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벽 3시 반쯤이면 오토바이 소리에 잠이 깬다. 날이 훤히 밝아오자 깨끗하게 정돈된 쓰레기집하장 앞을 지나며 부지런한 미화원의 손길이 느껴졌다. 상쾌한 마음으로 산책을 하며 요 며칠 날이 너무 더워서 어디로 피서를 갈까 고민하다가 기껏 생각해낸 것이 재래시장이었다.
정오가 지나 버스를 타려고 나갔으나 배차시간이 길어서 그냥 걷기로 했다. 긴 소매 옷에 썬캡과 마스크로 무장을 했는데도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한낮의 지열이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해님이 쏘아대는 빛의 화살은 피부에 구멍을 냈는지 온몸이 금세 땀으로 젖어버렸다.
가지고 간 생수를 연신 들이켜며 시장 안을 한 바퀴 돌았지만, 몸의 열기가 식지 않아서 은행으로 갔다. 처음 들어갈 때는 시원하더니 앉아 있으니까 이마와 등줄기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손수건이 흥건히 젖도록 땀을 닦아내며 일없이 앉아있자니 멋적어서 핸드폰을 꺼내 보는척하다가 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층층이 다니며 아이쇼핑(eye shopping)을 하느라 더위도 잊은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삼계탕용 닭 한 마리와 과일 몇 개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더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더위를 피한다고 여기저기 다녀도 피서는 역시 내 집이 최고였다. 더러는 에어컨 덕에 여름 더위를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있어도 전기세 무서워서 제대로 사용을 못 하고 이리저리 시원한 곳을 찾아다니며 여름을 나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면 선풍기조차 없던 시절,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여름을 났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서울)에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는데, 서빙고 얼음은 경주와 안동, 경남 창녕 등에서 만들어 왕실에서 썼다. 또한 에어컨과 선풍기가 없던 그 시절에는 부채가 그 역할을 대신했으며 시원한 정자나무 밑 평상이나 모정에 모여앉아 장기를 두거나 낮잠을 자며 더위를 식혔다. 복날에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고 따끈한 보신탕이나 삼계탕, 백숙 등을 끓여 먹고 수박ㆍ참외ㆍ복숭아 등 물이 많은 과일을 시원한 물에 담가 먹으며 더위를 이겨냈다.
내 어릴 적, 우리 집은 부모님이 들에서 돌아오면 으레 나를 불러 우물가에서 몇 바가지 물로 등목을 하며 피로와 더위를 푸셨는데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 선풍기가 방마다 있고, 샤워시설이 좋아 두레박질이나 펌프질을 하지 않아도 수돗물이 펑펑 나와 마음대로 씻을 수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때는 저녁만 돌아오면 모기를 몰아낸다고 모깃불을 피워 눈물 콧물 흘렸는데 지금은 널따란 방충망이 벌레를 막아주니 너무 좋다. 부채도 귀해서 두꺼운 비닐을 접어 사용했는데 휴대용 선풍기까지 상용화되었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느껴진다.
올해 여름 날씨가 기상관측 111년 만에 찾아온 역대 최고기온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제는 강원 홍천의 낮 최고기온이 41.0도이고 서울 또한 39.6도까지 치솟아 역대 기록을 경신했다고 한다. 오늘 전주도 낮 기온이 38도라지만 한증막 같은 도심은 아마도 40도를 훨씬 웃돌지 않을까 싶다. 이에 기상청은 문자메시지를 통해 폭염주의보와 경보를 잇달아 발령하면서 고령자나 어린이 등 취약계층은 강한 햇볕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아무튼 도로에는 차만 보일 뿐 걸어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새벽녘이면 떼 지어 하늘을 날던 잠자리와 새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길가 수목들도 더위에 지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고, 빈터를 덮고 있는 호박잎도 한낮의 열기에 기세가 꺾인 듯 모두 뒤로 젖혀져 있는 게 아닌가.
우리 아파트는 산 밑에 있어서 비교적 시원한 편이다. 처음 이사 올 때만 해도 여름휴가 때 아파트에 들어서면 시원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에어컨이 하나둘 생기더니 최근에는 세어보는 게 습관처럼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선풍기 4대와 서큘레이터 2대로 버티고 있는데 2018년 에어컨 보급률이 80%가 넘는다니 이젠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세상은 지구온난화로 계속해서 더워지고 있으니 말이다.
더위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이제 곧 물러갈 것이다. 오늘 하루, 더위와 맞서 싸우느라 땀을 엄청 많이 흘렸다. 하지만 에어컨 빵빵한 은행이나 백화점에서 더위를 식히고 사 온 닭 한 마리로 철 보약인 삼계탕을 끓여 먹었으니 이만하면 제대로 피서를 즐긴 게 아닌가?
(201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