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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희 요안나 자서전
유년기
나는 소제동 한디 마당집에 8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한디 마당이란 집터가 200평인데 안마당 한디 마당으로 불렀습니다.
한디 마당은 농사 집이니까 농사일만하고 사랑채에는 가족 머슴을 두고 살았습니다.
한디 마당집이라면 소제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재건해서 백년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낳으면 딸 낳으면 딸 해서 딸부자집이라고 합니다. 딸만 낳는 이집에 내가 남동생 아우를 보았으니 집안에 축복이요 행복이었습니다. 호강도 하고 귀여움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 시절은 놀이방도 없고 유치원도 없으니까 집에서 언니 동생들하고 주로 소꿉놀이를 하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시청 회계 과장으로 계셨고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시고 어머니는 현모양철 농사 집 살림 하시며 아이들을 키우셨지요.
소년기
자라면서 조금씩 무언가를 알게 되고 9살에 신흥동에 있는 초등소학교에 입학해서 언니들하고 함께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동안 남동생도 자라서 함께 다녔습니다. 여름장마가 오면 갑자기 불어나는 물이 대동천 다리위로 물이 잘랑잘랑 넘치면 싸이렌이 불고 다리를 건너 집에 가는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왜정 때라 한글은 전혀 배우지 않고 일본 공부만 배우고 일본말로 만 사용했습니다. 6년 동안 일본공부만 해서 한글은 전혀 몰랐고 일본 역사는 달달 외우면서 우리나라 역사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15세에 졸업을 하고 그 해 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막내 동생이 생겼습니다. 할머니가 하시든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가 호미 자루 쥐고 주인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다니시며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노산이라 모유도 부족한데 전쟁시절이라 그 때는 우유도 없고 설탕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쌀로 흰죽을 끓여서 그 죽물에다 설탕을 비릿하게 타서 먹이며 내가 낮에는 돌보며 집안일을 했습니다. 이웃 아주머니 들이 매일 와서 일손을 도와 주셨습니다.
매일 일을 하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소죽까지 쒔습니다. 날마다 고된 하루였지요. 졸업하든해 8월15일 전쟁은 끝이 나고 제국에서 해방이 되었지요. 일본 사람들은 다 버리고 자기나라로 쫓겨 가고 남 북 간에 좌익파 우익파로 갈라져 내란이 자주 일고 여기저기서 싸우며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그러는 동안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 나이 18세가 되었지요. 큰 언니가 자기옆 집에 집안은 넉넉지 않아도 집안 어른들하며 신랑감이 너무 좋다고 신발이 달토록 문창동에서 소제동을 드나들며 중매를 서서 음력 12월 20일에 결혼을 했습니다. 문창동 15번지 도립병원 뒤 고패기와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소제동에서 문창동까지 꽃가마가 아닌 외삼촌 찝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 시절은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대로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도 모르는 채 시집을 갔습니다. 오자 남자 세자라는 이름에 철도국 공무원이었습니다. 육 남매 중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청년기
친정에서는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부러운 것이 없이 살았는데 시댁은 너무 가난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19세에 아기를 가져 20세에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시부모님도 기뻐하시고 남편도 기뻐했습니다. 그 시절 공무원 월급 12,000원 시숙도 공무원이라 집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아기 엄마들이 점심을 모르고 저녁식사를 오후 4시 정도면 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어려움 속에서 제금을 났습니다. 수물 한살에 철도국 뒤 신안동으로 방 한 칸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달도 못가서 6.25사변이 났습니다. 피난을 가게 되어 아들 돌때 떡 해준다고 쌀 한말을 농속에 넣어 놓고 대충 꾸려서 피난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몇일만 피했다 오면 된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형님 친정 마랑 골 이라는 시골 동네로 온 가족이 떠났습니다. 머들령재라는 크고 높은 산을 아이와 짐을 지고 온 힘을 다했지만 겨우 도착해서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인민군들이 그 동네에 들어 왔다고 전추기가 날아와 구석구석 사격을 당하는데 난생 처음일이라 무섭고 겁이 나서 죽는 것 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를 떠나 다시 대전 집으로 들어 왔습니다. 오는 도중에도 여기저기 포격을 해서 숲속으로 조심조심 돌아 왔습니다. 오는 도중에 산속에서 집 주인을 만나 반가워 인사를 했지만 하고보니 내 농속에 넣어 놓은 쌀자루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 쌀자루 어디서 가져와요? 하니 두말 않고 내 주더군요 나는 그 쌀을 받아 왔습니다.
문창동 시댁에서 몇 달을 묵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 날 또 인민군들 밤중에 들어 닥쳐 지하실로 대청마루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무서워 벌벌 떨고 그 놈들은 밥을 달라 먹을 것을 내놔라하며 총칼을 드리 밀었지요.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니 인민군들은 다른 데로 갔습니다. 그러고 나니 비29라는 배행기가 몇 대 날아와 대전역을 치는데 땅이 울리고 집이 흔들리더니 유리창이 다 깨지고 대문이 열려 닫는데 폭탄의 위력으로 장정들 4명이 문을 밀어도 문이 닫치지를 안았습니다. 튼 사건이었지요. 그렇게 지내며 몇일이 지나니 폭격소리도 총소리도 별루 무섭거나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들 승균이 돌이 돌아와 떠을 해서 모두 나누어 먹고 소제동 친정집에 떡을 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대동천 냇가에서 폭격을 당했습니다. 사이렌이 불어 냇가에 나무속으로 숨었는데 대전역을 치는 폭탄이 떨어지면 콩 티듯 파편쪽이 날아오는 데 너무 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막간을 이용해서 옆집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그 안에 가득 차 있었다. 거기서 피신했다가 죽을 각오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전쟁은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인민군 들은 일력이 부족하니까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데리고 가니 어쩔 수 없이 남편은 철도국에 나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으로 나라에 중간을 끊어 놓으니 인민군들은 맥을 못 추고 산속으로 숨고 남편도 철도 봉사 일을 했다고 감원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국수공장을 시작했지요. 건물은 폭격 맞아 다 부서지고 먹을 것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난민이었지요. 허물어진 건물 속에 판잣집을 짓고 국수공장을 했지요.
값싼 국수가 없어서 못 팔정도로 잘 팔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철도국에서 복직하라는 발령이 났습니다. 그래서 국수공장을 형님에게 맞기고 군산 철도청으로 갔습니다. 방을 얻어 놓고 날 데리러 오는 날 밤 12시에 입대 하라는 영장이 나왔습니다. 뒤늦게 27세에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훈련소는 제주도 제일 훈련소로 갔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곧 바로 전쟁터로 가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박혁포 부대로 뽑혀서 전방에서 떨어진 곳에 배채를 받았습니다. 그 무렵 둘째 아들 창균이가 태어났지요.
점점 전투는 치열해지고 금호산 백고지까지 가서 전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가장 이군인인 사람들은 의가사제대라는 이름으로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집에 돌아와 전쟁터 사이에서 어물상과 고무신 노점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금이 부족해서 동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업을 하다 보니 서로 맞지 않아 갈라서고 빚만 남게 되었습니다.
제대하고 또 제금 났습니다. 신흥동 판암동경계선에 있는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큰 아들 승균이가 시흥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첫딸 회선이를 낳았습니다.
몇 년 후 전쟁은 끝이 나고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38선이라는 금이 그어져 남북으로 갈라졌지요. 좌익파 우익파로 갈라져 한동안 시끄러웠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 생활도 어려웠습니다. 궁리 끝에 폭격 당해 부서진 건물조각을 치우고 판자집을 지어놓고 남편 친구가 국수기계를 외상으로 얻어 주어서 구수공장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은 버스도 없고 판암동에서 인동까지 아이를 업고 걸리고 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서 인동가계로 이사를 했습니다.
사변후 집앞에 시장이 생겨서 상인들도 늘어나고 시장이 커지며 사람들도 많아지고 수동으로 조금씩 국수를 뺏지만 매일 매일 잘 팔렸습니다. 돈이 생기고 조금 씩 조금씩 가계가 활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수 돈도 얻어서 쓰고 첫째 신용을 얻어서 말만하면 얻을 수 있고 무엇이든지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국산 밀가루를 썼는데 국수가 붉은 색이 돋고 풀가루는 전혀 못썼습니다. 그래도 제분회사에서 나오는 하얀 밀가루 한 부대 살 돈도 없었는데 밀가루 집에 가서 사정예기를 했더니 두말 않고 밀가루 두 부대를 주더랍니다.
그 사람은 최 사덕이라는 분인데 한 동네 살았습니다. 참 고마운 분이지요. 매일매일 집안일을 마치고 큰 아들은 학교에 보내고 둘째는 매일 옆집 친구들하고 놀았습니다.
딸 희선이를 업고 공장에서 매일 일을 하다 보니 너무 힘이 들어 가게 앞 사과 상자안에 포대기를 깔고 놓으면 한참 놀다가 지쳐서 울곤 합니다. 그러면 이웃사촌 아줌마들이 번갈아 않아주고 업어주며 자기 들 장사를 했습니다. 아기를 돌보아 주니 너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큰 아들 승균이가 4학년 되든 해 둘째 창균이가 신흥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큰아들은 학교에 다녀오면 동생들 돌보며 공부도 잘 했습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동생들을 돌보아 주니 나는 한 짐 내려놓은 기분이었습니다. 혼자 몸으로 일을 하니 능률도 오르고 일도 더 많이 했습니다. 이웃 사람들 저녁 먹고 앉아 놀 때 나는 일 끝나고 아기기저귀 빨러 냇가에 갔고 다녀와서 저녁 밥지어먹고 다음날은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짓고 했습니다.
매일 같은 노동에 몸은 지치고 공장에 들어가려면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소 같았습니다.
아이를 업고 기계를 돌릴때 옛날 어른들이 목구멍에 쓴내가 난다고 하시든 그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쓴 맛을 저는 보았쓰니까요. 이렇게 힘들고 고생은 했지만 장사가 잘 되고 돈이 생기니까 밀가루 두포대 못살 형편이 다섯 부대 스무포대 60부대 한구루마로 사게 되니 밀가루집 아저씨도 오형이라면 얼마든지 외상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공장은 날로 번창하고 아이들도 잘 자랐습니다. 이렇게 돈도 많이 벌고 여우가 생기니까 인천에 있는 대한제분 공장하고 직거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밀가루 금이 오른다면 큰 창고를 하나 빌려 수십구루마로 밀가루를 사재기 하여 두었다가 오른 시세로 팔면 돈도 많이 쉽게 벌었습니다. 그러다 규모가 커지니 사람을 쓰게 됐습니다.
장사는 잘되고 힘이 드니까 하루매상 한 돈을 정리를 못하고 보따리 보따리 싸서 방에 여기저기 두었다가 비오는 날이 공치는 날 그날은 아침부터 보따리를 끌러 방안에 가득 쏟아 놓고 온 종일 돈 정리를 해서 묵었습니다. 비오는 날만 돈 정리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다보니 넷째 덕균이가 태어났습니다. 조그만 방에 아이들하고 살기가 부족해서 인동 대로변 건너편에 있는 터 30평 양철집을 샀습니다. 그때 돈 270만원을 주고 샀습니다.
조금만 판자집에서 양철집으로 이사를 가니 앞에는 큰 가게가 두 개 뒤로는 큰 방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가게 한 쪽은 세를 놓고 또 한쪽은 국수공장을 했습니다. 지붕 양철을 걷어내고 국수 건조장을 만들었지요. 건조장도 크게 만들고 공장 규모도 커졌습니다. 그 동안 일꾼들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남이란 다 그런 거지요. 돈만 보면 훔쳐 가는 것 같이 먹고 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쪽으로 이사 올 때 큰아들은 대고 1학년 둘째는 충남중학교 2학년 딸은 신흥초등학교 4학년 넷째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넷째덕균이가 간난아기때 유문협자이라는 병에 걸려 젖을 먹기는 잘 하는데 한참 있으면 젖을 다 토하고 변을 못보는 병이었습니다. 그 대 대전에서 제일 큰 병원 유외과에 갔더니 아기가 너무 어려서 수술은 못한다 해서 박외과 박선규 원장님께 수술을 받았습니다. 4시간 반 수술을 받고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안타깝고 아픈 마음을 말로 다 못했습니다. 생후 56일에 수술을 했으니까요 모든 사람들은 못한다 했지만 아빠가 수술하다 죽더라도 원 없이 한다고 극적으로 살아났지요.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건강해졌습니다. 내 나이 32세에 다섯째 아들 학균이를 낳고 35세에 막내 인선이를 낳았습니다. 공장일 하랴 애들 뒷바라지 하며 하루에 도시락을 몇 개씩 싸며 낮에는 일꾼들 점심 저녁을 해 먹였습니다. 눈 코 뜰새 없이 바쁘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중년기
매일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소금물에 불려놓은 국수 부스러기로 반죽해서 국수를 다 빼 널고 아침 식사를 하고 국수가 건조 될 때까지 막간을 이용해서 빨래도 하고 못한 일들을 합니다.
점심식사를 하면 공장에서는 남편과 일꾼들은 일을 시작하고 나는 국수 건조장에 올라가 국수를 끈기 시작하지요. 매일 매일 힘든 일이지만 손으로 자르는 국수가 기계 같이 움직이었습니다. 나는 노래를 좋아 했습니다. 몇 곡을 적어서 주머니에 넣고 올라가면 국수자르며 노래하면 능률도 오르고 힘도 덜 듭니다. 기분도 좋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엔돌핀이 가슴 속에서 팍팍 나옵니다. 때로는 국수건조가 다 되었는데 염기가 있는 국수라 소나기 한 줄기에 다 누져 버립니다.
그래서 소나기가 올 때면 건조장에 올라가 문을 다 내리고 열대야 속에서 국수를 미친 듯이 자르고 나면 온몸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상의를 벗어서 짜면 빨래 짜는 것만큼 땀이 나옵니다.
매일 하는 일이지만 지치지 않고 즐겁고 행복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입학식 졸업식에 한 번도 참석 못했습니다.
형 졸업식에는 동생들이 가서 축해 해주고 동생들 졸업식에는 형들이 가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초등학교는 엄마서부터 아이들 6남매가 다 신흥초등학교를 다녀서 입학만 하면 언니 오빠들이 같이 다녀서 별로 신경 쓸 일이 없었습니다. 막내 딸 인선이가 입학하고 나니 이제 마지막 인데 싶어서 초등학교 소풍가는 날 처음으로 따라 갔습니다. 김밥을 싸고 과자 음료수를 사서 가방에 넣고 아이 손을 잡고 학교에 갔습니다. 소풍 장소는 학교에서 가까운 야산이었습니다. 이웃 아주머니들 하고 점심식사를 하고 서로 나누며 이야기꽃이 피었지요. 처음 나와 보는 들판은 화사한 봄날에 상큼한 봄내음.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매일 매일 밥 먹으면 일에 무쳐 개미 체 바퀴 돌듯 살며 자식들에게 과연 엄마 노릇 한것이 무엇인가. 오히려 자식들이 집안일을 많이 도와주었지요.
아이들이 착하고 잘 자라 주었지요. 학년도 올라가고 큰 아들서부터 대학교에 가고 둘째도 대학 딸은 고등학교 넷째는 중하고 다섯, 여섯째는 초등학교 다닐 무렵 교편 잡고 있던 시동생이 갑자기 찾아와 고시 공부를 해 본다고 집에 찾아 왔습니다. 형님은 두말 할 것 없이 그래 한번 해 봐라 우리 집안에도 판사 하나 나왔으면 좋겠지 하고 승낙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흥동에다 방 한 칸을 얻고 공부를 시작했지요. 비싼 책값도 무시 못하고 먹는 것 입는 것 내 자식처럼 거두었습니다. 그 무렵 동서는 천안 소정리 초등학교에 있었습니다.
봉급으로는 아이들하고 부족하니까 늘 도와주다보니 두집 살림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년 이년 세월은 흐르고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송세월하더니 호남고속도로진입로가 날 당을 사놓으면 돈이 될 것 같다고 해서 돈도 얻어주고 곗돈도 타서 주고 자기 목도 타서 다 같다 주고 우리 집 문서까지 다 가져갔는데 진입로는 일부만 들어가고 남은 땅은 다 폐땅이 되었습니다.
우리 집은 시동생 대문에 다 망하게 되었지요. 돈 이자 갚으랴 계돈 넣느라 집 잡히고 빌려쓴 돈 이자 물으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부 팔린 땅값을 형님한테 내 놓아야 하는데 그 돈을 가지고 삼촌은 서울로 올라가 금호동에 가서 일수놀이를 하더군요. 우리는 속은 썩지만 열심히 일해서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지요. 계돈에 이자에 쫓겨 걱정을 하니까 옆집 공장 아저시가 오형 그 집을 나한테 파시지요 나는 그 집이 필요한데 이렇게 해서 그 집을 오백 삼십만원에 팔아 빛 청산하니 판암동 나가기 전에 철로 밑에 허름한 집을 전세 65만을 주고 얻어서 또 국수공장을 차렸습니다. 돈도 없고 아이들 학비 대기도 힘들었습니다. 설상가상 그런데 어디가 치리든 국수가 잘 팔려서 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집 옆에 말구르마로 벌어먹고 사는 아저씨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옆에서 만나고 접하다보니 정도 들고 우리가 밀가루 싫어 올 때면 그 아저씨들한테 부탁하고 상부상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이 되어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외국 땅으로 돈 벌러 나갔습니다.
큰 아들이 두 번 작은 아들이 한 번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집안 형편은 좀 폈지만 국수식품이다보니 보건소에서 자주 나와서 금연을 하며 건조장에 방충망을 쳐라 소독 물 대야를 해라 공장안에 물탱크를 만들어라. 등 들 복 까서 남편이 화를 내며 국수공장 구만한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속에서 힘들게 살아온 인동 본터배기 국수공장 23년이라는 긴 여정은 끝이나고 문화동 동산 중고등학교 건너편 감골식당 뒤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짐이 많아서 그 말 구르마 아저씨들이 구르마로 일곱 구르마를 싫어 왔습니다. 수고비도 안 받고 싫어다 주었습니다. 막걸이 한 사발씩 마시고 돌아갔습니다. 마음이 순수한 아저들하고도 그때 헤어지고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때 남편 나이 54세 내 나이 오십 세 였습니다.
이래서 국수공장은 막을 내리고 남편은 폐비닐로 빨래판 만드는 공장에 나가 친구와 함께 몇일 일을 했습니다. 삼성동에 큰 건물 안에 여러 가지 공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박 화영이라는 사람이 비닐 생산을 하는 공장을 만났습니다.
이것저것 물어 보았더니 마진도 좋고 괜찮다싶어 한밭도서관 앞에 이규제시 공장을 빌려 같이 비닐제품 공장을 하기로 했습니다. 시작을 하고 보니 애로상황도 많았습니다. 자본도 부족하고 일손도 부족 했습니다.
먼저 일꾼을 구하고 매일 일을 하다 보니 조금씩 나아지고 요령도 생겨 여기저기 판매도 했습니다.
물건을 사러 와도 차가 없으니 그때는 배달을 할 려면 용달차를 불러서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취직하고 있는 셋째 아들을 불러 내렸지요. 마침 운전면허를 따서 당장 일톤 짜리 용달차를 사서 배달을 하니 용달비도 안 들고 아들이 왔으니 일 능률도 오르고 돈도 많이 벌고 안전감이 생겼습니다. 그 무렵 나는 집에서 할 일이 없어 모살이 나고 우울증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결혼 문제가 생겨 바빠 졌습니다. 큰 아들은 서울아가씨하고 결혼해서 서울 장안동에서 살았고 큰 딸 희선이는 공주로 출가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문화동 안 동네로 들어가서 이년 살았는데 튼 아들이 도 사우디에 나가게 되어 며느리하고 손녀 정희와 가족이 대전으로 내려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아기가 있으니까 아기돌보며 공장에 점심 내가며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동안 비닐공장도 잘 돌아가서 전세돈빼고 보태서 문화동 천근이라는 동네에 개인주택 터가 90평 집은 13평 기와집이고 마당 가운데는 아무것도 심지안은 흙더미였습니다.
그 집을 천 이백 삼십만원에 샀습니다.
이사를 하고 아이들이 내려 올때 마다 그 큰 흙더미를 삽질해서 마당에 헤치고 집에 방 다섯평을 만들고 스라브를 쳤습니다.
훌륭한 집이 되었지요 현관 앞을 달아내서 마루도 키우고 샷시 유리문을 달고 현관문도 만들었지요.
현관에서 대문까지 길을 내고 보도부록을 깔고 양쪽으로 꽃밭을 만들고 여러 가지 꽃을 피우고 나무를 사다 심고 보니 훌륭한 집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큰 아들내 하고 6년을 사는 동안 손자를 얻어서 남매가 되고 큰 아들내는 서울로 올라가고 집안이 텅 빈것 같았습니다. 다음해 둘째가 결혼해서 안양에 살고 넷째가 결혼해서 같이 살았습니다. 식구가 다시 불어나고 아기도 생기고 바쁜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대문에 앞에서 있는데 이웃집 아줌마들이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어요. 어디들 가시나요 물었더니 성당에 가요 하더군요
나도 좀 데려가요. 했더니 같이 가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맨손으로 따라 갔습니다. 처음 가는 동네라 목표지를 정해놓고 따라 갔습니다. 그 가계이름은 진달래 상회였습니다.
성당은 유천동 성당 이였습니다. 낯도 설고 어리둥절했지요. 미사가 시작되고 노래 부르고 기도하고 앉았다 섰다 반복하고 미사는 끝나고 아주머니들은 나를 교리 실에 데려다 주고 집에 가더군요.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 생각이 나도 빨리 배워서 저 사람들 같이 되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진달래 상회를 목표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을 외우고 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한글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몇 십 년 동안 잡지 한 장 신문지 한쪽 들여다 본 적이 없는 내가 더듬더듬 읽으며 반 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나는 골치가 딱딱 아프고 눈이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서 극복했습니다.
그래서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 도 몇 가지 외워서 통과하고 1989년 12월 24일에 김종국 바오로신부님께 영세를 받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처음 영세를 받았습니다. 바로 레지오 단원이 되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무엇이든지 열심히 참석하고 배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알게 되고 구역장님 단장님이 가자고 하는데는 다 따라 다녔습니다. 이렇게 3~4년 동안 지내면서 견진성사도 받았습니다.
그 무렵 한 동네에 사는 한정미라는 학생 성모여고 일학년인데 코하고 눈 사이에 암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도 못가고 집에서 누어있었습니다. 9일기도 54일기도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많이 모이면 7명 적게 모이면 2명~3명 매일 모여서 기도하고 위로를 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꽃이 많아서 매일매일 그 꽃을 내가 꺾어 다 꽂았습니다. 꽃이 떨어지면 사다 꽂고 했습니다. 꽃 할머니라고 불리었습니다. 54일기도가 끝이 나고 또 54일 또 54일씩 3번이 끝났습니다.
그래도 정미의 병은 차도 없고 점점 시들어 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위독하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수녀님 들이 세분이 오셔서 성수로 입안과 얼굴을 닦아 주고 계셨습니다. 옷을 갈아입히고 주의를 깨끗이 했습니다. 그리고 임종기도를 바치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직이 전화가 왔습니다. 정미가 운명했다고
가보니 하얀 소복을 하고 자는 것처럼 누어있었습니다. 어른들이 계시니까 유천동 본당에서 정 재돈 요셉 신부님이 오시고 염하는 분이 오셔서 염습을 마치고 영구차 불러서 화장 터에가서 화장을 해서 산내 묘지 성모님계신 곳에 뿌리고 연도를 바치고 돌아 왔습니다.
착한 순한 얼굴 아파도 아프다 말 한마디 않고 늘 미소 짓던 그 얼굴 정미는 하늘나라에 꼭 갔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유천동 성당이 좁다고 호남선 철도를 중심으로 바깥쪽에 있는 신자들은 산성동 신설 본당으로 분리가 되었습니다. 산중턱에 390평이라는 대지를 교구청에서 받았지요
그때 초대 신부님은 이원순 신부님이었습니다. 군종 신부님이었기에 무엇이든 걱정하지 말라며 내가 동창 신부님한테 가서 다 얻어 온 다고 하셨는데 하나도 얻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건축 금을 거두어가지고 조립식으로 성당을 짓고 의자 값은 일인당 15만원에서 20만원씩 거두어서 의자를 사다 놓고 첫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티켓팔고 바자회 해서 성전 정문 쪽 집 한 채 사서 털어 넓히고 또 티켓을 팔 때에는 신부님은 서울로 가시고 우리는 조를 짜서 시내 변두리 성당 어디든지 주일마다 나가서 티켓을 팔고 장사라는 장사는 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정에 소홀해져서 가정불화가 나고 시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장사하는 걸 줄이고 바자회를 두 번 더 했습니다. 티켓팔고 해서 성당 뒤쪽 집 두 채를 사서 털 으니 성전 터가 620평이 되었습니다.
큰 건물을 얻어서 성당은 이사하고 성전을 짓기 시작 했습니다. 초대 신부님은 교구청으로 가시고 이 봉효 프란치스코 신부님이 오셔서 기초만 된 성전을 짓기 시작 했지요.
신자들이 건축 금을 달 달이 내며 틈틈이 장사는 계속 되었습니다. 티켓 팔고 바자회하고 해서 삼층 골조 까지만 다 올리게 되었습니다. 성당 옆에 있는 삼창 아파트에 사제관 수녀원이 있었는데 본당 이층에 사제관을 만들고 수녀원도 만들었습니다. 성체조배 실 까지 만들고 아래층 지하에 임시 성당을 꾸며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층에 회합 실도 임시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공사는 일단 중단 되었습니다. 그래도 틈틈이 장사는 계속 되었습니다. 나의 봉사 생활도 계속되었습니다.
성모의집 봉사 노인병원에 가서 밥도 짓고 목욕도 해드렸습니다.
금요일 마다 다녔는데 지난 금요일에 몸을 깨끗이 닥아 드렸는데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몸을 깨끗이 닥아 드리니 고맙다고 좋아하셨는데 오늘은 연도를 바치게 되다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몸을 깨끗이 하고 가셔서 마음이 덜 아팠습니다. 그 시절에는 연도가 나도 지금같이 장례식장이 아니라 집에 서 장례식을 했습니다. 연도 일손 돕기도 많이 했습니다. 신자가 아니던 신자이던 죽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환자가 생기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죽을 끓여서 방문했습니다. 아파서 지쳐 있는 환자들이 죽 한 그릇에 기운 차리고 고마워하는 그 모습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공장도 잘 돌아가고 번창해지고 돈도 벌리니 지금 공장 수영리에 땅을 사서 공장을 짓고 이사를 했습니다. 공장 확장을 했지요 케이엑스라는 간판을 따고 공장은 나날이 번창했습니다.
다섯째 아들 하균이도 결혼을 해서 선화동에서 살았습니다.
넷째하고 한 십년동안 같이 살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서 충대 병원갔더니 검사결과 장유착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는데 몇 일이 지나도 가스가 나오지 않아 다시 개복을 했는데 손을 쓸 수가 없어 그냥 닫았다고 합니다.
이제 자식을 버린 다는 생각에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젊은 의사선생님이 그 병은 약이 없습니다. 내가 매일 뛰고 운동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매일 영양제 주사를 맞으면서 밤이나 낮이나 열심히 운동하고 나는 매일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새벽 밥지어 병원에 보내고 공장 밥까지 챙겨 보내고 아이들 남매 챙겨서 학교 보내고 매일매일 지옥 같은 나날 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울면서 기도를 드리고 누을 감고 앉았는데 귓전에 들려오는 소리 엄마 나 다 낫었어요 하는 소리에 깜작 놀랐는데 병원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47일만에 가스가 나와서 물을 조금 마셨다구요. 너무 기뻐서 하느님 제 아들을 살려 주셨군요하고 예수님 감사 합니다 하고 고상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아들은 나날이 회복되어 퇴원을 했습니다. 몇 달 동안 쉬면서 회복이 되어 집근처에 살림을 냈습니다.
노년기
집에는 남편과 막내딸 나 하고 세 식구가 되었습니다. 넷째네 살림을 내더니 큰아들 승균이가 큰방에 우리를 옮겨 놓고 안방을 입식부엌으로 꾸미고 식탁을 드려다 놓니 너무 편하고 기분이 짱이었습니다. 항상 개인 주택에 비바람 치면 낙엽지고 덩그렁 소리 심난해서 입버릇처럼 하던 소리 나쁜 놈들 저희들은 아파트에 살며 늙은 부모는 이렇게 사는 줄 모르지 하며 불평하던 그 말이 오늘 다 풀리고 고마웠습니다.
나의 하루 생활은 계속되고 어느 날 구역장님이 방문가자고 해서 갔는데 집에서 가까웠습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후처를 얻어 사는데 부인하고 20년 차이가 낫씁니다.
자식들은 다 따로 살고 가끔 조금씩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부인 이름은 정 일순 모니카 할아버지는 한 요셉이라고 합니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컴컴한 방에 쾌쾌한 냄새가 역겨울 정도였습니다. 그 동안에는 모니카 자매님이 벌어먹고 살았는데 신부전증이라는 병에 걸려 두 환자가 방에 있었습니다. 들어가서 방문 기도를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주방을 좀 치워주고 왔습니다.
그 후 자주 드나들며 도와주고 같이 나누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일 년쯤 지나서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모니카 혼자 남았는데 영감 자식들은 완전히 끊어지고 친정 조카라는 사람이 와서 돈 벌어다 같이 살았습니다. 성당에서도 돌보아 주고 극빈자라는 명목으로 병원에서도 무료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낳아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신경을 쓰고 반찬거리도 사다주고 만들어서도 같다 주고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내 몸이 불편한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홍명상가 옆에 있는 연세외과 크리닉이라는 병원에 갔습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진료를 했습니다. 몇일 뒤에 다시 가서 장내시경을 하겠다고 했더니 몇 가지 약을 주더군요 그 약을 먹고 다음날 가서 장 검사를 했더니 직장암 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같이 살던 셋째 며느리를 불러다가 15년을 넘게 해 온 공장 밥을 인계하고 모든 것을 다 내 주었습니다. 섭섭하고 담담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충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다시 받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항암제약을 하루 세 번 씩 먹고 병원에 가서 방사선 치료를 매일 받았습니다. 6주는 치료를 받고 6주는 몸을 보강해서 수술을 한다고 했습니다. 독한 항암제를 2주쯤 먹으니까 손발이 붓고 배도 부었습니다. 그래서 레지오 단장님께 당분간 못나간다고 알리고 성모의집 봉사도 못 나간다 말하고 여기저기 알리고 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매일 매일 치료는 계속되고 매일 매일 성당에서 오고 이웃자매님들이 와서 누어서 쉴 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나를 보러오는 자매님한테 고마워서 같이 앉아 이야기도 하고 웃으니 환자 같지도 않다고 들 했습니다. 막내딸이 매일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담당을 맡아서요.
그러다 보니 독한 약에 시달려 이제는 부었던 손발은 허물이 벗겨지고 몸이 부어 옷도 못입을 정도였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치료는 끝이 나고 몸 보강을 육주동안 했습니다. 몸은 조금씩 나아지며 회복이 되었습니다. 내 나이 71세 여름 8월 14일에 윤 환희 교수에게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도 잘 되고 회복도 빨랐습니다. 2주만에 퇴원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번 두 달에 한번 차차 늦추어지면서 계속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음해 4월 24일 재수술을 받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입원을 하고 밤 2시에 수술을 받았습니다. 소장이 꼬여서 다 썩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고생 끝에 수술을 해서 회복도 더디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무엇이든 국물만 3주일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배가 아프면 응급실로 자주 가곤 했지요. 큰 아들은 그때 둔산동 크로바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내가 병원에 자주가게 되니까 둔산동 집을 세놓고 20년 넘게 산 문화동 집 팔아서 버드내 일단지 127동 1401호로 이사를 왔습니다. 유천동 성당으로 왔습니다. 두달정도 지냈는데 버드내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버드내 성당이 생겼고 정서빌딩 2층을 얻어서 수리를 하는 동안 사제관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초대 신부님은 강 현식 마태오 신부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신부님이 가가호호 방문해서 아파트 평당 십 만원씩 책정해서 신자들이 받아드려 협조를 하니 순조롭게 모든 일이 잘 풀렸습니다. 사제관 수녀원 모두 단지 내에서 해결했습니다. 두 번 세 번 건축 금을 거두어서 사제관을 주택으로 옮기고 집주위에 공간이 없기 때문에 개인 주택을 몇 채 사서 성당부지 420평을 확보 해 놓고 있었는데 어떤 영문인지 모르지만 신부님하고 신자들 사이가 벌어져 틈이 생기고 신자들끼리도 갈라지며 매일 신부님의 투서가 교구청으로 들어가 시끌시끌한 나날 이였지요. 그래서 결국 신부님은 옷을 벗고 미국으로 가시고 이 석우 비오 신부님이 오셨지요. 당장 사놓은 집을 헐고 공토로 만들어 울타리를 쳐놓고 본당에 행사가 있으면 그 공터에서 진행하고 했지요. 조립식 건물을 짓고 회합모임도 했습니다. 2년쯤 지나서 유주교님 모셔다가 성전 축성식을 하고 건축업자들을 모아 놓고 심사숙고해서 한 팀을 선정해서 성전을 짓기 시작 했지요 짓기 전에 성당부지 옆에 있는 미장원집을 사 넣어서 500평가량 되었습니다. 골조는 일사철리로 빨리 올라가고 돈이 부족해서 완공은 못하고 아래층을 성전으로 꾸미고 거기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사제관 수녀원도 완공이 되어 이사를 했고 사제관 수녀원 집세를 빼고 정서 빌딩에서 성당 세를 빼고 티켓팔기 바자회를 몇 번해서 얼마 안 가서 2층에다 성전을 꾸미고 아래층은 성심홀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이 석우 비오 신부님은 버드내 성당을 완공하고 진산 성지성당으로 가시고 윤 인규 라우렌시오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강론도 잘하시고 학자 신부님이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신부님 모시고 매일 미사 드리고 생활하니 참 행복합니다. 전에는 성당이 너무 멀어서 성당이 가까웠으면 매일 미사를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셔서 매일 미사를 합니다. 그동안 병원지시에 따라 치료 잘 받아 몸은 완전히 회복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모든 일에 접하며 기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있으니 전과 같은 활동은 못하지만 지금도 문화동 고향에 가면 모두들 반겨주고 손을 잡아 줍니다. 내가 문화동에 살 때부터 환자 장 헬레나가 지금도 환자이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몇 명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대모님도 가시구요 내가 문화동에 돌보던 정 일순 모니카 자매가 이직도 살아 있습니다. 몇일 전에 만났는데 나를 포옹하면서 나는 형님 덕분에 아직 살아 있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쎌기도모임에 나가지만 내가 힘이 다 하는 날까지 방문 연도 가벼운 봉사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살아온 생애를 뒤돌아보면 평생 일만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많고 많든 일이 지금은 다 어디가고 심심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나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자녀들을 다 영세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벌어먹고 살기위해서는 늘 쫓기며 살았으니까요 이해는 하지만 핑계일 뿐이지요. 남편도 계속 공장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자기가 이루어 놓은 공장이라 애착심이 많은지 76세까지 일을 했습니다. 나이가 들으니 서울에 있는 아들을 불러내려 아들들한테 전부 물려주고 은퇴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첫째 셋째 넷째가 공장을 운영하고 일꾼이 15명쯤 됩니다. 항상 바쁘고 모든 것이 잘 돌아 갑니다. 남편은 항상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 많이 했다며 이제 구경이나 다니고 맛있는 것 사먹고 행복하게 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랑 같이 교리 배우러 가자고 했더니 이미 그 때 귀가 안 들려 보청기를 했어도 잘 안 들렸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쑥스럽거나 잘 모르면 안 들린다고 핑계를 대지요 그래서 내 말을 잘 안 들어서요 그때는 나가 성당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해하고 매일 성당에 다녀오면 들은 것 본 것 다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성당 이야기를 자주 해 주다 보니 마음도 편해지고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성당은 예수님이 계시고 모여서 기도하는 곳이라는 걸 그래서 주일날 성당에 조금 늦게 가면 오늘은 성당 안가나 하고 말을 하고 협조적이었습니다. 한 3년 동안 젊어서 못해 본 태국 여행 일본 여행 유럽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생활에 전이를 알았지요 그러던 어느날 친구 분들하고 점심식사를 하고 산내로 해서 뿌리공원에 가서 친구 분들과 장기 세 판을 두고 집에 오셨는데 새벽 3시부터 열이 38도 40도로 오르면서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대학병원 근처병원에서 열이 떨어지지 않고 밤새고생하고 아침에 옷을 갈아입을 때 바른쪽 정강이에 포도 알만 한 것이 붙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하고 떼어 보라니까 잘 떨어지지 않아 종이를 대고 억지로 떼어 보았더니 떨어지면서 발이 꼬몰 꼬몰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장도 모르고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침 일찍이 충대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그 벌레를 의사 선생님께 보여 드렸더니 그 선생님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머리에 스쳐 떠오르는 생각이 났습니다. 남편에게 대세라도 받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베네딕토에게 말해서 병원에 계시는 수녀님을 모셔다가 대세를 받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신도 좋고 해서 대세를 준다고 하니까 고개도 끄덕이고 모든 걸 잘 받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오 남세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온 몸이 점점 굳어 갔습니다. 정신도 희미해지고 가망이 없었습니다. 담당 의사들은 보호자를 불러서 자꾸 보내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병은 쓰쓰가무시 찐디기가 온갖 동물에서 피 빨아 먹고 할아버지 몸에 모든 균이 퍼져서 못 사십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어떻게 결단을 내리겠습니까? 내가 나섰지요 아버지 보내드리자 어짜피 못사시는 것 고생만 더 할 따름이다. 그랬지요. 병원에서 합의하에 주렁주렁 걸어 논 약병을 하나씩 내려놓고 있는데 아이들은 집에 가서 자고 큰 아들하고 막내딸하고 나는 병원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이 되니 온 가족이 다 모였을 때 달았던 박동기를 하나 둘 떼어내니 숨은 점점 머므르고 온 가족이 보는 앞에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습니다. 병 난지 이틀 반 만에 열이 40도까지 오르고 폐지혈증이라는 병명으로 운명하셨습니다.
2006년 8월 18일 아침 7시 40분에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모든 게 믿어지지 않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시간을 흘러 삼일 만에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오니 남편의 옷하며 유품이 눈에 보여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성경구절에 눈물을 주리고 기도하십시오. 운다는 것은 잘못은 아니지만 당신을 떠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라는 글을 읽고 마음을 다졌습니다. 아이들하고 산소도 자주 다니며 속으로는 울며 겉으로는 웃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한해 두해 지나고 세월이 약이더군요 자식들한테는 늘 좋은 모습만 보였지요 나이가 들으니 해마다 힘은 줄고 사람이 조라 듭니다.
그러나 친구들에 비해 보면 아직 건강합니다. 아직 내일은 내가 다 하니까요. 자식들이 잘 해 주고 따뜻한 방에 잠재워주고 따뜻한 밥 지어 주고 용돈 넉넉히 주니 그저 감사할 다름입니다. 몇 년을 더 살지는 모르지만 내 힘으로 걸어서 주님 앞에 나 갈 수 있는 은총만 주신다면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마음을 다 비우고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여생을 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아침에 떠오르는 그 태양보다
저녁노을이 더 아름답다
봄에 울긋불긋 피는 꽃도 아름답지만
가을에 단풍이 더 아름답다
흰머리와 얼굴에 파인 주름은
세월을 증명하고 경륜을 말한다
눈이 흐리다 해서 귀가 안 들린다 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기 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자