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집사 스티븐스의 육일 간의 휴가에 동행했다. 집사 스티븐스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 아니었다. 낯선 기차여행 길에서 옆자리에 동승한 나이 지긋한 승객이 "어디까지 가시는지?"하고 시작한 인사에 이어 무람하게 나누기 시작한 대화 끝에 창밖으로 스치는 가을 벌판을 바라보며 독백하듯 들려주는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듣듯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세계는 자신의 세계가 아니라 달링턴 홀과 그가 모시던 주인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자신이 지녔던 집사로서의 품위, 품위있는 집사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흔들림 없이 전해주는 그의 이야기 속에 후회라고는 없는 듯 했다, 적어도 그 마지막 순간까지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통해서 중차대한 세상사를 움직이는 바퀴 중심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느낀 순간 그는 집사로서, 그리고 집사의 삶을 살던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정점에 도달하는 황홀한 경험을 했지만 그 주인이 굴리는 바퀴가 옳은 방향으로 굴러간 것은 아니었음을 스스로도 고백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이제 세상의 바퀴 중심에 있다고 느꼈던 스스로에게서 자신의 삶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기도 할 것이다.
짧은 여정의 마지막 날, 어쩌면 스티븐스 부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자신의 집사로서의 일, 그 '품위' 있는 일에 대한 몰두 속에 보내버린, 이제는 벤 부인이 된 켄턴 양, 그녀를 다시 만나 나눈 두 시간의 대화, 그리고 그 마지막 말을 들으며 "갈기갈기 찢기던 (스티븐스의) 가슴"은 그가 바쳐야 할 모든 것의 방향이 어디였어야 할 지에 대한 가슴아픈 회환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집사로서 자신의 인생을,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걸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그의 모든 최선은 사라졌을 지라도.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
어쩌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을 수도 있는 것마저 놓치는 '실수'를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이 모시던 주인에 대한 봉사를 통해 얻고자 했던 집사로서의 '품위', 그 성취를 스스로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겼던 '품위'마저도 과연 자신에게 있었던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집사로 남기를 선택한다. 스티븐스의 긴 이야기가 끝나는 그 쯤에 이르러 우리의 기차는 종점에 도착했다. 나는 그의 삶에, 그리고 삶을 대하는 그의 어떤 태도에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신발을 신지는 않을 것 같다.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들 각자인 내가 그가 말하는 '세상의 중심축'에 그리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내 운명' 까지 다른 신사들의 손에 맡기고 싶지는 않다. 그가 말하는 세상의 중심축이 아니라 나의 세상의 중심축도 있는 법이다, 그 세상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더라도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세상축 말이다.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대고 가치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반은 맞는 말이다. 그 '야망'이 무엇이고 '희생할 많은 부분'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그 야망이 다른 이를, 스티븐스처럼 결국 모시는 이를 위해 농담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위해 오래 전 켄턴 양을 포기했던 것과 같은 무엇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이라면 사양하겠다.
놀랍도록 부드럽게 술술 읽히며 생생하면서도 가슴저리고 따뜻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으로 따라가던 스티븐스의 이야기가 마지막에서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스티븐스의 인생에 대해서는 여전히 존경을 표하고 싶다. 비록 그가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그러나 마지막에 그의 말을 통해 느껴지는 작가의 관점에는 온전히 손을 들어주기가 망설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저녁 노을 지는 해변의 벤취 쯤에서 하루 이틀은 기꺼이 바쳐 온전히 들어주고 싶은 이야기다.
사족-읽다가 번역가를 확인해 본 적이 있었던가 싶게 중간에 나는 번역가를 확인했다. 그만큼 좋았다, 번역이. 송은경. 이 책을 번역하고 출간을 준비하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다 한다. 역자 후문이 다른 이인 까닭이 있었다. 고인이 된 송은경 님의 명복을 빈다. 그의 번역 작품을 찾아 읽어보려 한다. 온전히 송은경, 그의 번역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