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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생활취향과 문화예술론
1. 문제제기: 왜 새삼 연암을 주목하는가
연암의 학문과 활동을 연구하여 그 본질을 계승하기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200년 전에 서거했다는 시간차 때문이 아니라, 연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앞서 18세기 동시대 문화에 대해 문제를 진단하고 혁신적 방안을 찾아 실천했듯이, 우리가 우리시대의 과제를 그렇게 직시하고 실천적으로 해결해야만 진정한 계승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연암의 생활 면모와 문화예술론을 조명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혼선을 정리하는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문화예술에 관한 역사적 이론 토대를 확인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농경사회에서 물려받은 전통 풍속을 계승하는 한편, 지식정보사회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실생활의 다양한 변모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느라 한편에서는 성묘, 귀성, 제사모시기, 일가친척의 화목, 경로효친 전통을 강조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장기 기증 운동, 화장 및 납골묘 장려 운동, 스스로 노후대책 세우기를 강조하는 모순이 일상화되고 있다. 대세는 기울어 전통적 세시풍속이나 명절은 저절로 사라져,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추석이나 설날조차도 ‘후유증’이니 ‘증후군’이란 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농경사회의 축제일을 후기산업사회에서도 지켜간다는 것은 과연 전통을 계승하는 것일까. 시대착오적인 것일까. 그 계승의 방식만을 바꾸면 되는 것일까, 명절 자체를 청산해야 되는 것일까. 이 모순된 현상을 인문학의 기반을 활용하여 지혜롭게 정리해 나가야 마땅하겠으나, 학문 자체의 논리와 현실 자체의 논리가 각각의 영역으로 전문화되어 동떨어져 있는 까닭에 인문학의 성과로 현실을 변혁시키기란 요원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연암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한다면 인문학의 생활 실천적 영역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과연 연암이라면 이런 현실에 대해 어떤 논리로 대응했을까. 단독 세대주와 독신자가 늘어나고 초미니 핵가족이라든가 가족해체 같은 말이 빈번히 들려오는 가운데, 며칠간의 명절 연휴조차도 대가족의 생활리듬으로 돌아가기를 부담스러워하는 현상에 대해, 만약 연암이라면 어떻게 ‘법고창신’의 논리를 구체화시켰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명절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가치 갈등과 정서 혼란이 심화되고 병리 현상이 날로 깊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뉴스는 각종 범죄로 얼룩져 있다. 사건 사고를 다룬 뉴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생활상 전반이 혼란과 갈등의 도가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다. 우리 사회의 모습은 서적 출판에서조차 몇 개의 단어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 돈(재테크, 부자 되기, 로또), 섹스(몸짱, 다이어트, 성형), 처세술(아들아 이렇게 해라, 세상 사는 지혜, 몇 살에 알아야할 몇 가지, 해야 될 몇 가지, 누구를 위한 에티켓), 실용서(자격증, 전문서) 정도가 대세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신경제체제가 심화되는 과정의 부작용이기 때문에 문학․예술․인문학 분야 종사자들이 책임질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 예술, 인문학의 분야에서 인간과 생활 현실 전체를 조망하는 통찰력과 전체를 연계시켜 생각하는 유기적 사고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현실 대처 논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 존재의미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생활정서와 가치관, 인간관이 아무리 혼란을 빚어도, 황금만능으로 기울어도, 문학이며 예술이, 그리고 인문학이 거기에 맞설 정신적 힘과 실천의 논리를 충분히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그 존재위상이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문학은 각각 그 자체의 논리적 엄밀성으로 체계를 마련해갈 뿐, 현재 우리 사회의 생활인들에게 정신적․심리적․문화적 새로운 가치 기준과 실천 논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학문 분야가 전문적으로 세분화되다 보니 그런 역할을 감당할 엄두를 내기도 어려운 것이다. 한 분야의 전문 지식으로 이 다원화된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접근해 해결해보려는 것이 어쩌면 시대착오적 행동이요, 어쩌면 과대망상에 빠진 듯 느껴지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인문학이라면,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삶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실천적 생활 논리를 생산해내는 힘을 반드시 동시적으로 지녀야 그 존재의미가 있지 않을까. 연암이 18세기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시대의 토픽을 문학에 적극적으로 소화해내면서, 자기 일상생활의 실천을 통해 문제를 타개할 혁신의 길을 찾아내고, 문화예술 활동과 그 논리를 통해 도학적 인식 논리의 경직성을 타파함으로써 인식의 균형을 확보했듯이 말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연암의 일상생활을 통해 그가 추구한 생활 혁신의 방향을 구명하고, 그러한 생활의 인식 논리와 실천이 문화예술 활동과 어떻게 연계되며, 연암의 문화예술론은 어떤 것이며, 궁극적 목표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파악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접근하는데 꼭 필요한 시사점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2. 연암 생활상에서 두 가지 특징
1) 합리적 혁신과 비판적 유우머
연암은 만년에 병환 중에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큰 붓으로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徇姑息, 苟且彌縫)’이라는 여덟 글자를 병풍에 쓰고는 “천하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고 했다 한다.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적당히 임시방편으로 땜질하는 것을 못 견뎌함은 연암의 성격과 정신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까 한다. 연암은 생활 주변에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관행에 따르거나 임시방편에 의존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원리를 따져 바르게 고쳐나갔다. 그런데 여유로운 자세로 우스갯소리를 하여 문제 상황을 풀어갔기 때문에 연암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고, 남을 깨우쳐주기에도 유리했던 것이다. 연암의 그러한 면모를 보고, 송원(松園) 김이도(金履度,1750~1813)는 “연암처럼 매서운 기상과 준엄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만일 우스갯소리를 해대며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세상에 위태로움을 면하기 어려웠을 게야.”라고 했으며, 지산(芝山) 유화(柳訸, 1779~1821)는 “연암 선생이 사람을 깨우치고 계발해주는 방법은 대개 우스갯소리에 있으니, 풍류가 넘치고 재기가 번득여 사람을 놀라게 한다. 만약 선생의 속뜻을 모르고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듣는 사람은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했다.
연암은 “무당이나 판수가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면 그 집은 필시 망한다”고 했을 만큼 굿이나 점(占)과 같은 것에 기대는 심리를 거부하였으며, 풍수자리 보는 것이나 운수를 믿는 것 등과 같이 자신의 의지와 노력보다 다른 힘에 의지하고자 하는 심리나 사회적 인습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런 비합리적인 관행이나 습관보다는 합리적 노력과 실천을 강조했다. 사람들이 선을 행해서 복을 받으려 하지만, 선을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선을 행해서 복을 받으려 하기 보다는 악을 행하지 않아서 화를 면하려 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연암은 아무리 오래된 관행이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에 옮겼다. 조선시대 부녀의 의복 제도와 아이들의 머리가 원(元)나라 때 풍속에서 온 것이라 하여 좋지 않게 여기다가, 안의 고을에 부임하게 되자, 동계 정온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논의를 따라 자신은 검은색 가선을 두른 옷을 입고, 아들과 고을의 지인동자(知印童子)들의 머리 모양을 쌍상투(총각머리)를 올리게 하고, 사규삼(四袿衫)을 입힘으로써 오히려 오랑캐의 풍속을 따랐다는 오해를 사고 비난을 받았다. 세상 사람들이 낯설어서 적응을 못하고 비방을 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과감히 실천하였던 것이다. 이런 면모는 얼핏 「허생전」에서 허생의 목소리를 빌어 군사들의 의복을 활동에 적합하도록 오랑캐의 복장과 비슷하게 고치자고 제안한 것과 상충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면에서는 오랑캐의 풍속을 버리고 우리 의복의 주체성과 정통성을 추구하는 면모를 보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능적 편리성과 효율성을 우선하면서 오랑캐와 싸우기 위해서는 오랑캐의 복장과 비슷해지더라도 군복을 전투에 편리하도록 바꿔야 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얼핏 모순 되어 보이는 두 가지 주장에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상황과 장소, 즉 언제 어느 때 무슨 목적으로 입을 옷이냐 하는 점에 충실한 주장이라는 점이다.
사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연암의 공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안의 고을에 부임한지 달포쯤 되었을 때는 여러 가지 관행과 예법을 제거해버렸다. 고을 원이 행차할 때 벽제(辟除)하는 일, 음식 올리는 절차, 수령의 기거동작을 소리 내어 알리는 일등을 없애서 간소화 한 것이다. 그러면서 “전례가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앞으로는 함부로 전례를 들먹이지 않도록 하라.”고 명했다.
연암은 현상을 관찰하여 문제의 핵심을 간파, 원리원칙을 살펴 개선하는 것을 본연의 생활자세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연암의 문필 활동은 바로 일상생활에 밀접한 문제들을 표현하여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제도적으로 바로잡고자 한 데 있었던 것이다. 살아가는데 고통을 주는 문제들- 즉, 도량형 통일 문제, 수레 문제, 벽돌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균전법, 사창제, 화폐문제, 촌락 조직의 문제, 관리 등용법, 관리를 평가하는 법, 군사제도, 해양방위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 혁신 방안을 생각했다. 그가 구상한 것이 현재 『연암집』에 모두 전하는 것은 아니다. 일화로 전하는 것도 있고, 글로 전해지는 것도 있는데, 노비문제에 관한 것은 연암이 삼종질에게 보낸 편지에 그 견해가 펼쳐져 있고, 화폐문제는 김이소(金履素)에게 보낸 편지 속에, 환곡문제는 순사(巡使)에게 올린 편지 속에, 서얼 등용문제는 「의청소통소(擬請疏通疏)」에, 토지문제는「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라는 글로 전해진다. 이것은 모두 그가 일상생활에서 발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연장선상에서 빚어낸 고뇌의 산물이다. 법령이 그 시대의 생활에 맞게 정비되어야 백성의 삶이 건강하고 말폐를 바로잡을 수 있는데, 그런 것을 바로 잡는 것이 공부를 하는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연암은, 우리나라의 학문이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 경세제국학(經世濟國學)․ 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을 소홀히 하여 잘못을 답습하는 것을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다. 연암이 중년에 과거를 단념한 이후로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어울려 실용적 도구와 제도 문제를 담론하고 연구했으니, 그의 이런 생활자세와 문필활동, 학문 성향은 연암의 생애 전체를 포괄하는 특징이라고 하겠다. 까닭에 그의 글은 문학적인 글만이 아니라, 현실적 건의문조차도 표현의 묘미가 살아서 감동을 전해주었던 것 같다. 태호(太湖) 홍원섭(洪元燮,1744~1807)은 연암의 글 가운데 「술빚는 것을 금하는 정책에 대한 의견[원제: 酒禁策]」이라는 글을 몹시 좋아하여 읽은 횟수를 표시해가며 읽었던 적이 있다고 했을 정도이다. 그 글은 망실되어『연암집』에 수록되지 못하고 그 일화만 전해지지만, 연암의 글이 지닌 본질적 힘이 그가 생활에서 건져 올린 문제의식 어디에나 빛나고 있음을 잘 드러내주는 일화라 하겠다.
2) 예술적 취향, 전문지식화, 그리고 우정
연암은 스무살 청년 시절에 불면증에 시달리느라 고생했는데 그 무렵에 9편의 전(傳)작품을 지었다. 그 중 2편은 망실되고 7편이「방경각외전」이란 제목으로 묶여 『연암집』에 전한다. 거기 첨부된 연암의 자서(自序)는 각 편의 글을 창작하게 된 의도를 서술해두고 있는 바, 그 중 연암의 생애에 있어 중요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할만한 ‘우도론(友道論)’이 나온다.
“우도가 오륜의 끝에 놓였다고 해서 낮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오행(五行)중의 ‘토(土)’의 기능이 고루 사시(四時)의 바탕이 되는 것과 같다. 부자․군신․부부․장유 간의 도리는 신의가 없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다운 도리 및 사람답지 못한 도리를 우도가 다 바로잡아 주는 것이 아닌가. 우도가 끝에 놓인 이유는 뒤에서 인륜을 통섭케 하려는 것이다.”
일찍이 임형택은 이 대목을 주목하여 “등차적(等差的)․신분주의적 규범 도덕에 대한 윤리적 반성”의 의미가 들어있음을 지적하였고, 연암이 추구한 우정을 두 가지 방향으로 특징 지워 파악한 바 있다. 그 두 가지 방향이란, 첫째가 ‘동인적 결합에 의한 창조적 문학예술의 추구’요, 둘째가 ‘동지적 결속에 의한 창조적 행동의 추구’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연암의 생애 전체를 파악할 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누구에게나 인간관계는 그 인생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지만, 연암의 삶에서 친구, 즉 벗들과의 만남은 유난히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연암의 인간관계의 특징을 고찰해 볼 때, 동인적 결합은 젊은 시절의 교유 특징에 부합되고, 동지적 결속은 중장년 시절의 교유특징에 그대로 부합된다고 할만하기 때문이다.
연암은 젊은 시절부터 문명(文名)을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과거시험를 단념하고 응시를 거부했다. 종종 벗들과 모여 글 짓고 술 마시며 질탕하게 놀았으며,(과정록 44p) 민간의 이야기꾼을 통해 세상 소식을 듣는 일에 흥미를 느끼고 기분을 전환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서화와 고동을 감상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을 감상하고, 여행을 다니고 하며 지냈다. 연암의 교유는 중장년에 비하면 젊은 시절이 더 폭넓고 다양했던 편이다. 젊은 시절에는 대단히 친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만도 이민보, 윤득관, 김상숙, 김상정, 이운영, 유의양, 유언호, 김이중, 신광온, 심염조, 김노영 등을 꼽았을 만큼 여러 사람과 어울렸으며, 일반 서민이나 하층민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등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중년 이후로는 사귀는 벗도 많지 않아 소위 ‘연암그룹’이라 불리는 몇몇 사람들과 왕래하였다. 연암의 고백에 의하면 “중년 이후 세상일에 대해 마음이 재처럼 되어 점차 골계(滑稽)를 일삼으며 이름을 숨기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나, 말세의 풍속이 걷잡을 수 없어 더불어 말을 할만한 자가 없었고 마음은 항상 우울하여”(과정록 p.50) 즐겁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도 뜻이 맞는 매우 소수의 지기(知己)들과 만나서 고금의 치란(治亂)과 흥망에 대한 일로부터 선비의 절의(節義), 정책과 제도, 학문에 관해 논했던 것이리라. 연암이 연암골에 있을 때 담헌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에는, 덕망과 지체를 헤아려 모두 벗으로 허락하는 폭넓은 교유를 했으나, 명예와 권세와 잇속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벗을 찾으니 한 사람을 얻기도 어렵다는 탄식이 있다.
그런 까닭에 중년 이후에는 줄곧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같은 인물들과 어울려서 학문과 현실의 문제를 논했다. 이들과 밤낮을 잊고 계절을 잊은 채 취미와 호기심을 살려 전문적 지식 체계를 만들고, 그 전문 지식을 모아 백과사전적 저작을 하고, 그러한 박학함으로 현실 개혁의 비전을 제시하는 글을 쓰는 것이 연암의 생활이었다.
연암은 이들 벗들이 기존의 유학자의 관점에서는 사소해보이는 문제에 매달려 전문적 저작을 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할 점과 장려할 점들을 함께 생각해보곤 하였다. 「녹앵무경서(綠鸚鵡經序)」,「류씨도보서(柳氏圖報序)」,「형언도필첩서(炯言桃筆帖序)」「순패서(旬稗序)」「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영처고서(嬰處稿序)」「필세설(筆洗說)」이 바로 그에 해당되는 내용들이다. 이런 글들은 연암이 18세기에 새로운 문화적 기운 속에서 어떻게 방향을 제시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연암의 이런 활동은 그의 독특한 학문관과도 관련이 깊다. 그는 “학문이란 별 다른 게 아니다.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분명하게 하고, 집을 한 채 짓더라도 제대로 지으며, 그릇을 하나 만들더라도 규모 있게 만들고, 물건을 하나 감식하더라도 식견을 갖추는 것, 이것이 모두 학문의 일단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교경전과 역사서를 중심으로 학문을 추구하던 학자들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연암이 기획한 『삼한총서』의 목록 중에는 ‘서화보(書畵譜)․ 서양철금보(西洋鐵琴譜)․ 퉁소보(洞簫譜)․ 생황보(笙篁譜)’와 같은 책 제목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연암의 일상생활 속의 문제의식, 서화․고동․음악을 좋아하고 감상하는 취미, 그리고 학문적 논리와 그 결과물은, 그 모든 것이 유기적 연결망으로 섬세히 상호 작동한 증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암이 51세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주변의 재혼 권유에도 불구하고 6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 긴 세월을 홀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개결한 인품 외에도 이들 동지적 그룹의 존재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비록 아들에게 고추장을 손수 담가 보낸다거나, 청지기들에게 옷감 염색하는 법을 가르쳐 그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게 해줄 만큼 생활에 밝기도 하였던 연암이기에, 아내의 빈자리로 인한 생활의 불편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었지만, 학문적․ 예술적 관심을 소통할 벗들이 없었다면, 우도(友道)에 대해 젊은 시절부터 그토록 중요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홀로 만년을 보내기는 어려웠으리라. 연암의 생애에 있어 예술적 취미 생활과 학문, 그리고 우정은 매우 뚜렷한 특징으로 부각된다.
3. 문화예술론
1) 예술 감상의 요체와 그 효과
연암이 젊은 시절부터 글씨며 그림, 음악을 즐겼으며 그것을 감상하는데 시간과 관심을 쏟았다. 이런 면은 꼭 연암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18세기 조선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문화적 기풍 속에 연암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士) 계층을 비롯하여 중인층에 이르기까지 취(趣, 취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벽(癖)․치(痴) 등으로 불리는 특정분야의 마니아가 생겨나는 현상과 함께, 예술에 있어서도 상품적 수요가 창출되면서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예술가가 등장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처럼 고금(古琴)․ 고기(古器)를 많이 수장하고 있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는 사대부가 있었으며,「발승암기(髮僧庵記)」의 주인공 김홍연(金弘淵)처럼 고금법첩이며, 유명한 그림과 칼, 거문고, 옛날 제기(祭器), 기이한 화초를 천금을 아끼지 않고 구해 들였던 활자(濶者)도 있었다. 김홍연은 소년 시절 무과에 합격하기도 했지만 명산에 떠돌며 살았던 사람이다.
18세기에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문화적 취향은, 당시 사회의 생산력의 증대로 인한 경제 변화, 중국의 새로운 학문 경향에서 오는 자극, 그리고 우리 내부의 인식 변화가 맞물린 총체적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생겨난 것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마다 그가 왜 예술 감상에 몰두하는가, 예술 감상이 그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각기 대답이 다를 것이다. 재산가치로서, 혹은 과시욕 때문에, 수집 취미 때문에, 혹은 남들이 하니까 유행을 따라, 심리 치료를 위해서, 기분 전환을 위해, 예술적 능력 향상을 위해서 등등으로 그 이유는 천차만별일 수 있다.
연암의 경우는 젊은 시절에는 우울과 불면증을 치료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피로를 푸는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꼭 이런 표면적인 건강상의 이유에 한정시킬 수는 없다. 그 건강상의 이유에도 정신적 건강의 비중이 크게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연암은 이런 예술 창작 체험과 감상을 통해 인식과 사고를 새롭게 하고 창작의 이치를 깨우쳐 준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묵은 장도 그릇만 바꾸면 입맛이 새로워지고 예사롭던 정(情)도 환경이 달라지면 마음도 눈도 아울러 바뀌어진다’는 말은, 간단한 현상적 변화나 환경의 변화가 우리의 감각과 인식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연암은 소리나 빛과 같은 외물이 귀와 눈에 방해가 되어 우리의 참된 인식을 잃게 만든다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시각을 이용한 서화 감상, 청각을 이용한 음악 감상 같은 것은 기분을 전환시키고 새로운 인식을 자극하긴 하지만, 그 자체가 곧 참된 인식, 올바른 인식을 낳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연암은 그런 이유로 예술애호가를 두 종류로 구분했다. 수장가와 감상가이다.
“대저 서화고동(書畵古董)에 대해 수장(收藏)하는 사람과 감상(鑑賞)하는 사람이 두 길이 있다. 감상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수장하는 자는 부유해서 얻어들은 제 귀만 믿는 자이다. 감상은 잘 하면서 능히 수장하지 못하는 자는, 가난하기는 해도 그 안식(眼識)은 저버리지 않는 자이다. 진품은 버려두고 능히 수장하지 못하니, 슬플 뿐이다. 근세의 감상가로서 상고당(尙古堂) 김씨(金光遂)를 일컫는다. 그러나 재사(才思)가 없으니 진미(盡美)하지는 못하다. 대개 김씨는 감상하는 방법을 개창(開創)한 공이 있었다. 여오(汝五:徐常修)는 꿰뚫어보는 안식이 있어, 그 눈에 부딪히는 온갖 사물에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고, 재치를 겸했으니 잘 감상하는 자이다.”
연암의 구별법에 따르면 수장가는 부유해서 정보를 듣고서 소유할 수는 있는 사람이고, 감상가는 본질을 꿰뚫어보는 안목이 있어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상고당 김광수가 감상가로 명성이 있지만, 연암이 보기에는 그는 수장가에 불과하고 여오(汝五)가 감상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상해야 여오처럼 참된 감상을 할 수 있게 되는가? 예술 감상법의 요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을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는 것[不以目視之, 以心照之]”이다. 어떤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가? 선입견을 버리고 깊이 사색하는 마음(冥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명심(冥心)하는 자는 귀와 눈에 얽매이지 않지만, 귀와 눈만 믿는 자는 자세할수록 더욱 병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연암은 ‘감상(鑑賞)’을 과소 평가하지 않았다. “감상이란 사람 품격의 등급을 매겨 벼슬에 임명했다는 소위 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이라고 비유하였는데, 구품중정이란 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의 관리 등용법이다. 연암은 감상이, 관리를 덕행과 재능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평가하는 안목과 같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 안목, 즉 예술이나 사물, 혹은 현상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것은 왜 중요한가? 그것은 가치 평가에 있어 혼란을 없애고 모든 것을 제자리에 배치시켜 질서를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그런 까닭에 연암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붓씻개(筆洗)’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본 여오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며, 그러한 여오를 이 세상에서 장차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연암의 예술 감상, 혹은 예술 취미는 한갓 소비성향으로 그치는 행위가 아니다. 물질적 사치나 시간 낭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연암은 얼치기 수집 행위, 피상적인 안목, 유행에 편승하는 경향 같은 것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문제의식의 초점은 선명히 지닌 채 그의 감상안은 무엇이 진짜이며 진정이 스민 것인가를 구분해 내고 있었다. 연암은 예술 감상을 통해 기분을 전환하고 인식에 새로운 자극을 추구했지만, 깊이 사색하는 마음으로 감상하여 진짜를 판별하고자 했다.
2) 문학과 예술은 왜 ‘진(眞)’을 추구해야 하는가?
연암은 “문장을 하는 자는 오직 그 참모습을 적을 뿐이다.”라고 하여 문학의 사명이 진(眞)을 담아내는데 있다고 하였다. 진(眞)은 반드시 유교 윤리에 합당한 것만을 기록하거나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지 않는다. 이미 그 이전에 ‘진’을 그려낸 작품들은 “도올(檮杌)이 나쁜 짐승이지만 『초사(楚史)』에 편명을 삼았고, 퇴매(椎埋)는 흉악한 도적이지만 사마천과 반고가 이를 서문(叙文)했다.”는 것을 연암은 사례로 들었다. 진(眞)은 가(假, 가짜) 혹은 위(僞, 거짓)과 상대되는 개념인데, 18세기 무렵에 ‘진심에서 우러난 것(眞情)․ 진짜인 것․ 진경(眞景)’ 등을 추구하면서 생활문화와 문학․예술에서 중시된 개념이다.
그 이전의 문학이 유교 이념 속에서 ‘유교의 도(道)’를 표현하고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효과를 거두는 데 의미를 두었던 데 비해, 이 시기에 와서 실학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강하게 제기된 ‘진(眞)’의 개념은 문제의 인식과 표현에 있어 유교 윤리의 범주를 넘어서게 했다는 데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문학의 영역을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범주로부터 진실과 거짓이라는 존재 인식의 범주로 옮겨 버린 것이다. 그럴 경우, 도올과 퇴매 같이 바람직하지 못한 대상도 소재로 삼을 수 있고, 유교윤리에 합당하지 않은 주제도 표현해 낼 수 있게 된다. 창작에 구속이 없어져서 표현의 자유를 100% 얻게 되는 것이다.
연암은 단순히 창작의 자유로움 때문에 ‘진’을 추구한 것일까? 문학과 예술에서 특별히 진(眞)을 중시하고 추구해야 되는 이유가 있을까? 연암은 그것을 ‘보편성’이 지닌 호소력의 문제로 답한다. “기뻐 웃고 슬퍼 우는 것만은 통역을 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정(情)이란 겉으로 꾸밀 수 없고, 소리란 진심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진정에서 우러난 문학은 언어와 인종과 국적의 차이를 넘어서서 통역하지 않아도 서로 공감되고 서로 이해된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다. 보편성의 호소력은 윤리적 상대성에 갇혀 있는 경우와는 그 상호 이해와 소통의 범주에 현격한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연암은 이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면 문학에서 진(眞)은 진정이 있으면 저절로 표현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신의 언어로 써야 한다. 연암은 “자기 자신의 언어로부터 문장의 입체적 구성이 생겨나도록 해야지 옛사람의 언어를 표절하여 주어진 틀에 메워 넣으려 해서는 안된다. 바로 여기서 글이 난해한가 쉬운가 하는 차이가 생겨나며,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의 언어’란 창작자 개인에게 있어서는 ‘개성적 언어’가 되지만, 개인의 범주를 동심원으로 키우면 ‘자국의 언어, 민족의 주체적 언어’가 되기도 한다. “방언을 문자로 표현하고 그 민요를 운율에 조화시키면 문장이 저절로 이룩되어 진기(眞機)가 발현될 것이다. 옛 시체(詩體)를 답습하기를 일삼지 않고 서로 빌어오지 않고서 조용하게 즉석에서 시가(詩歌)를 지어도 온갖 사물을 나타낼 수 있다.”는 인식에서 연암은 ‘조선풍(朝鮮風)’을 선언했던 것이다. 문학과 예술에서 진의 추구는 보편적 공감을 추구하는 것인데, 한 작가의 경우에는 개성, 혹은 민족 주체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 과연 진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포착되는가? 연암은 진(眞)이 영역의 경계선상에 있으며 찰나적 접점에서 순간 포착된다고 했다. “어린애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 무릎을 반쯤 구부리고 뒤꿈치를 살짝 들고 손가락을 Y자 모양으로 내밀고 다가서는 즈음 그래도 손끝이 나비를 의심나게 하면 그만 날아가 버리지요. 사방을 둘러봐도 인적이 고요한데, ‘아차’ 하고 웃으며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게 곧 사마천이 저서 할 때입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진(眞)을 포착하기 위해 객관 사물과 현상에 접근할 때 자신의 주의력과 인식에 확신이 없어서 흔들리면 그 접점의 순간을 놓쳐버리고 만다는 것. 객관과 주관의 합일 순간에 ‘진’은 존재하며, 진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인식이 객관 현상을 꿰뚫을 수 있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의 많은 철학이론, 예술이론들을 통해 진실의 개념과 그 의미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지적 전통 속에 쉽고도 명쾌한 ‘진의 논리’가 시작되던 단계부터 그 핵심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었음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연암의 진에 대한 논리는 오늘날의 문학과 예술 창작에 있어서도 그 추구해야 할 방향점을 선명히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익하고 유효하다 하겠다.
4. 맺음말: 연암을 계승하는 길
이상에서 연암 생활면모에서 두드러진 두 가지 경향성- 즉 혁신적 취향과 예술적 취향, 그리고 연암의 문화예술론이 지닌 두 가지 핵심적 내용을 고찰하였다. 연암은 스스로 과거시험 보기를 거부함으로써 당시의 공정치 못한 인재 선발에 있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포기했던 사람이다. 그는 과거(科擧) 대신 자신의 양심의 길을 택했고, 중앙 관직 생활 대신 생활 현장에서 실험적 실천을 통해 생활의 구태의연한 관습과 인식을 바꿔나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실생활 문화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현상을 살펴서 그 방향 줄기를 바르게 잡아 물꼬를 틀면, 올바른 방향의 혁신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벗들의 취미에서 비롯된 전문 저작에 써준 서문과 문화예술에 관한 그의 주장과 언급들의 행간에서 그런 점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연암을 진정으로 계승하는 방법은, 연암이 연암의 시대에 그러했듯이 우리가 우리 시대의 당면 문제를 혁신하고 우리의 생활 문화를 미래 지향적으로 고쳐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연암의 삶과 논리에서 그 핵심을 얻어야 한다. 연암은 우리가 시간적 이삿짐을 꾸릴 때 꼭 챙겨 가야 할 보배로운 정신유산을 남겼기 때문이다. 연암의 생활 자세와 문화예술론은 지금 당장 우리의 생활과 문화산업 현장에서 그대로 소통될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는 논리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삶과 사회에 건강성이 흔들리고 가치관에 혼란이 오는데도 인문학이며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그것에 아무런 대처 논리를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 문학의 위기, 예술의 위기라고 할 것이다. 연암이 18세기가 아니라 오늘날에 존재한다면 그 위기 상황을 기꺼이 타개해 나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