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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란 무엇인가?
민중서관에서 출판한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서는 윤리(倫理)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곧, 실제의 도덕규범이라는 원리 ․ 인륜(人倫)”이라고 풀이했다. 여기서 인륜(人倫)이라 할 때 ‘윤(倫)’의 글자는 사람亻=人?과 윤(侖)자의 결합이다. 윤(侖)은 책冊, 대나무패(=竹簡)?과 그것을 덮은 글자, 즉 합(合)자에서 입구(口)가 빠진 모양인 ‘모으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글자가 합성된 것이다. 따라서 윤(侖)은 ‘대나무패를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윤(倫)’은 사람인(亻)변이 있는 것에서 ‘질서가 잘 잡힌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동시에 윤(倫)은 ‘무리’를 뜻하는 유(類) ․ 배(輩) ․ 군(群)과도 통한다. 무리가 있으면 관습 ․ 습관 ․ 습속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질서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윤리(倫理)란 무리를 짓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그러면 이러한 윤리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아마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윤리를 질서라고 할 때 이러한 질서는 인류가 태어날 때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점차 집단을 이루면서 그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규범을 만들어내었으니 이것이 윤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이 규범을 만든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였으니 윤리는 성인이 나오면서부터 생겼다고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양과 서양이 다소 그 궤(軌)를 달리하고 있다. 즉 동양에서는 성인설(聖人說)에 근원을 두고 있는 반면 서양에서는 신설(하느님)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도 이는 원시시대의 자연발생을 지나 인간 자체의 인위적 질서 규범을 갖는 데서는 동일하다. 따라서 이때는 단순한 윤리라기보다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윤리학’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철학의 한 분야에 속하게 된다. 그러면 윤리학을 철학의 한 분야로서 그 의미를 살펴본 후 윤리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1. 철학으로서의 윤리학
철학은 전통적으로 형이상학(metaphysics), 인식론(epistemology, theory of knowled -ge), 논리학(logics), 그리고 윤리학(ethics)으로 구분되어왔다. 학자에 다라서는 여기에 미학(aesthetics)과 가치론(value theory)을 첨가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가장 두드러진 네 분야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형이상학은 존재, 본질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 마음과 신체, 우주의 원질 등에 관해 탐구한다. 다시 말해 형이상학은 “실재(reality)란 무엇인가?” “어떤 것(들)이 실재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해 탐구하는 철학의 분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이에 속한다. 즉 “실재란 어떤 사물(thing)과 같은 것인가?” “실재는 하나인가 아니면 다수인가?” “만약 실재가 하나라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 주변의 사물들과 연관되어 있는가?” “궁극적 실재는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오관)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는가 아니면 초월적(transcendent)인 어떤 것인가?”
둘째, 인식론이란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갖게 되는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지식(knowledge)이란 무엇인가?”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은 인식론적 물음이다. 이를 위해 인식론은 지식의 본성, 인간인식의 가능근거, 진리의 문제 등에 탐구의 초점을 맞춘다.
다음은 인식론의 구체적인 질문들이다. “우리는 어떻게 지식을 얻는가?” “우리의 감각이 지식을 얻는데 어떻게 공헌하는가?” “우리의 이성은 지식을 얻는데 어떻게 공헌하는가?” “우리가 어떤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형이상학과 인식론은 철학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형이상학 및 인식론적 질문, 즉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나는 실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근원적이기 때문이고, 둘째, 이 두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어떤 한 사람의 철학적 입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과 인식론이 철학 내에서 이론학이라면 윤리학은 실천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학은 행위나 행위와 관련된 판단에 관계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학은 도덕적 가치를 그 탐구대상으로 한다. 윤리학에서 제기하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도덕적 선(good) 또는 악(evil)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right)이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wrong)인가?” “절대적(absolute) 혹은 보편적(universal) 도덕원칙들이 존재하는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justify) 할 수 있는가?” “나는 부모님을 돌보아야만 하는가?” 등과 같은 것이다.
끝으로, 논리학은 올바른 추론을 위한 원리를 체계화하는 분야이다. 이를 위해 논리학은 개념, 개념들 사이의 관계 등에 관해 탐구한다. 논리학의 중요한 개념들로서는 타당성, 모순, 귀납, 연역 등이 있다. 논리학은 위에서 소개한 철학적 주제들(실재, 지식, 가치 등)을 탐구 할 때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도구(tool)이다. 이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논리학 책에 그리스어로 ‘도구’를 뜻하는 오르가논(organon)이라는 이름을 붙인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리논리학(mathematical logic), 기초 논리학(symbolic logic) 등이 등장하면서 논리학은 도구적 성격에서 벗어나 이제 그 자체로서 철학의 고유한 탐구분야가 되었다.
이 밖에도 탐구영역에 따라 철학을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 심리철학(phil -osophy of mind),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 종교철학(philosophy of religio -n), 정치철학(political philosophy), 법철학(philosophy of low), 교육철학(philosophy of education), 의철학(philosophy of medicine)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그리고 철학을 시대나 장소에 따라 동양철학, 서양철학, 고대그리스철학, 중세철학, 대륙의 합리론(rationalism),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 등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2. 윤리의 정의
우리가 윤리라고 번역하는 ‘ethics'라는 말은 원래 그 어원이 그리스어의 ’eth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관행 또는 특유의 습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동양에서 윤리를 무리를 짓고 살아가는데서 자연적으로 발생된 사람들 사이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관습, 습관, 습속을 뜻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윤리’라는 말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하다. 우선 우리가 한 개인이나 집단의 특수한 도덕관을 가리킬 때 우리는 ‘윤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 ‘윤리’는 때로는 전통윤리(동양의 유교윤리) 기독교윤리 등과 같이 포괄적인 삶의 방식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의사의 윤리, 변호사의 윤리, 정치가의 윤리 등과 같이 특정 직업인들 사이에 적용하는 규약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이런 의미의 윤리는 슈바이쳐의 윤리,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윤리 등과 같이 한 개인이나 특정시대 특정사회의 도덕관을 가리키는 표현들에서도 발견된다.
위와 같이 특정 개인 ․ 집단 ․ 시대 ․ 사회의 관행과 혼동되는 의미 이외에도, ‘윤리’라는 말은 윤리 또는 도덕과 관련된 주제, 경험 판단 등을 지정할 때에도 사용된다. 이러한 종류의 주제, 경험, 판단 등은 법, 종교, 예술, 과학, 경제, 스포츠 등과 구별되는 인간의 독특한 관심영역이다. 예컨대, 우리가 “인간 복제는 윤리적 논쟁거리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윤리를 이러한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윤리적’(ethical)이라는 표현은 그 의미에 있어서 ‘도덕적’(moral)이라는 표현과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이 두 표현들은 한쌍의 동의어로서, 필요에 따라 의미의 혼동 없이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이들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도덕과 관계없는’(nonmoral)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도덕이라는 말을 도덕과 관계있다는 의미로서 이해한다면 우리가 “인간복제는 도덕적 논쟁거리이다”라고 할 때 ‘도덕적’이라는 표현은 ‘윤리적’이라는 표현과 그 의미에 있어서 전혀 차이가 없다. 따라서 서양의 현대 윤리학에서는 윤리와 도덕을 의미와 사용에 있어서 구분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동양 윤리학에서는 윤리와 도덕을 의미와 사용에 있어서 구분한다. 즉 도덕은 본성적 자리로 변할 수 없는 것이고 윤리는 규범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윤리라는 또 다른 의미는 우리가 칭찬할만한 인물을 지칭하거나 도덕으로 올바른 판단이나 행위를 가리킬 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료들 중 어떤 사람의 행위가 윤리적”이라고 말하거나 “데레사 수녀는 윤리적인 사림이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러한 의미의 윤리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비윤리적(unethical)’이라는 것과 ‘비도덕적(immoral)’이라는 것의 표현들에 반대되는 것이다. 끝으로 ‘윤리학’에서는 ‘윤리’는 그 의미에 있어서 위의 어떤 것들과도 같지 않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도덕 그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도덕에 관해서(meta ; about)철학적인 방법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윤리학의 관심은 규범들의 보편화 가능성(universalizabilitly)의 여부, 즉 문제의 규범들이 특정개인이나 집단, 특정시대나 특정문화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계약들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지닌 윤리적 규범들이 될 수 있는 지의 여부를 묻는데 있다. 비록 ‘윤리학’에서의 ‘윤리’가 그 의미에 있어서 독특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 의미를 혼동하는 일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의미의 윤리는 오로지 ‘윤리학’이라는 표현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와주라”는 명제에 관해 생각해보자 . 이것은 -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 분명 하나의 윤리적 명제이다. 우선, 도덕과 관계있다는 의미에서 윤리적 명제이다(윤리의 두 번째 의미).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다면 우리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 될 것이므로 여기서 윤리는 세 번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명제에는 우리의 관습이 반영되어 있다.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돕는 것은 이 사회에 사는 우리 모두가 준수하기를 요구받는 하나의 관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이 명제가 하나의 법률의 내용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곤경에 처한 자를 도와야만 한다는 윤리적 ․ 관습적 부조의무를 하나의 법적의무로 간주하는 국가들(독일, 오스트리아)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처럼 그것을 법적의무로서 요구되지 않는 나라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3. 철학에서 윤리학의 위치
우리는 앞에서 윤리학이 철학의 한 분야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윤리학 내의 구분에 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윤리학은 “도덕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로 정의 할 수 있다. 여기서 도덕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도덕에 관하여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과 구별된다. 도덕에 관한 과학적 탐구는 흔히 기술윤리학(descriptive ethics)이라고 불린다. 기술윤리의 목표는 도덕에 관한 경험적 지식을 얻는 것이다. 기술윤리학자의 임무는 현존하는 도덕관들을 기술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설명해내는데 있다. 이 도덕관들에 의해서 다양한 도덕현상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사회과학자들이나 행동과학자들에 의해서 설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철학의 한 분야로서의 윤리학은 이러한 기술윤리학과 구별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글에서의 ‘윤리적’이라는 표현은 기술윤리학이 아닌, 철학의 한 분야를 말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흔히 이러한 윤리학을 규범윤리학(normative ethics)과 메타 윤리학(meta ethics)으로 세분된다. 규범윤리학에서 철학자들은 어떤 행위에 대해 규범윤리학을 통해 도적으로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를 결정하려한다. 한편, 메타윤리학에서 철학자들은 도덕 판단들의 본성을 분석하거나 특정한 도덕 판단의 정당화를 위한 방법들을 규정한다. 기술윤리학이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도덕관들을 기술하고 설명하려는데 반해서, 규범윤리학은 도대체 어떤 도덕관들이 정당화 될 수 있으며 따라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지를 보이려고 시도한다. 규범윤리학은 다시 이론 규범윤리학(general normative ethics)과 응용 규범윤리학(applied normative ethics)으로 나누어진다. 이론 규범윤리학의 과제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를 통하여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그른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주는 하나의 이론을 확립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응용 규범윤리학은 특정한 도덕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예를 들자면, 임심중절(abortion)이 도덕적으로 정당화 되는가, 만일 정당화 된다면, 어떤 조건들 아래서 그렇게 되는가?
위의 구분들에 비추어 본다면 한의학의 의료윤리는 이론 규범윤리학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현대 서양의학의 의료윤리는 응용 규범윤리학의 성격을 띠고 있다. 현대 서양의학 윤리학의 과제는, 의료행위나 의료적 연구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문제들 외에도 인간 삶의 다른 측면들과 관련되어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들이 존재하는 까닭에, 응용윤리학에는 의료윤리학 말고도 다른 분야들이 있다. 예를 들면, 기업윤리학(business ethics)은 상거래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또한 환경윤리학(environmental ethics)의 과제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응용윤리학은 분야를 막론하고 그 논의의 성격이 규범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특정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가? 응용윤리학에서 우리의 관심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관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이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다만 기술적(記述的)인 일이다. 오히려 응용윤리학의 관심은, 이론규범윤리학에서와 같이, 어떤 도덕관들이 정당 한가 아닌가를 증명하는데 있다.
4. 윤리와 과학
윤리가 처방적(prescriptive) 성격을 띠고 있다면 과학은 기술적(descriptive)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 처방적이라는데 대해 기술적이라는 구분은 대상에 의한 구분이라기보다는 그 방식에 따른 구분이다. 비록 이것이 동일한 적용 또는 탐구의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 방식에 따라 처방적이 될 수도 있고, 기술적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도덕에 관해 과학적 탐구 방식을 취하는, 흔히 기술윤리학(descriptive ethics)이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해 보자. 기술윤리학의 목적은 도덕에 관한 경험적 지식을 얻는 것이다. 기술윤리학자의 임무는 현존하는 도덕관들을 기술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설명해내는데 있다. 이 도덕관들에 의해서 다양한 도덕현상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사회과학자들이나 행동과학자들에 의해서 설명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왜 특정 개인은 그토록 엄격한 성(性)도덕관을 가지고 있는가? 이에 대해 어떤 심리학자가 그 개인이 겪었던 유년기의 경험들을 토대로 하나의 설명을 시도 할 수 잇을 것이다. 또한, 왜 어떤 특정집단은 의사조력자살(physician assisted suicide)을 그토록 강력히 지지하는가? 어떤 사회학자는 문제의 그 집단을 조사해 보고 나서 다음의 요인들에 근거한 하나의 설명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즉,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해 왔고, 그리고 그 집단의 대다수가 비종교인이라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이 윤리가 처방적이라는데 반해 과학이 기술적이라면, 윤리는 과학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과학과 윤리는 그 목적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학의 목적이 탐구대상에 관한 경험적 지식을 얻는데 있다면, 윤리(관습과 법까지 포함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데 있다. 과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고 해서 반드시 윤리적 문제들에 관해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생활에서 과학과 윤리는 서로 분명하게 다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분야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말기 암 환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말기 암 환자의 고통이 너무 심하고 또한 회복될 가능성이 적을 때 그 환자의 주치의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환자에게 치명적은 어떤 약물을 처방할 것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학의 한 분야인 의학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생각이다. 의학적 사실과 그 약을 투여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그 약을 투여해야 할지를 윤리적인 관점에서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의학적 사실에 관한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비록 과학과 윤리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윤리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과학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실제로 그 약을 투여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한 결정은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관점에서 판단해야만 한다. 이처럼 과학은 기술적이고 윤리는 처방적이므로 과학지식을 올바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윤리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5. 윤리와 법
윤리가 자율적이라면 법은 보다 강제성을 띠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 발달과정에서 윤리는 법에 앞선다. 따라서 법에는 윤리의 많은 부분이 수용되어 있다. 자유의 불가침성, 생명의 신성성, 계약이행에 대한 신뢰 등 윤리에 침전되어 있는 공동체의 근본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법의 중요한 임무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따라서 많은 경우에 법은 윤리와 그 내용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한다. 예를 들어,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은 곧 법의 내용이 된다(형법 제 250조).
그런데 법과 윤리가 그 내용에 있어서 일치하지만, 관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낙태금지는 생명을 존중하라는 도덕적 규범인 동시에 법적 규범(형법 제 269조, 270조)이지만, 낙태금지 규범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편, 법과 윤리의 내용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 증인의 교리처럼 특수한 윤리규범은 관습이나 법에 의해 수용되어 있지 않으며, 자동차가 도로 우측을 통해야 한다는 법규는 관습이나 윤리적 이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더구나, 법과 윤리는 그 적용이 지리적 범위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대개 법은 한나라의 국경 내에서만 그 효력을 갖는 반면, 윤리적인 이슈들 중 어떤 것들은 국경을 넘어 세계적인 차원의 문제가 된다. 그러한 예로서는 인터넷상의 음란문제를 들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인터넷 음란물의 제작 ․ 유통 ․ 소비를 처벌할 수 있는 엄격한 법규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 미국에서 제작되어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어 인터넷 음란물들은 국내법에 의해 처벌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상의 음란물 문제는 여전히 국제적인 윤리적 이슈로 남아있다.
법이 관습과는 달리 윤리와 비슷한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윤리 규범들이 법규보다 더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윤리는 법을 비판할 수 있는 반면, 법은 윤리를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정부가 법에 의하여 한 시민을 구속할 때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는 윤리적인 원칙을 가지고 그 법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인 원칙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법으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윤리 원칙들을 가지고 그것을 비판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윤리는 법에 의해 교정되는 것이 아니라 윤리 자체에 의하여 스스로 바로 잡혀지는 것이다. 윤리와 법이 일치하는 경우 법이 특정한 행위에 대하여 평가 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 예를 들어, 인공호흡기가 한대뿐인 병원에 이것을 필요로 하는 두 명의 응급환자가 동시에 입원하였고, 두 환자 모두 다른 병원에 이송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의사는 그 중 한 환자만을 구하고 나머지 한 환자는 죽게 방치할 수밖에 없다. 이때 의사가 어떤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사용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법은 명령할 수 없다. 달리 표현하면, 인공호흡기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환자를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지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료법 제16조나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4조가 의사의 응급의료 의무를 규정하고 있고, 형법 제 250조가 부작위행위에 의한 살인죄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행위나 선택이 적법하고, 어떤 행위나 선택이 위법한 것인지를 말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행위에 대해 법이 적법과 위법의 평가를 포기하는 영역이 존재하고, 이러한 영역에서의 판단은 윤리의 처분에 맡겨진다.
일반적으로, 이해관계가 다른 사회적 집단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윤리적 규범이나 도덕에 의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법적 규제이다.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다원화되고 이해관계의 대립도 첨예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윤리적 규범이나 도덕으로 갈등을 풀어나가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의료분야에서 윤리적 판단이 지배하던 부분에 법적 개입이 증가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윤리적 영역이 법적 규제로 대체되는 현상의 배경에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과학기술의 발달로 과거보다 훨씬 더 위험도가 큰 시술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 의료부문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증가하였으며, 이는 여러 가지 법적 개입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의료분야의 갈등을 손쉽게 법적개입 혹은 법제화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이러한 원론적인 이유 외에도 우리나라 의료계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이에 걸맞은 새로운 윤리적 입장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사회와의 대화 가운데 그것의 해결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사회는 의료인의 윤리적 의무와 법적의무를 혼동하여 윤리적 의무를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법적 개입 또는 법제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의 열쇠는 아니며 여러 가지 부작용을 수반하게 된다.
6. 윤리와 관습
어원적으로 ‘윤리’(ethics)라는 말은 관습을 의미하는 라틴어 ‘mores’에서 유래했다. 윤리와 관습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윤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관습의 세련된 형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미개인들의 관습과 문명인들의 도덕 사이에는 오직 발달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근본은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도덕판단이란 우수한 관습을 대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가장 세력 있는 관습에 일치하는 행위는 ‘옳은’ 행위인 반면 그렇지 않은 것은 ‘그른’ 행위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과는 달리, 관습과 윤리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윤리와 관습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자.
관습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인간들은 옛날부터 집단을 이루고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왔다. 집단생활에서 한 개인의 행위는 그 행위자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집단의 공동이익과 타인에 대해 서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같은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행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마련이고 그들의 행위가 집단 또는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에 따라서 ‘옳다’ 또는 ‘그르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함께 어울려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회에서는 부지런한 사람이 칭찬을 받는 반면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공동작업으로 사냥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족속의 사회에서는 날쌔고 용감하게 사냥을 하는 행위가 칭찬을 받는 반면 굼뜨고 비겁한 행위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거짓말, 도둑질, 욕심부림 따위의 행위들은 ‘해서는 안 될 행위’로써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고, 정직함, 자기희생, 이웃돕기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 ‘마땅히 해야 할 행위’라는 고정관념이 형성된다. 이렇게 고정관념이 생기고 그것이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힘을 갖게 되면 그 고정과념은 사회규범(social norm)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된다. 사회생활의 진행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규범 가운데 가장 소박한 것이 관습(mores)에 해당한다. 이러한 관습은 이미 개인의 의지를 초월하는 것이며,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는 구속력을 갖는다.
그런데 관습보다 더 근본적이며 중요한 규범은 윤리이다. 우리는 관습 가운데서 존중해야 할 것과 타파해야 할 것을 분간해야 할 경우를 경험하는데, 이런 경우에 윤리는 관습을 평가하는 합리적 ․ 반성적 기준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참된 윤리가 요구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거나 조화되기 어려운 관습은 올바른 사회규범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없다. 관습은 합리적 반성(rational reflection)의 산물이기 보다는 단순히 오랜 내력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는 사회규범으로서, 더러는 불합리성 내지 맹목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남자들은 두 번 절하고 여자들은 네 번 절하도록 되어 있는 예법 따위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반해 윤리는 합리적 ․ 반성적 근거를 그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습보다 높은 권위를 인정 받게 된다.
한편, 어떤 사회규범은 그것을 관습과 윤리 중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옳을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사촌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 규범을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합리적 근거를 가진 윤리라고 보아야 할지 그 판단이 쉽지 않다. 아마도 많은 한국인들은 그것을 윤리라고 보아야 옳다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러나 사촌 사이의 결혼이 허용되는 나라 사람들은 한국에서의 사촌 간 결혼 금지를 단순한 관습에 불과하다고 여길 것이다.
7. 윤리적 판단기준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서 어떤 기준 또는 어떤 윤리학적인 학설을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판단자의 철학에 따라서 결정된다. 윤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의료 윤리적 문제의 판단에 적용하는 학설들 자체에 대한 비판이 오갔다. 그러한 학설들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들 수 있다. 공리주의는 전체적으로 보아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가에 따라서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개인에게서나 인간관계에서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는 언제나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는 중국의 묵자(墨子)와 영국의 벤담(Jeremy Bentham), 밀(John Stuart Mill)의 철학에 바탕을 둔다.
공리주의적 추론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자동차가 한 대 밖에 없는데 친구와 내가 동시에 그 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누가 그 차를 타고 갈 것인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공리주의에 따르면 두 사람 중에 이 차를 이용해서 더 큰 이익을 얻는 사람이 타고 가야 한다. 문제의 두 사람 중 A가 10㎞를 가야 할 뿐만 아니라 가야 할 곳이 언덕이라서 그 차를 타지 않는 경우 걷는데 상당한 고통을 받아야 하고 또한 약속시간에 늦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자. 반면, 다른 한 치구 B는 4㎞ 밖에 되지 않은 거리이고, 길도 비교적 평탄하며 몇 분쯤 늦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하자. 이때 공리주의는 A가 차를 타고 가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A가 차를 타고 가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불이익이, B가 차를 타고 가지 않음으로써 얻는 불이익보다 크기 때문이다. 공리주의는 행위수용자(moral patient)에게 초점을 맞춘 윤리학설이다. 즉 결과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은 행위수용자에게 좋은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한편, 도덕행위자(moral agent)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윤리학설이 있다. 이것은 결과보다는 행위자가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윤리적인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을 의무론(deontology)이라고 부른다. 의무론에 따르면, 어린이를 양육하는 이유는 그 어린이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무론은 복잡한 상황에서는 여러 의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결정하고 거기에 따라서 행위 하라고 말한다. 이 학설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는 도덕행위자의 자율성(autonomy)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C라는 사람이 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지만 아직 의식이 분명하다면 의무론에서는 그 환자의 의견(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 환자가 치료를 중단하고 죽게 내버려 두어주기를 원한다면 의사는 그 환자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무론의 선구자는 18세기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Immanuel Kant)이다.
세 번째 학설은 공리주의와 의무론이 둘 다 윤리적인 상황에서 지나치게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 학설은 ‘덕윤리’(virtue ethics)이다. 공리주의에서는 행위수용자의 이익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반면에, 의무론에서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위의 두 학설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나 법칙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도덕행위자의 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이것도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는 의무론과 비슷하다. 그러나 의무론은 어떤 의무 또는 어떤 규칙을 따를 것을 주장하는 반면, 덕윤리에서는 행위자의 미덕을 강조한다. 미덕은 습관과 비슷하다. 덕윤리는 인간의 교육과 관계된다. 가능하면 조기에 교육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좋은 습관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덕윤리의 장점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덕윤리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동양에서는 공자(孔子)를 들 수 있고,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학설은 권리이론(Right-based theory)이다. 이 학설은 의무론과 가장 밀접하다. 그 이유는 두 기준 모두가 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전적으로 행위의 결과로 판단하는 공리주의 입장과 반대되기 때문이고, 두 기준 모두 규칙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기준의 다른 점은 의무론에서는 도덕행위자의 의무를 중요시하는 반면, 권리이론에서는 도덕행위자나 행위수용자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권리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권리론자로서 미국의 철학자 룰즈(John Rawls)를 들 수 있다.
8. 윤리적 상대주의와 윤리적 절대주의
윤리적 상대주의(ethical relativism)란 사회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즉 어떤 사회에서는 윤리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는 한 행위가 다른 사회에서는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 상대주의 주장을 하나의 논증으로 재구성한다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대전제 : 윤리란 문화의 산물이다.
소전제 : 사회에 따라 문화는 서로 다른다.
결론 : 따라서, 윤리는 사회에 따라 다르다.
윤리적 상대주의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이 웃어른에게 손만 내밀면서 악수를 청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지만, 미국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이러한 윤리적 상대주의를 뒷받침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예로 들어지는 것이 에스키모 종족의 관습이다. 그들은 아주 귀한 손님이 자기 집에 묵고 갈 경우, 아내를 그 방에 들여보낸다고 한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혼외정사이므로 도덕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데, 그들에게는 이러한 관습이 손님에 대한 가장 극진한 대접이라 한다. 이러한 예는 사회적 관습이나 배경에 의해 윤리적 기준이 차이가 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윤리적 상대주의이다.
이와 같이 윤리적 상대주의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하나의 도덕적 표준이나 규칙이 모든 도덕행위자들에게 두루두루 타당하다는 규범윤리학(normative ethics)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만약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이 어떤 개별적인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도덕률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고 또 도덕규범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상적 도덕체계를 세울 수 있는 불변의 범문화적인 원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규범윤리학의 목적이 바로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체계를 세우고 또 옹호하는 것이므로 도덕규범의 상대성을 믿는 다른 것은 바로 규범윤리학의 모든 탐구활동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상대주의는 도덕적 가치가 특정한 개인이나 사회에 의존해 있지 않다는 윤리적 절대주의와 대비된다. 윤리적 절대주의(ethical absolutism)에 따르면, 도덕적 가치란 개인이나 문화로부터 독립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개인이나 문화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도덕규범이 현실적으로 엄연히 존재한다는 견해이다. 윤리적 절대주의는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윤리가 사회나 문화에 상관없이 항상 동일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만약 인간이면 누구나 추구해야 마땅한 삶의 목표가 정해져 있다면, 그 보편적 목적이 보편적 윤리의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적합한 행위는 옳은 행위로써 평가될 것이며 반면, 그 목적에 위배되는 행위는 그릇된 행위로써 평가된다.
윤리적 절대주의는 다시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 목적론(teleology)에 입각한 윤리적 절대주의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헤겔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이면 누구나 추구해야 마땅한 삶의 목표가 주어져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보편적 윤리의 원리를 제시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들은 삶의 궁극적 목적을 인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은 이미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런 뜻에서 그들이 제시한 삶의 목적은 절대성(絶對性)을 가졌다고 주장한 것이며, 우리는 그들을 목적론에 입각한 윤리학적 절대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의무론(deontology)에 입각한 윤리적 절대주의이다. 칸트, 버틀러, 프라이스, 프리차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에 따르면, 우리 인간에게는 사람인 이상 누구나 마땅히 지켜야 할 행위의 법칙이 주어져 있다. 그 법칙은 인간이 편의를 따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추월하여 미리 주어진 것으로서 절대불변 하는 것이다. 그 절대적 법칙이 구체적으로 어떤 조목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을 인간에게 준 것이 누구이냐에 관해서는 이들 의무론에 입각한 윤리적 절대주의자 사이에서도 여러 견해가 대립된다. 그러나 행위의 옳고 그름을 선천적으로 주어진 도덕법칙에 비추어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의견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윤리적 상대주의와 윤리적 절대주의 간의 논쟁은 오래된 논쟁이며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윤리가 문화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부인하는 윤리적 절대주의자들은 윤리적 상대주의자들이 이미 윤리가 상대적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전제(presuppose)하고 있다고 공격한다. 이에 대한 윤리적 상대주의자는 실제로 윤리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입론(thesis)을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절대주의는 의견을 달리한다. 문화에 따라 윤리가 다른 것은 윤리규칙이 다른 것이지 궁극적인 윤리원리나 기준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약속을 지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라는 도덕 판단은 시대나 사회 혹은 문화 등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는 말이다. 이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윤리적 절대주의는 윤리적 보편주의(ethical universalism)라고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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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과학 종교 윤리의 대화』. 서울; 궁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