 노스밴쿠버에 있는 연어 부화장인 The Capliano Salmon Hatchery에 들렀다. 부화장 한쪽에는 이곳에서 부화하여 태평양을 따라 멀리 알래스카까지 돌고 온 어미 연어들이 되돌아오는 마지막 과정을 관람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그런데 연어를 가까이서 보려고 다가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어미 연어들의 몸이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온몸에 상처가 나기도 했고 지느러미가 상하기도 했다. 이미 숨을 쉬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연어도 있었다. 그런데 어미 연어들은 그런 몸으로 거칠게 내려오는 물길을 거슬러 마지막 힘을 모아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렇게 올라간다고 새롭거나 아름다운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곳에서 다음세대의 주역이 될 알이 태어나고, 자신은 죽게 되는 것이다.
‘아, 이것이 생즉사(生卽死)요 사즉생(死卽生)의 원리로구나.”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니라. 이것이 ‘순교하는 연어’의 자세였다. 다음세대를 진정으로 키우기 원한다면, 내 생명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각오로 살아야 한다. 마치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 같이, 우리가 작은 예수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리라.
p.2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