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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아발다라보경
(楞伽阿跋多羅寶經)
송(宋)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최윤옥 번역
능가아발다라보경 제4권-2
4.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품[一切佛語心品]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외도들이 다 무상(無常)이라는 망상을 일으키는데, 세존께서도 역시 ‘모든 행(行)은 무상하니, 이것이 생멸법(生滅法)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은 무엇입니까? 그릇된 것입니까, 바른 것입니까? 몇 종류의 무상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외도에는 일곱 종류의 무상이 있으니, 이는 내가 설한 법이 아니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그들은‘만들고 나서 버리니, 이것을 무상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또‘형처(形處)가 무너지니 이를 무상이라고 한다’고 말하고,‘바로 물질[色]이 곧 무상이다’고 말한다.‘물질이 전변(轉變)하는 중간을 무상이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틈이 없이 스스로 흩어지고 무너지는 것이 마치 우유와 낙(酪) 등과 같아서 전변하는 중간은 볼 수 없으나, 무상하여 모든 성품을 무너뜨리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또‘성품이 무상하다’고 말하고,‘성품[性]과 성품 없음[無性]이 무상하다’고 말하며,‘모든 법은 생기지 않으므로 무상하여 모든 법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대혜야, ‘성품과 성품 없음이 무상하다’는 것은 4대(大)와 4대로 만들어진 것들은 자상(自相)이 무너지고, 4대의 자성(自性)은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생기지 않으므로 무상하다’는 것은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니다. 모든 법은 있든 없든 생기지 않으므로 미진(微塵)까지 쪼개어도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생기지 않는다는 이치이며 생긴다는 것이 아니다. 이를‘생기지 않으므로 무상한 모습’이라고 한다. 만일 이를 깨닫지 못하면 모든 외도에 떨어져 무상하다는 뜻을 일으킨다.
대혜야,‘성품이 무상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망상이니, 영원한 성품도 아니고 무상한 성품도 아니다. 왜냐하면 무상(無常)의 자성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것이 바로 모든 성품과 성품 없음이 무상한 일[無常事]이라는 것이다. 무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법의 성품을 성품이 없게 하는 것은 없다. 마치 몽둥이나 기와나 돌로 모든 물건을 깨뜨릴지라도 현전(現前)에서 각각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성품의 무상한 일’이다. 짓는 자와 지어진 것에 차별이 있는 것이 무상(無常)이고 이것이 사(事)라는 게 아니다.‘짓는 자와 지어진 것에 다름이 없다’는 것은 모든 성품이 영원하여 인성(因性)이 없다는 것이다.
대혜야, 모든 성품과 성품 없음에는 인(因)이 있으나, 이는 어리석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슷하지 않은 것들이 인이 되어서 사(事)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만일 생긴다면 모든 성품은 다 무상할 것이다. 비슷하지 않은 것과 사(事)가 짓는 자 와 지어진 것이 되지만 따로 다른 것이 없는데 모두들 다른 것이 있다고 본다. 만일 성품이 무상하다면 짓는 인[作因]의 성품과 상(相)에 떨어진다. 만일 떨어진다면 모든 성품이 구경(究竟)이 아닐 것이며, 모든 성품이 짓는 인[作因]의 상(相)에 떨어진다면 무상 자체가 무상해야만 할 것이니, 무상도 무상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품이 무상하지 않다면 반드시 이것은 상(常)이어야 한다. 만일 무상이 모든 성에 들어간다면 반드시 3세에 떨어질 것이다. 저 과거의 물질이 무너졌으므로 미래에 생기지 않을 것이며, 물질이 생기지 않으므로 현재의 물질도 무너지는 모습과 함께할 것이다.
물질이란 4대(大)가 모여진 차별이나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의 자성(自性)은 무너지지 않으니, 다르거나 다르지 않은 것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외도의 4대는 무너지지 않으므로, 모든 3유(有)의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이 가는 곳마다 생기는 것과 없어지는 것이 있음을 안다.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을 벗어나면, 모든 외도가 어느 것을 무상(無常)하다고 생각하겠느냐? 4대는 생겨나지 않으니 자성의 모습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만든 자[始造]를 벗어나면, 무상이란 4대 안에 다시 다른 4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각각 다른 모습의 제 모습이니, 차별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저것이 차별이 없으므로 이것들이 다시 만들어지지 않으니, 두 가지 방편을 짓지 않는다. 이것이 무상인 줄을 알아야 한다. 저‘형처(形處)가 무너져 무상하다’고 하는 것은,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이 무너지지 않아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혜야,‘마지막까지’라 함은 쪼개어 미진이 되기까지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이 무너지는 것을 관찰하면 형처(形處)가 다르게 보이거나, 길고 짧은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니, 이는 4대가 아니다. 4대는 무너지지 않는다. 형처가 무너지는 것이 나타나면 수론(數論)에 치우치게 된다.‘물질이 무상하다’는 것은 물질이 곧 무상한 것을 말한다. 저것은 형처(形處)가 무상한 것이지 4대가 무상한 것이 아니다. 만약 4대가 무상하다고 하면 세속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의 말로는 ‘성품이 아니다[非性]’라고 하는 것이니, 이는 세론(世論)에 떨어진다. 모든 성품을 보면 단지 말만 있을 뿐인데, 자기 모습이 전변(轉變)하여 무상한 것을 생기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는 물질이 성품과 다른 것으로 나타나므로 4대가 아니라고 한다.
마치 금으로 장엄구(莊嚴具)를 만들어 모습이 변해 나타나면, 이는 금의 성품이 파괴된 것이 아니고 단지 장엄구로 모양만 변한 것과 같다. 처소(處所)가 파괴되는 것도 이와 같다.나머지 성품이 전변되는 것 등도 역시 이와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온갖 외도의 무상하다는 견해는 망상이다, 불이 4대를 태울 때 자상(自相)은 타지 않는다. 각각의 자상이 서로 무너진다면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은 반드시 끊어져야 할 것이다.
대혜야, 내가 설한 법은 일어나되[起],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니다. 왜냐하면 바깥 경계의 성품은 결정(決定)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3유(有)와 미세한 마음만 말할 뿐, 갖가지 모습의 생김과 없어짐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4대가 화합하는데 차별이 있으니, 4대와 4대로 만들어진 물질이기 때문이다. 망상에 두 가지 일이 있으니,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두 가지가 망상인 줄을 알고, 바깥 경계의 성품이 있다거나 성품이 없다는 두 가지 견해를 벗어나 자심 현량의 망상인 줄 깨닫는 자는, 생각해서 행(行)을 지어 행을 짓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성품이 있다거나 성품이 없다는 망상을 벗어난다. 세간과 출세간에서 가장 높은 모든 법이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니어서 자심의 현량인 줄 깨닫지 못하고, 두 극단에 떨어져 악한 견해가 끊임없이 계속되는데도 모든 외도들은 자기의 망상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범부가 근본이 없어 세간과 출세간의 가장 높은 법이라고 하며 말에 따라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니,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처음 만든 자를 멀리 벗어나고
또한 형처(形處)가 다르다며
성품과 물질이 무상하다고 하니
이는 외도의 어리석은 망상이다.
모든 성품이란 무너짐이 없는 것
크고 큰 자성(自性)이 머무르는데
외도는 무상하다고 생각하며
온갖 견해에 빠진다.
저 모든 외도들
없다고 하고 생긴다거나 없어진다고 하는데
크고 큰 성품은 스스로 영원하니
무엇을 무상하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것은 오직 심량(心量)이니
두 가지 마음이 유전(流轉)하며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것일 뿐
나[我]도 나의 것[我所]도 없다.
범천(梵天)이 뿌리가 되어
가지가 되어 두루 덮듯이
내가 말한 것도 이와 같아
오직 저 심량(心量)일 뿐이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모든 보살과 성문과 연각이 멸정수(滅正受)에 이르고 상속하는 차례를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멸정수의 상속하는 차례를 잘 알면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들은 끝내 멸정수의 즐거움이라는 문(門)을 망령되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모든 성문이나 연각이나 외도의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6지(地)에서 보살마하살과 성문과 연각이 멸정수에 들기 시작한다. 제7지의 보살마하살은 생각마다 정수(正受)에 들어서 모든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을 벗어나는 정수에 드니, 성문이나 연각과는 다르다. 모든 성문과 연각은 있다는 생각에 치우쳐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행하며 멸정수에 든다. 그러므로 7지는 염정수(念正受)가 아니니, 모든 법의 차별 없는 모습을 얻는 것은 그 분(分)이 아니어서 모든 상성(相性)을 얻고, 일체법선불선성상정수(一切法善不善性相正受)를 깨달을 뿐이다. 그러므로 7지는 선념정수(善念正受)가 없다.
대혜야, 8지 보살과 성문과 연각은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의 망상된 모습이 없어진다. 초지(初地)에서 7지에 이르는 보살마하살은 삼계가 심ㆍ의ㆍ의식의 양(量)임을 관찰하고 나와 나의 것을 벗어나지만, 자기 망상을 닦아 바깥 경계의 성품이라는 온갖 모습에 떨어진다. 어리석은 범부는 두 가지 자기 마음 즉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있으므로, 무지(無知)로 향하면서 끝없는 옛날부터 허물과 악과 거짓된 습기에 의해 훈습된 것인 줄 깨닫지 못 한다.
대혜야, 8지 보살마하살은 성문과 연각의 열반이니, 보살이란 삼매각(三昧覺)의 보호를 받으므로, 삼매문(三昧門)을 즐기고 열반에는 들지 않는다. 만일 보호받지 않는다면, 여래지(如來地)를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중생을 위한 모든 일을 버릴 것이므로 부처의 종자가 끊어지리라. 모든 부처님 세존이 여래의 불가사의하고 한량없는 공덕을 보여 주는데도 성문과 연각은 삼매문에서 얻은 즐거움에 이끌려 열반이라는 생각을 한다.
대혜야, 내가 나눈 7지는 심ㆍ의ㆍ의식의 모습을 잘 닦고, 나와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들,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생멸하는 것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잘 닦아 4무애(無碍)의 확고한 힘을 가진 삼매문에 능통해 지위가 차례로 상속하고 도품법(道品法)에 들어가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자상과 공상을 깨닫지 못하거나 7지를 잘 알지 못하여 외도의 그릇된 길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위를 차례로 세운 것이다.
대혜야, 저것이 실은 생멸이 없는 것이니,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일 뿐이다. 차례로 상속하는 지위와 삼계의 온갖 행을 어리석은 범부는 깨달을 수 없다.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은, 나와 모든 부처가 말한 지위의 차례와 상속과 그리고 삼계의 갖가지 행을 말한다.
또 대혜야, 성문이나 연각이나 제8 보살지(菩薩地)에서는 멸삼매(滅三昧)의 즐거움이라는 술에 취해 자심의 현량임을 능통하지 못하고, 자상과 공상의 습기에 가리며, 인(人)과 법(法)이 무아(無我)여서 모두 법에 포섭된다는 견해에 떨어져 망상으로 열반이라는 생각을 하니, 적멸한 지혜의 깨달음이 아니다.
대혜야, 보살이란 멸삼매문(滅三昧門)의 즐거움을 보고도 본원(本願)으로 불쌍히 여겨 커다란 자비심을 성취해 10무진구(無盡句)를 분별해 알며, 망 상으로 열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미 열반이라는 망상이 생기지 않는 까닭에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망상을 벗어난다. 자심의 현량을 명료하게 깨달아 모든 법에 대해 망상이 생기지 않으므로 심ㆍ의ㆍ의식으로 바깥 경계의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에 계착하는 망상에 떨어지지 않는다.
불법(佛法)의 인(因)이 아니면 지혜가 생기지 않으니, 지혜를 따라야 여래의 자각지(自覺地)에 태어날 수 있다. 마치 사람이 꿈에서 방편(方便)으로 물을 건너다가 미처 건너기 전에 깨어나서 ‘바른 방편인가, 그릇된 방편인가’를 생각하지만 바른 것도 아니고 그릇된 것도 아닌 것과 같다. 그 밖에 끝없는 옛날부터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의 인(因)이 되는 것은 생각이므로, 온갖 습기와 온갖 형처가 생각이 있고 없는 데 따라, 심ㆍ의ㆍ의식의 꿈에 나타난다.
대혜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제8 보살지에서 망상이 생기는 것을 본다. 초지(初地)에서 점점 나아가 제7지(地)에 이를 때까지는 ‘모든 법은 환(幻)과 같다’는 등의 방편을 알아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마음의 망상의 행을 건넌다. 그러고 나서 불법(佛法)의 방편을 써서 얻지 못한 사람을 얻게 한다.
대혜야, 이것이 곧 보살의 열반이니, 방편이라는 생각을 품지 않고 심ㆍ의ㆍ의식을 벗어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 대혜야, 제일의(第一義)에는 상속하는 차례가 없으니, 모든 망상이 없는 것을 적멸한 법이라고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심량(心量)이 없는 것
여기에 머물면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
3세의 모든 부처님이 말한다.
심량의 지위는 제7지이고
소유(所有)가 없는 것은 제8지이니
두 지위를 주(住)라 하고
불지(佛地)를 최승(最勝)이라 한다.
스스로 깨닫는 지혜와 깨끗함
이것이 곧 나의 자리이니
자재(自在)하고 가장 훌륭한 곳
청정하고 묘하게 장엄하였다.
왕성한 불꽃처럼 밝게 비치니
광명이 모든 곳에 두루 이르며
타오르는 불꽃 눈을 상하게 하지 않고
두루 돌며 3유(有)를 교화하네.
현재의 3유를 교화시키고
혹 과거에도 교화해
거기에서 승(乘)을 연설하니
모두 이 여래지(如來地)이다.
10지가 곧 초지(初地)가 되고
초지가 곧 8지가 되며
제9지가 곧 7지가 되고
7지 역시 다시 8지가 된다.
제2지가 제3지가 되고
제4지가 제5지가 되며
제3지가 제6지가 되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무슨 차례 있겠는가.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영원합니까[常], 무상합니까[無常]?”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니니, 둘 다 허물이 있다. 상(常)에는 짓는 자[作者]가 있다는 허물이 있다. 상이란 모든 외도가 ‘짓는 자[作者]는 만들어진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상(常)이기도 하고 비상(非常)이기도 하니, 짓는 자는 항상 있다는 허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여래가 무상하다면 짓는 자가 무상하다는 허물이 있다. 음(陰)은 형상과 형상이 나타내는 것의 본성이 없으므로 음이 무너지면 끝나야 할 것이나, 여래는 끝나지 않는다.
대혜야, 모든 지어진 것[所作]은 무상하여 병(甁)이나 옷[衣] 등과 같다고 하면, 모두 다 영원하다[常]는 허물은 없다. 그러나 일체지(一切智)의 여러 가지 방편에는 의(義)가 없다는 허물이 있으니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지어진 것[所作]은 반드시 이 여래이어야 할 것이니 차별된 인성(因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여래는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또 대혜야, 여래는 허공과 같은 상이 아니다. 허공과 같은 상이라면, 자각성지(自覺聖智)의 여러 가닥이 의(義)가 없다는 허물이 있다. 대혜야, 이는 마치 허공이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것과 같아, 상과 무상,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을 벗어나니, 상이라거나 무상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래는 상이 아니다.
또 대혜야, 만약 여래가 생김이 없어서 상이라면, 이는 마치 토끼나 말 등의 뿔과 같을 것이니, 생김이 없어서 상이기 때문에 방편에 의(義)가 없는 허물이 된다. 생김이 없으므로 상이라는 허물이 있기 때문에, 여래는 상이 아니다. 또 대혜야, 다시 다른 일이 있어 여래가 상인 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얻은 지혜가 영원한 까닭에 여래는 상이다. 대혜야,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건 세상에 출현하지 않건 간에 법은 끝내 일정하게 머물며, 성문이나 연각이나 모든 부처님 여래는 무간(無間)에 머물지 허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을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대혜야, 여래가 얻은 지혜는 곧 반야(般若)로 훈습된 것이다.
대혜야, 여래는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이나 저 모든 음(陰)ㆍ계(界)ㆍ입처(入處)에 의해 훈습된 것이 아니다. 대혜야, 모든 3유는 다 진실하지 않은 망상(妄想)으로 생긴 것이나, 여래는 진실하지 않고 헛된 망상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대혜야, 두 가지 법 때문에 상과 무상이 있으니, 불이(不二)가 아니다. 불이란 적정(寂靜)이니, 모든 법의 두 가지 생기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대혜야, 말로써 분별이 생기므로 곧 상과 무상이라는 허물이 있으니, 분별각(分別覺)이 없어지면 어리석은 사람의 상이라거나 무상이라는 견해를 벗어난다. 적정한 지혜[慧]는 영원히 상과 무상을 벗어나니 상이나 무상에 훈습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중구무의(衆具無義)란
생(生)함이 상(常)이건 무상(無常)이건 허물이라는 말이니
분별각(分別覺)이 없다면
영원히 상과 무상을 벗어나리라.
그 세운 종(宗)에 따라
여러 많은 뜻이 있게 되니
자심의 현량을 평등하게 보라.
말로는 얻을 수 없느니라.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다시 저희를 위해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생김과 없어짐을 말씀해 주십시오. 내[我]가 없다면 누가 생기고, 누가 없어집니까? 어리석은 범부는 생기고 없어지는 데 의지하므로 고통이 다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열반을 알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자세히 들어라. 너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장(藏)이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이니, 능히 두루 모든 중생취(衆生趣)를 만들어 낸다. 이는 마치 광대가 변화로 모든 중생취를 나타내는 것과 같아 나와 나의 것을 벗어나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세 가지 연(緣)이 화합한다는 방편이 생겼는데, 외도가 깨닫지 못하고 짓는 자[作者]라고 계착한다.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악습(惡習)에 훈습된 것을 식장(識藏)이라 하니, 무명주지(無明住地)를 일으키고 7식(識)과 함께하며 마 치 바다와 물결같이 몸이 항상 생겨 끊이지 않는다.
무상의 허물을 벗어나 있고 나[我]라는 주장을 벗어나 있어 자성(自性)이 무구(無垢)하여 끝내 청정(淸淨)하다. 그 밖의 다른 식(識)들은 생김이 있고 없어짐이 있으니, 의(意)와 의식(意識) 등 생각마다 일곱 가지가 있다.
진실하지 않은 망상으로 인하여 모든 경계의 온갖 형처(形處)를 취하여 이름이나 모습에 계착하면,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물질의 모습인 줄 깨닫지 못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며, 해탈에 이르지 못하고, 이름과 모습의 모든 얽매임에서 삶을 탐하고 탐욕을 내게 된다. 인(因)이건 반연(攀緣)이건 저 모든 느끼는 감관[受根]이 없어지면 차례로 생기지 않으며, 자기 마음의 망상을 없애면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지 못하여 멸수상정수(滅受想正受)와 제4선(禪)에 들어가며, 진제해탈(眞諦解脫)을 잘 이룬다. 수행하는 사람이 해탈이라는 생각을 일으켜 벗어나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不離不轉]을 여래장식장(如來藏識藏)이라고 한다.
7식은 유전하되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이 되어 반연한 모든 식에 생기기 때문이니, 성문이나 연각의 수행하는 경계가 아니다.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하고 자상과 공상을 받아들이면 음(陰)ㆍ계(界)ㆍ입(入)이 생긴다. 여래장(如來藏)을 보면 다섯 가지 법의 자성(自性)과 인(人)과 법(法)이 무아여서 없어지며, 지위가 차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므로 나머지 외도의 견해로는 경동(傾動)시킬 수 없다. 이를 보살이 부동지(不動地)에 머무는 것이라고 하니, 열 가지 삼매도문(三昧道門)의 즐거움을 얻고 삼매각(三昧覺)에 의해 유지된다. 부사의한 불법의 원(願)을 관찰하고는 삼매문(三昧門)의 즐거움과 실제(實際)를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깨닫는 성인(聖人)의 무리로 향한다. 모든 성문이나 연각, 외도가 수행하는 모든 도(道)와는 같지 않으니, 10현성(賢聖)의 종성(種性)의 도와 뜻대로 나타나는 몸과 지혜를 얻어 삼매행(三昧行)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대혜야, 보살마하살이 훌륭하게 전진하기를 구한다면 장식(藏識)인 여래장을 깨끗이 해야 한다. 대혜야, 만일 식장(識藏)이 없다면 여래장은 생김과 없어짐이 없을 것이다. 대혜야, 그러나 범부와 성인은 모두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이 있으니, 수행자는 스스로 깨달은 성인의 무리 속으로 나아가, 현재의 법에 즐거이 머물며[現法樂住] 방편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대혜야, 이 여래장식장(如來藏識藏)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이 심상(心想)으로 보는 것이다. 비록 자성이 청정하나 객진(客塵)에 덮인 까닭에 오히려 청정하지 못한 것을 보니, 모든 여래의 경지는 아니다.
대혜야, 여래에겐 현전(現前)의 경계가 마치 손바닥 안에 있는 아마륵(阿摩勒) 열매를 보는 것과 같다. 대혜야, 나는 이 뜻을 신통력으로 건립하여, 승만부인(勝鬘夫人)과 예리한 지혜가 가득한 보살 등에게 식장인 여래장이 7식과 함께 생긴다는 사실을 널리 펴서 연설하게 하였다. 성문이 계착하여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보는 까닭에 승만부인이 부처의 위신력(威神力)을 받아 여래의 경계를 설명한 것이니, 이는 성문이나 연각이나 외도의 경계가 아니다. 여래장식장은 오직 부처와 그 밖의 예리한 지혜로 이치에 의지하는[依義] 보살 지혜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은 여래장식장을 열심히 배우고 닦아야 할 것이니, 듣고 깨닫는 것만으로 만족하다는 생각을 내지 말라.”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깊고 깊은 여래장(如來藏)
7식(識)과 함께하여
두 가지가 생(生)을 받아들이니
지혜로운 이는 멀리 벗어난다.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마음이 나타나니
끝없는 옛날부터 훈습되어 온 것
여실(如實)하게 관찰하면
모든 사(事)란, 실은 사가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 달을 가리켜 보이면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니
명자(名字)에 계착하는 자는
나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마음은 광대 같고
뜻[意]은 광대의 조수[和伎者] 같으며
5식(識)으로 반려(伴侶)를 삼고
망상으로 구경꾼을 삼는다.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다섯 가지 법의 자성식(自性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의 구경(究竟)의 차별된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은 모든 지위를 차례로 상속하면서 이 법을 분별하여 모든 불법(佛法)에 들어갈 것이며, 모든 불법에 들어가서는 여래께서 스스로 깨달은 지위에 이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의 자성식과 두 가지 무아의 차별된 갈래의 모습이란, 이름[名]과 모습[相]과 망상(妄想)과 바른 지혜[正智]와 여여(如如)를 말한다. 만일 수행자가 수행하여 여래의 자각성취(自覺聖趣)에 들어간다면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을 벗어나고 현재법의 즐거움을 누리는 정수[現法樂正受]에 머물 것이다. 대혜야, 저 다섯 가지 법의 자성식과 두 가지 무아(無我)가 자기 마음이 나타낸 바깥 경계의 성품인 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범부의 망상 때문이니, 모든 성현(聖賢)의 경지는 아니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어리석은 범부에게는 망상이 생기고, 모든 성현에게는 생기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범부는 세속법[俗數]의 이름과 모습에 계착하여 마음이 따라 흘러서 흩어지며, 흩어지고 난 후 온갖 모습과 형상을 보므로 나와 나의 것이라는 견해에 치우치며, 묘한 물질[妙色]을 희망하고 계착한다. 계착하고 나면 무지(無知)가 덮고 가려 염착(染着)을 일으키며, 염착하고 나면 탐욕과 성냄으로 지은 업이 쌓이고, 쌓이고 나면 망상에 스스로 얽히니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는 것과 같다. 생사의 바다와 모든 취(趣)의 광야에 떨어지는 것이 마
치 우물의 도르래와 같건만, 어리석은 까닭에 환(幻)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이 자성(自性)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벗어난 줄을 알지 못하고, 온갖 진실하지 못한 망상을 일으킨다. 형상과 형상이 나타내는 것,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을 벗어나건만 자심(自心)의 망상으로 일으키고, 자재천(自在天)이나 시절(時節)이나 미진(微塵)이나 승묘(勝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데 어리석은 범부는 이름과 모습을 따라 유전(流轉)한다.
대혜야, 그 모습[相]이란 다음과 같다. 안식(眼識)이 비추는 것을 빛깔[色]이라 하고, 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으로 비추는 것을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ㆍ법(法)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를 모습[相]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망상이란 여러 가지 이름을 시설하여 모든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코끼리나 말이나 수레나 걸어 다니는 남자나 여자 등의 이름[名]과 다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바른 지혜[正智]란 저 이름이나 모습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지나가는 손님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모든 식은 생기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고 항상 있지도 않으니, 모든 외도나 성문이나 연각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바른 지혜가 있음으로 이름이나 모습을 세우지 않으나, 이름과 모습을 세우지 않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 소견, 즉 건립과 비방을 버리고 벗어나며, 이름과 모습이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알면 이를 여여(如如)라고 한다.
대혜야, 여여에 머무는 보살마하살은 무소유(無所有)의 경계를 얻으므로 보살의 환희지(歡喜地)를 얻으며, 보살의 환희지를 얻고 나서 영원히 모든 외도의 나쁜 세계[惡趣]을 떠나 출세간의 세계에 바르게 머물고, 법상(法相)이 성숙하며, 환(幻)과 같은 모든 법을 분별하고, 법취상(法趣相)을 스스로 깨달아 모든 망령된 견해와 괴이한 모습을 여의며, 차례로 법운지(法雲地)까지 오르고 그 중간에 삼매(三昧)와 힘[力]과 자재(自在)와 신통(神通)을 열어 서 편다. 여래지(如來地)를 얻고 난 뒤에는 갖가지 변화로 두루 비추어 나타내 보임으로써 중생을 성숙시키니, 마치 물에 비치는 달과 같다. 구경(究竟)에 10무진구(無盡句)를 잘 만족하고 갖가지 뜻으로 이해하는 중생 을 위해 분별하여 설법하며, 법신(法身)을 얻어 뜻으로 짓는 일[意所作]을 벗어난다. 이를 보살이 여여로 얻는 데에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자성이 다섯 가지 법에 들어간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각각의 자상종(自相宗)이 있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세 가지 자성과 8식(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가 모두 다섯 가지 법에 들어간다.
대혜야, 저 이름[名]과 모습[相]은 망상자성(妄想自性)이다. 대혜야, 만약 저 망상에 의지해서 마음과 마음법이 생긴다면 이름이 동시에 생길 것이니, 마치 햇빛이 온갖 모습을 갖추었으나 각각 다르게 분별해서 가지는 것과 같다. 이를 연기자성(緣起自性)이라고 한다.
대혜야, 바른 지혜와 여여(如如)는 무너질 수 없으므로 성자성(成自性)이라고 한다.
또 대혜야,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망상을 여덟 가지로 분별하니, 식장(識藏)과 의(意)와 의식(意識)과 다섯 가지 식신(識身)이다. 상(相)이란 진실하지 못한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므로,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는 두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없어지면 두 가지 무아(無我)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대혜야, 이 다섯 가지 법이란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이나 여래의 자각성지(自覺聖智)의 모든 지위에 상속하는 차례이니, 모든 불법(佛法)이 다 이 속에 들어간다.
또 대혜야, 다섯 가지 법이란 모습[相]과 이름[名]과 망상(妄想)과 여여(如如)와 바른 지혜[正智]이다.
모습이란 처소(處所)와 형상(形相)과 색상(色像) 등이 나타나는 것이니, 이를 모습이라고 한다. 만일 저기에 이와 같은 모습이 있는데 병(甁) 등이라고 하면, 이것이 곧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이름이라고 한다. 여러 이름을 지어 모든 모습, 즉 병(甁) 등과 마음[心]과 마음법[心法] 등을 현시하면, 이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저 이름과 저 모습을 필경에 얻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覺]도 없고 모든 법에 전전함이 없어, 진실하지 못한 망상을 벗어나는 것을 여여라고 한다. 진실하고 결정적인 구경(究竟)의 자성(自性)을 얻을 수 없는 것, 이것이 진여(眞如)의 모습이니, 나와 모든 부처가 따라 들어가는 곳이다. 두루 중생을 위해 여실하게 연설하고, 저것을 시설하여 드러내 보여 정각에 들어가게 하며, 단절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망상을 일으키지 않게 하여 자각성취(自覺聖趣)를 따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외도나 성문이나 연각은 얻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를 바른 지혜라고 한다.
대혜야, 이를 다섯 가지 법이라고 하니, 세 가지 자성과 여덟 가지 식과 두 가지 무아와 모든 불법이 이 가운데 들어간다. 그러므로 대혜야, 스스로 방편을 세워 배워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게 해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과 세 가지 자성
여덟 가지 식(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
이 모두가 마하연(摩訶衍)에 포함된다.
이름[名]과 모습[相]과 헛된 망상은
자성의 두 가지 모습이며
바른 지혜와 여여(如如)
이것이 바로 성취한 모습이다.
[출처] 능가아발다라보경-제4권-2|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