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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40. [역경의 열매] 신용원 (1-11) 마약 중독자, 하나님 손길로 복음을 선물받다
신앙으로 심각한 중독 극복한 이후 17년째 약물 중독자들의 자활 도와
신용원 목사(앞줄 왼쪽 두 번째)와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워크숍을 마치고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는 약물 등 중독자들의 자조·자활을 돕는 공동체인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대표다. 우리 공동체는 매월 서울과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치소, 부산과 강원도 원주·춘천에 있는 교도소 등을 돌며 마약 사범들을 대상으로 치료재활교육을 한다. 마약사범 가족들을 위한 상담도 하고 있다.
이 사역을 올해까지 햇수로 17년째 지속하고 있다. 혹자는 사회에서 처절히 외면 받고, 남들이 기피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다. 당연히 고된 일이다. 때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감당해야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다. 마약 중독의 끝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한때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순간 나를 찾아오셨다. 복음으로 중독을 극복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계셨다. 이제부터 폭풍우와 같던 삶 가운데서 허덕이던 내게 따스한 손길을 내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1965년 충북 보은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모님부터 3대째 이어온 크리스천 집안으로, 특히 어머니는 매우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었다. 대표적인 일화가 하나 있다. 내가 일곱 살 때쯤이었다. 주일이었는데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교회에 가지 않았다. 한참을 놀다 집에 왔더니 배가 고팠다. 밥을 달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셨다. 교회에 가지 않은 것을 아시고 벌을 내리신 것이다. 어머니는 먹을 것을 장독대에 숨겨 두고 하루 종일 나를 굶기셨다. 그 충격이 너무 컸던지 그 이후로 난 교회 주일학교 6년을 개근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목사님이 추우실까봐 매번 손수 장작을 패서 지게에 지고 교회에 가져다주실 정도로 헌신적인 분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는 심하게 기울었다.
41세에 과부가 되신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나였다. 난 항상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어머니는 내가 판사나 검사가 되기를 바랐다. 내 장래 희망은 육군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감 선생님이 어머니께 “용원이를 큰 도시로 데려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권유하셨다. 우리 가족은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어머니는 집 평수를 줄이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사를 강행했다. 순전히 나의 교육 때문이었다.
부천고로 진학했다. 갑자기 바뀐 환경 탓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열심히 공부했고, 반에서 5등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사실 당시 나는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가난한 우리 집이 창피했다. 사춘기여서 더 민감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한 친구의 집에 갔다. 부유한 집이었다. 그 친구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분이 친구에게 한 말을 듣고 말았다. “넌 왜 하필 저렇게 아버지도 없고 가정형편도 어려운 근본 없는 애하고 어울리니?” 나의 열등감은 폭발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 [역경의 열매] 신용원 (1) 마약 중독자, 하나님 손길로 복음을 선물받다
* [역경의 열매] 신용원 (2) "근본없는 아이" 놀림에 충격… 가출한 후 탈선
* [역경의 열매] 신용원 (3) 마약에 찌들었던 시절 교회로 나를 이끈 어머니
* [역경의 열매] 신용원 (4) 뇌출혈로 쓰러지신 어머니 위해 눈물로 기도
* [역경의 열매] 신용원 (5) 간절한 기도에 마약보다 100배 강한 성령 체험
* [역경의 열매] 신용원 (6) "기도로 1등 하겠습니다" 34세에 신학대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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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신용원 (11·끝) "마약 극복, 우리는 주님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약력=1965년 충북 보은 출생. 개혁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대표. 2005년 세계 마약의 날 기념 국민근정포장 수상. 인천시 가로정비사업 직업재활사업장 대표.
***[역경의 열매] 신용원 (2) “근본없는 아이” 놀림에 충격… 가출한 후 탈선
폭력배들과 어울려 본드 흡입·마약… 軍생활 적응못해 손가락 절단 자해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신용원 목사가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두뇌도 명석했고, 리더십도 있어 나름 따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친구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도 없고 가정형편도 어려운 근본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자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워하던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방황과 탈선의 이유를 합리화해서는 안 되지만 나는 폭발한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 말 한마디가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이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나 하나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의 기대는 무거운 짐이었고, 집에서의 충돌도 잦아졌다. 아버지를 먼저 데려가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가출을 했다. 자연스레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또래 아이들에게 유명세를 탈 만큼 주먹질을 하고 다녔다. 당시 나는 힘이 좋아 씨름 선수로도 활동할 정도였다. 폭력의 주 대상은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작용해서 가정이 유복하다고 알려진 아이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돌이켜 보면 너무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모범생이던 나는 일탈을 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 갔다. 약물에 처음 손을 댄 것도 그 즈음이다. 나와 같이 가출한 또래들과 모여 있던 아지트에서 본드 등을 흡입했다. 환각상태가 되면 괴로운 현실과 마음속의 방황에서 도망친 것 같이 느껴졌다. 당시 약물을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추구해왔던 가치와 신념이 무너졌고, 마음의 공허함은 갈수록 커졌다. 탈선의 정도가 심해지자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이후로 몇 학교를 옮겨 다녔다. 어머니가 받은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돌리시려 부단히 애쓰셨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이미 내 인생은 끝이 났고 되돌리기엔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대학 진학은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지냈고 약물흡입도 멈추지 않았다. 툭하면 패싸움에 휘말렸다. 결국 보다 못한 가족들은 나를 군대에 보내기로 했다. 마땅히 하는 일도 없었고, 늘 나 때문에 우시는 어머니에게 미안해 따르기로 했다. 당시 내 나이 20세였다. 하지만 내면에 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입대를 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어려서 장래희망이었던 육군 장성이 아니라 도피하다시피 입대한 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불과 4년 사이에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꺾였고, 꿈을 꿀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군 생활을 잘할 리 없었다. 결국 적응을 못하고 6개월 만에 왼손 두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자해를 저질렀고, 난 불명예제대를 했다.
경기도 부천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폭력배 생활을 시작했다. 타락의 정도는 점차 심해졌다. 1986년쯤 규모가 큰 폭력사건에 관여를 했다가 지명수배령이 내려졌다. 강원도 원주로 도망을 갔다. 타향에 가서도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롭다는 생각에 그 지역 폭력배들과 어울리며 지냈고, 본드 등 약물을 넘어서 필로폰 등 더욱 심한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마약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가 만든 인공낙원으로 쾌락과 타락의 끝이다.
나는 마약사범들의 자활교육을 할 때 마약을 선악과에 비유해 이야기한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했던 선악과를 먹으므로 해서 아담과 하와는 원죄를 저질렀고, 그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역경의 열매] 신용원 (3) 마약에 찌들었던 시절 교회로 나를 이끈 어머니
폭력 사건으로 수배 된 후 약물 손대… 괴물 되어가는 아들 보며 상심 컸을 것
신용원 목사의 어머니 변보배 권사(오른쪽). 신 목사는 “어머니의 강직한 신앙과 기도가 나를 수렁에서 건져냈다”고 말했다.
처음에 마약을 접했을 때는 낙원을 경험하는 것 같겠지만 결국은 본인을 파괴시키게 된다. 약 기운으로 느끼는 쾌락은 일시적이며 약 기운이 빠지고 밀려오는 공허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결국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다시 약을 찾게 되고, 그렇게 중독 상태가 심해진다. 중독의 사슬을 끊기란 세상 어떤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마약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폭력사건 수배자로 도피 생활을 하다가 그에 맞는 처벌을 받고, 다시 부천으로 돌아왔다. 약물에 손을 대고, 마약에 빠지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난’에서 출발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얼른 돈을 벌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경매(競賣)일을 시작했다. 돈이 꽤 모이기 시작했다. 돈이 생기니 삶의 의욕이 생기면서 마약을 접하는 횟수도 줄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산경매를 하러 한 집에 찾아갔다. 가전제품들을 가지고 나오려는데 그 집의 꼬마가 울기 시작했다. 특히 책상을 들고 나오려고 하자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난 때문에 박탈감을 경험하는 그 아이가 처해 있는 상황이 과거 내가 겼었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은 경매라는 것이 사업 실패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부를 빼앗아 내가 부를 축적하는 일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아이의 책상을 포함해 그 집의 물건을 다 돌려주고 그날부터 경매일을 접었다.
경매일을 해서 모은 돈을 어떻게 불릴까 고민하다가 형님 사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건물을 관리하는 용역회사였다. 장남이자 장손인 형님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일념 하에 사업에 매진하셨다. 나 역시 형님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자금 투자는 물론 건물 청소 일을 직접 하기로 했다. 신성한 노동을 통해 마약과 폭력으로 방황했던 시간, 편법과 탈법을 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며 돈을 버는 일을 청산하겠다고 생각했다.
약 3년이 지나며 형님 사업은 자리를 잡아갔다.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에 찌들어 살지도 않았다. 문제는 나였다. 내 안에 욕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불쑥불쑥 차올랐다. ‘그저 청소용역 일이나 하며 내 인생은 여기서 주저앉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때를 노린 듯 유혹은 강력하게 찾아왔다. 나는 또 마약에 손을 댔다.
히로뽕과 헤로인 등 마약에 찌들어 있던 그 시절, 가장 마음 아팠을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남편이 죽고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막내아들이 괴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며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수시로 교회에 가자고 권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짜증을 냈다. 성화에 못 이겨 어쩌다 교회에 나가도 어머니 몰래 예배 시작 전에 빠져 나왔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다. 설교는 모두 거짓말 같았다. 어느 날은 교회에 가자고 다그치시는 어머니를 향해 “하나님이 있다면 교회에 헌신했던 아버지는 왜 그렇게 일찍 죽게 했으며 어머니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며 “하나님은 없으니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못된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우셨지만 나에게 확고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 은혜를 받아야 네가 산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고집스럽고 강직한 성품이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님마저 놓쳐 버리면 어머니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신용원 (4) 뇌출혈로 쓰러지신 어머니 위해 눈물로 기도
72시간 혼수상태서 기적적인 회복… 감사는 그뿐 또다시 방탕한 생활
성찬식을 진행하고 있는 신용원 목사. 신 목사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손에서 마약을 놓지 못했다. 후유증으로 머리털은 빠지고 치아도 문드러져 갔다. 가족과의 관계는 당연히 악화됐다. 약을 끊으려고 한국을 떠났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지를 고민했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였다.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형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갑자기 어머니가 쓰러지셨고, 혼수상태라고 했다. 불과 얼마 전인 어버이날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당시 어머니가 머리가 무겁고 아프다고 하셨던 기억이 났다. 의사는 감기라고 진단했지만 오진이었다. 뇌출혈이었다. 어머니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당장 귀국했다. 병실 앞에서 절규했다. 하나님께 어머니를 살려주면 마약을 끊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겠다고 울면서 기도했다. 가족 모두의 간절한 염원에 대해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어머니는 72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나셨다. 정말 다행인 것은 뇌출혈을 앓은 대다수가 후유증으로 풍이 든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이를 겪지 않으셨다. 만약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후에 내가 회심하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나 사역을 시작할 때, 나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완전히 회복하시고 집안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혹시 어머니가 다시 쓰러지실까봐 해외에 나갈 생각을 접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나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금방 잊어버렸다.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어머니가 아프셨을 때는 다급한 마음에 하나님을 찾았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바람을 들어주면 따르겠다는 치기 어린 기도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조차도 예쁘게 보셨고 응답하셨지만 나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가장 든든한 지지자를 살려주셨는데도 나는 약속으로 내걸었던 변화된 삶을 살지 못했다. 방황과 방탕의 시간은 계속됐다. 20대 후반부터 사채사업을 하거나 재즈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또다시 마약에 손을 댔다. 결국 마약사범으로 여러 차례 수감생활을 했다. 수감생활을 하고 나면 자연스레 그간 이뤄놨던 사업의 성과들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돈도 잃고, 친구도 잃었다. 마약은 자아를 파괴시키고 무력감에 빠져들게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과 화목을 이룰 것을 권면하지만 마약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자신의 내면을 파괴한다.
앞서 말했듯 마약 중독의 말로는 죽음이다. 마약 탓에 연거푸 수감생활을 하고 사업에 실패했지만 끊지 못했고, 그렇게 몇 번 동일한 과정이 반복되자 나는 지독한 상실감에 빠졌다. 그리고 스스로 생명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뭘 해도 마약 때문에 안 될 것 같았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장소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오산리 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이다. 왜 그곳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죽기 전에 하나님께 마음껏 따지고 싶었던 것 같다. 목 놓아 울며 기도하는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았다.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다 놓아 버리려고 하니까 마음이 편안한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인생이 끝난다는 것에 대한 허무함도 있었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뒤엉켜서 지나갔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입에서 먼저 나온 기도는 단 한 문장이었다. “하나님 살고 싶어요.”
***[역경의 열매] 신용원 (5) 간절한 기도에 마약보다 100배 강한 성령 체험
“하나님만 믿고 살겠습니다” 고백에 불덩이와 벅찬 감격이 내 몸 안으로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대성전 입구 전경. 신용원 목사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찾은 이곳에서 하나님은 강력한 성령 체험을 허락하셨다”고 말했다.
살려 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은혜 받아야 내가 산다고 하셨다. 그런데 은혜라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 아닌가. 순간 다음 기도가 이어졌다. “하나님, 내가 살고 싶은데 살아갈 자신도 없고, 나 살려면 당신이 주신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고 고백했다.
절규 어린 고백 속에 성령 체험을 했다. 성령이 내 몸을 지배할 때 느낀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마약을 한 것보다 더 큰 행복감이었다. 마약은 쾌락의 정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도 마약이 주는 것 이상의 쾌감을 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약 중독은 무서운 것이다. 한때 나는 마약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성령의 임재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상상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했다.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며 몸 안으로 불덩이가 들어오는 듯하면서 벅차오르는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확신에 찬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혹자는 이런 나의 경험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령 체험은 사람마다 다르며 획일적이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왜 이렇게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체험을 주셨을지 생각해봤다. 난 마약에 찌들어 산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 힘이 마약의 쾌감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나에게 그런 체험을 허락하신 것이다.
마약 중독자 자조·자활 사역은 엄청난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일이다. 흑암과 어둠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하나님께로 이끌려면 그런 어떤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마약에 흔들렸다가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유혹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과의 강렬했던 첫 만남을 항상 열망한다.
성령 체험을 하면서 방언의 은사도 받았다. 구르고 가슴을 두드리고 울고 웃으며 그 자리에서 8시간을 기도했다. 정신없이 시간이 가고 날이 밝았다.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얼굴에 비춰진 햇살은 전날 느꼈던 그것이 아니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세상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던 나였다. 그런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는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 듯 아름답게 보였다. 지나는 사람들이 다 선해 보였다. 모두가 형제요 자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되었을 때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듬성듬성 머리털이 빠지고, 문드러진 치아의 몰골을 한 사람이 웃고 있었으니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여담이지만 현재 나의 치아는 대부분 의치다. 마약 탓에 다 상해버렸다.
그 길로 기도원에서 내려왔고, 부천으로 돌아왔다. 내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노방전도를 하기로 결심했다. 전도의 방법도, 하나님 말씀도 몰랐지만 서울 신촌역과 경기도 안양역 앞에 가서 무작정 떠들어댔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하고,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때마다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간이 지나며 하나님을 더욱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간증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 성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역경의 열매] 신용원 (6) “기도로 1등 하겠습니다” 34세에 신학대 입학
“목회의 길·섬길 이를 가르쳐주세요” 하루 3∼4시간 자며 2시간 이상 기도
개혁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식에서 신용원 목사(왼쪽)의 모습. 신 목사는 “신학생 시절 금식기도를 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셔서 현재 사역에 대한 단초를 알려주셨다”고 말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열정이 끓어올랐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은 신학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귀결됐다.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삶을 봐온 이들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약에 찌들어 살았고, 폭력배 등으로 타락한 생활을 일삼아 오지 않았던가. 계속 희죽희죽 웃었고, 틈만 나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등 너무 변한 내 모습에 정신이 나갔다는 말을 했다. 형제 중에는 나를 보고 악귀에 씌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친구들도 내가 실성했다고 했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이런저런 사업을 하다가 마약 탓에 다 망가져서 이제 종교사업에 손을 대려고 한다 했다. 사이비 교주가 되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용원이 네가 신학교 가서 목사를 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지인의 추천으로 알게 된 개혁신학대학원대학교를 무작정 찾아갔다. 입학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보를 얻고 준비를 시작했다. 내 나이 34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대학공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였지만 내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입학을 했지만 수업과정을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살다가 왔는데 무엇을 알 수 있었겠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의 신앙은 매우 순수한 상태였다. 방탕하게 살다가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외모만 보고 학교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사람들하고 부딪히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다. 학교 끝나고, 노방전도하고 산에 기도를 하러 갔다가 바로 집에 갔다. 당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가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로 1등을 할 수는 없겠지만 기도로는 1등을 하겠습니다.”
한번 기도를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무조건 2시간 이상은 지속했다. 잠을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새벽기도, 산기도 등 할 수 있는 한 무조건 기도를 했다. 당시의 영적 갈급함은 너무도 심했다. 내가 어떤 전도자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 때 처음으로 21일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당시의 기도 제목은 단순했다. “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십시오.” 정확한 소명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한국 땅에 수만명의 목회자들이 있는데 그중에 내가 어떤 목회자가 되어야 할지 너무도 궁금했다. 내가 섬길 이들이 누구일지 고민했다. 당시 생각한 대상은 청소년이었다. 나의 일탈이 시작된 것이 청소년기였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와 같이 방황하는 아이들을 위로하고 친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금식기도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신학교의 선배와 동기들을 보면 모두가 “예수님 닮기 원한다”고 기도를 했다. 그 기도가 너무 추상적이라 생각했다. 나도 예수님을 닮고 싶은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와 닿지가 않았다. 그래서 답을 찾으려 했다.
금식기도 중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응답하셨다. “용원아 내가 고아와 과부와 병든 자들과 같이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그 음성을 듣고 정말 많이 울었다. 하지만 고아와 과부, 병든 자같이 소외된 이웃이 너무도 많은데 누구를 돌보고 복음을 전해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런데 금식기도가 끝나고 내려오는 날 거짓말같이 마약퇴치운동본부라는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역경의 열매] 신용원 (7) 마약퇴치운동본부 “청소년 재활교육 맡아달라”
신학교서 ‘마약 극복한 인물’ 유명세… 아이들에게 경험 들려주고 기도해줘
국내 한 교도소에서 신용원 목사가 마약 사범 재활교육을 하고 있는 모습.
신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사람들을 피해 다녔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학우들과 정기적으로 기도모임을 가졌다. 단순히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간증하며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기도 했다. 나의 이야기는 학우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학교에서는 ‘마약을 이기고 회심한 인물’로 나름 유명세를 탔다. 이는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과거의 내 삶을 솔직하게 간증했다. 처음에는 겁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의 회심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교회 집사님 중 한 분이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에 내 이야기를 전했고, 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는 내게 본드 등 약물에 중독된 중·고등학생을 위한 재활교육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선뜻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약물이라면 정말 징글징글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약 중독의 끝을 경험해본 사람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던 사람이다. 마약과는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의 재활을 돕거나 돌보는 일을 하면 자연스레 마약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꾸만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누군가 내게 약물 중독의 위험성을 일찍 알려주었다면 조금 더 일찍 정신을 차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약물에 빠져 일탈을 시작한 것이 청소년기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셨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약물에 빠진 청소년들을 만나보니 과거의 나를 보는 듯했다. 대부분이 불우한 가정환경에 놓여 있었다. 불공평한 세상에 나름 저항하려 했으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본드나 약물 등을 택했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동시에 이들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독은 세상 기준에서 볼 때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지만 성령께서 임하시면 한순간에 정리될 수 있다. 현재의 행동심리학은 중독을 ‘영적인 문제’라고 정의한다. 중독 상태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킬 수는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완벽히 치유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낸 것이다. 중단된 상태라면 언제든지 마약을 다시 시작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해져야 마약 중독을 완벽히 끊을 수 있다.
당시 만난 아이들에게 내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들을 위해 강력히 기도했다. 그렇게 사역을 지속하고 있을 즈음 KBS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내 삶을 소개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은 종영한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프로다. 참 신기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그 누구의 주목도 받을 수 없었던 나와 내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는 것과 심지어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칭송받는 것 모두가 믿기지 않았다.
방송을 보고 한 교도소에서 근무하고 있던 분이 연락을 하셨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마약사범들을 교육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약 중독자들을 회복시키고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들어 쓰신 이유가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온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마약 중독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기도 끝에 교소도 사역을 감당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나 혼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때에 맞게 적절한 동역자들을 붙여주셨다.
***[역경의 열매] 신용원 (8) 결혼 보름 만에 신혼집이 중독자들 가정교회로
10평도 안되는 집에 20여명이 북적… 믿음의 아내, 불평없이 중독자 보살펴
신용원 목사와 아내 안진숙 사모, 쌍둥이 딸의 모습. 신 목사는 “아내의 헌신 덕분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교도소 사역을 하면서 연을 맺은 수감자들이 출소 후 찾아왔다. 마음을 잡고 살아보려 했지만 마약을 끊기 어려웠고, 그런 자신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절도나 사기 등에 비해 마약사범에 대한 인식은 훨씬 더 안 좋은 편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교회를 개척한 것도 아니었고 개척할 돈도 없었다. 오갈 데 없는 8명을 나의 신혼집으로 데려왔다. 자연스레 가정교회가 형성됐다. 사람들은 점차 늘어 20명 이상이 되었고, 10평도 안되는 집은 포화상태가 됐다. 하지만 이들이 복음을 받아드리며 예배의 열기는 뜨거웠다. 찬양하고 기도하며 나중에는 빌라의 옥상에서 예배를 드렸다.
생각해 보면 나에겐 신혼기간이 없었다. 2001년 6월 결혼을 하자마자 보름 정도만 단둘이 살았을 뿐 이후 마약 중독자들이 집에 함께 머물렀기 때문이다. 아내에게는 늘 미안했다. 새색시가 마약에 취해 있던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얼마나 불안했을까. 사역을 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설 때면 혹여 집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아내에게 험한 짓을 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늘 아내의 안위를 위해 기도했다.
아내는 지금까지도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현재도 형편이 좋은 것은 아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쌍둥이를 포함한 세 딸은 한방에서 같이 지낸다. 아이들이 크고 사춘기가 시작되니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그럴 때 아버지로서 미안함이 있다. 하지만 아내는 항상 나의 편을 들어준다. 환경을 탓하지도 않는다.
아내는 내가 운영하던 재즈바의 손님이었다.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 교제를 시작했다. 후에 내가 마약을 했던 것도 알게 됐지만 꿋꿋하게 내 옆을 지켰다. 결혼을 한다면 이 여자와 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내는 내가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열심히 할 사람’이 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데이트를 할 때 내가 노점상 할머니나 노숙자들에게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수시로 사주고 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따뜻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라 여겼다고 했다.
아내는 내가 회심을 하고 목회를 하겠다고 하자 격려를 잊지 않았다. 주변 모두가, 심지어 나의 가족도 내가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지만 아내는 날 지지했다. 좋은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이 목사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했다. 장모님의 반대도 매우 심했다. 당시 TV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내 이야기를 보시고, 내가 마약 중독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남편이 일찍 돌아가시고, 외동딸인 아내를 많이 의지하셨던 장모님의 입장에서는 나와의 결혼을 쉽게 허락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배필이라면 이 여자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당신의 사역을 같이 감당해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다. 아내와 장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수시로 찾아갔다. 지극한 기도와 설득 덕분에 마침내 마음을 돌릴 수 있었고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아내는 딸들의 신앙교육에 힘쓴다. 다행히 자녀들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잘 성장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신용원 (9) 중독자 사역의 가장 큰 좌절은 사람에 대한 실망
어머니와 아내의 응원에 시련 극복… 후원금·대출로 자활 위한 순대공장을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가족들이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뢰는 언제고 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다. 예수님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역을 하면서 맛본 가장 큰 좌절은 사람에 대한 실망이었다. 나를 찾아와 함께 머물던 중독자들을 신앙교육을 통해 치유하려 했지만 믿음의 뿌리가 없기에 쉽게 흔들렸다. 중독자끼리 모여 있다 보니 누군가 마약을 몰래 가지고 와서 다시 공급을 하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열심히 재활훈련을 하고 예배를 드리던 친구들이 마약의 유혹에 다시금 무너져 교도소로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더욱 속상한 것이 있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내가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누군가 체포를 당했다고 하면 목 놓아 대성통곡을 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지만 몇 번 동일한 일이 발생하니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약간 아쉬울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하다.
당시 찾아오는 이들을 더 이상 집에서 수용할 수 없어 인근에 조그만 공간을 얻었다.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교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 그곳에서 예배도 드리고 재활교육을 했다. 어느 날 철야가 끝나고 공동체 사무실에서 내려가는데 건물이 참 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가 처한 현실이 처량했다. 나름 의욕을 갖고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하는데 별다른 성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가 타고 낡고 더러운 계단이 나의 모습 같았다. 가치가 없어 보였다.
내가 기죽어 있으니까 아내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남편, 이 계단의 흔적이 부끄럽고 해어졌지만 기죽지 마세요. 기댈 곳 없고, 위로해 줄 사람 없는 이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은 하나님의 상급이에요.” 그 말이 참 위로가 됐다.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격려도 힘이 됐다. 어머니는 내가 방황하던 17세부터 34세까지 17년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를 위해 새벽기도를 하셨다.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처음엔 놀라셨지만 점차 든든한 응원군이 되셨고, 내가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때는 만세를 부르며 좋아하셨다. 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도 역시 “너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겠다”며 쉬지 않고 기도를 하고 계신다. 든든한 동역자로 서 있는 두 사람 덕분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았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재활을 위해서는 현실적인 문제가 뒤따랐다. 바로 돈 문제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내가 엄청난 부자이거나 후원을 넉넉하게 받는다면 재활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헌금을 낼 수 있는 형편들이 못됐다. 마약을 했다고 소문이 나면 아무리 끊었다고 말을 해도 재취업이 너무도 힘들다.
공동체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했다. 이들이 자립적으로 사업체를 운영한다면 이 역시 재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마약을 끊고 모여 함께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도 우리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특별한 기술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은 순대 공장이었다. 누구나 조금만 배우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약간의 후원금을 모으고 은행 대출을 받아 인근 시장에 100평짜리 순대 공장을 차렸다. 이들과 함께 순대를 만들어 납품을 하면서 차근차근 나아질 생활을 꿈꿨다.
***[역경의 열매] 신용원 (10) 순대공장·떡 판매사업 실패… 신용불량자 전락
‘마약중독자들이 만든 제품’ 의심받아… 옥상 올라가 “돈 필요해요” 눈물 기도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직업재활 사업장 ‘보리떡 다섯 개’에서 신용원 목사(앞줄 오른쪽)와 공동체 식구들의 모습
마약중독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내면의 회복이 일어나고 가정이 회복되는 것을 보며 많은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안된다. 그들은 어찌됐건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건강한 구성원으로 서야 한다. 직업재활훈련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야심 차게 시작한 순대공장의 출발은 괜찮았다. 나와 공동체식구들 모두 이 일에는 완전한 초보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순대를 만들어 납품하고 거래처도 점차 늘어났고, 공동체 식구들은 일하는 기쁨과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게 되는 보람을 다시금 느끼면서 행복해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언론사에서 찾아왔다. 마약에 중독 됐던 사람들이 약물의 유혹을 이겨내고, 순대를 만들어 팔고 있으니 충분한 이야기꺼리가 될 것이라 생각했었나보다.
인터뷰도 하고, 여러 가지 취재도 해갔다. 방송에도 소개가 됐다. 내심 기대를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관심을 끌어서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방송이 되고 난 후 오히려 손님의 발길은 뚝 끊겼다. 마약에 중독 됐었던 이들이 만드는 순대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강한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주변의 여론도 안 좋아졌다. 먹기가 찝찝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혹여 마약을 한 상태에서 순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았다. 마약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결국 이 주홍글씨는 지울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절망스러웠다. 결국 순대공장의 문을 닫았다. 마음을 잡고, 매일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망해야만 하느냐며 떠나가는 이들도 생겼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른 일을 또 해보기로 했다. 은행에 가서 방송에 나온 내 이력을 걸고, 담보도 없이 사정사정해 대출을 받았다. 빚을 얻어서 떡을 만들고 판매하는 가게를 차렸다. 떡을 교도소에 납품 하려고 생각했다. 마약사범이었던 이들이 중독을 극복하고 열심히 일해 만든 떡을 재소자들에게 전달하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심지어 떡에 몰래 마약을 넣어 재소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 아니냐는 오해까지 받았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업의 실패로 나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집도 경매를 당하는 등 어려움에 직면했다. 단 한 번도 물질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는데 하루는 너무 답답해서 옥상에 올라가 “나 돈이 필요해요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라며 울며 기도하기도 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헤쳐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고, 다시 재활사업에 도전했다. 전에 도전했던 떡 공장 재활사업장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이름은 ‘보리떡 다섯 개’. 민간시장을 대상으로 떡을 판매하고, 이곳에서 얻은 수익의 일부를 환원하는 사회적 기업 형태였다. 다행히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인천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안기획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되기도 했다.
앞서 2005년, 나는 세계마약퇴치의날 기념 국민근정포장을 수상했다. 엄청난 성과는 아니지만 나와 우리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됐다. 더욱 열심히 하라는 격려 같았다. 마냥 외면 당하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 참 외로웠는데 조금씩 인정을 받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다.
***[역경의 열매] 신용원 (11·끝) “마약 극복, 우리는 주님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직업재활·영적훈련 통해 중독 치유, 중독자들의 가로정비사업 큰 호응
신용원 목사(오른쪽)와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공동체’ 가족들의 모습. 신 목사는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예배하고, 일하며 서로의 든든한 지지자가 됐다”고 말했다.
우리 공동체는 마약중독자들을 대상으로 영적치료와 가족치료, 직업재활치료를 시도하고 있다. 중독자의 환경과 영성변화를 추구하고 결과적으로 진정한 회복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지한다. 구성원들은 수평적 조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친구가 된다.
영적치료의 핵심은 기독교 신앙생활을 통해 위대하신 하나님의 힘에 의한 영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매주 두 차례의 예배를 통해 회복을 돕고 본인이 희망하면 매일 일과가 끝난 후에도 영적 훈련 시간을 갖는다. 영적훈련을 통해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마약의 위험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한다.
마약중독자들에게 가족과의 관계 회복은 중요한 치료과업 중 하나다. 치료 과정에 그들의 가족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가정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 동병상련이어서 서로의 상황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네트워크는 중독자들의 재활을 위한 든든한 지지망이 된다. 중독자와 배우자, 자녀들이 함께 모여 야유회와 체육대회, 영화관람 등 다양한 단체활동을 하고 있다. 중독자의 배우자들이나 자녀들이 서로의 아픔에 공감한다. 또 다른 중독자 가정의 어린 자녀들을 돌보며 상호 지지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사회에서 소외받고 멸시받던 이들에게 ‘가족의 형성’이란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경험이다.
사회적 격리나 입원치료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부적응 문제를 직업재활치료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직업자활을 통해 중독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고 새로운 직업환경을 조성해 마약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 공동체는 2012년 ‘야긴앤보아스’라는 이름으로 인천시 가로정비사업 직업재활사업장을 개소하고, 현재도 지역 내 구두 수선대와 가로판매대 교체 작업 등을 하고 있다. 2014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가로정비사업을 담당할 사회적 기업을 물색하던 인천시가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제안을 해왔다. 청소년 쉼터 등에 떡을 나누는 사업을 벌이는 등 지난 시간 동안 지역사회를 위해 노력해온 점을 높게 산 것이다. 가로정비사업을 통해 모양이 제각각이고, 노후한 시설물을 표준 디자인으로 교체해 쾌적하고 편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그가 세우실 것이다’라는 의미의 야긴과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뜻의 보아스는 예루살렘 성전의 거대한 놋 기둥들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약중독을 극복한 이들이 사회의 건전하고 든든한 기둥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이름을 지었다. 마약중독자의 회복은 중독자들이 직업을 가지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지속될 수 있다. 대부분의 마약중독자들은 사회부적응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좌절감과 절망을 느끼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다시 마약의 유혹에 빠진다. 가로정비사업의 성과도 좋아 인천시는 지난해 행정자치부가 개최한 지방예산 효율화 우수사례발표대회에서 세출절감 부문 우수사례로 선정됐다.
돌아보면 삶의 순간이 역경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했으니 마냥 역경이 아니라 축복이라 할 수 있겠다. 대단한 성과를 이루거나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어찌 보면 이렇게 신문지면에 나의 이야기를 소개한 것이 부끄럽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사는 사람이기에 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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