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씨 (固城 李氏)/이우(李瑀)1259년(고종 46)∼1340년(충혜왕 복위1) 추정.고려의 문신.시호: 문헌(文憲), 철성군(鐵城君)
이우(李瑀)1259년(고종 46)∼1340년(충혜왕 복위1) 추정.고려의 문신.
시호: 문헌(文憲), 철성군(鐵城君) 문중자료
이존비 장남으로 충렬왕 시절 귀족자제들과 함께 독로화[뚤루게]로 차출되어 원나라에서 생활했다. 부친이 사망할 때까지 원나라에서 귀국하지 못한 채 근시낭장(近侍郎將)을 역임했다. 20대 초반에 입조하여 약 8년 원나라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귀국 후 회양(淮陽)과 김해(金海) 전주(全州) 진주(晉州)의 지방관을 거쳤다가 말년에 봉군되었다. 충숙왕 복위로 아들 이암이 파직 당하자, 연루되어 고향인 고성으로 귀향형에 처해졌다. 이 시절 고성에 설묘된 조부 진(瑨)의 유택이 보존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아버지 이존비와 어머니 익산 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함양 박씨와의 사이에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 행촌 이암과 차남 도촌 이교는 문과에 올랐고, 삼남 이징은 숙부 각진국사의 뒤를 이어 출가하였다.
충렬왕 5년(1279) 독로화(禿魯花 = 뚤루게)로 임명되어 원나라에 파견되었고, 그 후 1332년에 충숙왕이 복위하면서 전대의 왕이었던 충혜왕 측근들을 몰아낼 때 아들 이암이 폐행으로 지목되면서 함께 파직되어 전리(田里)로 귀향(歸鄕) 하였다. 이우에 대한 자료는 매우 빈약한 편인데, 이는 그가 오랜 기간 동안 원나라에서 인질생활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급제공 이진 및 철성군 이우 부부 묘비(경남 고성 웅곡)
고려는 몽고와의 전쟁 중에 벌어진 여러 가지 요구들 중에 인질 제공만을 받아들여, 1241년(고종 28) 처음으로 왕족 영녕공 준(永寧公綧)을 비롯한 귀족 자제 10인을 몽고에 파견하였고, 이후 1271년(원종 12)에도 추가로 보내는 등 굴욕을 겪어야만 했다. 이를 독로화 또는 몽고어로 뚤루게라 불렸는데, 귀족자제들이 선발되기를 꺼리자 충렬왕은 특별히 3등급을 올려 수직(授職)하여 보냈지만, 이들 중 소수는 유력자들에게 청탁해 곧 귀국한 경우도 있었다.
충렬왕이 즉위한 후인 1275년에 왕족인 대방공 징(帶方公澂)과 의관자제 10명을 독로화로 보냈지만, 원에서는 이들이 의관자제가 아니란 이유로 돌려보내기 까지 하는 등의 마찰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1278년 충렬왕이 원에 친조(親朝)해 다루가치 폐지와 원병 철수, 홍다구(洪茶丘) 소환 등을 요구해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원은 고려에 대한 간접적인 통제 수단으로 자격 조건을 더욱 강화한 고려 권력자 자제를 인질로 요구하게 되었고, 이 때 이존비의 아들 이우도 징발 대상이 되었다.
그 면면을 보면, 당대의 이름 있던 김방경(金方慶)·원부(元傅)·박항(朴恒)·허공(許珙)·홍자번(洪子藩)·한강(韓康)·설공검·김주정(金周鼎) 같은 고위 관직 자제들이 대거 선발되었고, 대방공 징(帶方公澂)과 함께 원에 보내졌는데, 모두 현직에서 3 등급씩 올려 임명하여 보냈다.
독로화로 파견된 인물 가운데는 안향(安珦)·박전지(朴全之)처럼 원나라에서 문명(文名)을 떨친 이도 있었고, 한사기(韓謝奇)처럼 가족을 이끌고 원에 들어가 그 곳에서 출사(出仕)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린 나이에 이국 땅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우 역시 충렬왕 5년(1279)에 인질로 원에 들어가 한 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본국에서의 문과 응시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무반으로 입신하여 충렬왕 13년(1287) 이존비가 사망할 당시까지도 원나라에서 귀국하지 못한 채 근시낭장(近侍郎將)을 역임했고, 대략 20세 초반의 나이에 입조하여 약 8년 정도 원나라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나라에서의 역할은 근시낭장(近侍郎將)으로 궁전배(弓箭陪)였다. 궁전배란 원 간섭기에 원나라에 인질로 들어간 왕자를 호위하는 역할을 했던 무신을 말한다. 이우는 충렬왕 13년(1287) 1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본국으로 돌아와 부상(父喪)을 마치고 이후로는 본국에서 장군(將軍)으로 근무했다. 김방경의 아들 김흔(金忻)은 독노화로 원나라에서 같이 숙위(宿衛)한 사이로 지우지감(知遇之感)이 돈독하였다.
충렬왕 25년(1299) 정월, 충렬왕 측근들의 참소로 인하여 왕과 아들 충선 간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그런 가운데 ‘중 일영(日英)이 찬성사 한희유(韓希愈)와 상장군 이영주(李英柱)가 반역(反逆)을 모의(謀議)한다’라는 제보가 있었다. 인후(印侯)와 김흔(金忻) 등이 군대를 출동시켜 한희유와 이영주를 붙잡아다가 마침 고려에 와 있는 원나라 좌정승(左政丞) 합산(哈散)에게 고발하여 문초케 하였다. 한희유 등은 끝내 죄를 시인하지 않았고, 제보자였던 중 일영은 달아나버렸다.
인후와 김흔 등이 이 사건을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하려 하자, 충렬왕은 그 일을 덮어두어 무마하려 하였다. 2월 무오일에 원나라 좌정승 합산은 귀국했고, 한희유와 이영주를 섬으로 귀양 보냈다. 그럼에도 만호(萬戶) 인후와 김흔·원경(元卿), 상장군 강수(姜裋), 대장군 김칠초(金七貂), 장군 환정(桓貞)과 이우(李瑀), 소윤 민적(閔頔) 등은 원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한희유 등을 반역죄로 고발하였다.
그러자 충렬왕도 판삼사사 정인경(鄭仁卿)과 판통례 유거(柳裾)를 원나라에 보내어 인후의 고소가 허망한 것임을 변명하였다. 원나라에서는 탑해활활불화(塔海闊闊不花) 등을 고려에 파견하여 한희유·이영주·원경 및 판밀직 유비(유청신), 도평의록사 송지한(宋之罕) 등을 잡아갔다. 조사 결과 한희유 등의 죄는 무고로 밝혀졌다.
한희유는 다시 정승으로 기용되어 총애를 받았다. 이우가 본국에 돌아 온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인후와 김흔 등은 충렬왕 32년 7월 도첨의 좌중찬 한희유가 죽을 때까지 약 7년간 원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 33년(1307) 정월, 원나라에 머물던 충선(忠宣)이 동지밀직 김문연(金文衍), 상호군 김유(金儒)를 보내어 인후(印侯)·김흔(金忻)을 비롯한 80여 명에 대한 인사발령을 하였다. 이듬해 8월 충선왕이 즉위하자 교서에서, 우리나라에서 무뢰한들이 난을 꾸미려고 할 적에 만호 김흔은 만호 인후와 더불어 능히 미리 그 음모를 탐지하여 난을 방지할 수 있었으니 그 공로가 상 줄만 하다. 특별히 기록하고 등용할 것이라고 한 바가 있었다.
김흔과 함께 원나라에 갔던 이우는 51세가 되는 충렬왕 33년 정월에 회양부사(淮陽府使)에 오르고 이어서 김해부사(金海府使), 전주목사(全州牧使),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역임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업적(業績)을 남기었다. 《진양지(晉陽誌)》에서 ‘이우(李瑀)는 고려조에 목사(牧使)로 와서 선치한 명환(名宦)으로 재간(才幹)이 있어 사신(使臣)으로 갔는데 유애(遺愛:남긴 업적)가 있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충숙왕(忠肅王)이 복위하여(1332) 아들 암(嵒)이 섬으로 귀양 보내질 때 부자(父子)의 연좌로 아버지 우(瑀)도 함께 현직에서 파직(罷職)되어 전리(田里)로 보내지는 귀향형(歸鄕刑)에 처해졌다.
경남 고성읍(固城邑) 서외동 145번지, 고성이씨선세유허(固城李氏先世遺墟)는 73세였던 이우가 귀향형으로 낙향(落鄕)하여 여생(餘生)을 보낸 집터이다. 고성군(固城郡) 회화면(會華面) 봉동리 1219번지 금봉재(金鳳齋)의 고성이씨선영(固城李氏先塋)은 이우의 조부 진(瑨)과 본인 내외(內外)분의 유택(幽宅)이다.
이우의 부인은 무반으로 입신했던 함양 박씨 박지량(朴之亮)의 딸이다. 박지량은 원종 12년(1271)에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가 되어 경상도를 지켰고, 충렬왕이 즉위한 1274년에 려몽연합군의 김방경(金方慶) 휘하에서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참전하였던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관군천호(武德將軍管軍千戶)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어 2차 일본 정벌에도 참여하였으나 태풍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돌아왔고,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288년에 동북면병마사가 되었고, 이듬해 경상전라도순문사가 된 뒤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후 철령을 넘어오는 적들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이존비의 장남으로 태어난 철성군 이우는 부인 함양 박씨와의 사이에 아들 행촌 이암과 도촌 이교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여 고성 이씨 가문을 더 큰 명문가 세족 반열에 오르게 하였다.
이암과 이교, 이징 등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는데, 이우의 사위였던 하즙(河楫)은 진주 하씨로 충숙왕 11년(1324)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우왕 대에 찬성사로 치사(致仕)한 후 진주군(晉州君)에 책봉되었다. 아들 하윤원(河允源) 역시 충혜왕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에는 경성수복 2등 공신이 되었고, 신돈에게 끝까지 아부하지 않아 후세에까지 칭송을 받았다. 하윤원의 아들 하자종(河自宗)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등과 교유했던 학자이자 문신 관료였는데, 그의 아들 5형제 중에 세종 때 명망 있는 정승으로 이름 높았던 하연(河演)이 뛰어났다.
이우의 또 다른 사위 윤보(尹寶)와 호군 김상(金鏛)이 있고, 막내 사위 이사정(李思正)은 행적이 크게 알려진 게 없으나, 조선 초 이방원을 왕좌에 오르게 하는 데 1등 공신이었던 이숙번(李叔蕃)이 그의 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