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부 내의원 /1 ]
"애비 아적 안 일어났느냐?"
허준이 밀양 천황산에서 스승 유의태의
유언을 실천하고 돌아온지 나흘째.
해가 기울었건만,
오늘도 자기 방에서 한마디 기척도 없는
아들의 심기가 궁금하여 손씨가
며느리에게 물었다.
아직도 젊디젊은 부부다.
사나흘씩 헤어져 있고 보면,
없던 정분도 냄직하건마는 돌아온 후
'혼자있게 해주오.'
한 아들의 당부를 좇아 자기 방으로 건너와 있는 며느리가 손씨는 안타까웠다.
"아직 너무도 혼곤히 자고 있습니다."
며느리의 눈가에 웃음이 잡혀있자,
손씨는 혀차는 소리를 낼 뻔했다.
아무리 서로가 믿어 의심치 않는 부부간이기로 수삼 일 집 비우고 돌아온 남편에게
궁금증조차 없느냐 싶어서였다.
"대체 밀양까지 가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돌아와서는 사흘씩 나흘씩 잠만 잔단
말이냐."
"오늘은 일어나 나오겠지요."
"사람이 드나드는 기척도 모르고 자기만 해?"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워 있고 싶어서 누워 있을 것이다. 게으른 남자가 아닌 걸 안다.
그래서 작은 기척 한번 더 내보다가 말없이 돌아 나왔을 뿐이다.
"어디 몸이나 탈난 눈치는 아니더냐?"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삼복 더위속에 밥 한끼 청하지 않고 잠을 자누.
내 잠시 들어갔다 오마.
뭐 가지고 들어갈 게 없느냐?"
"... 없습니다."
손씨가 부엌으로 나섰다.
"애비야 애비야."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났을 때 허준은
깨어 있었다.
"원 방문조차 첩첩이 닫고."
하며 들어온 손씨는 뜻밖에 아들이 깨어
있는 눈을 보자 오히려 당황했다.
"아니 깨 있었더냐?"
"예."
하고 아들이 대답했다.
그 방문 밖에 자지러질 듯이 장난웃음을
문 남매가 닥쳤고 뒤따라 아내의 얼굴이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아부지 깼다!
와아, 아부지 수염 봐라."
하고,
숙영이가 문지방에 매달리며 허준에게
웃었다.
허준은 어머니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 많이 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
"걱정이야 에미가 더 했지.
혹 갔던 일에 몹쓸 일이라도 있었던 것
아니냐?"
"몹씁 일이라니요?"
"너는 제 얼굴도 볼 수 없어 모르는 모양이다만 바짝 야위었어.
눈빛부터가 전과 같지 않구."
-눈빛이 다르다?
다를지도 모른다.
지금 자기의 이 손은 무엇을 한 손인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세상.
그 누구도 꿈에도 생각 못한일을 한
손이다.
그 피!
온몸에 달라붙던 그 스승의 피!
떠들썩한 남매를 말리며 방에 들어온
김씨도 딴때없이 무거운 눈빛의 남편을
건너보았다.
순간,
허준의 입에선 변명 아닌 예상치 않은 말이 독백처럼 나왔다.
"사람이란 정말 대단한 것올시다.
상상도 할 수 없도록 사람은 위대한
존재올시다."
"무슨 일이 있었사오니까?"
"무슨 소린지 난 ..."
허준의 대답은 또 엉뚱했다.
"세상에 사람처럼 크나큰 존재가 없습니다."
"대체 누구를 만났기에?"
허준의 퀭한 눈이 잠시 허공을 쏘아보았다.
"... 좁쌀처럼 잔망스런 인간도 많을 것이요 평생 뜻을 품지도 세우지도 못하는 인간도 있을 것이오.
일차 뜻을 세운 인간은 ..."
"누구 얘기를 하고 계시오니까?"
"우리가 알아서는 아니 되는 일이냐?"
허준이 잠시 어머니와 아내를 건너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무어라고! 설마 ...?"
"사실 올시다."
"언제오니까!"
"그분이 왜!"
"자진 했사옵니다."
고부가 허준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자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씀 이오니까?"
"나를 위하여 ..."
"예?"
"이 허준을 위하여....
내 의술이 더욱 정통해질 기회를 주고자 ... 짐을 졌사옵니다.
너무나 커다란 짐을,
뜻이 나약한 저에게는 너무도 무거운
짐을...."
"소상히 말씀해주소서!
너무도 궁금 하옵니다."
"유의원의 정정한 모습을 뵌 것이 불과 바로 며칠 전이어늘 ..."
"꿈결 같은 일이옵니다.
제가 보고 겪은 일!
소자의 입으로는 차마 말하지 못하옵니다. 오로지 한마디 그분이 아니라면
영원히 꿈꾸지 못했을 너무도 귀한 체험을 했다는 그 말 한마디!
외 지금일랑 더는 묻지 말아주소서."
"...?"
"그 은혜 ...
열 번 다시 태어나도 또 의원이 되리라는
그 높은 뜻!
저 또한 이어받아 명심하고 명심할 뿐.
언젠가 이번 길에 제게 있었던 일.
조용히 말씀드릴 날이 있사오리다."
"그렇거든 네가 입을 열기까지 더 묻지
않으마.
하나 유의원의 장사는?"
"제 손으로 치렀습니다,
밀양 천황산 양지바른 곳에...."
문득 허준의 목이 잠겼다.
나홀 전,
천황산을 떠나을 때 허준은 한사코
유의태의 관을 산음으로 모시고 오려
했었다.
하나 김민새가 말렸다.
안광익도 반대한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
얼마 전,
안점산에 찾아와 스스로 자신의 묏자리를 보러 다닌다 얘기하며,
유의태가 지정한 무덤자리는 그런 소박한 장소였음도 두 사람에게 들었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부는 양지바른 언덕, 생전의 그의 바람이 그러했다 하매,
고제야 허준은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천황산!
그 이름없는 언덕이 굳이 부조가 묻힌 산음땅보단 유의태에게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여겼고,
언젠가 도지가 찾고자 하면,
쉬 찾을 수 있도록 스승이 묻힌 지형을
뇌리에 새기고 돌아왔었다.
생전에 그가 세상에 베푼 인술에 비하면,
그 무덤은 너무나 적적한지 모르나,
생전의 유의태를 아는 그로서는 온산 가득 만장과 조객이 뒤덮인 호사스러운 장례보다
천황산의 조용한 장례가 고인이 바라는
바라고 느꼈다.
일차 안점산으로 돌아갔던 김민세가
산음 허준의 집으로 다시 나타난 것은
약속대로 열흘 후였다.
유의태를 묻고,
산음으로 돌아오는 귀로에서 김민세가
허준에게 강경하게 권했던 것이다.
"의업에 바탕이 될 세상 구경 이라니요?"
처음 허준이 그 말뜻을 못 알아듣고,
반문하자 안광익도 기다렸다는 듯이
허준에게 권했다.
"춘하추동 계절을 따라 각도의 특산 약재가 무엇이며,
향약이라 일컫는 각 지방 전래의 처방도
알아보고...."
"그보다 중요한 까닭이 또 있네.
그것은 넓지도 않은 내 땅,
내가 죽도록 살아야 할 이 땅에,
조선팔도 안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 구경을 해 두라는 것일세!"
"이 땅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
"그밖에 소득이 또 있으리.
동서의 지형에 따라 물맛이 다르고,
남북의 기후가 다르니 그 산줄기와 강변과 곳곳에 사는 내 나라 사람들의 인심 풍속은 어떠한지,
그 민생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겪으며
세상의 견문을 넓히는 일 또한 장차 세상을 넓게 살아야 할 사람의 빠뜨릴 수 없는
공부로세."
"진실로 소인도 원하는 바올시다마는..."
"마음만 정해지면 앞장일랑 내가 서리.
한 일년 식구들과 헤어져 살수 있겠는가?"
"일년 이오니까?"
절간을 찾아 잠을 자고,
인근 마을에 내려가 의술을 베풀어
의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덧붙자,
허준은 가족과의 상의도 없이 결심을
하였다.
그렇게 길을 떠난 허준이,
멀리 함경도 경원땅에서 내의원 취재
소식을 들은것은 일년 작정한 그의 여정에 아홉 달을 넘긴 이듬해 봄이었다.
허준은 그 길로 한양으로 남하,
취재에 응했다.
그 허준의 태도는 딴때없이 조용했다.
김민세와의 9개월의 동고동락의 여행에서 세상 물정에 대한 끊임없는 토구가
그가 아는 의술에 관한 지식 외,
인간사에 관한 두텁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시켜 주었던 것이다.
허준은 등방했다.
성적은 수석이었다.
그때의 허준의 나이 스물아홉!
선조 8년 4월의 일이었다.
내일 계속됩니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