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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강동현에 대박산에 있는 4,092년 전의 구을(丘乙)단군릉(檀君陵)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해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평양 단군릉은 7세 구을단군임을 밝혀주는 환단고기 『환단고기』원문에는 “BC 2092년 7월 구을단군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풍류강(風流江)을 건너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곧 세상을 뜨니 대박산大博山에 묻혔다.”『단기고사』에는 풍류강을 비류강이라 하였는데 송양도 강동江東이라 하여 그곳에 묻혔다고 하였다.『신단실기』도 『강동릉변』에서 송양을 강동현이라 했으며 제1세 단군왕검의 릉이 아니라 후대 단군의 릉이라 하였다.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밝산 동남쪽 기슭에는 옛날부터 단군릉이라고 무덤 하나가 있었다. 대박산은 우리말 “밝산, 한밝산”의 음차音借이다.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을 일컫는데 이동의 흔적에 따라 곳곳에 백산, 장백산, 태백산, 소백산, 백악산, 불함산이란 이름을 남기고 있다. 구을단군은 이 해 유난히 순행이 잦아 장당경(藏唐京) 고역산(古曆山)을 비롯해 남쪽 지경에 이르는 풍류강을 넘어 강동이라고도 하는 송양에 이른 것이다. 얼마 전에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개축한 단군릉이 전에는 평남 강동군이었던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이다. 지명과 기록이 세 사서(史書)가 일치한다. 또한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 서쪽 3리에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록을 내세우는 것과 또 『조선왕조실록』숙종과 영조 대에 강동의 단군묘 수리 및 보수 기록이 적혀있고 정조 때 평안감사에게 “강동사또가 봄가을로 단군묘에 제사 지내는 것을 제도화하라”는 지시사항이 나온다는 점을 볼때 좀더 명확해 진다. 이정기(李正己) 왕국의 대당항쟁은 국내문헌으로는 환단고기에만 나온다.
중국대륙에는 서기 761년부터 817년까지 4대 58년간 당나라와 맞서며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독립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평로치청왕국이다. 이정기는 고구려의 유민으로 본명은 회옥이다. 국내 문헌으로는 유일하게 환단고기에 기록되어있다. 특히『환단고기』에는 이정기가 대제라는 큰 나라를 세우자 대진국(발해) 문황제가 군사를 보내 싸움을 돕게 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환단고기>'태백일사' 당에 항거한 이정기의 활약 부분 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逾將助 戰李正己高句麗人也生於平盧二十二年師衆逐軍帥李希逸立正己卒子納統父衆五十六年納卒子師古代其位及卒其家人不發喪潛使迎師道於密而奉之 대흥45년(단기 3114,781)에 치청절도사 이정기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이정기는 고구려인으로 평로에서 태어났다. 대흥 22년에 병사들이 군의 통수자 이희일을 쫓아내고 정기를 세웠다. 이정기가 죽자 아들 납(納)이 아버지를 따르던 무리를 거느렸다. 대흥 56년에 납納이 죽자 아들 사고(師古)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사고師古가 죽자 그 집사람들이 발상發喪을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보내 밀 땅에서 사도를 맞아들여 받들었다.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대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고조선 8조금법(八條禁法) 전체를 보여주는 환단고기 범금팔조(犯禁八條)라고도 하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으로 8조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8조 중에서 3조의 내용만이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 전하며 그 내용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바와 같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 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22세 색불루 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다. 8조금법은 여덟가지 죄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三聖祖,환인,환웅,단군) 시대의 최초의 성문법이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국가로서이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회분위기와 경제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낸다.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있는 8조문은 아래와 같다.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재산을 몰수하여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게으른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邪淫者笞刑) 8, 남을 속인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行詐欺者訓放)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은나라 갑골문 기록이 환단고기의 고조선 기록과 일치한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47년 경인(BCE 1291)년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전쟁을 일으켜 이미 귀방(鬼方)을 물리치고 나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삭도,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단군세기] 671 귀방(鬼方) : 지금의 중국 산서성 북쪽 내 몽골의 음산 산맥 일대에 살던 족속이다. 은나라때는 빈(邠) 지역에 살던 주나라 조상인 고공단보가 이들의 침략을 피해 기산 남쪽 위수 지역으로 옮기기도 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쳤다는 기록이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鬼方)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중국 하나라의 멸망과 은나라 건국에 관한 환단고기 기록이 입증되다.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1767)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위 기록에서 우리는 단군조선의 의중에 따라 하나라와 은나라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단군세기>의 기록은 중국의 고대 사서인 한나라 사람 유향이 쓴 <설원 권모(設苑權謀)> 편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기록의 신빙성을 말해주고 있다. 은나라 건국태조 탕왕(성탕)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기를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걸왕이 진노하여 구이(九夷=단군조선)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九夷)의 군사를 요청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됐습니다.”라고 말하자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토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위 <단군세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설원의 기록은 하나라와 은나라 교체기에 성탕이 포악무도한 걸왕을 내쫓고 은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두나라 간의 패권 싸움에서 성패의 관건을 쥐고 있던 구이(九夷) 곧 단군조선의 강한 영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해준다. 북경대 교수 푸쓰넨傅斯年도 “탕이 걸을 내쫓은 것은 동이가 하나라를 멸망시킨 것과 같다고 하였다.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대진국)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8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환단고기가 그 연호를 기록한 것은 진서임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대진국(발해)은 세조(대중상)로부터 15세 259년간 존속한 나라였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보면 대진국 황제들의 묘호, 년호, 시호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위의 년호는 <신당서>에 기록된 년호와 일치하고 있으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이라 한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조부와 증조부 이름을 밝힌 환단고기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子遊)’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천남생의 고조부(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이 ‘광廣’임은 태백일사에만 드러난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세) 홍무 9년(단기 2931,598)에 열제께서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사로잡아 죽였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이고 선조는 봉성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 이름은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고 나란히 막리지를 지냈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1117P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연태조가 대대로(大對盧)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대로는 제 1위의 관등이고 막리지는 최고위 관직인데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志銘)에는 막리지로 나와 있다. 대진국(발해)의 제대로된 황제 연호는 환단고기에서만 보여준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대진국(발해)의 전신인 후고구려와 대진국(발해)의 건국과정이 상세히 나와 있으며, 대진국(발해) 황제들의 묘호, 년호, 시호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신당서에서도 연호가 나오나 대조영부터 연호를 기록하고 있다. <당회요>의 기록에 의해 김육불과 황유한의 책에는 13대 대현석(명종)과 15대 대인선(애제) 사이에 위해라는 이름의 왕이 13년간 다스린 것으로 나온다. 서기 668년 9월 21일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서압록하(지금의 요하)를 지키던 대진국(발해)장군 대중상은 패망한 고구려 유민을 모아 동쪽 동모산에 이르렀다.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고구려의 영광을 거듭한다’는 뜻으로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 회복을 자신의 천명이라 여겼던 대중상이 699년 5월 붕어한 뒤, 태자였던 대조영이 뒤를 잇게 된다. 기존 사서에서는 대중상의 붕어 전 해인 698년에 대진국(발해)이 건국된 것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그 해 대중상이 대진국(발해)의 전신인 후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제위에 오른 대조영은 홀한성(지금의 상경 용천부)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는 대진(大震), 연호를 천통(天統, 하늘의 법통을 계승한다)이라 하였다.
전국 시대 추(鄒)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교를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장수왕 연호가 발굴된 불상으로 입증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 ‘건흥(建興)’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때의 연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신빙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소서노와 두 아들의 자립 고주몽이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자신의 두 아들(비류와 온조)에게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다가. 경인년(BCE42년) 3월에 사람들에게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번 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그곳에 산지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만 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 5백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리고 주몽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고 칭찬하며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라는 칭호를 내렸다. 13년 임인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온조의 백제건국 이때 마려 등이 온조에게 이르기를 “ 신들이 듣기를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 하니 온조가 “좋다”며 허락하였다. 이에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지금의 인천부근)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곳을 더 찾지 마옵소서 ”온조가 신하 열명의 의견을 쫓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엿다. 뒤에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위지성 : 하남 위례성. 위지성의 위치는 고대사에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1500년 동안 잊혀졌던 위지성은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으로 밝혀지고 있다. * 어하라 : 고주몽 성제가 책봉한 백제 건국 과도기의 왕의 호칭, 백제 건국의 시초는 고구려의 제후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그 뒤에도 계속 백제왕을 어하라라고 불렀는데, 이는 고구려가 백제를 제후국으로 거느린 황제 국가였음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주서][백제전]을 보면 " 백제왕의 성은 부여씨이며 왕호는 어라하인데 백성들은 건길지라 불렀다"라고 하여 환단고기의 어하라와 기록상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백제 왕을 부르던 칭호임을 알 수 있다.
신라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5대손 파소의 아들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가 부여 황실의 딸이라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신라가 부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주는 획기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종래에서는 사대주의 사관의 왜곡, 날조에 의해 중국 진나라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를 세운 것으로 잘못 인식돼 왔다. 삼국유사 감통에는 “선도산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한라라 8세 소제나 9세 선제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라고 하였고 또 사소가 처음 중국에서 진한에 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기록하여 파소와 박혁거세의 혈통을 중국 한족 혈통으로 왜곡시켜놓았다. 그러나 정작 중국 사서에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 문헌으로는 밝힐 수가 없어 그것이 확실한지는 알지 못하겠다.(檀君旣徒居阿斯達而 國人猶推尊之 諸侯亦無敢逼者 或曰 朴氏白氏 皆其後裔 而赫居世亦出於檀君之後云 今文獻無徵 未知其確矣)” 고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 제6편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의 기록을 보면 (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抵辰韓奈乙村 時有蘇伐都利者 聞之 往收養於家而 及十三岐祥然夙成 有聖德 於是 辰韓六部共尊爲居世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亦曰斯盧) “사로(斯盧)의 처음 임금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 제실(帝室)의 딸 파소(婆蘇)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들을 배어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奈乙村)에 이르렀다. 이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영리하고 숙성한데다가 성덕이 있었다. 이렇게 되어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居世干)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이름을 진한(辰韓)이라 하고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호태왕 비문 속 광개토대왕 17세손의 비밀은 환단고기로 풀린다. 호태왕 비문에 광개토대왕이 17세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고주몽으로부터 13세손이라고 되어 있다. 19대왕에서 6번의 형제상속 또는 종손상속을 제외하면 주몽의 13세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로부터 4세손이 고주몽이므로 따져보면 17세손이 된다. 이것을 통해 고구려 역사 900년 미스테리도 풀린다. 기원전 232년에 해모수가 단군이 되고, 고구려가 기원후 668년에 망했으므로 정확히 900년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사서 중의 하나인 신당서에는 당의 시어사 가언충이 고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80 먹은 당의 장수에게 망한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역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당의 가언충이 고구려는 漢대로부터 나라를 가져 오늘날 9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라고 지적했다. 즉,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김부식이 잘못 판단하고, 오히려 당의 가언충이 올바르게 봤다는 것을 환단고기를 통해 증명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당시의 당나라 군주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때로부터 8년이 지난 서기 668년에 신하인 가언충賈言忠이 고종을 격려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30년 가까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지쳐 있는 자신의 주군을 격려하기 위한 말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편에 나오는 말이다. “고구려의 비기(秘記)에서는 ‘900년이 안 되어 80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씨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진 이래로 오늘날 900년이며 장수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왜를 격퇴한 광개토태왕의 기록을 통해서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영락 10년(단기 2733,400)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 하엿으므로 열제의 명령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1147
동명
고조선 47세 고열가단군의 후손인 그는 거병에 앞서 졸본에서 동명왕으로 즉위하였고, 훗날 민심을 얻어 북부여 5대 단군에 즉위하였다. 고두막학은 동명이라는 나라의 왕 동명왕)으로 22년간 재위하였고 북부여 5세 단군(고두막 단군)으로 27년간 재위하였으나 합하여 49년간 왕과 단군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大周故金紫光祿大夫行營繕大匠上護軍遼陽郡開國公泉君墓誌銘幷序」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昔者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雖星辰海嶽莫繫於要荒而俎豆詩」 書有通於聲敎承家命氏君其後也乃高乃曾繼中裏之顯位惟祖惟禰傳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비록 성진(星辰)과 바다와 산악이 변방지역[要荒]에 걸려 있지 않았어도 예절[爼豆]과 시서(詩書)는 성교(聲敎)에 통하여, 가(家)를 잇고 씨(氏)를 받았으니 군(君)은 그 후예이다.
광개토대왕비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 <대변경大辯經> <왈曰> 柵城有 太祖武烈帝 紀功碑 東鴨祿之皇城有 廣開土境大勳蹟碑 安州淸川江厓上有 乙支文德石像 烏蘇里江 책성유 태조무열제 기공비 동압록지황성유 광개토경대훈적비 안주청주강애상유 을지문덕석상 오소리강 外有 淵蓋蘇文頌德碑 平壤牧苒峰中麓有 東川帝朝天石 朔州巨門山西麓有 乙巴素墓 雲山之九峰山有 淵蓋 외유 연개소문송덕비 평양목염봉중록유 동천제조천석 삭주거문산서록유 을파소묘 운산지구봉산유 연개 蘇文墓 소문묘 책성에는 태조무열제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 황성에는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으며, 안주 청천강 절벽위에는 을지문덕석상이 있고, 오소리강 밖에는 연개소문 송덕비가 있으며, 평양 목염봉 중턱 기슭에는 동천제조천석이 있다. 그리고 삭주 거문산 서쪽 산기슭에는 을파소의 묘가 있으며, 운산 구봉산에는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
광개토 대왕비와 모두루비는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왔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환단고기는 이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모두루 묘지와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자료들이다. 모두루 묘지는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의 북부여 수사(守事)인 모두루의 묘지(墓誌)다. 1935년 10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서 발견되었다. 광개토대왕비와 모두루 비에 모두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왔음(出自)을 밝히고 있다.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가 개창되었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단기 2095년에 웅심산에서 기두하였다(삼성기 상, 북부여기)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47세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대신하여 오가 부족장의 6년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순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 역사가 시작되었다 (BCE 232)
고구려는 해모수께서 태어난 고향이므로 북부여를 또한 고구려라고도 불렀다 (단군세기) 고구려의 본래 이름은 ‘고리’,‘구려’이다 [삼성기]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해모수를 시조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해모수가 태어난 곳이 서압록의 고리이므로 후에 북부여를 고구려라고도 불렀는데 주몽이 그 이름을 계승하여 고구려라 한 것이다. 고구려는 해모수의 북부여(원고구려)와 주몽의 고구려(본 고구려), 대중상의 대진국까지 합쳐서 1165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후에 왕건이 고구려의 맥을 계승하여 고려라 하였으니 고구려(고리,구려,고려)의 정신은 1631년(BCE 239~ CE 1392)을 이어온 것이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보충해주는 환단고기의 기록 삼국사기 온달열전에는 온달에 관한 이런 기록이 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작위를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이 기록을 통해서 온달이 어디에서 전투를 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환단고기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는 온달이 북주와 싸웠던 기록을 단순히 배산들이라고 했는데, 환단고기는 갈석산과 배찰산이라고 명시했고, 더 나아가 이 전투의 결과로 고구려가 유림관 동쪽을 모두 차지했다고 전하고 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 시기에 온달과 관련된 좀더 구체적인 기록이 보인다. 平岡上好太烈帝 有膽力 善騎射 乃有朱蒙之風 改元大德 治敎休明 大德十八年丙申 帝率大將溫達 往討碣石山 拜察山 追至楡林關 大破北周 楡林鎭印悉平 楡林 今山西境 평강상호태열제는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주몽의 기풍을 닮았는데 연호를 대덕이라 고치고 나라를 다스림과 가르침이 아주 밝았다. 대덕 18년 병신에 평강상호태열제가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 배찰산을 토벌하러 가서 추격 끝에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쳐부수니 유림진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유림은 지금의 산서 경계이다. 이외에도 고구려국본기에서 연구해 보아야 할 역사적 사건들이 많다. 예를 들어 ▶ 광개토대왕의 일본 진출 문제 ▶ 문자명왕의 대륙 동해안 장악 문제 ▶ 을지문덕의 태원 및 유주 지역 출격 문제 (탁성, 창평, 조양, 상곡 등의 지배 문제) ▶ 영양왕 9년 연태조의 등주 토벌 문제(산동 지역 지배 여부) ▶ 연개소문이 하북 일대를 진격하고, 이세민에게 산서, 하북,산동, 강좌를 할양받은 문제 ▶ 태조대왕의 요서 10성 문제 (북경 인근 지배 문제) ▶ 인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한다는 문제 (일명 대마도 지배 문제) 이런 여러 가지들을 한중일 사서들을 비교 대조해보고 연구분석해보는 자세가 사서를 대하는 학인들의 자세가 아닌가. 환단고기는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역사적 만남을 연개소문의 입장에서 보여준다.
642년 8월, 백제군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해 성주 부부를 죽였다. 죽은 이들은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다. 김춘추는 개인적인 분노 이전에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렸다. 이를 위해 그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방문했다. 당시 고구려의 권력자는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중국의 당나라와 전쟁을 불사하려던 사람으로 반대파 귀족과 영류왕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연개소문은 국방에도 힘써 당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에 대비하였다. 먼저 백제 상좌평과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우고, 또 신라 사신 김춘추를 청하여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두번세번 권유하였으나 김춘추가 끝내 듣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안시성주 양만춘의 존재와 승리는 환단고기에는 자세히 나온다.
연개소문을 도와 요동을 방어한 고구려의 장군들은 누구일까. 단재 신채호는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을 들고 있다. 하지만 추정국은 물론이고, 양만춘 장군도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안시성주에 대해서는 송준길의 문집인 『동춘당성생별집』「경연일기」의 현종 10년인 1699년 4월 26일조에 처음 그 이름이 보인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양만춘'이 '이세민'을 보자 호통을 치며, 화살을 날렸다. '이세민'은 말을 타고 진지(陣地)로 나서다가 허공을 반으로 가르며 날라오는 화살에 왼쪽 눈 한 복판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이세민'은 숨을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종군하는 병사들 사이로 숨어 버렸다.
환단고기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설화의 비밀을 풀어준다. 대무신 열제 20년(단기 2370,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하셨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설화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호동(好童)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에게서 난 소생이다. 왕은 그를 심히 사랑하여 호동(好童)이라 이름하였다. 대무신왕 15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를 유람하였는데, 낙랑의 왕 최리(崔理)가 여기 나왔다가 호동을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다. 그대야말로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인가?"며 호동을 데리고 함께 돌아가 사위를 삼았다. (삼국사기) A.D 32년 그 뒤, 호동이 고구려에 돌아와 낙랑(樂浪)에 있는 아내 최씨녀(崔氏女)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하기를 "그대의 나라 무구(武庫)에 들어가 고각(鼓角-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린다면 내가 그대를 아내로서 맞아들이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으리라." 하였다. 이유는 낙랑에는 옛날부터 신기한 고각이 있어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리는지라, 그로써 침략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과연 최리의 딸(낙랑공주)은 몰래 무고에 들어가 예리한 칼로 그 고각을 찢어 버리고 호동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호동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여 낙랑을 공격했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이르러서야 깜짝 놀라 무고에 가보니 벌써 고각은 부서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최리는 마침내 딸을 죽이고 항복하고 말았다.
평양 일대에 있다는 낙랑유적은 무엇이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전설에 나오는 낙랑국은 무엇인가? 호동왕자의 나라인 고구려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낙랑공주의 나라인 낙랑국(樂浪國)에 대해서는 시원스런 해명을 듣지 못한 채 역사를 배워왔다. AD 37년에 고구려로 통합 된 최리의 낙랑국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번조선의 기준왕이 BC 194년에 위만에게 쫓겨났는데, 최숭은 낙랑군 수성현지역의 유민들과 함께 기준의 번조선이 망하기 1년 전에 진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해모수단군의 허락을 받고 마조선의 평양지역으로 옮겨와 낙랑국을 세웠다.
번조선의 낙랑군과 최숭의 낙랑국
낙랑은 위만이 번조선을 찬탈해 다스렸던 왕험성王儉城(번조선 말기의 수도로 지금의 하북성 창려昌黎) 지역이다. 본래 평양 일대에 있었던 낙랑은 고조선 삼한 중 번한番韓의 유민 최숭이 세운 ‘최씨 낙랑국’이며 낙랑군이 아니다. 현재의 평양지역을 낙랑군으로 보는 인식은 당나라 이후에 생겼으며, 그 전에는 요동에 있었다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중국의 3대 보배로 현존하는 4,700년 전 황제헌원의 릉과 5,200년 전, 염제신농의 릉, 그리고 우왕(禹王)의 비(碑) 조선시대의 [응제시주]와 [세종실록지리지]는 ‘우禹가 도산(塗山)에서 제후들과 회동할 때 태자 부루를 보내 조회하게 하였다’라고 하여 고조선이 오히려 중국의 속국이었던 것처럼 주객이 전도되게 기록하였다. 황제릉과 염제릉과 함께 중국의 3대 보배라 하는 소위 우왕비가 있다. 우왕비는 원래 남악 형산의 구루봉에서 발견되어 구루비라고 하며, 이 구루비는 송나라 때 실종되었다가 약1,000년이 지나 깨진 채로 사찰의 담장으로 쓰였던 것을 2007년 6월에 발견한 것이라 한다. 남악 형산 72봉의 하나인 악록산의 산정에 있는 우왕비는 송나라 시대 하치(何致)가 탁본하여 만든 복제품이 되며, 이 비의 머리부분은 1935년 6월에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정자를 세우면서 새긴 것이 된다. 비문의 글자체는 올챙이 모양과 비슷하며 해독하기 어렵다 하는데, 글자수는 9행으로 나뉘어 모두 77자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우의 치수 공적을 적은 것이라 한다. ‘배달’,‘신시神市’,‘청구靑丘’를 기록한 문헌들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 유희령 1480~ 1552 <권1 전조선>檀君 姓桓氏 名 王儉 .. 有神人桓因之子 桓雄 .. 謂之神市 在世理化 ◆<신증동국여지승람>이행 홍언필 1530 <권54 평안도4 영변대도호부 고적 태백산)太佰山(古記 昔有天神桓因 名庶子雄 .. 謂之神市 主人間三百六十餘事) ◆<기언記言>허목 1595~1682 <권32 외편동사1 단군세가>上古九夷之初 有桓因氏 桓因生神市 始敎生民之治 民歸之神市 生檀君.. ◆<약천집藥泉集>남구만 1629~1711 <제29잡저 동사변증 단군> 云昔有桓國帝釋庶子桓雄 受天符印三箇..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 且其五行治水之法과 皇帝中經之書가 又出於太子扶婁오 而又傳之於虞司空하고 後에 復爲箕子之陳洪範於紂王者가 亦則皇帝中經과 五行治水之說이니 則蓋其學이 本神市邱井均田之遺法也니라.
오행치수법과 <황제중경皇帝中經>이 부루태자에게서 나와 우사공虞司空에게 전해졌는데, 후에 기자箕子가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진술한 홍범구주 또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설이다. 본래 그 학문은 배달국 신시시대의 구정법邱井法과 균전법均田法에서 전해 내려온 법이다. ([환단고기]<태백일사> ‘청구靑丘’를 기록한 문헌 ◆<규원사화>북애자 1675 <태시기단군기>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 曰靑丘國 宅樂浪忽'
◆ 倍達桓雄定有天下之號也其所都曰神市後徙靑邱國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 蚩尤起靑邱하시니 萬古振武聲이로다. 淮岱皆歸王하니 天下莫能侵이로다 치우천황 청구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셔서 회수태산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 천하의 누구도 침범할수 없었사옵니다. <단군세기(檀君世紀)> ◆ 六世檀君 達門 在位三十六年 韓民族의 뿌리를 노래한 大敍事詩 「誓效詞」
戊寅元年이라. 壬子三十五年이라 會諸汗于常春하시고 祭三神于九月山하실새 使神誌發理로 作誓效詞하시니 달문단군의 재위 원년은 무인(BCE 2083)년이다. 재위 35년 임자(BCE 2049)년에 여러 왕을 상춘에 모아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지내실 때, 신지 발리로 하여금 서효사를 짓게 하시니
其詞에 曰 그 가사는 이러하다.
東方 文明의 開倉 精神을 讚揚함
「朝光先受地에 三神赫世臨이로다. 桓因出象先하사 樹德宏且深이로다. 諸神議遣雄하사 承詔始開天이로다 아침햇빛 먼저 받는 이땅에 삼신께서 밝게 세상에 임하셨고 환인천제 먼저 법을 내셔서 덕을 심음에 크고도 깊사옵니다. 모든 신이 의논하여 환웅을 보내셔서 환인천제 조칙받들어 처음으로 나라 여셨사옵니다.
蚩尤起靑邱하시니 萬古振武聲이로다. 淮岱皆歸王하니 天下莫能侵이로다. 王儉受大命하시니 懽聲動九桓이로다 치우천황 청구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셔서 회수태산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 천하의 누구도 침범할수 없었사옵니다. 단군왕검 하늘의 명을 받으시니 기쁨의 소리 구환에 울려퍼졌사옵니다
魚水民其蘇오 草風德化新이로다. 怨者先解怨이오 病者先去病이로다. 一心存仁孝하시니 四海盡光明이로다. 물고기 물만난 듯 백성들이 소생하고 풀잎에 부는 바람처럼 덕화가 새로워졌사옵니다. 원한 맺힌자 원한 먼저 풀어주고 병든자 먼저 낫게 하셨사옵니다. 일심으로 인과 효를 행하시니 사해에 광명이 넘치옵니다.
辰韓鎭國中하니 治道咸維新이로다. 慕韓保其左하고 番韓控其南이로다. 巉岩圍四壁하니 聖主幸新京이로다. 진한辰韓이 나라 안을 진정시키니 정치의 도는 모두 새로워졌습니다. 마한慕韓은 왼쪽을 지키고 번한番韓은 남쪽을 제압하옵니다. 깍아지른 바위가 사방 벽으로 둘러 쌌는데 거룩하신 임금께서 새서울에 행차하셨사옵니다.
如秤錘極器하니 極器白牙岡이오. 秤幹蘇密浪이오 錘者安德鄕이로다. 首尾均平位하야 賴德護神精이로다. 삼한형세 저울대 저울추 저울판 같으니 저울판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요 저울추는 안덕향이라. 머리와 꼬리가 서로 균형을 이루니 그 덕에 힘입어 삼신정기 보호하옵니다.
興邦保太平하야 朝降七十國이로다. 永保三韓義라야 王業有興隆이로다. 興廢莫爲說하라 誠在事天神이로다.」 나라를 흥성케하여 태평세월 보전하니 일흔나라 조공하며 복종하였습니다. 길이 삼한관경제 보전해야 왕업이 흥하고 번성할 것이옵니다. 나라의 흥망을 말하지 말지니 천신(삼신상제)님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겠사옵니다. 단군의 아들 부루태자가 오행치수법을 전한 사건의 실체를 보여준다.
시조 단군왕검께서 재위 67년에 태자 부루를 보내어 9년 대홍수를 겪으며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중국에 ‘오행의 원리로 물을 다스리는 법’을 전하며 요순 정권을 구해주엇다. 동방 회맹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부루태자가 우순이 보낸 사공을 도산에서 만난 오행치수법을 전한 이 사건 이후 고조선은 중국과의 국경을 살펴 오늘날의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인 유주와 영주를 강력으로 편입하였다. 우(禹)가 세운 하(夏)나라도 역시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우禹는 아버지 곤(鯤)이 치수에 실패하여 순임금에게 처형당한 후 그 뒤를 이어 나라의 치수(治水)사업을 맡아보던 사공(司空)신분이었다. 우禹는 순(舜)을 대신하여 도산회의에 참석하여 고조선의 태자 부루에게서 오행치수법이 적힌 금간옥첩을 받았고 이 비법으로 홍수를 해결하고 인심을 얻어 나중에 하夏나라를 열게 되었다.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홍범구주편에는, 우禹가 치수를 맡으니 하늘(天)이 우禹에게 홍범구주등을 내리어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고, 오월춘추(吳越春秋) 월왕무여 외전(越王無余外傳)에는, 우(禹)가 꿈에 붉게 수놓은 옷을 입은 남자를 보았는데, 그 남자가 "나는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이니라"하였으며, 이후 우禹는 3달동안 목욕재계를 한 후 산에 올라 금간옥서(金簡玉書)를 얻었으니 이 책은 치수법을 적은 요결이라 기록하고 있다. 사공(司空) 우禹가 금간옥첩을 받아간 것과 관련된 기록은 [오월춘추],[역대신선통감],[응제시주],[세종실록],[동국여지승람],[동사강목],[묵자] 등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중국이 중화주의 사관으로 쓴 오월춘추는 부루태자를 창수사자라 말하며 은인의 실체를 감추었고 또한 창수사자가 우의 꿈에 나타나 비법을 알려준 것으로 기록하여 우가 순전히 자신의 현몽으로 국난을 해결한 것으로 왜곡하였다. 환단고기를 통해 삼국유사 단군 1,908살의 비밀을 풀린다.
삼국유사에는 1,90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단군조선 건국 BCE 2333년에서 44대 단군이었던 구물단군이 대부여로 국호를 개칭한 BCE 425를빼면 정확히 1908년이 된다. 이것으로 볼때 환단고기 내용이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단군조선의 도읍지 이동]
고조선의 시조 단군왕검께서 아사달에 첫 도읍지를 정하고 고조선을 건국. 2. 백악산 아사달시대(BCE 1285~BCE 426) 860년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단군의 자리에 오른 22대 색불루 단군이 백악산 아사 달로 천도 3. 장당경 시대(BCE 425~BCE 238) 188년 반란을 일으킨 우화충을 소탕한 구물장군이 모든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단군의 자리에 오름. 이때 국호를 대부여로 개칭하고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김. 고조선사를 한분의 단군사로 잘못기록한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1908세를 살았다라고 한 것은 송화강 아사달 (1048년)과 백악산 아사달(860년)시대를 합한 것이다. [응제시주],[역대세년가][동사강목] 등에서 단군왕검의 수를 1048년이라 한 것은 송화강 아사달 시대의 역년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최부의 시문집인 [금남집錦南集]도 고조선 역년을 1048년으로 잘못 말하고 있다. “송화강 아사달 시대 (1048년)과 백악산 아사달시대 (860년)의 기간을 합하면 정확히 1,908년이다. 고인돌 유적은 환단고기의 사료 가치를 높인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의 주무대였던 만주와 요서의 고인돌도 그 형성연대가 오래지만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해도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하지만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방사능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관점과 직결되어있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 뚜렷한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례 문화를 갖고 있었다.
새라 M 넬슨 교수= 1970년 한국을 방문해 1년간 한국의 신석기 문화를 공부했고, 1973년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한강 유역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산리 유적을 세계고고학사전에 올렸고, 1996년엔 세계동아시아 고고학대회에서 처음으로 한국고고학을 독립 분과로 만들기도 했다(그 이전에는 한국고고학은 중국과 일본의 고고학에 속해 있었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 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비파형 동검은 중국 중원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양식의 청동검이다. (cf. 한반도에서도 서기전 25세기로 올라가는 청동기 유적이 두 곳이나 발굴되었다. 전라남도 영암군 장천리 유적의 청동기시대의 집자리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 무덤은 방사성탄소 측정에 의하여 서기전 25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 같은 연구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단군조선의 건국연대가 고고학적 신뢰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기전 2500년이라는 연대는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2333년보다 170여 년 앞선 것으로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여 진다. )
연개소문을 도와 요동을 방어한 고구려의 장군들은 누구일까. 단재 신채호는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을 들고 있다. 하지만 추정국은 물론이고, 양만춘 장군도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안시성주에 대해서는 송준길의 문집인 『동춘당성생별집』「경연일기」의 현종 10년인 1699년 4월 26일조에 처음 그 이름이 보인다.
'양만춘'이 '이세민'을 보자 호통을 치며, 화살을 날렸다. '이세민'은 말을 타고 진지(陣地)로 나서다가 허공을 반으로 가르며 날라오는 화살에 왼쪽 눈 한 복판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이세민'은 숨을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종군하는 병사들 사이로 숨어 버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대 태조대왕 3년(A.D.55) 조를 보면, "봄 2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를 방비토록 했다. 三年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가 요서 지역까지 진출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10개나 되는 성을 쌓았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그 성을 쌓은 곳이 요서 지역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성의 이름이나 그 성들의 배치상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도록 기록되어 있다.
기록을 보면, "조대기에 이르기를, 태조 융무(6세 태조 무열제 단기 2388년,55) 요서에 10성을 쌓고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1. 안시(安市)성이니 개평부의 동북쪽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2. 석성(石城)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덜어진 곳에 있고 3. 건안(建安)은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4. 건흥(建興)은 난하의 서쪽에 5. 요동(遼東)은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6. 풍성(豊城)은 안시성의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7. 한성(韓城)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8. 옥전보(玉田堡)는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9. 택성(澤城)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곳에 있고 10. 요택(遼澤)성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탕지보는 일명 안촌홀 변한성이라 하는데 변한성은 단군조선 시대 삼한의 하나인 번한의 수도로 곧 신지비사에 나오는 오덕지이다. 안시성의 남쪽으로는 당산 준봉이 있고 서쪽으로는 어양, 북평 보정 등지가 넘겨다 보이고 동북쪽으로는 산해관 평원이 훤히 바라다보이고 ,북녘으로는 만리장성이 희미하게 보인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안시성 위치'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꼭 눈을 잃었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고 한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당서를 상고해보면, 안시성은 평양의 거리가 5백리요, 봉황성은 왕검성이라고도하였고, 지지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무엇으로 이름한 것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에는 옛날 안시성을 개평현의 동북쪽 70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까지가 3백 리이고,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그러니 만일이 성을 옛 평양이라고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라는 말과 서로 부합된다"고 여긴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고 있으므로, 기자가 평양에 있다하면 또한 지금의 평양으로만 믿고, 정전이 평양에 있다하면 역시 지금의 평양으로만 믿어서, 만일 누가 봉황성이 곧 평양이라고 한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고 나무랄 것이다.
안시성은 하북성에서 찾아야 한다
중국 정사의 기록 → 하북성 북경일대라 기록하고 있다 - 한서 : 요동군, 하북성 북경 - 위서 : 안락군, 정주, 하북 북경, 밀운 - 독사방여기요 : 안시폐현, 북경현 동북 50리, 한요동속현
환국의 12나라 이름은 여러 문헌상에 나타난다. 중국 문헌에서도 12환국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진서 사이전을 보면 비리국,양운국,구막한군,일군국이 있었는데 이들은 2만~ 5만호 정도를 가진 소국으로 시베리아 등지에 있었다 한다. 당서 북적전에는 우루국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구다천국과 매구여국이 구다국과 매구곡이란 명칭으로 남아있다. 이처럼 아홉 개 나라의 이름이 후세의 사서에 나타난다.
裨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日 領戶二萬 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 領戶二萬 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 領戶五萬餘 一群國去莫汗又百五十日 計去肅愼五萬餘裡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며 가구의 수는 2만호이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또 말을 타고 50일을 가며 가구의 수는 2만호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50일을 가며 가구의 수는 5만여호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150일을 가야하는데 이를 계산해보면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 하는 거리이다. 신라 석탈해(昔脫解)왕은 협보가 세운 다파라국 출신임을 밝힌 환단고기
협보(陜父)는 누구인가?
협보(陜父)는 주몽(朱蒙)의 친구이며 고구려 건국의 주역(개국공신,창업공신)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등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원래 부여왕의 신하였으나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옮겨올 때 오이(烏伊)‧마리(摩離)와 함께 이주해 와서 주몽 초기의 세력 기반의 하나를 이루었다. 3년(유리왕 22) 대보(大輔)의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사를 소홀히 하는 유리왕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 좌천, 관원(官園)의 일을 맡게 되었다. 이에 분개하여 남쪽 한(韓)으로 이주해 갔다. (한韓은 대동강 지역)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남쪽으로 이주해간 이후 협보가 왜국으로 건너가 다파라국의 시조가 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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