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과 의령관문1
정암철교와 정암진교2
성곽과 옆의 정자3
의령관문4
의령관문의 누각5
의령관문 큰줄땡기기(무형문화재20호)(좌측).소싸움(우측)6
1800년대부터 풍년 농사를 기원하기 위해서 물아래와 물위를 구분하여 동군.서군으로
나누어 줄땡기기를 했다.길이205m.무게가 무려 70톤이나 되어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
임란 때 홍의장군이 기발한 유격전술로 왜군을 격퇴하였는데 강변에서 먼지를 일으켜
군사가 많은 것처럼 적을 속이기 위해 소싸움을 시키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다.
정암진 승첩도7
임진년 6월에 천여명의 왜군이 경상내륙과 전라도를 침공하기 위해서 정암진에
도착하였는데,때마침 장마철이 되어 이튼날 새벽에 강을 건너기 위해 높고 단단
한 강바닥을 골라서 표시하는 것을 탐지하고 곽재우 장군이 그 표식을 뽑아 진흙
밭쪽으로 표식을 바꾸어 유인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의병 창의도8
임진왜란 때 관군만으로는 왜적을 방어할 수 없게 되자 1592년 4월22일 유곡면 세간리
마을앞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민중들을 모아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곳으로 처음에는
10여명에 불과한 장정들이 첨차 인근지역 장정까지 합세하여 2천수백으로 늘어 났으며
신출귀몰한 전술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의령관문9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10
1552년 의령 유곡면 세간리에서 출생한 의병장으로 1585년(선조18년)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답안지 내용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고 해서 파방되었다.
15592년 4월14일 왕이 의주로 피난을 가자 4월22일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5월4일 기강전투의 첫 승리로 2천여명의 군사가 모였고 정암진에서 대승을 했다.
이 때 홍의를 입어 홍의장군이 되었으며 1차 진주성전투에 큰 보탬을 주었다.
정유재란 때는 영산.밀양.창녕.현풍 등지의 군사로 화왕산성을 굳건히 지켰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남아있다.
곽재우 의병장과 17장군 부조11
왼쪽부터1군관 조사남(위관급장교) 2기찰 심기일(헌병장교) 3치병 강언용(훈련교관)
4전군 허언심(군수담당관) 5돌격장 권란(특전장교) 6선봉장 심대승(대대장) 7수병장 오운(병력책사)
8영장 윤탁(연대장) 9의병장 곽재우 10도총 박사제(군무총괄책사) 11수병장 이운장(병력책사)
12선봉장 배맹신(대대장) 13독후장 정연(기무대장) 14조군 정질(해군장교) 15전향 노순(군수보급관)
16군기 허자대(무기제조관) 17복병 안기종9정찰대장) 18군관 주몽룡위관급장교)
정암진 승전도12
서기1592년 임진년 5월말 왜장 안국사혜경이 왜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전라도 침공을 위해 그 길목인
정암진을 도하하기 위하여 장군의 의병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는데장군은 늪지와 절벽으로 된 강
언덕지형을 이용하여신 출귀몰한 유격전법으로 왜군의 침략을 저지하고 격퇴하여 왜군의 전라도 침입
로를 차단하였으며 그후 왜군은 다시 정암진을 침입하지 않았다.이 곳이 의병전 사상 유명한 홍의장군
승전지 정암진 전투였다.정암진 전투는 단순한 왜군 격파뿐만 아니라 주요 수송로인 낙동강 수로를
차단하고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미리 저지하는 한편 우리군사에게 승리의 자신감을 안겨준 전략적인
큰 의미를 가진 승전이었다.
의령관문13
솥바위 분수 조형물14
정암철교(등록문화재639호)15
경남 의령과 함안사이 남강을 가로질러 설치한 근대식 트러스 구조의 철교이다.
1935년 준공되었으나 6.25 때 파괴되어 교각2개만 남아있던 것을 1958년 복원했
다.길이 259.6m.폭6m이며 정암나루가 있던 곳으로 옛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정암루16
정암루 현판17
정암(솥바위) 원경18
정암(솥바위)과 솥바위 전설19
의령의 관문이자 함안군과 경계를 짓는 남강(또는 정강)의 정암철교 아래 강물속에는 솥뚜껑
바위가 있으니 솥뚜껑 바위라고 한다.옛날 정암진은 도선장이고 임란 때에는 승첩지인 정암진
이다.솥의 발은 정보(삼정승).정갑(과거시험에 최우수로 뽑힌 세사람).정조(임금의 자리).정식
(진수성찬을 뜻하는 것으로 부귀를 뜻함).국운을 정운이라고도 표현한다.정암전설이 있는 정암
을 중심으로 8km이내에는 부귀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예로부터 공훈을 세워 벼슬과 시호
가 이어졌고 실제로 삼성.엘지.효성의 창업자가 태어나 전설이 진실이 된 곳으로 자손만대로
부귀가 끊어지지 않을 곳이라고 한다.지금도 솥바위를 보면서 기도를 하면 부귀.건강.사업 등
소원성취를 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어령여씨 향제시도록 및 시조제단비(宜寧余氏 享祭時到錄 및 始祖祭檀碑)(문582호)20
의령여씨 향제시도록은 시조제단비와 비각이 설치된 설치된 경위와 제향의 시행 등을 상세히
기록한 고문서로 현재 의병박물관에 보관중이다.또한 시조제단비는 余善才公을 제향하던 제
단으로 1807년에 세워졌다.비문은 김한동이 짓고 이의선이 썼다.묘소는 끝내 찾지 못했다.
의령관문과 홍의장군 동상21
정암진 힐링카페22
정암나루 가든23
의령 9경24
1경(충익사) 2경(897m의 자굴산) 3경(일붕사 봉황대) 4경(벽계 관광지) 5경(정암루-솥바위)
6경(임란 때 곽재우의 전승지 탑바위)
7경(신덕산 수도사-원효창건) 8경(백산 안희재생가.학문을 닦던 고산제) 9경(호암 이병철 생가)
이병철생가 마을의 벽화(우마차)25
이병철 생가 마을의 벽화(소싸움)26
호암 이병철생가(대문채)27
호암 이병철(1910-1987)선생이 태어난 생가지로 선생은 경주이씨 찬우공과 안동권씨 4남매중
막내로 탄생했다.1926년 박두을(박팽년의 후손)여사와 결혼했다.6세부터 조부가 세운 문산정
(문산 홍석공)에서 수학했다.1930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귀국후 1938년
삼성을 창업했다.삼성의 경영을 이어받은 이건희는 질 중시 신경영 창조경영을 바탕으로 일류
기업으로 삼성을 올려놓았다.풍수지리에 의하면 이집은 곡식을 쌓아놓은 듯한 노적봉형상과
남강의 물이 천천히 역수로 흐르기에 재물이 쌓일 수 밖에 없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호암 이병철생가(사랑채)28
호암 이병철생가(사랑채)29
호암 이병철생가(안채)30
호암 이병철생가(광.장독대)31
호암 이병철생가(사랑채.안채)의 풍광32
이병철생가 마을의 돌담 길33
중제고택(한옥스테이)34
생가 망개떡(방앗간 안지)35
망개떡은 가야시대에 가야와 백제가 서로 적대관계를 해소하고자 서로 혼인을 맺었는데,
이 때 신부측이던 가야가 이바지로 망개떡을 백제에 보냈다고 기록이 남아 있으며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산속으로 피해다니면서 먹던 떡으로 망개잎으로 싼 이유는 부패를
방지하고 흙이나 먼지가 묻지 않도록 함이었다.일본에서도 망개잎으로 떡을 싸는 풍습이
남아 있다.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부잣길(이병철생가가 있는 장내마을)36
삼성(이병철) 외에 엘지(구인회)와 효성(조홍제)가 인근에서 출생했다.
(2018.08.31)
첫댓글 홍의장군의 업적과 성곽 등 많은 볼거리를 올려 잘 보았네. LG(구인회)와 효성(조홍제)생가 인근에 있다면서 그 날 일정상 가 보진 못한 모양이네.
이병철생가 외에는 일정에 없었다네~시간이 있으면 가보면
좋을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