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백(李白)은 대문장가로 한 번 글을 쓰면 단숨에 쓰되 글을 수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율곡 이이(李珥)는 자기를 흠모하는 기생 유지(柳枝)와 밤새워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새벽녘에 자신의 마음 속 생각을 단숨에 글로 써서 유지에게 주었다. 일명 유지사(柳枝詞)이다. |
▶유지사(柳枝詞) - 율곡 이이(李珥)가 유지(柳枝에게 준 글
이이(李珥)가 황해도 해주에 관찰사로 있을 때 어린 기생인 유지(柳枝)가 이이의 시중을 들었다. 유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듯 아름다웠으나 12세에 지나지 않아 동침을 할 수 없었다. 이이는 유지에게 따뜻한 마음의 정을 느꼈지만 곧 헤어졌다. 유지는 이이의 학식, 고귀한 인품에 매료되어 이이에게 연모의 마음을 갖고 그리워 했다. 그 후 9년이 흘러 이이는 요양 차 들렸던 누나 집에서 다시 유지를 만난다. 유지는 이제 재주와 자태가 더욱 성숙해 있었다. "너의 재주와 자태는 심히 고우나 다만 한번 동침하면 의(義)상 마땅히 집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데, 이것이 심히 어려운 일이므로 할 수 없다." 이이 유지와 새벽까지 이야기를 하고 일명 유지시(柳枝詩)라는 글 지어 주었다. |
柳枝士人女也(유지사인여야) : 유지는 선비의 딸이다.
落在黃岡妓籍(락재황강기적) : 집안이 몰락해 황강(黃岡·현재의 황주) 관아의 기생으로 있었다.
余按海西時(여안해서시) : 내가 황해도(海西) 관찰사로 갔을 때
以丫鬟爲侍妓(이아환위시기) : 동기(童妓:어린 기생)로 내 시중을 들었다.
纖細妖冶貌秀而心慧(셈세요야모수이심혜) : 섬세하고 용모가 빼어난 데다 총명해서.
余撫憐之(여무린지) : 내가 어루만지며 어여삐 여기긴 했으나
初非有情欲之感也(초비유정욕지감야) : 처음부터 욕정의 마음은 두지 않았었다.
厥後余以遠接使往來關西(궐후여이원접사왕래관서) : 그 뒤에 내가 원접사가 되어 평안도로 오고 갈 적에
柳枝必在閤而未嘗一日相昵(유지필재합이미상일일상닐) : 유지는 늘 마을에 있었지만, 하루도 서로 가까이 보지는 않았다.
癸未秋(계미추) : 계미년 가을(1583년)
余自首陽省女嬃于黃岡(여자수양성여수우황강) : 내가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을 뵈러 갔을 때
又與柳枝同杯觸者數日(우여유지동배촉자수일) : 유지를 데리고 여러 날 동안 술잔을 같이 들었다.
還首陽時追送余于簫寺(환수양시추송여우소사) : 내가 해주로 돌아올 적에는 절에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주기도 했다
旣別余宿于栗串江村(기별여숙우율곶강촌) : (9년 후)이별한 뒤 내가 밤고지(栗串)라는 강마을에서 묵고 있는데,
入夜有人扣扉(입야유인고비) : (누니 집)밤에 어떤 이가 문을 두드리고
乃柳枝也一笑入室(내유지야일소입실) : 방긋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서는 게 바로 유지였다.
余怪問其由(여괴문기유) : 나는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則其言曰(칙기언왈) :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다.
公之名義 國人皆慕(공지명의국인개모) : “대감의 명성은 나라가 우러러 흠모합니다.
況號爲房妓者乎(황호위방기자호) : 하물며 명색이 기생이라 일컫는 저는 어떻게습니까.
且見色無心尤所歎服(차견색무심우소탄복) : 게다가 여색을 보고도 무심하오니 더욱 탄복하는 바이옵니다.
此別後會難期故(차별후회난기고) : 이제 떠나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렵기에
玆敢遠來耳(자감원래이) : 이렇게 감히 불구하고 멀리 찾아온 것이옵니다.” 하므로
遂明燭夜話(수명촉야화) :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噫(희) 아!
娼家只愛浪子之多情(창가지애랑자지다정) : 기생이란 다만 뜬 사내들의 다정이나 사랑하는 것이거늘,
孰知有義之可慕者乎(숙지유의지가모자호) : 누가 도의(道義)를 사모하는 자가 있는 줄을 알았으랴.
且不以不見親爲耿而反服焉(차불이불견친위경이반복언) : 더욱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감복했다고 하니
尤所難得(우소난득) : 정말 더욱더 보기 어려운 일이로다.
惜乎女士困于賤隸也(석호여사곤우천예야) : 안타까워라! 이런 여자로서 천한 몸이 되어 고달프게 살아가다니.
且過客疑余有枕席之私(차과객의여유침석지사) : 더구나 지나는 이들이 내가 혹시 잠자리를 같이 하는지 의심하며
莫之顧眄則國香尤可惜也(막지고면칙국향우가석야) : 저를 보살펴 주지 않는다면 국중일색이 더욱 애석하겠구나.
遂製詞以敍其實(수제사이서기실) : 그래서 노래로 읊고 사실을 적어
發乎情止乎禮義之意(발호정지호예의지의) : 정에서 출발하여 예의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다.
則觀者詳之(칙관자상지) : 보는 이들은 자세히 알도록 하시라.
若有人兮海之西(약유인혜해지서) : 바다의 서쪽(황해도)에 사람이 있어
鍾淑氣兮禀仙姿(종숙기혜품선자) : 맑은 기운 모아 선녀의 모습을 내리었네.
綽約兮意態(작약혜의태) : 얌전하고 아름다운 마음과 모습이여
瑩婉兮色辭(형완혜색사) : 맑고 곱도다! 그 얼굴과 말씨여.
金莖兮沆瀣(금경혜항해) : 가을 새벽 맑은 이슬 같은 것이
胡爲委乎路傍(호위위호로방) : 어쩌다 길가에 버려졌는가?
春半兮花錠(춘반혜화정) : 봄(남녀의 정)은 한창이고 꽃은 피었는데
不薦金屋兮哀此國香(부천김옥혜애차국향) : 부귀한 집으로 가지 못하니 애석하구나! 이 국향이여.
昔相見兮未開(석상견혜미개) : 예전 서로 보았을 때 아직 안 피어
情脈脈兮相通(정맥맥혜상통) : 서로 훔쳐보며 애틋한 정만 나눠었고
靑鳥去兮蹇脩(청조거혜건수) :전령과 중매쟁이는 가고 (좋은 때는 이미 다 가고)
* 청조(靑鳥)는 서왕모의 전령(새), 건수(蹇脩)는 복희씨의 신하로 중매장이라고 한다
遠計參差兮墜空(원계참차혜추공) : 먼 앞날을 위한 계획 어긋나 허공에 떨어졌네.
展轉兮愆期(전전혜건기) : 이런저런 좋은 일 때 다 놓쳤으니
解佩兮何時(해패혜하시) : 허리의 패옥을 풀 날은 언제이런가.
曰黃昏兮邂逅(왈황혼혜해후) : 노년에 다시 해우를 하니
宛平昔之容儀(완평석지용의) : 완연한 옛 모습 그대로구나.
曾日月兮幾何(증일월혜기하) : 세월은 왜 이리도 빨리 흐르는가.
悵綠葉兮成陰(창록엽혜성음) : 인생이 무성한 잎같이 푸르렀으나
矧余衰兮開閤(신여쇠혜개합) : 어느 사이 늙어 여자의 문앞에 서서
對六塵兮灰心(대육진혜회심) : 티끌같은 정욕은 재가 되었네.
彼妹姿兮妧姩(피주자혜완연) : 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아
秋波回兮眷眷(추파회혜권권) 연모하는 사랑의 눈초리를 돌리는가.
適駕言兮黃岡(적가언혜황강) : 내 마음 황주 땅에 수레 달릴 제
路逶遲兮遐遠(로위지혜하원) : 황강을 가는 길은 굽이굽이 멀고 더디구나.
駐余車兮蕭寺(주여차혜소사) : 내가 소사에서 수레 머물고
秣余馬兮江湄(말여마혜강미) : 강가에서 말을 먹일 제
豈料粲者兮遠追(기료찬자혜원추) : 어찌 알았으랴. 어여쁜 이 멀리 따라와
忽入夜兮扣扉(홀입야혜구비) : 밤 되어 내 방문 두들길 줄을
逈野兮月黑(형야혜월흑) : 아득한 들에 달은 어둡고
虎嘯兮空林(호소혜공림) : 호랑이 울부짖음 빈 숲에 들리는데
履我卽兮何意(리아즉혜하의) : 나를 뒤밟아 온 뜻 무엇이던가.
懷舊日之德音(회구일지덕음) : 옛적의 덕스러움 그리워서라네.
閉門兮傷仁(폐문혜상인) : 문을 닫는 건 인(仁)을 상하게 하고
同寢兮害義(동침혜해의) : 같이 자는 건 의(義)를 저버리는 일
撤去兮屛障(철거혜병장) : 가로막힌 병풍이사 걷어 치워도
異狀兮異被(이상혜이피) : 자리도 달리 이불도 달리했다.
思未畢兮事乖(사미필혜사괴) : 정분을 못 나누니 일은 틀어져
夜達曙兮明燭(야달서혜명촉) : 촛불을 밝히고 동이 틀 때까지 지내웠다.
天君兮不欺(천군혜부기) : 천군(사람의 참 마음)을 어찌 속이겠는가.
赫臨兮幽室(혁림혜유실) : 깊숙한 방이라도 내게 내려와 보시리니
失氷泮之佳期(실빙반지가기) : 혼인할 좋은 기약 잃어버리고
忍相從兮鑽穴(인상종혜찬혈) : 서로 따라 욕정을 둘이 참았네.
明發兮不寐(명발혜부매) : 동창이 밝도록 잠 자지 않고
恨盈盈兮臨歧(한영영혜임기) : 떨어져 자니 가슴엔 한만 가득
天風兮海濤(천풍혜해도) : 하늘에 바람 불고 바다엔 물결치고
歌一曲兮悽悲(가일곡혜처비) : 노래 한 곡조 슬프기만 하구나.
繄本心兮皎潔(예본심혜교결) : 붉은 비단 위에 그 본심은 밝고도 깨끗해
湛秋江之寒月(담추강지한월) : 가을 강에 어리는 차디찬 달이로고
心兵起兮如雲(심병기혜여운) : 마음에 선악 싸움 구름같이 일 적에
最受穢於見色(최수예어견색) : 그 중에도 더럽기는 색욕이거니
士之耽兮固非(사지탐혜고비) : 선비의 탐욕이야 진실로 그릇될 터
女之耽兮尤感(여지탐혜우감) : 계집의 탐욕이야 말해 무엇하나.
宜收視兮澄源(의수시혜징원) : 마음을 거두어 근원을 맑히고
復厥初兮淸明(복궐초혜청명) : 마땅히 시선을 거두어 밝은 근본으로 돌아갈지라.
倘三生兮不虛(당삼생혜부허) : 내생이 있단 말 빈말이 아니라면
逝將遇爾於芙蓉之城(서장우이어부용지성) : 장차 죽어서 부용성〔(선경/仙境)〕에서 너를 만나리.
▶復申以篇三首(복신이편삼수) 다시 3수의 시를 거듭 써주다.
天姿綽約一仙娥(천자작약일선아) : 타고난 용모와 맵시 선녀 같은 자태로구나.
十載相知意態多(십재상지의태다) : 10년을 서로 알아 익숙한 그 모습
不是吳兒腸木石(부시오아장목석) : 무릇 내가 목석같은 사내이기야 하겠나마는
只綠衰病謝芬華(지록쇠병사분화) : 병들고 쇠하여 분화를 사양함일세.
含悽遠送似情人(함처원송사정인) : 헤어지며 정든 이 같이 설워하지만
只爲相看面目親(지위상간면목친) : 서로 만나 얼굴이나 친했을 따름
更作尹那從爾念(갱작윤나종이념) : 다시 나면 네 뜻대로 따라가련만
病夫心事已灰塵(병부심사이회진) : 병든 이라 세상 정욕 찬 재 같은 걸
每惜天香葉路傍(매석천향엽로방) : 길가에 버린 꽃 아깝고 말고
雲英何日遇裵航(운영하일우배항) : ‘운영이’처럼 ‘배향이’를 언제 만날 가
瓊漿玉杵非吾事(경장옥저비오사) : 둘이 같이 신선될 수 없는 일이라
臨別還慙贈短章(임별환참증단장) : 헤어지며 짧은 글이나 써주니 미안하구나.
癸未 九秋 念八日(계미 구추 염팔일) 1583년 9월 28일
栗谷病夫 書于 栗串江村(栗谷病夫 書于 栗串江村) 율곡 병든 늙은이가 밤고지 강마을에서 쓰다.
▶박세채(朴世采)의 남계견문록에 의하면, 율곡(栗谷)이 떠난 뒤에 유지(柳枝)는 서울로 달려 올라와 곡하고 또 그대로 삼년상을 입었다고 한다.
첫댓글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